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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남방제
신창 남방제는 현재는 충남 아산시 신창면 남성1리 마을로
성 조윤호(1848~1866, 요셉)가 태어나서 성장한 곳이다.
조윤호는 성인 조화서 베드로의 아들이며,
1839년에 치명한 조 안드레아의 손자이다.
조화서와 조윤호 부자는 1866년 12월 4일 체포되었다.
부자를 한날, 같은 장소에서, 같은 칼로 처형할 수 없다는 국법에 따라
부친이 참수된 지 10일 후인 12월 23일에
조윤호는전주 서문 밖 서천교 형장에서 죽도록 매를 맞고
끝내는 노끈으로 목이 졸려 순교하였다.
당시 나이 18세였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죽임을 당한 조윤호 성인은
당시 거지들이 순교자의 시체를 질질 끌고 다니며 거렁뱅이 짓을 하곤 했는데
시체가 하도 참혹해서 거지가 끌고 가면 누구든지 겁에 질려 밥을 주었다고 한다.
이로써 조윤호 집안은 3대에 걸쳐 순교자를 배출하게 되었다.
그의 시신은 서천교 너머 용머리 고개에 묻혔다가, 그 후 교우들이 시체를
소양면 유상리 막고개에 있는 아버지 묘 옆으로 이장하였다고 한다.
73. 공세리 성당
바다가 육지로 깊숙이 들어온 아산만에 인접한 충남 아산군 인주면 공세리 성당은
일찍이 조선조 때 아산 · 서산 · 한산을 비롯해 멀리 청주 · 문의 · 옥천 · 회인 등
40개 고을의 조세(租稅)를 쌓아 두던 공세(貢稅) 창고가 있던 곳이다.
공세리 본당의 오늘이 있기까지 초대 주임을 지냈던
드비즈 신부의 열정적인 사목 활동이 그 바탕을 이루었다.
그 크고 화려함으로 건축 당시 아산 지방의 명물로
멀리서까지 많은 구경꾼을 불러왔던 현재의 성당 건물은
그 자신이 직접 설계하고,
중국인 건축 기술자들을 불러 지휘 감독하면서 지은
1922년도의 성당이다.
길에서 성당으로 올라가는 길은 마치 순교의 현장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는 안내자처럼 길게 뻗어 있다.
한 걸음 한 걸음을 피땀이 범벅이 된 순교자의 발걸음을 묵상하면서 올라가면
한 켠으로는 성당이 자리하고 다른 한 켠으로는 신유박해(1801년)부터
병인박해(1866년)까지 아산 공세리 지역 출신 순교자 32위를 모신
납골식 순교자 현양탑이 자리하고 있다.
74. 성거산 성지
경기도와 충청북도 경계선에 자리 잡고 있는 성거산 성지는
한국의 성지 중에서 보기 드물게 해발 500m의 높은 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성거산이란 명칭은 고려 태조 왕건이 수행원들과 함께 성환 지역에 머무르면서
잠시 쉬는 동안 오색구름이 맴돌며 신령한 기운이 감도는 모습을 보고
‘거룩할 성(聖)'자에 '거할 거(居)'자로 이름을 지어준 다음
이 산에서 제사를 지낸 데서 유래한다.
이곳 성거산 성지 주변은 박해 때 신앙의 선조들과 순교자들이 피신하여
신앙생활을 영위했던 삶의 터전인 교우촌 7개가 산재되어 있어
선조들의 신앙의 향취를 물씬 느낄 수 있는 곳이다.
현재 제1줄무덤에 총 38기, 제2줄무덤에 총 36기의 묘봉이 있는데,
시신(屍身)들이 겹쳐 묻혀 있어 실제 이곳에 안장된 순교자의 수는 훨씬 더 많다고 한다.
75. 배티 성지
천혜의 피신처라 할 수 있는 배티는
충북 진천군과 경기도 안성시가 경계를 이루는 지점에 위치한 깊은 산골이다.
이 지역은 서쪽으로 안성, 용인, 서울,
남쪽으로는 목천, 공주, 전라도 그리고
동쪽으로는 문경 새재를 지나 경상도로 이어져
박해 시대에는 내륙 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이처럼 각 지역과 쉽게 연결되면서도 깊은 산골이라는 지리적 특성으로
1830년부터 본격적으로 교우촌이 형성돼 왔고
최양업 신부가 이 지역을 근거로 전국을 다니며 사목 활동을 해 왔다.
배티 인근의 교우촌으로는 은골, 삼박골, 정삼이골, 용진골, 절골, 지구머리, 동골, 발래기,
퉁점, 새울, 지장골, 원동, 굴티, 방축골 등 배티를 포함해 모두 15곳이나 된다.
충북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에 위치하고 있는 배티는
동네 어귀에 돌배나무가 많은 배나무 고개라서 ‘이치(梨峙)’라고 불렸고
이는 다시 순 우리말로 ‘배티’라고 불리게 됐다.
