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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악보 외 4편
김명아
1961년 전남 여수 출생, 2009년 「시와산문」 등단, 시집 「붉은 악보」 「물 속의 잠」, 제3회 「한국녹색문학상」 수상.
출항을 기다리는 여수항 오동도등대 마을에서
첫 불을 밝히고 화물선 모여들고
썰소리 돌아오는 바다를 듣는다
신발코는 모두 집 쪽으로 돌려놓은
손길을 따라 지금도
집집마다 불을 밝히고 있다
불빛을 따라 해가 미끄러져 들어온다
어딘가에서부터 나를 깨우는
곁에 앉아 토닥이는 손짓이 있다
몇 해가 흘렀을까
눈길 닿는 곳마다 솟대 세우고
비와 천둥을 부르며 감겨든다
차오르는 목울대, 웅크린 어둠살 너머
붉은 해가 떠오른다
법당에 나비가 날아들었다
지난여름 햇살이 꽃살문으로 출렁인다
밤낮이 갈마들고 향초는 불을 물고
솟아오르듯 번진다 나비가 좇던 악보
망설이다 삼켜버린 음표, 붉은 악보가
하늘에 펼쳐졌다 내려놓은
그러나 달려온 얼굴이다
눌러주세요
무엇을 보고 싶을까요 시스템이 완성되었어요 눌러주세요 반자동의 의미는 아시겠죠 가끔은 선택이 필요하거든요 문이 열렸네요 거리가 보여요 살랑살랑 치마가 다리를 올리고 두터운 점퍼는 골목으로 숨어드네요 두 남자가 기타를 메고 노래하며 코믹멘트를 보네요 거리공연은 그물을 던져 팔을 잡았어요 한바탕 웃고나자 입벌린 검은 배낭이 지폐를 먹고 싶어 해요 이웃에 봄이 쓱싹 칠해지길 바라며 풀어진 나사를 조이고 방향을 바꿔봐요
휘파람을 불며 용달차가 신나게 달려요 찰랑거리던 햇살도 빤히 쳐다보네요 선이 그어져 있어요 언제부터인지 둔중한 무게가 비켜서고 싶어 해요 가지각색의 안경을 써보고 싶으세요 거꾸로 가는 시계도 있고 고장난 시계도 있어요 가보지 못한 곳을 볼 수 있는 기회죠 눌러주세요 안면찰과상을 입은 자존심이 울고 있어요 나오지 못한 자국이 간헐천을 만들고 있는 거예요 융단폭격을 맞은 곳도 있네요 흉터를 핥으며 선잠 깨우는 손을 잡아요 바다 너머 배꼽 내놓은 섬이 보이네요 재잘거리는 웃음소리, 아침을 여는 소리예요 단추를 채우고 기린 목을 타고 올라 커다란 눈으로 보고 싶네요
한 번 더 눌러주세요 보이지 않거든요 창가에 앉은 놋그릇에 달이 보여요 감사해요 맑은 달은 꿈을 꾸고 있네요 눈맞춤을 하기 위해 다리를 놓아야겠어요 물처럼 흘러갈 수 있겠죠 같은 창에 서 있는지 모르겠어요 바다가 보이기 시작하네요
합니다 사이에 팝니다
웃음이 남아 있는 볼트를 사고 화장이 지워진 너트를 팔았다 꿈이 깨는 날 톱니바퀴는 필요 없었다
짧은치마를 팔고 긴 다리를 샀다 배꼽티를 팔 때 배꼽을 사고 귀마개를 팔 때 귀를 샀다 안경을 팔면서 눈을 샀고 마스크를 팔 땐 입을 샀다 그러나 긴 다리를 살 때 발은 사지 못했고 배꼽은 사면서 말라버렸고 귀를 살 땐 들리지 않았다 눈을 살 땐 보이지 않았고 입 속에는 이가 없었다
바늘 없는 괘종시계가 울린다 오후 1시, 서둘러 문을 연다 ‘파마세일 합니다’ 등판을 지고 물결파마가 출렁이고 베이비파마가 기어 다녔다 눈썹을 짧게 심고 깜박이는 눈꺼풀 위로 ‘속눈썹 합니다’ 간판은 머리를 자르고 있다
안개꽃 한 다발을 안고 4D 영화를 볼 때 흔들리는 의자에 앉았다 타는 냄새 속에 물방울이 튀었고 안경은 벗지 못했다 물 묻은 선잠을 자다 자리에서 일어나 건강만을 판다는 간판을 내걸었다 잠가지지 않는 문을 열고 배달된 시래기뭉치를 볶아 비빔밥을 만들었다
접시를 깨트리며 냄비를 팔고 찌그러진 냄비를 펴며 접시를 팔았다 냄비우동에 조개를 빼고 시장을 오가는 행인의 다리를 걸고 젓가락을 들었다 멈췄다 불어터진 면발을 세며 귀퉁이로 몰려드는, 건너야 할 신호등을 보고 횡단보도를 늘리며 넘어졌다
