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513
6월6일[연중 제9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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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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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i_vCDjwNg9o
(정용호 대건안드레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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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이미 와 있지만, 현재 진행형인 하느님 나라>
‘종말론’에서 ‘하느님의 나라’ ‘주님의 날’과 관련해서 자주 강조되는 표현이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이미 와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현재 진행형인 하느님 나라.’
이와 관련해서 베드로 2서의 저자는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그날을 앞당기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베드로 2서 3장 12절)
베드로 2서 저자의 요점 정리는 이렇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의 생활은 겸손하고 나약한 모습으로 첫번째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권능과 영광 중에 다시 오실 재림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 전개되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마지막 시대를 살고 있지만, 마지막 시대의 모든 양상과 의미가 다 드러난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날은 이미 도래했지만,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습니다. 당연히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은 완전하거나 완벽하지가 않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아직 어둠 속에서 헤맬 수 밖에 없으며, 성경의 빛, 성령의 이끄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한쪽 발은 주님 나라에, 다른 한쪽 발은 인간 세상에 딛고 서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한 생활, 티없고 흠없는 삶을 통해, 주님 나라의 도래를 앞당기는 사람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은 의로움이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날, 마지막 날, 종말에 대한 베드로 2서의 가르침에서 우리에게 가장 큰 희망과 기쁨을 주는 표현은 ‘새로움’입니다.
주님의 날이 도래하면 그분 가르침에 충실했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놀라운 은총의 선물이 주어질 것입니다.
새로운 이름이 부여될 것입니다.
새로운 언어로 말하게 될 것입니다.
새로운 노래를 부르게 될 것입니다.
새로운 도성에 살게 될 것입니다.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곳에서는 그간 주님께서 약속하신 모든 언약이 어김없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거룩하지 않은 사람들, 정화되지 않은 사람들, 티많고 흠많은 사람들,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들, 내면 가득 욕심과 분노로 가득한 사람은 거기 들어가기 어려울 것입니다.
천만다행으로 주님께서는 합당한 준비가 갖춰지지 않은 우리를 위해 충분한 시간을 주고 계십니다.
“우리 주님께서 참고 기다리시는 것을 구원의 기회로 생각하십시오.”(베드로 2서 3장 15절)
사실 90분 정규 시간이 다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미처 준비가 되지 않은 우리를 위해 인저리 타임(injury time)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일분 일초가 소중한 추가 시간입니다. 더 이상 시간을 헛되이 낭비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 자신과 공동체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 이웃 사랑의 실천을 위해, 주님 나라 도래를 앞당기기 위해 온전히 사용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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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뒤죽박죽되어 있는 우리 삶을 다시 한번 재구성하고 재배치합시다!>
언젠가 난감한 문제로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적대자들 비슷한 사람들을 대면한 적이 있었습니다. 기자들과 변호사까지 대동해서 완벽히 판을 짜왔더군요. 그들이 건네는 말들은 이미 잘 짜여진 각본처럼 매끄러웠습니다.
언성도 높이지 않고 조근 조근 압박을 해오는데, 발언의 지향점, 목적성은 명료했습니다. 저희를 꼼짝달싹도 못 하게 코너로 몰아가서, 결국 저희 얼굴에 먹칠을 하고, 저희를 바닥으로 내동댕이치려는 것이었습니다.
부끄럽게도 저는 이성과 냉정함을 상실해버렸습니다. 분노로 얼굴이 일그러지고, 격앙된 목소리로 횡설수설 반격을 했는데, 말이 점점 꼬이고 말았습니다. 그들의 책략에 마음이 흔들린 것입니다.
노골적인 악의를 지니고 달려드는 적대자들이 겉으로는 예수님을 잔뜩 치켜세우면서 칭찬하는가 싶더니, 즉시 본색을 드러내며 난감한 질문 하나를 던집니다.
“그런데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마르 12,14)
예수님을 향한 그들의 찬사는 진정성이 조금도 보이지 않는 마음에도 없는 말이었습니다. 예수님을 갖고 노는 분위기입니다. 예수님의 분노를 자극하려는 언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저처럼 그들의 계략에 휘말리지 않으십니다.
분노하지도 호통치지도 않으십니다. 마음이 평정을 유지한 채, 꽤 애매하지만, 당시로서는 최선의 대답일 수밖에 없는 지혜로운 말씀 한 마디로 그들이 파놓은 함정에서 조용히 빠져나오십니다.
원래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은 이렇게 같이 몰려다니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헤로데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던 헤로데 당원들은 당연히 백성들이 헤로데에게 세금을 바칠 것을 종용하고 있었습니다. 한편 바리사이들은 반대의 입장이었습니다.
이렇게 아주 중요한 당론의 노선을 달리하고 있던 두 부류이 사람들이 오늘은 아주 사이좋게 어깨동무를 하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에게 올무를 씌우고 잡아들이기 위해 일시적인 동반자 관계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잘못 대답했을 경우 큰 타격을 입을 질문이었습니다. 반대의 입장에 있는 두 부류의 사람 앞에 한쪽을 선택했을 경우, 다른 쪽 사람들의 집요한 공격에 시달릴 것이 분명합니다.
그들의 계략을 잘 파악하신 예수님의 답변은 훨씬 절묘합니다. 하느님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참으로 대단한 답변을 하십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한 국가의 국민으로서 합법적이고 정당한 권위에 의해 요구되는 의무와 도리에 충실하라는 말씀입니다. 소득을 얻었으면 그에 따르는 백성으로서의 의무, 납세의 의무를 다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고 덧붙이십니다.