76. 죽산 성지(竹山聖址)
조선 태종대 죽산은 광주 부사의 관할하에 ‘현감’이 다스리는 작은 고을이었다.
하지만 이 지역은 고려 시대 이래 삼남 지방으로 내려가는 주요 교통 요지로,
분행역(分行驛)·좌찬역(佐贊驛)·대평원(太平院)·장항원(獐項院) 등 여러 역원(驛院)들이 있었다.
병인박해가 시작되자 전국에서 다수의 천주교 신자들이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작은 고을이었던 죽산에서는 22명이나 되는 신자들이 순교하였는데,
이들에 대한 기록은 《치명일기》와 《병인 치명사적》, 《박순집 증언록》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77. 미리내 성지
경기도 안성에서 북쪽으로 40리쯤 떨어져
'은하수'라는 뜻의 아름다운 우리말로 불리고 있는 미리내는
한국 최초의 사제 김대건 신부의 묘소와 그의 어머니 고(高) 우르술라,
김 신부에게 사제품을 준 조선 교구 제3대 교구장 페레올 주교
그리고 김 신부의 시신을 이곳에 안장했던
이민식 빈첸시오의 묘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 곳이다.
김 신부는 형장에서도 추호의 두려움도 없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의 최후의 시각이 다가왔으니 여러분은 나의 말을 잘 들으시오.
내가 외국 사람과 교제한 것은
오직 우리 교(敎)를 위하고 우리 천주를 위함이었으며
이제 죽는 것도 천주를 위하는 것이니
바야흐로 나를 위해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려 합니다.
여러분도 죽은 후에 영보를 얻으려거든 천주교를 믿으시오."
마침내 희광이의 칼을 대하고서도 김 신부는 태연하게
"이 모양으로 있으면 칼로 치기 쉽겠느냐?"고 묻고
"자, 준비가 되었으니 쳐라."하고 말했다.
국사범으로 형을 받은 죄수는
통상 사흘 뒤에 연고자가 찾아 가는 것이 관례였으나
김 신부의 경우 장례마저 막아 참수된 자리에 묻고 파수를 두어 지켰다.
하지만 죽음을 피해 살아 남은 신자들은 이를 그대로 둘 수 없었고
그들 중 한 사람인 이민식(1829-1921년)은 파수의 눈을 피해
치명한 지 40일이 지난 후 김 신부의 시신을 빼내는 데 성공했다.
그는 시신을 등에 지고 험한 산길을 틈타 1백50리 길을 밤에만 걸어
일 주일이 되는 날 자신의 고향인 미리내에 도착했다.
자신의 선산에 김대건 신부의 묘를 모시고 아침 저녁으로 보살피던 그는
그로부터 7년 후 페레올 주교가 선종함에 따라
주교의 유언대로 그를 김 신부의 옆자리에 안장했다.
그 무렵 김 신부의 어머니인 고 우르술라도 비극적인 처지에서 숨을 거둔다.
7년 사이로 남편과 아들을 여의고 이집 저집으로
문전 걸식을 하다시피 한 눈물겨운 생애였던 것이다.
이민식은 고 우르술라도 김대건 신부의 묘 옆에 나란히 모셔
생전에 함께 있지 못한 한을 위로한다.
그리고 미리내의 오늘을 있게 한 당사자인 이민식 자신도
92세까지 장수하다가 죽어서 김 신부 곁에 묻혔다.
미리내 순례를 마치고 감곡성당 가는 도중 늦은 점심을 먹었다.
고기를 먹으려고 배티성지, 죽산성지를 거쳐 계속 찾다가
겨우 찾은 한우전문 식당으로 시장하기도 했지만 정말 맛있는 점심을 먹었다.
감곡 성당은 여주에 살 때 여러번 방문한 적이 있다.
서울 성가복지병원 봉사자들이 순례왔을 때 합류했고,
스승예수제자 수녀회 수녀님들이 부활 엠마오 길에 차량봉사,
그리고 우리 부부가 다녀온 적이 있다.
모두 김웅열 신부님 계실 때였다.
느티나무 카페에서 활동할 때 김웅열신부님에게서
성경 신구약 완필로 축복장과 천국의 반지를 받기도 했다.
78. 감곡 매괴성모 순례지 성당
감곡 본당은 1896년 9월 17일 ‘장호원 본당’(長湖院本堂)이란 명칭으로
설립되었으며, 주보는 매괴(묵주기도)의 성모이다.
이 성당은 충청북도에서 가장 먼저 건립된 성당으로
1930년 10월 7일에 고딕식으로 지었으며,
1934년에 석조 건물로 2층의 사제관(현 매괴 박물관)이 건립되었다.