산청 금수암(錦繡庵)에서
몇 번이나 넘어지며 갔을까 깊은 밤을 걷고 또 걸었다 부릅뜬 눈으로 잠든, 지리산 너머에 떠나온 자리와 떠나간 사람들을 재웠다 겨울은 빨리 찾아왔고 별은 쏟아지고 잠들지 못했다 삭풍에 닫힌 문 끝에 앉아 흔들리는 풀을 뽑아내고 돌탑을 쌓는다 법당(法堂) 계단 오를 때마다 다리를 절곤 했다
도착한 화두(話頭) 찾아 산을 넘고 있다 달아난 귀가 보고 싶었던, 얼음 박힌 눈이 듣고 싶었던, 만삭이 된 입에서 토해낸 말들이 절을 했다 법당에 쏟아낸 말들이 쌓여갔다 무릎이 없어지고 불시착한 혀가 녹아 내렸을까 아침을 깨우는 예불소리 들린다 내려놓은 자리마다 햇빛이 몸을 바꾸고 스님 밥상에 연꽃이 피었다
벽
벽을 넘는다 안팎이 모두 벽이다 커다란 입을 가진 벽 뒤엔 또 다른 창살이 있다 줄자를 가지고 토막 남 밤을 건널 때마다 어깨 통증이 왔다 질주하는 회전목마에서 뛰어내렸다
흐르는 강은 낙관을 허락하지 않았고 모래 한 줌 빌려주며 단단한 이야기를 쓰게 하고 실어증을 앓았다 감나무에 걸린 얼룩진 얼굴이 떨어지고 밤낮으로 보안손님이 찾아왔다 묶어둔 저녁은 뒤꿈치가 없다
분침과 시침이 떨어져나가고 표류하는, 달려드는 벽 앞에서 연결통로는 목이 짧았다 크기가 다른 창마다 불빛이 새어나오고 목청을 높였을까 오후 다섯 시의 그림자가 숨을 죽인다 밀어내는 벽 앞에서 배인 자리는 잇몸을 드러냈고 가시 박힌 손이 벽을 넘고 있다
그것을 아는지 외 4편
이를테면 들쑤신 개미집이 잿더미로 변하고 흘러가던 강물이
얼어붙은 수면위로 나뒹구는 돌멩이를 잠든 거울에 던졌는지
그러니까 가장 오래된 나미브사막에서 수혈된 붉은
사막의 속살을 바람의 채찍 받으며 타조가 달리고 있는지
어쩌다 질주 할 수 없는 유목민의 밤하늘을
타조 깃털 두르고 포식자의 눈을 피해 걸어 나올 수 있는지
어디쯤에서 먹구름 몰려오고 기다리는 우기가 찾아와
깃털로 알을 품고 일어나 부화된 숨소리 들을 수 있는지
누군가 찾는 이 있어 모퉁이 가로등 기침 하고 벨이 울리고
머뭇거리다 숨어드는 헛꽃을 부르는 신호 들을 수 있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늦가을 빗소리에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북소리 들으며 주저앉은 횡단보도를 깨울 수 있는지
언제부턴가 불씨 나누던 땅의 눈꺼풀이 감기고
심장에 도착한 마지막 얼굴 위해 무릎 내어줄 수 있는지
아직도 창턱 넘어 반사된 달빛넝쿨이 새벽이슬에 숨을 불어
넣고 터널 속을 빠져나오는 뒷모습 비춰주고 있는지
그렇게 얼음기둥 세우고 벼랑으로 내딛던 웃자란 망설임 몰려와
여름밤 폭죽소리 한가운데 집 한 채 세우는지,
더블베이스 앙상블
- 바시오나 아모로사
더블베이스가 비행을 시작한다
기댄 듯 붙잡은 듯 흔들거린다
가장 낮은 곳으로 춤추듯 호흡하며
수직의 현을 탔다 거장의 팔은
악기를 안고 도약하듯 해와 달을 넘나들며
천천히 변주된 선율을 연주했다
짧고 굵은 활이 현을 그었다 떼었을까
울림통은 바흐의 하프시코드 협주곡을
들려주었고 벌판에 중후한 몸통으로
키다리신사는 섬세한 귀를 열었다
피치카토 주법으로 코끼리를 데려오거나
묵직한 저음의 발자국이 현 위에서
동굴 속으로 사라지기도 했다
마지막 악장이 끝날 때까지
관객과 호흡하며 치닫던 더블베이스는
박수를 녹여냈을까 휘파람을 반죽한
달의 눈물은 건기의 물웅덩이를 채우고
저물녘의 징검다리를 건너며
장거리 전화를 붙들고 푸른 문으로 사라졌다
열일곱 그림자
잔설을 품고 걸어가는 동안 몰이꾼은
땅을 들춘다 늦봄 산책길에 만났던 맥문동,