황제와 하느님은 비교 대상이 아닙니다. 황제가 아무리 난다긴다 할지라도 우리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한 나약한 인간입니다. 언젠가 물러나야 하고, 세상을 떠나야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황제와는 근본적으로 비교가 안 되는 분이십니다. 삼라만상을 지배하시는 분, 우주 만물을 통솔하시는 분, 잠시 통치하는 분이 아니라 세세대대로 영원히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이 아침, 뒤죽박죽되어 있는 우리 삶을 다시 한번 재구성하고 재배치하면 좋겠습니다. 많이 뒤로 밀려나있는 하느님을 우리 삶의 첫 번째 자리에 모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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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미래의 유토피아는 없다>
워싱턴 D.C. 지하철 랑팡역, 청바지와 티셔츠 차림에 야구 모자를 눌러 쓴 청년이 낡은 바이올린을 꺼내 들고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연주한 지 6분이 지났을 때 한 사람이 벽에 기대어 음악을 들었고 43분 동안 일곱 명이 청년의 바이올린 연주를 1분 남짓 지켜보았습니다. 스물일곱 명이 바이올린 케이스에 돈을 넣었고 그렇게 모인 돈은 32달러 17센트였습니다. 다음날 신문을 펼친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지하철역에서 공연하던 청년은 미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세계적 바이올리니스트 ‘조슈아 벨’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날 350만 달러(한화가치 30억 원)짜리 스트라디바리우스를 들고 43분 동안 멋진 연주를 했습니다. 그러나 현장을 오가던 1,070명은 단 1초도 그를 쳐다보지 않고 바쁘게 지나갔습니다. 이 공연을 제안한 ‘워싱턴 포스트’는 현대인이 일상에 쫓겨 자기 주변에 존재하는 소중한 것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는 현대인의 문제를 꼬집고 싶었던 것입니다.
며칠 전 한 신자분과 대화 중 유토피아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언젠가 건설될 하느님 나라. 그것이 유토피아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종말을 향해 가고 있고 결국 주님이 오실 때는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일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못한 대탕녀 바빌론처럼 영원한 바다의 심연속으로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많이 충격을 받은 것 같았습니다. 아마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가 건설되며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형체는 사라지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오늘 제1독서에서 마지막 날에 이럴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날이 오면 하늘은 불길에 싸여 스러지고 원소들은 불에 타 녹아 버릴 것입니다.”(2베드 3,12) 그렇다면 미래에 유토피아가 이 세상에 건설될 것이라는 희망은 버리는 게 좋습니다. 사실 미래의 유토피아를 말하는 이들은 지금의 행복을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요즘 선거철이라 그런지 운전하다보면 여러 후보자들의 공약이 걸린 현수막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은 자주 헛웃음이 나올 때가 있습니다. 여전히 미래의 유토피아 이야기를 하는 공약들이 많습니다. 이런 공약들이 먹히는 이유는 우리는 여전히 현재의 상태에서 행복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가리키는 곳만을 향해 달려갑니다. 그러면서 여전히 속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유토피아의 환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미래의 유토피아를 위해 지금 당장 기도하고 묵상하고 주님에 대해 더 알아가고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기회를 잃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바쳐야하는지를 물어보는 사람들에게 동전 하나를 가져와보라고 하십니다. 그 동전에는 로마 황제의 얼굴이 그려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왜 이런 돈에 집착하느냐고 하시며 황제에게 줘버리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에나 집중하자고 하십니다. 하지만 돈을 좋아했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비현실적이고 이상주의자라고 말합니다.
돈이 참 행복을 가져다줄 현실적인 대안으로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들의 행복은 여전히 미래에 돈을 충분히 벌게 되었을 그 때에 있습니다. 우리가 뽑아주어야 할 지도자들은 ‘지금’을 말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미래의 유토피아를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지금의 ‘하느님 나라’를 말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지금 이 순간 마음만 바꾸어먹으면 만날 수 있는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성령으로 이루어지는 정의와 평화와 기쁨의 나라입니다. 돈과 상관이 없습니다. 미래에 건설될 눈에 보이는 유토피아가 아닙니다. 행복은 지금 이 순간 눈을 감으면 내 안에서 펼쳐집니다. 지금의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충분히 찾을 수 있는 것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사라져가는 이 세상에 집착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세상은 그나마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는 이들에 의해 지속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대한 비전이 없으셨습니다. 노예제도를 그대로 인정하셨고 로마의 지배를 받는 것을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리고 그 로마에 세금을 내라고 하셨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선거에 나가셨다면 아무도 찍어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만 지금 이 순간 우리 옆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고만 당부하셨습니다. 배부른 돼지를 만들어주겠다는 이들을 조심해야합니다.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지금의 부족한 현실이 아니라 미래의 유토피아 건설에 대한 환상입니다. 그리고 그 환상을 심어주어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는 사람들입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줘 버리고 우리는 하느님의 것인 우리 자신을 매일 주님의 것으로 봉헌하는 삶을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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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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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6월6일 [연중 제9주 화요일]
복음: 마르 12,13-17: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문제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헤로데 당원 몇 사람이 예수께 교묘한 질문을 던진다. 이 질문에는 역사적인 배경을 가지고 예수께 로마 제국과 이스라엘 민족 사이에 어느 편을 들 것이냐는 함정이 있다.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14절) 그들은 그분을 거슬러 교묘하게 음모를 꾸미고 있다.
예수님은 로마의 돈인 “데나리온 한 닢을 가져다 보여다오.”(15절) 하신다. 예수께서 받으신 돈 앞면에는 ‘아우구스토의 아들, 신성한 아우구스토 티베리오 황제’, 뒷면에는 ‘최고 성직자의 화폐’라고 적혀있었다. 이것을 보시고 예수께서 “이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황제의 것입니다” 하자,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그들은 예수님께 매우 감탄하였다.(16-17절) 이 답은 신학적으로 매우 깊은 의미가 있다.