이 성당은 본래 여주군 강천면 부흥골 본당 관할이었는데,
1894년 소신학교가 자리한 부흥골 본당 신부로 부임한 부이용(任加彌)신부가
1896년 9월 감곡 매산(玫山)밑에 임오군란 때(1882년)에 명성황후가 피신해 있었던
민응식의 집이 있었던 곳(현 매괴고등학교)으로 본당을 이전하여 장호원본당이라고 하였다.
이때에 사제관 겸 소성당을 완공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최초의 감곡성당이다.
제대 정면에는 한국전쟁 때 인민군에게 7발의 총탄을 맞았다는
본당 주보(主保)인 ‘매괴 성모상’이 설치되어 있다.
프랑스의 루르드 성지에서 제작되어 1930년 성당 봉헌 당시 제대 중앙에 안치된 성모상은
70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건재했다.
지금에 와서는 그 총탄 흔적을 통해 성모칠고(聖母七苦)를 기억하며,
주보로서 본당을 수호해주고 전쟁을 겪은
우리 겨레의 아픔에 동참하고자 한 성모의 마음을 깨닫고 있다.
청주교구는 2006년 10월 7일 감곡 성당을 ‘매괴 성모 순례지’로 공식 선포했다.
장봉훈 주교는 본당 주보인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축일을 맞아
교서를 발표하고 감곡 성당을 매괴 성모 순례지로 승인했다.
성모 순례지 지정은 1991년 10월 7일 성모께 봉헌된
수원교구 남양 성모성지에 이어 한국 교회에서 두 번째이다.
오늘 배티성지 순례를 마치고 안성에서 숙박을 하려고 예약했는데
죽산, 감곡성당 순례를 마치고 나니 제 3고향이나 다름없는 도전리 생각이 났다.
원고향(용인 12년), 2고향(서울 30년),
3고향(은퇴 후 여주 10년), 4고향(제주 7년), 기타 10년
갈멜수녀님들이 여주에 꼭 한 번 방문하라는 말씀도 있었고
여주에서 얻은 영세및 견진대자도 보고싶고
또 마을 교우분들의 소식도 궁금했기에 전화를 하고 도전리로 향했다.
먼저 4시 반경 수원 순교 가르멜 봉쇄 여자 수도원을 방문하여
2시간 가량 이야기를 나누었다.
수도원 설립 준비하실 당시 스페인 본원으로 연락하는
서신을 주고 받을 때 우리집 컴퓨터로 작업을 하시기도 했고
매일 새벽미사 시간에 만나기도 했던 수녀님들이다.
서로 궁금했던 이야기에서 시작했지만 결국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는
영성적인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은총의 시간이었다.
홍시 한 상자 밖에 드릴 것이 없었는데 나올 때는 곶감, 빵 등 간식을 싸 주셨다.
후원금 약간 드리고 약속시간에 맞게 수도원을 나왔다.
숙소는 대자집에서 신세를 지기로 하고 7시에 저녁약속을 했다.
대자 부부와 바오로형제와 어머님과 우리 부부가 함께하며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많은 분들이 돌아가시거나 요양원으로 가셨다는 말,
이제는 수도원 미사에 마을교우분들이 참례하지 못해 불편하다는 점,
도전리를 떠난 지 7년 밖에 되지 않았는데 많은 것이 변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수녀님들과 자주 은행을 주우러 다녔던 반계리 은행나무가 유명해져
지금은 축제도 열리고 차량행렬로 무척 붐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바오로씨가 찍은 사진을 몇 장 받고 동영상도 찾아 보았다.
식사 후에 집으로 가는 길에 대자가 치킨집에 미리 주문한
치킨과 생맥주를 찾아와 집에서 맥주를 마시면서 못다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야기 도중 대자부부가 성지순례를 하고 싶다는 말을 해서
틈틈히 가까운 곳부터 방문할 것을 권유하고 제주에 도착해서
김대건신부님 표착성지에서 2권을 구입해 택배로 보내주었다.
여주에서 출발하다보니 예정에 없었던
풍수원 성당과 홍천 성당까지 순례를 할 수 있었다.
'계획은 인간이 세우지만 좋은 길로 이루어주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라는 말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반계리 은행나무
(강원도 원주시 문막읍 반계리)
이 나무는 높이가 34.5m(일반건물 10층 정도 높이),
가슴높이의 줄기 둘레가 16.9m,
남북으로 31m 정도로 넓게 펴져 있다.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지만, 대략 800년이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나무는 예전에 이 마을에 많이 살았던 성주 이씨 가문의 한 사람이 심었다고도 하며,
또 아주 오랜 옛날에 어떤 대사가 이 곳을 지나가다, 목이 말라 물을 마신 후
가지고 있던 지팡이를 꽂아 놓고 간 것이 자란 것이라고도 한다.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 속에 커다란 흰 뱀이 살고 있어서,
아무도 손을 대지 못하는 신성한 나무로 여겼다.
가을에 이 나무에 단풍이 일시에 들면, 다음 해에 풍년이 든다는 전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