보랏빛 촛대가 점화를 시작할 때
먹구름이 몰려왔다 전기뱀장어 꼬리를 벗기던
여름은 그림자를 늘리고 외출을 서둘렀다
달리다 머뭇거리기를 몇 번, 가을빛은
불법으로 거미줄을 쳤다 바람계곡을 따라
환청이 들린다 확성기를 들고 따라 다닌다
열일곱 살이 다가올수록 증상은 심해졌다
모국어를 잃어버렸고 사각지대에서
신분증이 없다 철부지였던 스위치가 꺼졌다
머릿결 타고 내리는 진눈깨비,
틀어진 등뼈를 세울 수 없는 그림자가 되었을까
헝클어진 밤을 나르며 잔등을 켜둔다
수런거리는 미끄럼틀
수런거리는 미끄럼틀 타고 내려온다
새총으로 둥지가 휩쓸려가고
귀가를 서두른다 되풀이되는
입맞춤은 흉터를 짓누르고 곤두선
머리카락은 전해지는 물살에 울부짖는다
그 후 병정놀이는 깃발을 앞세워
동해로 떠났고 언제 올지 모른다고 한다
발돋움하는 시선, 응시하는 바다가
출렁이고 한번 쯤 가야할 곳이라고 했다
바다의 자궁 속에서 잉태한 햇덩이를
머리에 이고 간다 월식이 다가오고
투명한 허벅지에 맞닿는 제비꽃 한 움큼
감아돈다 물빛은 어지럽고
웅덩이는 깊다 수거하는 지난날들,
잠복해 있는 거리로 달빛을 삼키고
꼬리지느러미 흔들며 모여든다
입천장에 매달려 기웃거리던 외눈박이
박쥐, 청진기 갖다 대고 두 눈을 감는다
읊조리는 귀띔 들으며 덧칠을 하고 있다
꽹과리 치며 벌집을 찬다
이면지를 뒤적인다 기도의 첫 구절이 된
활자들의 자맥질, 출장 나온
목젖은 술렁이는 사물함에
빗살무늬 그려놓고 체중계를
찾았다 분꽃 입술의 신입사원,
새털구름 엘리베이터 속에서
안내방송을 듣는다 무한 반복되는 인사,
마주친 순간마다 복구되고 삭제되는,
코끝에 머물다 다가서려면 문이
닫혔을까 벽의 등짝은 넓었고
송곳니는 번식중이다 꽹과리 치며
벌집을 찬다 웅성거리는
후유증, 예고편은 상영 중이고
거울 속 레시피가 지워진다
한 사람의 땅을 열고 활화산이
솟구친다 산봉우리 삼키고 협곡을 지나
동굴을 뒤덮고 크라잉게임을 한다
불의 옷을 입고 풀리지 않는
소문을 젓는다 찢어진 고막,
비상구 앞에서 탈출구는 없었다
악천후는 도돌이표로 흘러내리고
꺾인 허리가 손금을 읽는다
시간의 발자국을 따라서 간다
매일 밤 벗어놓은 하루를 개어 뒤돌아보느라 목이 아프고 또 다른 오늘을 준비하느라 허리 아플 때가 많았다. 아침이 오는 거리는 바람이 앉은 자리였으며 사각지대에 빛이 있어 너울거리는 먼지가 보이는 시간이었다. 열대야가 지나야 다시 피어나는 아침을 맞듯 스스로의 중재자가 되어본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서로 끌어안음이 없으면 관계는 성립되지 않는다. 그 끌어안음으로 오늘도 귀가를 서두르고 또 기다리며 조각잠을 자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안다.
언젠가 “고슴도치의 선택”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너무 추워 껴안으니 서로 상처가 났고 떨어져 있으니 추위에 견디기 힘들어 결국은 가시를 참고 받아들임으로, 가벼운 상처를 감내함으로써 뭉칠 수 있었고 그 온기로 함께 살아남았다는 얘기였다.
뽑으려 하니 모두 잡초였지만 품으려 하니 모두 꽃이었다는 나태주 시인의 풀꽃처럼 세상 밑바닥에 내민 풀꽃의 얼굴들, 바람에 흔들리는 그들의 향기가 전해지길 바란다. 우리는 인큐베이터의 이른둥이처럼 낯선 삶을 같이 품어주고 등 다독여줄 따뜻한 손길을 기다린다. 키가 자라지 못한 여름을 보내며 예측불허의 미래로 건너가기 위해 오늘도 맞바람을 맞는다. 부유하고 뒤척이는 목소리 잘 들을 수 있길 바라며 밤마다 열꽃의 물고기가 튀어 오를 수 있도록 뜨거운 모래톱을 기어이 걸어가고자 한다.