우선 예수님의 대답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디베리오 황제의 화폐를 사용한다는 것은 이스라엘 안에서 그의 정치적 권력을 인정하는 것이다. 비록 그 화폐를 달리 생각한다고 하여도 그 화폐에는 그의 초상과 그의 문장이 새겨져 있으므로 그의 것이다. 그러므로 황제에게 세금을 바친다는 것은 황제 자신의 것을 바치는 것이므로 그것은 황제에게 바쳐라!”라는 뜻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라는 말씀은 ‘인간’은 하느님께 속한 것이므로 하느님께 바쳐야 한다는 말씀이다. 사람은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되었으니 하느님께 속하므로 우리 모든 인간의 삶은 하느님께 바쳐야 한다는 것이다. 즉 하느님의 초상은 우리 인간에게 새겨져 있으니 우리 인간은 모두 하느님의 것이고, 그러기에 하느님께 바쳐져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이며, 우리는 하느님의 금고에서 잃어버린 하느님의 은화이다. 우리 안에 새겨주신 당신의 초상을 찾아 주시려고 사람이 되셨으니,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되돌려 드려야 한다. 그러기 때문에 황제도 하느님의 모습을 가진, 즉 하느님의 초상이니 하느님께 속한다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이 말씀을 들은 군중들은 그 깊은 뜻을 알아듣고 그 함정을 없애버리시는 주님의 지혜에 대하여 경탄하였다.
동전에는 통치자의 흐리멍덩한 육체적 모습이 새겨져 있지만, 구원받은 우리는 살아계신 하느님의 생명력 넘치는 모습을 담고 있다. 우리 인간은 우리 안에 새겨진 하느님의 모습을 완성하도록 노력하며 하느님께 분명히 돌려 드려야 한다. 그것은 우리의 모든 것이 하느님께 속하는 것이고 올바로 되돌려 드릴 수 있을 때 될 수 있다. 그러한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참된 예물로 이 제단에 봉헌할 수 있도록 지혜와 용기를 청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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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그 뒤에 그들은 예수님께 말로 올무를 씌우려고,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 몇 사람을 보냈다. 그들이 와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는 스승님께서 진실하시고 아무도 꺼리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압니다. 과연 스승님은 사람을 그 신분에 따라 판단하지 않으시고, 하느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위선을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한 닢을 가져다 보여 다오.’ 그들이 그것을 가져오자 예수님께서, ‘이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황제의 것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이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 그들은 예수님께 매우 감탄하였다."(마르 12,13-17)
당시에 열혈당에 속한 사람들은 황제에게 세금 내는 것을 거부하고 독립투쟁을 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속으로는 세금 내는 것을 싫어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세금을 내고 있었습니다. 바리사이들도 일반 유대인들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한가? 합당하지 않은가? 세금을 바쳐야 하는가? 바치지 말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은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질문이지만, 바리사이들 자신들의 고민도 들어 있는 질문입니다. 그들도 평소에 그 문제로 많이 고민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데나리온 한 닢을 가져오라고 말씀하셨을 때 사람들이 예수님께 드린 돈은, 다른 데서 가져온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자기들이 가지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로마제국의 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것을 사용한다는 뜻이고, 그것을 사용한다는 것은 황제의 통치를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황제의 통치를 인정하면서도 세금을 바쳐야 하는가? 바치지 말아야 하는가? 라고 고민하는 것은 ‘위선’입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라는 말씀은, “세금을 바치는 것이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다고 판단되면 바치고,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다고 판단되면 바치지 마라.” 라는 뜻인데, 온 세상 모든 것은 다 ‘하느님의 것’이라는 가르침도 들어 있습니다. 황제의 권력도, 재산도, 목숨도 ‘하느님의 것’입니다. ‘하느님의 것’과 대등한 위치에 있는 ‘황제의 것’은 없습니다. <‘황제의 것’은 ‘하느님의 것’에 속해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것’과 ‘황제의 것’을 대등한 위치에 놓고서 고민할 이유가 없습니다. 황제의 통치가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지, 합당하지 않은지, 그것만 제대로 판단하려고 노력하면 됩니다. 이 가르침은 유대인이든지 유대인이 아니든지 간에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금방 알아들을 수 있는 단순하고 명쾌한 가르침입니다. <절대로 ‘모호한’ 답변이 아닙니다.>
예수님께 와서 질문했던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도 이 말씀의 뜻과 가르침을 알아들었고, 그래서 ‘매우 감탄’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에 대한 적대감이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신앙인들은 세속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지만, 세속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세속의 법과 제도와 질서를 신앙생활과 어떻게 조화시켜야 하는지를 고민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지배자는 그대의 이익을 위하여 일하는 하느님의 일꾼입니다. 그러나 그대가 악을 행할 경우에는 두려워하십시오. 그들은 공연히 칼을 차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악을 저지르는 자에게 하느님의 진노를 집행하는 그분의 일꾼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진노 때문만이 아니라 양심 때문에도 복종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조세를 바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들은 바로 이러한 일에 정성을 다하는 하느님의 심부름꾼입니다. 여러분은 모든 이에게 자기가 해야 할 의무를 다하십시오. 조세를 내야 할 사람에게는 조세를 내고 관세를 내야 할 사람에게는 관세를 내며, 두려워해야 할 사람은 두려워하고 존경해야 할 사람은 존경하십시오."(로마 13,4-7) 이 말은 세속의 지배자들이 전부 다 ‘하느님의 일꾼’이라는 뜻도 아니고, 그들에게 ‘무조건’ 복종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세속의 지배자들이 하느님의 일꾼으로서, 또 하느님의 심부름꾼으로서 올바르게 정치를 한다면, 그 통치에 복종하고 세금을 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세속의 지배자들이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악한 자들이라면, 복종하면 안 된다는 것이 바오로 사도가 한 말의 진짜 뜻입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의 말씀’에만 순종하는 사람입니다.(사도 4,19)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나쁜 독재자를 물러나게 만드는 것은 신앙인들이 신앙인으로서 실천해야 할 본분입니다.>
