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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
<소래포구>
날씨가 꽤 쌀쌀해지고 있습니다.
100명이 넘는 대식구가 함께 살다보니
요즘 제 머리 속에 계속 떠오르는 단어가 '월동 준비'란 단어입니다.
난방을 위해 한동안 때지 않았던 보일러도 시험 가동해봐야 합니다.
각 방 라디에터에 에어도 빼야하지요.
슬슬 김장 준비도 해야겠습니다.
언제 날 잡아서 소래 포구에 가서 새우젓이랑 멸치젓도 사와야 하지요.
이런 저런 당장 먹고 살 일에 집착하다가 오늘 복음을 읽으니 또 가슴이 철렁합니다.
가슴이 찔리기 시작합니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당장 코앞에 들이닥친 일에는 그리도 신경을 곤두세우면서도
가장 중요한 하느님의 뜻, 성령의 이끄심이 무엇인가를 찾는 데는 어찌 그리도 둔하냐?’는 음성이 제 귀에 들려왔습니다.
"내일 당장, 이번 달, 올 겨울 당장 먹고 살 걱정은 태산 같으면서도
가장 궁극적인 걱정, 영원히 사느냐 못사느냐에 대한 걱정, 영혼을 위한 걱정은 하나도 하지 않느냐?"는 그분의 음성에 몹시도 마음이 찔렸습니다.
수시로 벌어지는 세상의 여러 사건들 앞에서,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세상의 여러 모습 안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징표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이 한 세상 살면서 우리가 겪게 되는 다양한 체험,
그 안에서 하느님의 뜻과 표징을 포착해내는 일,
그리고 지혜롭게 대처하는 일만큼 중요한 일은 다시 또 없는 것 같습니다.
저는 요즘 수도 공동체 안에서 어쩔 수 없이 직면하게 되는 다양한 갈등 상황이나 상처, 고통들 안에 깃든 하느님의 뜻과 징표를 찾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관계 안에서 다가오는 상처가 만만치 않을 정도로 크다면,
일단 제 자신을 거두어들이고 침묵으로 몰입하라는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입니다.
이유 없이 오해받는 일이나 억울한 일이 발생하면
제 자신의 내면을 보다 자세히 들여다보라는 하느님의 뜻으로 여깁니다.
나 자신의 비참함이 커져만 갈 때, 바닥으로 빠져 들어감을 느낄 때면,
절실한 기도가 필요한 순간으로 여깁니다.
삶의 모든 국면, 모든 상황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는 오늘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매 순간 모든 사건 안에서 시대의 징표를 찾아나가는 영적인 하루가 되길 빕니다.
-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
요즘 아이들은 뭐 하고 노는지 참으로 궁금합니다.
평일 낮에 성당 앞 동네 골목을 걷다보면 아이들을 볼 수가 없습니다.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지…….
그러면서 저의 어렸을 때를 떠올려 봅니다.
그때 동네 골목은 어린이들의 땅이었습니다.
그 골목에서 별의별 놀이를 다 했지요.
구슬치기, 딱지치기, 숨바꼭질,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천당집기, 얼음땡, 땅따먹기, 총싸움, 오징어, 찜뽕 등등…….
그때 했던 놀이를 적어보니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렇게 많은 놀이를 하다가,
누구의 엄마든 상관없이 “밥 먹어라.”라는 소리만 들으면 아쉬움 속에 그날의 놀이는 끝이 났지요.
어렸을 적에 학교 수업이 기다려졌던 이유는 수업 이후에 있었던 놀이 때문에 그랬고,
그렇게 한바탕 놀고 나면 9시 뉴스 직전에 나오는 “새 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납니다.”라는 구절을 보기도 전에 꿈나라 속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신나게 놀았던 어린 시절,
그래서 그때가 지금도 많이 그리워집니다.
그런데 그때가 그립다고 옛날의 놀이를 지금 하면 어떨까요?
우리 본당의 꼬마들과 어렸을 때 많이 했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과 ‘얼음땡’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보다 재미가 없었습니다.
어렸을 때 최고의 놀이였으나,
지금은 시시하고 유치한 놀이가 되고 만 것이지요.
자기 나이에 적합한 놀이가 있는 것처럼,
지금 나에게 맞는 행동거지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내가 해야 할 일들을 찾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힘들어하고, 혼란 속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이렇게 혼돈 속에서 방황하는 우리들을 향해
주님께서는 시대의 징표를 읽어야 함을 말씀해주십니다.
