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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표 없는 편지 원문보기 글쓴이: 청풍명월
☪ 3층 서기실의 암호
책을 쓴 태영호는 1962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우리로 치면 고등학교를 베이징 외국어대학교 부속중학교를 다녔고 베이징외국어대학 영문학부를 졸업한 뒤, 북한 외무성 유럽국 지도원이 되었다. 덴마크, 스웨덴, 영국의 북한 대사관에서 근무하였으며 2013년 영국주재 북한대사관 공사로 근무하던 중인 2016년 여름 가족과 함께 대한민국으로 망명했다. 현재는 한국에서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자문연구위원으로 각계에 나가 강연 등을 하고 있다.
책은 분량이 좀 많다. 그 나름대로 일생을 망라한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북한체제에 대한 접근방법에 대한 이견을 설명하느라 늘어난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직접 체험한 저자의 생생한 목소리니만큼 현실감이 더하고 실감도 난다. 여기에 적는 이 책에 대한 이야기는 내 생각을 적기보다는 저자의 말을 인용하는 것이 될지도 모르겠다.
“남북한의 현실을 서로에게 정확히 알리는 일을 한다면 통일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태 공사께서 그런 일을 해 주셨으면 합니다.”망명 후 우리사회에서 상대적으로 통일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망명의 변과 북한 실상에 대한 강연을 하고 다닐 때 재단법인 ‘통일과 나눔’안병훈 이사장이 한 말이다. 그 설득에 겨우 용기를 낸 결과가 자서전에 가까운 이 책이라고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충격으로 받아들인 새로운 사실 곧 평양 심장부의 실상과 허상을 드러내는 데 중점을 두긴 했지만 이 책을 통해 내가 기대하는 또 다른 바람이 있다. 내 삶에 녹아 있는 북한의 시대상, 사회상, 생활상과 그 변천사를 한국사회라는 스크린에 투영하고 싶었다. 북한사회라는 거울로 보면 한국인 스스로는 알기 힘든 한국의 위상이 비춰진다. 대한민국은 자유와 인권 그리고 민주주의와 번영을 세계에 자랑할 만한 자격이 있는 나라다. 노예상태에 빠져있는 북한 주민을 해방시키고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을 주도해야 할 책임이 한국에 있다. 하지만 이를 인식하지 못하는 한국인이 많은 것 같다. 이 책은 그런 안타까움의 소산이기도 하다.”
“책은 2018년 3월초에 내려고 했었다. 그런데 3월부터 남북관계는 급격한 해빙무드에 들어섰고 정상회담으로 이어졌다. 책이 정상회담 성사에 찬물이라도 끼얹을 수 있을 것 같아 정상회담 뒤에 출간을 미루기로 했다. 남북정상회담 당일 나는 하루 종일 TV앞에 앉아 숨을 죽이고 과정을 지켜보았다. 이번 정상회담은 대한민국의 국력과 자유민주주의가 가져온 성과라고 볼 수 있다. 북한의 진정성이 관건인데 곧 열리게 될 북미회담까지 지켜보면 김정은의 진정성 여부가 판단될 것이다.
북한 체제에 대한 증오는 최대한 누그러뜨리려고 했지만 크게 성공한 것 같지는 않다. 등장인물의 실명과 언행을 드러내는데도 고민을 많이 해야 했다. 끝내 실명을 밝히지 못할 경우도 상당하다. 북에 있는 동료들이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지만 혹시 놓친 대목이 없을까 걱정이 된다.”(서문에서)
“1994년 김정일의 외가 친척이며 강성산 총리의 사위인 강명도가 탈북 했다. 그는 내가 다녔던 평양외국어혁명학원 몇 년 선배였다. 강명도의 탈북은 일반 주민들에게는 공개되지 않았지만 외무성 등 대외사업부에는 당 간부 자녀들의 해외여행이나 파견을 보류하라는 지시가 내렸다. 나는 당 간부의 자녀가 아닌 영어 전공자여서 유럽 쪽으로 발령받기가 어려운 처지였는데 강명도의 탈북으로 나의 발령을 막아오던 장애물들이 한꺼번에 사라진 것이다.”(84쪽-강명도의 탈북이 열어준 나의 해외 발령)
다음은 최근에 중앙일보가 보도한 내용이다.
“태영호 전 공사는 자신의 블로그 ‘태영호의 남북동행포럼’에 올린 ‘김정은은 최고사령관인가 총사령관인가’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지금까지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이라 불리던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직책이 최근 바뀐 북한 헌법에서는 ‘총사령관’이라고 설명했다. 북한은 지난 4월 최고인민회의 제1차 회의에서 헌법을 개정하고 이를 대외선전매체 ‘내나라 웹사이트’에 공개했다. 개정 헌법 제 102조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무위원회 위원장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무력총사령관으로 되며 국가의 일체 무력을 지휘통솔한다.’고 명시했다.