‘법’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악법도 법이다.” 라는 말이 대단한 진리인 줄로 알고 있는 세속 사람들이 많은데,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악법은 법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 법은 폐지해야 합니다. <바리사이들은 안식일에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는 자기들만의 악법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마르 3,4) 이 말씀은, 안식일이라도 좋은 일과 목숨을 구하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가르침이고, 또 바리사이들의 악법을 폐지하신 말씀입니다. 이처럼 “악법은 법이 아니다.”가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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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꽤 곤혹스러운 질문을 받으십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이 질문에는 그분을 옭아매려는 의도가 숨어 있습니다.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은 먼저 예수님을 찬양하는 온갖 좋은 말을 나열합니다. 특히 ‘사람을 그 신분(그리스 말로 ‘프로소폰’[얼굴, 외모])에 따라 판단하지 않으신다.’는 표현으로, 어떤 이의 외모나 신분이나 위엄에 흔들리지 않으시는 예수님의 공평을 치켜세웁니다. 그리고 곧이어 둘 중 하나를 선택하여야 하는 질문을 통하여 어느 한쪽을 답하도록 예수님을 유도합니다. 만일 황제라는 높은 신분에 겁을 먹거나 흔들리지 않는 이라면, 그에게 내는 세금이 합당하지 않다고 떳떳하게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가 이스라엘의 메시아라면 그러한 멍에에서 이스라엘을 자유롭게 하는 이로서, 적어도 이방 통치자에게 내는 세금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혀야 한다는 계산이 깔려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로마 제국에 맞서는 것이 되기에, 그들은 곧바로 예수님을 대역죄로 고발할 계획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계략에 넘어가지 않으십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바쳐라’ 또는 ‘바치지 마라’는 식의 답을 고르지 않으십니다. 그 대신에 예수님께서는 데나리온에 새겨진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인지 확인하게 하신 뒤에,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십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 사실 이 대답은 조금 모호한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모호함 덕분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놓은 덫에서 영민하게 빠져나오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우리에게 더 근본적이고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무엇이 황제의 것이고, 무엇이 하느님의 것인가?’ 마침내 사라져 버릴 것들과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남게 될 것들을 잘 분별하라는 숙제가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것’이 무엇인지 잘 식별하고, 그것을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돌려드리고 있습니까? 나라에 내는 세금도 있지만, 하느님께 바쳐야 할 ‘세금’도 있습니다. 꾸준한 기도와 신앙생활로 그 세금이 밀리는 일이 없게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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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예수 성심 성월을 여는 오늘 미사의 말씀은 <하느님의 것과 세상 것 사이의 질서>를 가르쳐 주십니다. "저희는 스승님께서 진실하시고 아무도 꺼리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압니다. 과연 스승님은 사람을 그 신분에 따라 판단하지 않으시고, 하느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십니다."(마르코 복음 12장 14절)
수석 사제들, 율법 학자들, 원로들이 보낸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장황하게 말문을 엽니다. 얼핏 들으면 예수님의 존재에 대해 잘 알고 있는데 다 그분께 호의적이기까지 한 듯 느껴지지요.
하지만 이 지당한 이야기 안에는 올가미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어떤 선택을 해도 예수님은 황제와 식민지 백성인 이스라엘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 없게 되실 테니까요.
아무도 꺼리지 않고 신분에 따라 판단하지 않는 분으로서 황제의 편에서 세금을 독려한다면 식민지 백성의 정서에 반하는 형국이 되겠지요. 반대로 진실하고 하느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심으로써 이방인과 불화한다면 민중 봉기와 반역을 조장하는 역적으로 몰릴 수도 있습니다.
이는 허울 좋은 말로 예수님을 떠보며 그분의 미래를 차단하려는, 세속 정치에서는 아주 흔한 술수일 것입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 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마르코 복음 12장 17절) 예수님께서 우문에 현답을 던지십니다. 그들은 감탄하지만, 데나리온 한 닢에 들어 있는 의미들을 제대로 알아들었는지는 미지수입니다.
하느님은 세상 모든 것의 주인이시지요. 종교 영역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과 그 안에 존재하는 모든 가치들, 제도들이 다 하느님께 속해 있다는 뜻입니다.
비록 데나리온 한 닢이라는 물체에 새겨진 초상과 글자가 누군가를 표현한다 해도, 그 글자와 사람은 물론 그 가치와 제도까지 오로지 하느님의 것이지요.
제1독서에서는 충실한 유다인의 전형인 토빗이 등장합니다. "토빗은 죽은 이를 묻어 준 다음" 도입 부분부터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듯 느껴집니다. 토빗은 이미 아시리아 임금 산헤립이 죽인 이스라엘 사람들의 주검을 묻어 준 일로 도망 다니는 처지가 되었고 모든 재산을 몰수당했었지요.(토빗기 역사서 1장 16절-20절 참조)
이국땅에 흩어져 사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비극적으로 목숨을 잃고 주검마저 버려진 이들에게 마지막 예를 갖춰주는 일은 참으로 훌륭한 선행이었습니다. 토빗은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이러한 선행과 자선을 멈추지 않는 의인이고 선인이었지요.
"당신의 그 자선들로 얻은 게 뭐죠? 당신의 그 선행들로 얻은 게 뭐죠? 그것으로 당신이 무엇을 얻었는지 다들 잘 알고 있어요."(토빗기 역사서 2장 14절)
사고로 시력을 잃은 토빗과, 그 대신 생계를 꾸리느라 지친 아내 사이에 오해가 생겨, 아내가 토빗에게 반어적으로 질문들을 퍼붓습니다.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사고로 장애를 입은 것이 마치 자선과 선행의 보답이냐고 비아냥대는 듯 들리니, 오죽 답답하고 서러웠으면 저리 따지나 싶어 부부 모두에게 안쓰러운 마음이 들 지경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재산이나 건강, 자손 등을 하느님의 축복으로 보고, 질병과 실패, 후손 없음을 죄로 인한 징벌로 여겼습니다. 그렇다면 가난한 이들과 버려진 동족을 위해 헌신한 토빗이 재산과 시력을 잃은 일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되어버리는 것이죠.
탐욕이 하느님의 것과 황제의 것, 하느님 일과 세상의 일을 혼동하면 할수록, 인간은 자꾸 하느님과 거래를 하고 싶어지는 것 같습니다. 이만큼 할 테니 이렇게 해 달라고요.
그렇다면 고통이나 불행은 설명할 길이 없게 됩니다. 달콤한 건 섭리고 쓴 건 자기 죄가 되어 버리니까요.
