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디리 극장전
박몽구
가을장마 질금거리는 저녁
출출해진 속 덥히려 피맛골에 들렀지만
낮은 처마 서로 기대고 있던 술청들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키 머쓱한 빌딩들만 비쭉 비쭉 솟아 있다
으슥하게 들어선 모텔들
급전 융통해 주는 전당포
간판 없는 환전소들…
얼굴 반쯤 가린 채
골목 곳곳에 숨어 있다
피맛골 끝을 만졌나 싶었더니
옛 피카디리 극장 앞이다
로마의 휴일의 오드리 헵번
이유 없는 반항아 제임스 딘을 보기 위해
긴 줄 이루던 연인들 사라지고
극장 터 누른 채
귀금속 상가만 으리으리하다
극장은 사라지고 덜렁 남은 스타 광장
신성일, 엄앵란, 윤정희, 안성기…
왕년의 배우들 핸드 프린팅 동판들
가을비에 어깨가 젖고 있다
얼마나 많이 밟았는지
구리판에 박힌 배우들의 손바닥
뭉개지다 못해 바스러져 가고 있다
귀금속 상가로 가며 밟을 때마다
낡은 필름 속 배우들이
온몸으로 으스러질 듯 어깨로 받치고 있다
이름값을 한다는 건
소리 없이 아픔을 참는 거라고
획이 망가진 사인들이 말해준다
아직 다 눈에 담지 못한
장면들 남아 있다며
툭툭 끊어진 낡은 필름을 잇는다
피맛골 삼키며 들어선
키 머쓱한 호텔 뒤
알박기하듯 박혀 있는
마지막 선술집 문 밀고 들어가
찬비를 긋는다
박몽구
1977년 월간《대화》로 등단.
시집『단단한 허공』『5월, 눌린 기억을 펴다』『라이더가 그은 직선』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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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디리 극장전 - 박몽구
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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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2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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