그런데 7.14일자 북한 노동신문은 김 위원장의 직함을 ‘최고사령관’으로 보도했다. 노동신문은 이날 ‘조선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유럽지역련대성모임 참가자 일동’이 김 위원장 앞으로 보낸 편지를 보도하면서 김 위원장의 직함을 이같이 표기했다. 이를 두고 태 전 공사는 북한 내부에서 김 위원장 직함을 두고 혼선을 빚고 있는 것으로 봤다. 또 과거 사례를 볼 때 직함을 잘못 기재한 일로 당 주요 간부들의 해임이나 숙청 가능성도 제기했다. 태 전 공사는 “북한에서 최고 존엄인 김정은의 직함을 틀리게 명기·보도하면 큰일 난다.”며 "과거 노동신문사에서 ‘조선로동당 총비서’인 김정일의 직함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총비서’로 보도한 적이 있다. 그날 신문 발간을 담당했던 신문사 간부들과 기자들이 수령의 직함도 모르는 불경죄에 걸려 해임철직(직위해제)됐다.”고 했다. 태 전 공사는 “김정은 시대 들어 지난 7년 동안 북한헌법이 4번 개정됐는데 헌법이 개정됐다는 소식만 보도하지 무엇이 달라졌는지 주민들에게 공개하지 않아 김정은의 직책을 두고 혼란이 생기고 있다.”고 했다.
정은혜 기자 jeong.eunhye1@joongang.co.kr [출처:중앙일보] 태영호 ‘노동신문 김정은 직함 틀려…몇 명 목 날아갔을 듯’
책에는 비전향장기수로 북한으로 돌아 간 사람들의 이야기도 있는데, 2000년 9월 김선명 노인 등 63명이 휴전선을 넘어 평양으로 갔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이익모 노인을 크게 보도했던 것 같은데 그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당시 평양은 그들을 크게 환영하는 분위기로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환영했다고 하고 그들의 굽히지 않았던 신념을 본받아야 한다고 선전도 했다한다. 조국통일상과 노동당 당원증도 수여했다고 하는데 그 후 태 전공사는 2002년 평양주재 영국대사관의 요청으로 김선명을 만난 적이 있다면서 그 내용을 상세히 소개했다.
“영국 임시대리대사 짐 호어가 그를 만나고 싶어 했다. 영국의 속셈은 뻔했다. 김선명 노인이 북에 온지 1년이 지났으니 그의 생각을 직접 들어보겠다는 의도였다. 통일전선부의 승인을 받고난 뒤 직접 대리대사와 3등 서기관 케네디(여)와 함께 평양 평천구역에 살던 김선명의 집을 방문했다. 듣던 대로 좋은 가구들로 집이 꾸며져 있었다. 한국에서는 총각 할아버지로 불리던 그는 북한에 와서 결혼도 했다.”
짐 호어는 직설적으로 물었다.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한국과 북한에서 다 살아보니 어디가 더 좋던가. 북한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통제를 받고 있는데 당신도 당국의 통제를 받는가. 생활에 어려운 점은 있는가. 북한에도 인권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김선명은 “공화국에 올라와 장가도 가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며 구수하게 이야기를 풀어냈다. 한국에서 자란 어린 시절, 44년 동안 신념을 지킨 수감생활, 출옥 후 어머니를 만난 감회 등에 대한 이야기가 진솔하게 여겨졌다. 영국 외교관들도 그이 이야기를 매우 감명 깊게 듣고 있는 것 같았다. 몇 시간에 걸친 대화가 끝나고 짐 호어가 일어나려 하자 김선명이 물었다.
“혹시 런던에 있는 국제사면위원회에서 나에게 돈을 보내지는 않았습니까?”갑자기 돈 이야기가 나오자 나도, 짐 호어도 당황했다. 김선명은 책장에서 커다란 앨범 2개를 꺼내왔다. 하나는 한국에 있을 때 찍은 사진첩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에 대해 보도한 한국 언론의 기사 스크랩이었다. 사진과 기사를 보여주며 그가 설명한 사정은 이렇다.