사실 자선과 선행을 현실적 보상을 의식하고 행하지는 않지요. 주님의 축복을 끌어내기 위해 무언가 한다면 자칫 거래가 되어 버리니까요. 하지만 주님은 우리와 흥정을 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자선과 선행은 어려운 일을 당한 이웃의 회복과 유익이 목적이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베푸는 이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자선과 선행은 인간이 하느님 자녀다움, 하느님 모상성을 충만히 발휘하는 하느님의 일이기 때문이지요.
베푸는 이는 베풀수록 모든 것의 주인이시면서도 자기 소유를 주장하지 않고 다 내어 주시는 하느님을 닮아갑니다. 결국 더 행복하게 되는 이는 받는 이보다 주는 쪽입니다.
자선과 선행은 베푸는 그 순간 이미 큰 축복입니다. 줄 수 있고 나눌 수 있는 그 자체가 물질적이고도 영적인 커다란 축복일 터이고, 나누는 이의 비움과 관대함과 자비와 흡족함은 이미 하느님의 마음과 일치하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우리,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리고 세상 것은 세상에 돌리는 지혜를 청합시다. 모든 것의 주인이신 분께서 우리에게 무얼 좀 더 주셨다면 더욱 두려운 마음으로 그분이 원하시는 바를 살피고 경청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 뜻에 따라 베푼 모든 것에 대해서는 이미 나눔 자체가 보상이고 축복임을 감사하며 주님 마음에 우리 마음을 합하면 그것으로 족하답니다.
예수 성심 성월에, '자비와 인정이 넘치는 예수 성심'께 이 한 달을 맡겨 드립시다. 예수 성심,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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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
오늘 우리가 듣게 되는 복음의 내용은 예수님을 향한 부정의 감정을 드러내는 ‘올무’에서 시작하여 ‘감탄’이라는 긍정적인 장면으로 전환되는 움직임을 보여 줍니다.
주목할 점은, 올무가 감탄으로 바뀌는 그 자리에 바로 하느님께서 계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향한 모함을 마주하는 가운데, 어떤 화려한 언변이 아닌 하느님을 통해서 대답하십니다. 그러하기에 오늘의 복음은 두 가지를 함께 생각하게 해 줍니다.
첫째,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신앙의 의문들, 신앙과 삶의 질문들은 우리의 생각과 판단을 통해서 답을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사고를 바탕으로 우리가 지닌 신앙에 대하여 우리 자신에게 ‘올무’를 씌우려 합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다양한 상황 속에서, 신앙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는 가운데, 우리는 ‘합당한가, 합당하지 않은가?’, ‘해야 하나, 하지 말아야 하나?’라는 올무를 마주하게 되고, 결국 올무에 걸리고 맙니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마주하고, 우리가 던지는 신앙의 의문에 대한 답은 하느님 안에서만 해결됨을 오늘 복음은 알려 줍니다.
둘째, 예수님의 대답처럼,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황제에게 세금은 바칠 줄 알면서, 하느님께 하느님의 것을 돌려드릴 줄은 모릅니다. ‘성공’과 ‘부’(富)라는 이 시대의 황제에게 우리는 많은 세금을 바치면서 살아갑니다. 부귀영화가 우리를 보호해 줄 것이라고 굳게 믿으면서 아까워하지 않고 당연하게 세금을 바칩니다.
반면에 하느님께 속한 것은 어떠한가요? 주님께 속한 것이 무엇인지 찾으려 하지도 않고, 자연스레 하느님께 드릴 생각을 하지 않고 지냅니다. 그런 우리에게 시편의 저자는 소리 높여 외칩니다.
“주님 것이라네, 세상과 그 안에 가득 찬 것들”(시편 24[23],1) 세상과 세상을 채우는 모든 것이 하느님의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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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빚을 지고 사는 나>
국가경영에 있어서 세금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권력자들은 국민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더 많은 세금을 거둬들여 더 많은 사업을 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세금을 내야 하는 많은 국민은 어떻게 하면 적게 낼 수 있을까를 생각합니다. 사실 어느 사회에서나 세금 문제는 골칫거리입니다. 경제민주화, 창조경제를 밤낮으로 외친다고 해서 서민 경제가 나아지지 않았고, 기회의 평등과 과정의 공정, 결과의 정의도 헛구호였습니다. 고물가, 고금리, 고환율의 시대에 신자유주의 정책은 각자는 경쟁에서 스스로 살아 남아라는 라는 위험성이 던져주고 있습니다. 실질적 재원 마련 대책이 없는 복지는 소용이 없습니다. 세금으로 모든 것이 해결될까요?
식민지 체제의 유다에서 세금문제는 야훼 하느님만을 유일한 왕으로 인정하는 그들의 신앙과 결부되어 더욱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그들에게 세금은 곧 로마의 법에 복종해야 하는가? 하느님의 법을 좇아야 하는가의 문제였습니다.
극단적인 민족주의자들은 납세를 거부하며 반란을 일으켰으나 유혈 진압되고 말았고 그 후 억지로 세금을 냈습니다. 그러나 각자의 처지나 주장은 아주 달랐습니다. 바리사이들은 납세를 로마의 노예를 드러내는 혐오스런 짓이며 유일하신 이스라엘의 주님이신 야훼 하느님께 불충하는 짓으로 여겼으나 현실적으로 로마의 막강한 군사력 때문에 마지못해 세금을 내야 했습니다. 반면에, 로마에 의지하고 있는 헤로데 당원들은 당연히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납부하여 로마의 평화와 안정을 누려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였습니다. 실로 납세는 민중 정서와 로마 권력이라는 양날을 지닌 날카로운 칼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를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 같습니다. 일본과 맞서는 독립군이 있었고 일본의 권력에 빌붙어 사는 친일파가 있었습니다. 독립군에게 있어서 공출당하는 것은 치욕적인 일이니, 그에 응할 수 없는 법입니다. 그러나 친일파는 자기의 잇속만을 챙기는 파렴치한 모습으로 민족을 배반하였습니다. 일제의 권력에 세금을 바쳐야 합니까? 거부해야 합니까? 아직도 위안부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은 아첨하면서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마르12,14). 하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이는 어느 쪽을 선택하여도 예수님은 다치게 되어있는 물음이었습니다. “세금을 내라”고 하면 민족주의자들인 군중을 실망케 하고 분노하게 할 것이며 , “내지 말라” 하고 말한다면 로마 권력에 대한 도전으로 처벌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길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데라니온 한 닢을 가져오라 하여 “이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 하고 물으시고, 반대자들이 “황제의 것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마르12,17).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돌려주라는 말은 빚을 갚거나 배상금을 지불한다는 뜻입니다. 결국 국가라는 공동선을 위해 세금을 납부하라는 말씀입니다.
