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교 경전(經典)의 내용을 필사(筆寫)하는 일.
석가의 입멸 후 제자들이 모여 결집한 불교 경전은 처음에는 구송(口誦)으로 전해지다가 문자화되었는데, 사경은 경전이 문자화된 이후에 시작된 것이다. 처음에는 경전의 내용을 배우거나 널리 전파하거나 보존하는 등의 현실적인 목적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나 뒤에는 그 공덕을 중요시하게 되었다. 사경을 하는 행위가 신앙심과 정진력이 없으면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경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그 연대는 분명하지 않다. 후한(後漢) 영제(靈帝) 광화(光和) 2년에 지루가참(支婁迦讖)에 의해 한역된 《도행반야경(道行般若經)》과 《반주삼매경(般舟三昧經)》에 사경의 공덕에 관한 것이 있는 것으로 보면 2세기 이전에 이미 사경이 행해졌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위의 두 경전 외에도 《방광반야경(放光般若經)》 《수능엄경(首楞嚴經)》 《법화경(法華經)》 등의 여러 대승경전에서 사경의 공덕을 높이 평가하여 장려하고 있는 데 비해 《아함경》이나 《율전(律典)》 등에서는 사경의 공덕에 관한 것이 없다.
이로 미루어 소승(小乘)의 여러 부파에서는 경전을 구송으로 전했으나, 대승 교도들은 서사(書寫)를 장려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인도의 내지(內地)에서는 서사가 많이 행해지지 않았고 서역(西域)에서 많이 행해진 것으로 보인다. 중국에서 한역될 때는 번역된 경문이 필수자(筆受者) 등에 의해 즉시 깨끗하게 필사되었다. 인쇄술의 발달로 경전을 서사한다는 것의 의의가 다소 감소된 것은 사실이지만 법처럼 진행되는 사경 의식은 그 자체가 수행의 한 방법으로 평가된다.
사경(寫經)
= 경전을 베껴 쓰는 것 / 마음가짐이 더 중요
부처님은 지금부터 2547년 전에 열반하셨다.
부처님의 열반이후에도 불교가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인 법(法)이 있었고 또 그 가르침이 여러 사람에게 계속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인쇄술(印刷術)은 물론, 종이도 발명되지 않았던 당시에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제자들의 입을 통해서만 전해졌다. 네 차례 진행된 결집(結集)은 바로 이 구전(口傳)을 확인하고 정리하는 과정이었다.
문자와 종이의 발명으로 부처님의 말씀은 더 이상 구전으로만 전해지지 않았다. 바로 경전이 탄생한 것이다. 또한 불교의 융성은 많은 지역의 불자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더 많이 알고 싶어 했으며, 이는 경전의 수요를 크게 증가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한 번에 많은 책을 찍어낼 수 있는 인쇄술이 출현하기 전까지 이 몫은 오로지 사람에 의해서만 이루어졌다. 바로 사경(寫經)이다. 경전을 손으로 베껴 쓰는 것이다. 즉, 사경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담긴 경전을 널리 보급하기 위한 종교적인 열정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따라서 초기 불교에서 사경은 공덕을 쌓는 중요한 수단이기도 하였으며, 그 의미는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또 사경은 단순히 경을 옮기는 것 이외에 그 이면에는 자신의 신앙과 수행이 깃들여 있다. 사경을 할 때 일자일례(一字一禮), 일자삼례(一字三禮)를 하는데 이는 글 한자를 쓰면서 절을 한번 하거나 세 번 한다는 의미다. 그만큼 예
로써 혼신의 힘을 기울인다는 뜻이다. 인쇄술의 발달뿐만 아니라 현대과학은 사이버 공간에서도 쉽게 부처님의 말씀을 접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 귀한 말씀을 스쳐 가는 바람처럼 여길 것이 아니라 금과옥조(金科玉條)로 귀하게 여기기 위해서는 듣는 이의 마음가짐이 무엇보다 중요할 것이다.
=사경노트란??
사경은 불교의 오래된 수행방법중의 하나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인 불경을 옮겨 적는 것이죠. 사경노트는 펜글씨 교본처럼 흐리게 경전이 씌어져 있습니다. 불교용품점이나 절에서 팔기도 합니다.(가격은 경전에 따라 다릅니다)
구하기 어려우시면 그냥 일반 공책을 이용하셔도 됩니다.
사경변상도
고려 1334년, 34.0×11.5cm, 보물 제752호, 호림박물관 소장.
목판 인쇄술이 발달하기 이전의 경전들은 모두 필사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경전을 베끼는 경서사의 공덕은 극히 강조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목판이 발달하면 대부분의 수요는 판경이 담당하게 되므로 사경의 필요성은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고 이제는 실용적인 면이 아닌 '경서사의 공덕'이라는 신앙적인 면만 강조되기에 이른다.
이렇게 만들어진 사경들은 초호화판으로 만들어졌으니 글자는 금이나 은으로, 그림은 금니로, 바탕은 최고급 종이인 감지 같은 색지로 만들어졌다. 이러한 화려한 사경들은 통일 신라 때부터 유행하기 시작했지만, 초호화판의 사경이 대량으로 유행하기 시작한 것은 고려 때부터이다. 사실, 고려의 호화판 사경들은 무수히 조성되었고, 현재도 많이 남아 있다. 이 변상도는 충숙왕 복위 3년(1334)에 자선대부 장작원사였던 안새한이라는 사람이 부모님의 은공을 기리기 위해 대방광불 화엄경 보현행원품을 사경한 책의 첫 부분이다. 그림은 화면 가운데에 보현보살이 위치하고, 그를 향해 합장하고 법문을 듣고 있는 보살들로 구성되어 있다. 보살들의 보관과 법의 등은 화려하고 장식적인 필치로 정교하게 그렸고, 배경은 동일한 문양을 반복해서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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