김선명은 6.25전쟁 때 의용군에 들어가 1951년 10월 포로가 되었다. 서울고등군법회의 재판에서 징역 15년의 확정판결을 받았지만 1953년 간첩죄가 추가되어 사형이 선고되었다. 이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후 1995년까지 44년 동안 감옥살이를 했다. 출소 후 인권변호사들이 그를 찾아왔다. 그에게 간첩죄를 적용한 법률이 선고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다면서 국가에 손해배상 청구를 권유했다. 여기에 국제사면위원회까지 개입했다. 해당 법률의 존재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한국과 미국의 도서관 등을 뒤졌지만 어떠한 법률적 근거도 찾지 못했다고 한다.
김선명은 북송을 앞두고 고민을 했다. 국가배상 소송이 진행 중이었기 때문이었는데 소송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배상금을 받고 북으로 갈지 북에 가서 판결을 기다릴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의 변호사들은 재판에 이기면 반드시 배상금을 송금하겠다고 약속했다. 김선명은 약속을 믿고 북으로 갔다.
평양주재 영국대사가 찾아온다고 했을 때 그는 런던 국제사면위원회가 한국 정부로부터 받은 배상금을 전달하려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것과는 아무 상관없는 인터뷰만 하자 그는 대단히 실망스러워하는 기색이었던 것이다. 짐 호어도 매우 미안해하면서 자신이 한번 알아보겠다고 했다.
“나는 지금도 궁금하다 그가 평생을 바쳐 믿었던 북한과, 실제로 생활해본 북한은 어떤 차이가 있었을까. 단순히 한국 정부로부터 사죄의 뜻을 받고 싶었던 것인지. 아니면 북한에서 새삼 돈의 귀중함을 느꼈기 때문인지. 그는 어떤 말도 남기지 않은 채 2011년 세상을 떠났다.”(151쪽-북송 장기수들 한국서 번 돈 당에 바치고 때늦은 후회)
지금의 북한외무상은 TV에서도 자주 보이는 리용호다. 2016년 5월에 외무상이 된 그는 한 때 영국대사를 지낸 적이 있고 그의 아버지 리명제는 김정일의 최측근으로 노동당 조직지도부 부부장이었다. 리명제는 김정일을 코밑에서 보좌하는 3층 서기실 실장으로 북한을 움직이는 실세 중의 실세였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3층 서기실’은 북한 주민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서기실은 어느 건물 3층에 있어서 붙여진 별칭이 아니라 3층 규모의 건물 전체를 일컫는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김정일의 집무실 건물이 3층인데 여기서 김정일을 보좌하는 부서를 ‘3층 서기실’이라고 하는 것이다. 굳이 한국으로 치면 노동당 중앙청사는 청와대, 3층 서기실은 대통령 비서실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당 중앙청사는 중앙당 일꾼들도 마음대로 접근할 수 없는 완전한 금지구역이다. 그런데 김정은은 2018년 3월 5일 남한의 대통령특별사절단을 여기서 맞이했고 북한 언론들은 여기를 조선노동당 본관으로 소개했다.
2019년 5월 이후 3층 서기실 실장은 평창올림픽 때 김여정과 함께 방남 했던 김창선이다. 김창선의 전 부인 류춘옥은 북한에서 유명한 항일혁명투사 부부인 류경수와 황순희의 딸이다. 류춘옥은 김경희와 절친한 사이였고 김창선은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과 서훈 국정원장 등 남한사절단이 방북했을 때 비중 있는 역할을 했으며 특별사절단과 김정은이 만날 때는 안내를 맡기도 하고,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 회담에도 배석해 회담 내용을 김정은에게 보고하는 역할도 했다. (233쪽 - 모르는 게 없는 지도자를 만들어내는 3층 서기실)
2008년 8월 김정일이 뇌졸중으로 쓰러졌지만 내용을 아는 사람은 3층 서기실 내에서도 극소수였다. 그해 9월9일 공화국수립 기념행사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북한사회는 술렁이기 시작했다. 별의별 소문이 다 나돌았다. 그러나 그 다음 달인 10월 김일성종합대학과 평양철도대학 간 축구경기장에 색안경을 끼고 김정일이 나타났다. 그는 이때 자신의 건강이 여의치 않으며 살날이 많지 않다는 것을 직감했는지 모른다. 이 무렵 김정일의 건강만큼 심상치 않은 일이 연이어 터졌다.