황제가 만든 은화는 그에게 돌려주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이니 우리 안에는 하느님의 초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전 존재를 하느님께 바쳐야 하는 것입니다. 황제에게는 돈만 주면 그만이지만 우리는 자신을 봉헌해야 합니다. 사실,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으니 모든 사람은 다 하느님의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은 하느님께 돌려드려야 할 빚을 안고 있는 것입니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은 자기 속을 숨긴 채 올가미를 씌우려 했지만 속을 꿰뚫어 보시는 예수님께서는 황제도 결국 하느님의 피조물이므로 하느님께 속한 사람으로 하느님께 충성을 드려야 한다는 것을 확인하셨습니다.
우리의 생애에서 물질의 세금보다도 하느님께 드려야 할 세금을 제대로 바치고 있는가? 돌아보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기도와 희생의 봉헌,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그리고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기꺼이 돌려드림으로써 기뻐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느님으로부터 서로 다른 탈랜트를 받았습니다. 그 모두를 그분을 위해서 사용할 수 있다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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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세실리아 블리스데일이라는 여성이 딸 그레이스의 결혼식을 앞두고 런던의 쇼핑몰에서 77달러짜리 드레스의 사진을 찍었습니다. 결혼식에 입을 생각으로 사진을 딸에게 보내 의견을 물은 것이지요. 그런데 딸 그레이스와 예비 사위 카이는 사진 속 드레스 색깔에 대한 의견이 달랐습니다. 딸은 파란색-검은색 드레스라고 했고, 사위는 흰색-금색 드레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서로 자신이 본 색이 맞다고 하니까 주변 사람에게 어떤 색깔로 보이느냐고 의견을 구했습니다. 이 색깔 논쟁이 전 세계로 퍼지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그래픽 편집 회사인 어도비사에서 ‘파란색-검은색’이 맞다고 했지만, 더 많은 사람이 선택한 ‘흰색-금색’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학자들은 이에 대해 우리의 주관적 현실과 객관적 현실이 다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 내면의 현실은 외부 세계가 모종의 방식으로 재현된 것이며, 외부 현실의 복제품이 아니라 하나의 내부 모형일 따름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있는 것도 거짓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색깔까지 확인했다고 해도 틀릴 수 있었습니다. 이런데도 ‘나는 맞고, 너는 틀렸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요?
겸손의 필요성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직접 듣고, 직접 본 것도 틀릴 수 있는데, 자신의 판단만을 내세워서 어떻게 무조건 맞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하느님이신 주님께서도 ‘겸손’을 담아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겸손은 과연 어디에 있나요?
예수님을 제거하려는 많은 이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해주셨고, 이에 대한 표징으로 각종 놀라운 기적을 행하셨어도 이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이 사회에 혼란을 일으키는 큰 죄인이라고 단정 짓고 있습니다.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수님과 함께 주민세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사실 이 둘은 정치적으로 절대 어울리지 않습니다. 헤로데 당원은 철저히 로마의 편이어서 주민세를 내야 한다는 입장이고, 바리사이는 민족주의자이기에 주민세를 거부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마음을 맞춥니다. 예수님을 제거하고자 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정반대의 자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편이 됩니다. 즉, 주민세를 내라고 하면 하느님을 버리라는 것이라며 따질 수 있고, 주민세를 내지 말라고 하면 반로마 반란자라는 죄목을 씌울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입장은 단호했습니다. 하느님께 해야 할 일이 있고, 국가 권력자에게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마르 12,1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것은 무엇일까요? 악과 타협하는 것이 아닌 철저하게 하느님의 의로움을 따르는 것입니다. 철저한 겸손으로 서로 사랑으로 하나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런 겸손만이 주님과도 함께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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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마르코 12,13-17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문제)
그때에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은 예수님께 말로 올무를 씌우려고,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 몇 사람을 보냈다. 그들이 와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는 스승님께서 진실하시고 아무도 꺼리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압니다. 과연 스승님은 사람을 그 신분에 따라 판단하지 않으시고, 하느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위선을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한 닢을 가져다 보여 다오.” 그들이 그것을 가져오자 예수님께서, “이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황제의 것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이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그들은 예수님께 매우 감탄하였다.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너의 것은
내가 아니라
너에게
너는
나도 아니요
너도 아니요
하느님께
나의 것은
네가 아니라
나에게
나는
너도 아니요
나도 아니요
하느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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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행복이 요지부동인 행복>
선행한 사람과 함께 사는 사람의 고통, 사랑의 사람과 함께 사는 사람의 불행, 저는 이 문제를 오늘의 토빗기를 가지고 묵상하려고 합니다.
토빗기는 선행한 토빗에게 고통이 또 닥치는 것으로 얘기를 전개합니다. 그것도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로 고통을 받게 됩니다.
토빗은 어찌하여 새가 똥을 누는 곳에 가서 눕고 하필이면 새 똥으로 인해 눈이 멀게 되는 겁니까?
이것은 인간의 악행으로 고통받는 것이 아님을 말하는 것이지요. 새 똥 때문에 눈이 멀었다면 하느님께서 멀게 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토빗의 선행에 하느님께서 상으로 보답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앙갚음하듯이 하느님께서는 악으로 갚아주신 셈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생각게 됩니다. 이것으로 토빗은 불행해졌을까요?
제 생각에 토빗이 고통과 불편을 느꼈을지언정 불행해지지는 않았을 겁니다. 오늘 우리가 보기에는 불행한 사건을 겪었는데도 그는 아무에게도 원망하지 않고 고통에 신음하지도 않습니다.