즉, 그 시대의 징표를 읽고 올바른 일을 지금 이 순간 그리고 바로 이 자리에서 실천할 수 있도록
스스로 판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의 뜻을 제대로 실천할 수 있으며,
주님께서 맡겨주신 이 세상 안에서 의미 있는 삶을 영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신앙인들에게 적합한 행동은 과연 무엇일까요?
주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실천에 있습니다.
반대로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에 대한 집착을 통해서 사랑의 실천을 하지 못하면,
그로 인해 시대의 징표를 읽을 수 없는 것은 물론 주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간절하게 원하는 행복의 길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에게 지금 이 순간 반드시 필요한 사랑의 실천.
이것이 바로 지금 이 시대의 징표임을 기억하면서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했으면 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인 만큼,
우리의 노력에 주님도 함께 해주실 것입니다.
- 인천교구 간석4동 본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
<징조에 민감하라>
얼마 전 한 젊은이가 사회가 자신을 무시한다는 이유로
고시원에 함께 살고 있던 조선족들을 비롯한 여자들을 살해했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또 어떤 분은 정부가 하는 일이 못마땅해 국보 1호를 불태워버렸습니다.
또 길거리에서 아무 이유 없이 살해를 당하는 많은 사건들도 뉴스에 심심치 않게 나옵니다.
이런 것을 보면 그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게 우발적으로 사건을 저지른 것처럼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정상적인 사람이 착했다가 한 순간 갑자기 변해서 그런 사건을 저지를 수는 없습니다.
작은 구멍이 큰 둑을 허물어뜨리듯이
큰 잘못도 다 작은 것들이 누적되어 일어나는 것입니다.
한 순간에 성인이 되는 사람도 없고
한 순간에 살인자가 되는 사람도 없습니다.
만약 살인자가 되었다면 그 이전에 그런 징조가 나타났을 때 고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가리옷 유다도 한 순간에 변하여 예수님을 배신하였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바오로 사도도 한 순간에 회개하였다고 하면 오산입니다.
문제는 점점 나빠지는 자신의 상태를 알아채지 못하는 것에 있습니다.
화살은 겨냥하는 방향으로 날아가듯이
지금의 나의 모습도 어느 방향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내가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를 아는 것이 깨어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방향으로 날아가고 있다면
옆으로 스쳐 지나가는 것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것들이 징조입니다.
이 징조에 둔감하면 결국 큰일을 당하고 맙니다.
얼마 전에 이태리 아퀼라 지방에서 큰 지진이 있어서 이례 없이 수백 명이 사망하였습니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이미 땅에서 솟아나는 징조를 눈치 채고
정부에 사람들을 피신시켜야 한다고 여러 차례 언질을 준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에 또 산사태로 수십 명이 매몰되어 사망하였습니다.
이것도 예고 된 재난이었습니다.
산이 허물어져가는 것을 고치라고 이미 돈이 지불된 상태였는데
그 액수가 터무니없이 작아서 고치지 않고 그냥 방치하였다가 결국 무너져 내리고 만 것입니다.
우리나라 삼풍백화점도 이미 예고되어져 있었다고 하고
미국의 911 테러도 정부엔 이미 보고가 되어져 있던 상태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보면 예고되지 않은 재난이란 없는 것 같습니다.
아주 작은 징조라도 잘 캐치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영성적으로도 민감한 일일 것입니다.
나에게 일어나는 작은 일도 결코 작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아주 작은 일이라도 하느님 허락 없이 벌어지는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나에게 벌어지고 있는 것들이,
마치 500미터 전부터 계속 속도 카메라가 있다고 가르쳐주는 도로 표지판과 같은 역할을 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계속 살면 안 된다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굳이 인정하려 하지 않고 고치려 하지 않는 것이 잠을 자고 있는 것입니다.
잠을 자기 때문에 자신이 조금씩 나빠지는 것도 눈치 채지 못합니다.
개구리를 물에 넣고 조금씩 끓이면 개구리는 온도의 변화를 느끼지 못하고 죽고 만다고 합니다.
그 변화를 느껴 재빠르게 물 밖으로 뛰어나오면 살 것이지만 작은 변화는 좀처럼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세상 것들은 예표를 보고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알면서도
인간 일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예측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구름이 서쪽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면 곧 ‘비가 오겠다.’ 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또 남풍이 불면 ‘더워지겠다.’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작은 잘못이 쌓이는데도 자신의 잘못을 바꾸려하지 않으면
결국 큰일을 벌이고야 만다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입니다.
그런데도 자신을 방치하기 때문에 큰 잘못을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 자신에게 ‘지금 이대로 계속 간다면~’이란 질문을 끊임없이 던져야 할 것입니다.