열차 담당 8,9호 총참모장 서남식 등 철도성 간부들이 일거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북한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하는 경우는 드물고 전모가 명백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서남식 등이 용천역 폭발사건을 통해 김정일 암살을 시도했으며, 6.25전쟁 때 한국에서 파견한 간첩조직이라는 것이 드러났다는 소문이었는데 용천역 폭발사건이 일어난 지 4년, 6.25는 60년이 지난 시점에 뭔가 석연치 않은 것은 분명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당위원회가 외무성 유럽국에서 일하던 서철을 소환했다. 그는 베이징대학 영어과에 유학한 후 1979년부터 국제관계대학 영어교원으로 일했으며 태공사가 대학에 입학했을 때 그는 영어정독 담당교원이었으므로 그에게 영어를 배운 것이다. 나중에 리수용에게 영어실력을 인정받아 제네바 유엔기구 담당 참사, 귀국 후에는 외무성 유럽국 영어담당 과장, 평양 주재 스위스 개발협조성 북한 대표로 재직하기도 했다.
당위원회에 불려간 서철은 검은 승용차에 태워져 어디론가 사라져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서철이 붙잡혀간 몇 시간 뒤 태영호는 당위원회 지시로 ‘서철의 가족이 지방으로 추방되니 직원 10여명을 데리고 그의 집으로 가서 짐을 싸주라’는 명령을 받았다. 서철의 집은 평양의학대학병원 옆에 있었는데 이미 보위원들이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고 가족들은 앉아서 울고 있었다. 태영호는 그의 짐을 싸면서 그가 얼마 전에 총살된 철도성 총참모장 서남식의 조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서철의 아버지가 6.25때 안전원, 동생은 모란봉구역 안전부 수사과장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북한에서도 보기 드문‘알짜 빨갱이 집안’이었다. 그런 집안이 김정일 암살에 개입했다고 하니 믿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서철의 가족은 평안남도 상원군 오지로 추방될 처지였고 태영호 일행은 닥치는 대로 짐을 쌌다. 와중에 서철의 부인이 다가와 “집에 외화가 좀 있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스위스에서 6년 동안 외교관으로 있으면서 틈틈이 모은 돈인 듯했다. 서철은 이날 오전까지도 함께 일하던 동료였다. 태영호는 암시장에서 달러를 북한 돈으로 바꿨다. 서철 가족이 추방되는 곳은 외진 곳으로 달러가 필요 없는 곳이었다. 거기서 철도역으로 나오려면 200리를 더 걸어야 했다. 북한돈으로 바꾸면 1달러당 4,000원이 넘었고 부피가 많았다. 그 돈을 보자기에 싸 보위원의 눈을 피해 짐 속에 감추었다. 보위원이 보면 경을 칠 일이었으나 모두 한 마음이 되어 감쪽같이 해치웠다. 성원(직원) 5명이 서철 가족과 함께 이날 밤 상원군으로 떠났다.
울며 평양을 떠나는 서철의 가족을 보면서 그래도 돈을 가지고 있으니 몇 년은 버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1년도 안 된 2009년 11월 북한은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어제까지도 통용되던 돈이 한순간에 종잇조각이 되는 것을 보면서 상원군 오지에서 고통스럽게 살아갈 서철의 가족이 떠올렸다. 태 공사는 망명 후에도 용천역 폭발사건이 정말 김정일이 생각했던 것처럼 그를 암살하기위한 사건이었는지. 아니면 항상 암살의 공포에 사로잡혀 있던 김정일을 달래기 위한 보위부의 거짓 작전이었는지 궁금하다고 했다. (274쪽-김정일의 복귀와 용천폭발사건)
2013.12 김정은에 의해 처형된 장성택은 김정일 시대에는 2인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인물이다. 장성택은 김정은의 아버지 김정일의 여동생 김경희의 남편이었다. 그러니까 김정은에게는 고모부다. 장성택이 처형된 후에 북한 주민들이 알게 된 사실은 장성택의 억울한 죽음보다는 신문과 방송을 통해 알게 된 장성택의 비리와 추문이었다. 그로인해 오히려 그를 비난하는 여론이 높았는데 날조라는 것이 모두의 객관적 판단이다. 태 공사는 말한다. 김씨 가문은 공산주의와 플로레타리아 독재의 외피를 쓰고 결코 있어서는 안 될 노예사회를 건설하고 있다며 장성택 처형은 앞으로 김정은 정권의 아킬레스건이 되리라고 확신한다고 했다.