내가 이렇게 평생 선행을 하며 살았는데 그 대가가 이거냐고 하느님께 원망을 퍼붓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참사랑과 참 행복으로 선행을 한 사람에게는 고통은 있을지언정 불행은 없고 고통으로 인한 원망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와 함께 사는 사람은 그로 인해 고통도 받고 불행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와 똑같은 경지에 올라 있으면 고통을 겪어도 불행해하지 않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고통 때문에 불행해할 것이고 그가 무척 원망스러울 것입니다.
오늘 토빗의 아내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그래서 토빗을 원망하며 선행의 대가가 뭔지 따집니다.
“당신의 그 자선들로 얻은 게 뭐죠? 당신의 그 선행들로 얻은 게 뭐죠? 그것으로 당신이 무엇을 얻었는지 다들 알고 있어요.”
토빗의 아내는 토빗의 경지에 아직 오르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선행에 대가가 있어야 한다고 아직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그녀는 대가가 있어야 선행을 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과 선행의 대가가 고통일지라도 불행하지 않고 오히려 행복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대가라면 대가이고 상급이라면 상급입니다.
어떤 고통에도 행복이 요지부동인 행복, 선행에 악이 뒤따라도 행복이 요지부동인 행복, 사랑에 어떤 고통이 뒤따라도 사랑 충만으로 행복이 요지부동인 행복, 이것이 참사랑으로 선행하는 이에게 주어지는 대가임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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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중심의 삶>
- 주님의 전사, 분별의 지혜, 영적승리의 삶 -
저는 강론을 묵상할 때는 언제나 염두에 두는 것이 제목입니다. 제목을 정한후 강론을 쓰며 후에 제목을 정정하기도 합니다. 오늘 강론 제목은 “하느님 중심의 삶-주님의 전사, 분별의 지혜, 영적승리의 삶-”입니다. 이 강론 제목 역시 참 많이 반복했던 주제입니다. 하늘 아래 새것은 없음을 새삼, 삶은 반복이란 진리를 깨닫습니다. 단조로운 반복이 아니라 늘 새로운 반복, 날로 내적으로 깊어지는 깨달음의 반복입니다.
바로 윗 제목에 그대로 해당되는 분이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시고 성인들이고 살아 계신 성인 프란치스코 교황입니다. 정말 88세 고령에도 불구하고 활동하시는 모습은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입니다. 정말 하루하루 사적인 삶은 전혀 없고 완전히 공개된 공인의 삶입니다. 쉴 시간이 거의 없이 끊임없이 사람을 만납니다.
교황님께서 강조하는 바, 목자로서의 하느님 스타일의 삶입니다. 바로 친밀함(closeness), 온유함(tenderness), 연민(compassion)이 하느님의 스타일이라 하시며 그 모범을 보여주십니다. 지난 5월27일 교황님은 이탈리아 공영방송 TV에서 여러 사회적 이슈에 대해 세상 상황에 대한 대화와 토론이 있었고, 교황님은 자신의 생각을 표현했습니다. 특히 세계 평화에 관한 말씀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전쟁 그것은 인간만큼이나 오래된 이야기다. 평화와 함께 여러분은 앞으로 나아간다. 조금씩일것이나 얻는 것이 있다. 반면 전쟁과 더불어 너는 모든 것을 잃는다. 모든 것을!(영어 ‘Everthing!’로 강조된 표현이 강력한 느낌이었습니다). 소위 얻는 것들은 잃은 것들뿐이다(gains are losses). 비오 12세 교황은 1939년 세계 2차 대전에 앞서 라디오 메시지에서 말씀하셨다. ‘어느 것도 평화와 함께 할 때는 잃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것이 전쟁과 더불어 사라진다.’”
평범하나 참으로 공감이 가는 말씀입니다. 이래서 좋은 전쟁보다 나쁜 평화가 백배 낫다합니다. 인간 역사만큼이나 깊은 전쟁의 역사입니다. 평화를 추구하나 늘 전쟁과 함께 살았던 역설적 인간존재입니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전쟁입니다. 참으로 무지한 인간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전쟁입니다. 무지의 악, 무지의 죄, 무지의 병이 그대로 압축 요약된 전쟁입니다.
교황님의 6월 기도지향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교황님은 “고문의 공포를 멈추십시오, 인간의 존엄성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고문은 과거의 역사가 아닙니다. 안타깝지만 오늘날에도 우리 역사의 일부입니다.” 말씀하시며 고문 폐지를 위해 기도할 것을 청하십니다. 유엔은 6월26일을 세계 고문 희생자 지원의 날로 정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 믿는 이들이 말하는 것은 영적전쟁입니다. 예로부터 수도자들은 물론 믿는 이들은 자신의 삶을 영적전쟁의 삶이라 규정했고, 자신을 주님의 전사 즉, 평화의 전사, 사랑의 전사, 믿음의 전사라 했고 이것은 제가 즐겨 쓰는 표현입니다. 정말 죽어야 끝나는 하루하루가 영적전쟁의 순교적 삶이고, 우리는 주님의 영적전우에, 영적전우애를 지니게 됩니다. 영적전쟁 승리의 본보기가 바로 순교자들입니다. 순교자 공통 찬미가는 늘 불러도 감동입니다.
“하느님 위해 싸워 승리한 용사. 그 몫의 월계관을 씌우신 주여.
순교자 우러르며 기리는 우리, 죄악의 사슬에서 풀어주소서.”
참으로 믿는 이들의 삶은 영적전쟁의 순교적 삶입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 복음을 보면서도, “아 예수님의 삶이 참 고달프구나. 끊임없이 계속되는 적대자들의 공격속에 살아가는 영적전쟁의 삶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 죽어야 휴식이겠구나!”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성인들은 놀랍게도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과 기쁨, 평화를 잃지 않았습니다. 바로 어제 성무일도시 계응송이 그 비밀을 알려줍니다.
“의인들아 주님 안에서 기뻐하라, 즐거워하라. 마음 바른 사람들아 춤추며 기뻐하라.”