또 한 가지 뻔한 일은
누구를 미워하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에 우리 스스로,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오니,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라고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불을 보듯 뻔한 일인데도 신자들의 많은 경우 아직도 미움을 가지고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건 깨어있지 못한 것입니다.
만약 지금 당장 주님께서 부르신다면
그 미움 때문에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적어도 미움이 지금 이대로 지속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이렇게 덧붙이시는 것입니다.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재판관에게 갈 때, 도중에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
그러지 않으면 그가 너를 재판관에게 끌고 가,
재판관은 너를 옥리에게 넘기고, 옥리는 너를 감옥에 가둘 것이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이는 미움을 지니고 계속 살다가 마지막을 맞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자, 우리들도 지금 이대로 계속 간다면 구원을 받을 확신 속에 살고 있습니까?
나를 돌아보고 지금 이대로 계속 되어도 괜찮은지 항상 되물으며
큰 재난을 당하기 전에 어떤 징조가 있으면 바로바로 고쳐나가야 하겠습니다.
- 로마 유학중
<땅과 하늘의 모습은 풀이할 줄 알면서>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예언직을 수행하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일어날 일들을 미리 다 알려 주셨고
장차 어떻게 될 것인지도 알려 주셨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승리하여 영원히 살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 지도 이미 다 알려주셨다.
그것을 기록한 것이 성서이다.
따라서 성서를 보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장차 착하게 살면 어떤 상을 받게 되고,
악하게 살면 어떤 벌을 받게 되는지가 기록되었기 때문에
성서를 통해서 어떻게 사는지를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성서를 모르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또 장차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제멋대로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성서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성서에 적혀 있는 삶의 지혜를 가르쳐 주는 사람이기 때문에
예언직을 수행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 하더라도 성서를 모르면 일반 사람들과 똑같다.
그리스도인이 예언직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은
성서를 알아들을 때에 가능한 것이다.
성서를 알아들으면 이 시대를 풀이할 줄 안다.
무엇이 올바른 일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줄 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은 시대의 징표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느님의 나라를 설명해 주는 하나의 표징들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물질적인 것을 보지만
그것을 통해서 영적인 것, 즉 하느님의 나라를 볼 줄 아는 사람이다.
따라서 신앙인은 무엇보다도 영적으로 눈이 뜨인 사람이다.
영적으로 눈을 뜨지 못하면
보고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듣고 들어도 듣지 못한다.
육적으로는 보고 보고 듣고 들어도
영적으로는 귀머거리요, 장님이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것을 가지고 말씀하시지만 이 세상의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영적인 것, 즉 하느님의 나라에 관한 것을 이야기하시는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요한 6,64)
"영적이 아닌 사람은 하느님의 성령께서 주신 것을 받아 들이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그것이 어리석게만 보입니다.
(1고린 2, 14-15)
"너희는 구름이 서쪽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면 곧바로 '비가 오겠다.'하고 말하고 남풍이 불면 '더워지겠다.'라는 것만을 아는 사람은 육적인 사람이고, 그것을 통해서 하느님의 징표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은 영적인 사람이다.
우리는 물질적인 것을 보고 그 이상의 것, 즉 영적인 것을 볼 수 있어야만 한다.
그런 사람이 영적인 사람이다.
영적인 것을 보고도 물질적인 것으로 보는 사람이 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영적인 것을 보게 하는 하나의 징표이다.
그리스도인은
"여러분은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새 사람이 되십시오.
이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그분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를 분간하도록 하십시오."
(로마 12, 2)라고 말씀하신 삶을 사는 사람이다.
- 전 성바오로수도회 관구장
<시대를 읽는 눈>
과학 발전과 대중 매체, 특별히 인터넷 보급으로
오늘날 우리는 엄청난 지식 정보를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과거보다 훨씬 자유롭고 자율적이어야 할 텐데 꼭 그렇지만도 않다.
현대인들이 오늘의 사회와 사건을 보면서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기를 얼마나 쉽게 포기하는지를 보면 때로는 아찔해진다.
대중 매체, 그것도 방송의 힘은 참으로 강력하다.
은연중에 사람들을 움직이는 ‘유행’이라는 것도 있다.
많이 배운 사람도 예외는 아니다.
스스로 관찰하고 분석하고 평가하는 수고가 귀찮아서
혹은 혼자 외톨이가 되거나 따돌림당하기 싫어 무리를 따라가는 경우가 적지 않다.
우리 시대에는 각 분야에 많은 전문가가 있다.