장성택 처형 이전인 2012년 말과 2013년 초에는 키가 장대 같고 시꺼먼 검둥이가 김정은과 함께 있는 그림을 우리는 자주 보았다. 이때는 세계가 북한의 핵실험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을 때였는데 김정은이 미국의 농구선수 출신인 로드맨과 함께 웃고, 박수치고 포옹하는 모습을 연출하면서 ‘이러한 체육교류가 조선과 미국사이의 이해를 증진하는데 기여하게 될 것’이라고 선전했다. 핵실험은 하지만 매우 개방적인 지도자라는 이미지를 선전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핵실험에 이은 장성택 처형으로 세계여론이 요동치자 2014년 1월 다시 로드맨을 네 번째로 그것도 김정은의 생일날(1.8) 불러서 수많은 평양시민 앞에서 생일축하 노래를 부르게 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로드맨에 대한 비판여론이 들끓었고 그의 방북을 후원해 오던 아일랜드의 도박업체는 후원계약을 취소했다. (367쪽 - 김정은과 로드맨의 위험한 만남, 주선자는 베일 속)
북한에서 외국물을 먹을 수 있는 외교관이나 무역일꾼으로 빨리 성장할 수 있는 길은 평양외국어학원에 입학하는 길이라고 한다. 그래야 외국어대학도 가고 김일성종합대학에도 갈 수 있는데, 노동당 부위원장 리수용, 외무상 리용호, 당서기실 부부장 백순행과 외무성1부상 김계관, 미국담당 최선희 등이 모두 여기 출신이다. 여기 출신으로 남한에 망명한 이들도 상당수 있는데 가장 먼저 한국에 망명?한 이는 1987년 KAL기 폭파사건의 김현희로 태 공사와는 동기거나 한 학년 선배로 알고 있다고 했다. 그녀는 일본어과를 다니고 태 공사는 영어과를 다녀 서로 모를 뿐이라고 했다. KAL기 폭파사건 이후 대외경제위원회에서 근무하던 그녀의 아버지와 가족들은 평양에서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다음은 국가안보전략연구원 고영환 부원장, 프랑스어과 강명도, 영어과 김관진, 독일어과 최세웅 등이 망명해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고 이름을 밝힐 수 없는 이들도 상당수 있다고 한다. (490쪽 - 노동당 비공개 김현희 KAL폭파사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태공사는 이렇게 적고 있다. “내가 50대 후반이라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자서전에 가까운 책을 쓰기로 결심한 것은 현 북한사회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주는데 목적이 있다. 한국에서는 북한 사회를 사회주의, 공산주의라는 이념과 결부해 보고 있다. 이런 방식으로 고찰하다 보니 대북정책에서 좌익과 우익, 보수와 진보로 갈라질 수밖에 없으며 대북정책 논평에서는 스펙트럼이 넓어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과연 북한은 사회주의 사회이고 공산주의 국가일까.
사회주의사회란 신분의 평등과 경제적 평등이 실현된 사회를 의미한다. 인류가 정말로 유토피아적인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나의 친가와 처가 어른들은 김일성이 하라는 대로만 하면 한반도에 사회주의 이상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분들은 북한의 사회주의 사회가 어떻게 사회주의 봉건사회로 변화되었으며 봉건사회로부터 다시 노예사회로 퇴행했는지를 모르고 세상을 떠났다. 그만큼 북한의 사회주의 퇴행과정은 매우 은밀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6.25전쟁은 수백만 명의 동족살상이라는 비극만 남긴 채 끝났지만 전쟁 후에도 한반도 통일이라는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바람과 열정은 식지 않았다. 김일성은 공산주의자들의 이상과 열정을 이용해 1960년대 말까지 당내에서 모든 파벌을 숙청하고 유일한 지도체제를 수립했다. 그러면서 동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사회주의 복지체계를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그 후 북한사회는 북한식 문화대혁명이 벌어졌다. 이것은 역사의 흐름에 역행하는 것으로 이론적으로는 레닌과 스탈린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론을 계승하는 것처럼 보였다. 또한 분단된 한반도의 특수성을 고려한 조치로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실상은 북한 사회를 여러 계급으로 나누는 퇴행이었다. 김일성은 인간이 아닌 초인간적인 지도자로 만들어 절대적으로 숭배하게 만들었다.
노예란 남의 소유물로 되어 부림을 당하는 사람, 모든 권리와 생산수단을 빼앗기고 물건처럼 사고 팔리는 사람을 말이다. 북한 주민에게는 기본권리인 의사표시의 자유, 이동의 자유, 생산수단을 보유할 자유, 자식을 관할할 수 있는 자유조차 없다. 단언컨대 오늘의 북한은 현대판 노예사회다.”
그러면서 태공사는 2016년 자신이 한국에 와서 본 촛불혁명처럼 “통일은 북한의 노예들이 촛불을 들고 일어나는 과정이 될 것이며 촛불을 들고 일어날 날이 머지않았다”고 장담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통일의 그날까지 “실천하는 통일, 움직이는 통일, 행동하는 통일운동을 만드는데 미력을 다하겠다.”고도 했다. (533쪽 - 통일은 노예해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