바로 지옥같은 세상속에서도 하느님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예수님이요 그 후예들인 성인들입니다. 이어 더불어 생각나는 응송입니다.
“주님은 나의 힘, 나의 기쁨이시도다.”
하느님을 나의 힘, 나의 기쁨으로 삼아 영적승리의 삶을 사셨던 예수님이요 성인들입니다.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에서 내적평화와 기쁨, 찬미와 감사의 삶이요, 평화의 전사, 사랑의 전사로서의 삶이겠습니다. 참으로 주님의 전사에게 분별의 지혜는 필수입니다. 오늘 주님의 양자택일의 곤궁한 처지에서 그 분별의 천상적 지혜가 빛납니다. 적대자들은 주님을 한껏 부풀린후 양자택일의 답을 요구합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
이어지는 대화가 참 통쾌합니다. 참으로 예수님의 이런 침착하고 두려움이 없어 보이는 모습에 지혜로운 처신은 하느님 중심의 철저한 삶에서 기인함을 깨닫습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한 닢을 가져다 보여 다오.”
“이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
“황제의 것입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
이들의 무지를 깨우쳐주는 ‘신의 한 수’ 같은 답변에 이들은 예수님께 매우 감탄합니다. 예수님께 크게 한 수, 지혜를 배우는 적대자들입니다. 혹자는 정교분리의 원칙을 말하지만 이것은 분명히 아닙니다. 우선적인 것이 하느님 중심의 삶이요 무엇이 황제의 것이고 무엇이 하느님의 것인지 스스로 분별하여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금을 바치고 안바치고는 너희들이 각자 알아서 하라는 것입니다.
황제의 초상이 있는 데나리온에 앞서, 하느님의 모습이 각인된 존엄한 품위의 너희들이니 하느님의 자녀답게 지혜로이 스스로 판단하여 처신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전사로서 예수님의 통쾌한 영적승리를, 서로가 사는 ‘상생相生의 승리(win-win)’를 상징하는 오늘 복음입니다.
오늘 제1독서 토빗기는 의인의 시련을 말해줍니다. 토빗의 하느님 중심의 삶이 시험대에 오릅니다. 이런 인내의 시련을 통해 단련되고 정화되어 참으로 주님의 전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음 안나의 도전적 유혹의 말이 토빗에게는 아팠을 것이나 토빗은 이를 너끈히 통과했을 것입니다.
“당신의 그 자선들로 얻은 게 뭐죠? 당신의 선행들로 얻은 게 뭐죠? 그것으로 당신이 무엇을 얻었는지 다들 알고 있어요.”
일면 타당한 듯 보이지만 악마의 간교한 질문입니다. 이와 유사한 물음도 우리에게는 끝이 없어 보입니다. 왜?, 왜?, 왜?, 이렇게 충실히 살아왔는데 하느님은 왜 이런 불행을, 고통의 병고를 주셨느냐는 등 끝없는 질문입니다. 무수한 미사예물의 다양한 지향들을 보면 기도는 간절해질수 뿐이 없습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건강하게 미사참례 하면서 예쁘게 살다가 갑작스런 병으로 꿈처럼 떠난, 도저히 실감이 가지 않는 스테파노-비비안나 부부를 생각하면 정말 하느님이 이해불가입니다. 이 또한 믿음의 시험이자 시련입니다. 암투병하던 비비안나 자매는 2월에, 요양원에 있던 스테파노는 3월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두분의 연미사를 신심깊은 도미니카 자매님이 봉헌했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느님 중심의 삶에, 주님의 전사로서 주님의 참 좋은 선물인 지혜와 믿음과 용기로, 온갖 유혹을 통과하여 영적승리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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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마르12,15)
오늘 복음(마르12,13-17)은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문제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 세상 모든 이들의 구원을 위해 파견되신 하느님의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유다인들로부터 내내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저 예수가 자신들이 찾고 있었던 메시아인지?'
'저 예수가 자신들 편에 서 있는 구원자인지?'
계속된 그런 질문으로 예수님을 시험했던 사람들이 바로 유다인들 중에서도 높은 자리를 차지하며기득권을 누리고 있었던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과 같은 백성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계속 묻습니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루카10,25)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마태22,35)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마르10,2)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보여 달라고 요청하였다."(마태16,1)
오늘 복음에서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시험을 받으십니다. 백성의 지도자들이 예수님께 말로 올무를 씌우려고, 사람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또 묻습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마르12,14)
참메시아이시며 참구원자이신 예수님께서는 명쾌한 정답으로 그들이 쳐놓은 올무와 시험에서 벗어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했던 이들을 감탄하게 만드십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마르12,17)
'하느님의 것이 아닌 것이 무엇인가?'
'무(無)가 유(有)가 되게하신 창조주 하느님을 믿는 이들에게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예수님께서도 시험을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도 고통을 통해 시험을 받습니다. 우리도 믿음으로 예수님처럼 모든 시험들을 이겨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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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p9iIzp2pA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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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마르 12, 17)
우리가
어디에
묶여있는 지를
제대로
보게 됩니다.
우리자신이
바로
하느님의
것임에도
하느님을
향하지 않고
헛된 황제의
욕망에만
묶여있습니다.
오늘도
많은 이들이
하느님께로
돌아갑니다.
우리가
여기까지 온 것은
모두 하느님의
은총이었습니다.
아깝고 아쉬운
것들이 실은
하느님의 것임을
모른 채 살았습니다.
이 모든 것에
존재하시는
생명의
하느님이십니다.
사랑이 멈추면
소유권이
떠오릅니다.
황제의 것을
거절하지 못하는
우리들 삶입니다.
황제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황제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온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것이
우리를 안고 갑니다.
신앙은
세상과의
단절이 아닌
하느님 것과의
참된
소통입니다.
끝없이 내달리는
욕심을
멈추게 하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사랑으로
이끄시고
하느님을
만나게 하시는
이것이 삶의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황제의 것을
비워내고
하느님의 것을
되찾아
하느님께
돌려 드리는
아름다운
마음의 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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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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