이 전문가들에 대한 맹목적 추종이 때로는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유명인사나 전문가의 말이 방송 매체를 통해 전해질 때,
그 내용과 사리를 따져보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많다.
종교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더 무섭다.
동서고금을 통해 보면 종교적 권위를 이용해
사람들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무조건적 추종을 강요한 경우가 없지 않았다.
최근까지도 사이비 종교, 신흥종교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현혹시켰는가.
그런데 예수님은 건전한 상식을 중시하신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사람에게
‘네 마음의 소리를 들으라.’ 고 일깨워 주신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 가능성이,
다른 사람을 형제자매로 바라볼 수 있는 마음과 눈이 우리에게 이미 주어졌기 때문이다.
오늘 말씀에는 이 세상에 이미 도래하기 시작한 하느님 나라의 징조를 알아채지 못하는 동시대인에 대한 예수님의 안타까움이 배어 있다.
왜 스스로 올바르게 판단하지 못하느냐고 꾸짖으시는 말씀에 이어지는 구절은
재판정에 가기 전에 고소인과 합의를 보고 화해하라는 가르침이다.
하느님의 심판이 임박했으니 미루지 말고 회개하라는 말씀이다.
아무리 전문가나 학자 또는 성직자의 말이라 해도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가장 큰 계명을 벗어나는 것이라면 동조하지 말아야 한다.
온갖 주장이 난무하고 혼란스러울 때일수록 중심을 잃지 않아야 한다.
우리 마음속에 현존하시는 하느님 사랑의 숨결에 귀 기울이며
상식과 양심, 평상심을 잃지 않도록 애써야겠다.
심판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세상에 이미 펼쳐지는 하느님의 다스림, 고요한 그분 사랑의 손길을 발견하고 전달하기 위해서.
- 프랑스 떼제 공동체
<내적 일치의 온전한 삶>
내적 결핍과 분열의 인간 현실입니다.
내적 일치의 충만한 삶이 우리 영성 생활의 목표입니다.
때로 필요하다 싶은 책을 구입하려면
꼭 시내 중심가의 대형 서점을 찾아야 합니다.
곳곳에 널려있는 음식점에 비해
서점은 어디서나 거의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아, 이게 우리 내적 삶의 현실이구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점점 육적 욕망 따라 보이는 외적 현실로 치닫는 오늘의 사람들입니다.
새삼 관상과 활동, 기도와 노동의 균형이 시급한 시대임을 깨닫게 됩니다.
세상을 얻은들 자기를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보이는 외적인 것으로 향할수록 삶은 얕고 가벼워질 수뿐이 없습니다.
하여 생각 없이 조건반사적으로 행동하기 마련입니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모르느냐?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군중들이 보는 눈을 지녔더라면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 나라의 임재를 감지했을 것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 그대로 오늘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입니다.
보이는 것 넘어 보이지 않는 실재를,
부수적인 것들 넘어 본질적인 것들을,
육적인 것을 넘어 영적인 것을 통찰하라는 말씀입니다.
잘 보고 잘 듣는 것은 관상의 핵심입니다.
잘 보고 잘 들어야 올바른 판단입니다.
바로 지혜의 원천이신 살아계신 하느님을 만나라는 말씀입니다.
진정 마음의 눈으로 하느님을 보고,
마음의 귀로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
지금 여기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본질적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이래서 우리는 모든 수행의 궁극 목표를 마음의 순결에 두는 것입니다.
마음이 깨끗해야 갈림 없는 마음으로 살아계신 주님을 뵙고
그분 말씀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참 어려운 게 사람입니다.
일치를 향하면서도 분열을 조장하는 모순적 인간이요,
영적 삶을 추구하면서도 육적 욕망을 향하는 인간이요,
내적 삶을 바라면서도 외적 삶에 한 눈 파는 내적 분열의 인간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탄식은 그대로 내적으로 분열된 우리의 실존적 체험이기도 합니다.
“나의 내적 인간은 하느님의 법을 두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내 지체 안에 있는 다른 법이 있어,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음을 나는 봅니다.
그 법이 나를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이런 내적 분열의 비참한 한계 상황에서
하느님께 무릎 꿇는 사도 바오로입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줄 수 있겠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주신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이 길 말고 인간 구원은 없습니다.
자력 구원은 말 그대로 인간 현실에 무지한 교만한 자들의 환상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께서 선사하시는 내적 분열의 치유에
순수한 마음이요 충만한 삶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 은총으로
당신과 일치로 우리의 내적 분열과 결핍을 채워주시어
충만한 영적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 성베네딕도회 성요셉수도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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