삶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경험해야 할 신비라고 했다. 스스로의 작은 생각의 차이가 내면으로부터 축복의 불씨를 키울 수 있다는 것을 믿으며 앞으로 계속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묻는다. 이를테면 잠든 거울을 닦으며 깨운다던지, 그러니까 시의 수혈을 받아 그림을 그리고 빛의 색채로 시를 쓸 수 있길 바라며 길목마다 피돌기 시키는 일을 계속하고자 한다. 타인의 시선에 머물지 않고 부화된 숨소리로 반복에 의해 손이 만드는 그일, 시(詩)라는 집 한 채 세울 수 있길 기도한다.
“독서는 앉아서 하는 여행이고 여행은 걸어 다니면서 하는 독서다”라고 했던가 시의 여행길에 올라 또 다른 나를 만나고 그 너머의 다양한 삶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변주된 리듬으로 연주 할 수 있길 간절히 바래본다.
모든 시는 새로운 사람이야기다
이동희(시인)
1985년 「심상」 등단. 시집 「빛더듬이」, 「사랑도 지나치면 죄가 되는가」, 「은행나무 등불」, 「벤자민은 클래식을 좋아해」 등 다수. 평론집 「문학의 즐거움 삶의 슬기로움」, 「문학의 두 얼굴」 외 다수.
1965년 소설 『분지』 사건으로 재판을 받은 남정현 작가가 판사로부터 “문학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이에 남 작가는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남 작가의 대답이 판사의 의중에 성문법이 담아낼 수 없는 인문주의적 성찰의 단서를 주었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래도 이 사건에 대하여 검사의 7년 구형에 판사는 “죄는 인정하지만 선고는 유예한다”고 판결했다고 한다. 군사독재의 엄혹했던 시절에 판사가 이만큼이라도 염량을 보인 것은 앞의 남 작가의 답변에서 일말의 인문학적 성찰을 보인 것은 아닌지, 무망한 기대지만 일말의 추단이라도 해보고 싶은 심정이다.
실로 문학적 진실을 말할 때 무엇으로 대답할 수 있을까? 문학 작품이 무엇을 담아내야 비로소 진실의 반열에 설 수 있을까, 자문해보면 막연한 경우도 없지 않다. 실제로 문학에 담겨야 할 진실의 정체를 혼돈하거나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갈만한 작품들을 더러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할지라도 문학작품이 지향해야 할 정도는 남 작가의 진술이 아니더라도 결국은 ‘사람’과 관련된 측면을 외면할 수 없다.
문학 작품은 결국 세상[사회]와 인간[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사람이 세상과 맺는 관계 양상을 드러내는[표현] 방법이다. 드러내는 것만으로 진실에 다가설 수 없다. 그런 드러냄이 필수적인 방법론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면, 다른 축에는 인간과 사회에 대하여 ‘철학적 사유’와 ‘미학적[예술적] 감동’이 뒷받침될 때, 비로소 진실의 반열에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문학 작품이 진실의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독자에게 세상과 인간의 관계망에 대하여 깊이 있는 성찰을 끌어내어야 하며, 동시에 미학적 감동을 안겨줘야 가능한 노릇이다. 이렇게 두 측면이 드러내는 문학의 세계는 결국 ‘사람의 존엄성’을 부각시키려는 작가의 노력과, 그런 노력에 대한 독자의 반응이 일치되는 선에서 비로소 ‘문학적 진실’은 성립될 수 있을 것이다.
한 작가를 그가 쓴 작품으로 7년 동안이나 영어(囹圄)의 몸이 되게 해달라는 검사의 구형을 판결하면서, 그 판사가 문제가 된 작품 - 『분지』를 읽어봤음에 틀림없을 것이다.(당연히 읽어봐야 마땅하며, 만약 읽지 않았다면 그 자체가 또 다른 범죄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문학 작품[소설]을 읽는 과정에서 판사 역시 작가가 장치한 [인간에 대한]철학적 사유의 기회를 가지게 되었을 것이며, [사회에 대한]인간의 행위가 어떤 미학적 의미와 감동으로 오는지 실감하고도 남았을 것이다.(이런 추단마저 엄혹했던 당대적 정치상황으로 봐서 무망할 법하지만, 너무도 안타까운 마음에서 추론해 보는 것이다.)
이렇게 봤을 때, 문학적 진실이 따로 있지 않다. 문학 작품은 ‘깊은 사유’와 ‘예술적 감동’이라는 두 축에 의지해서 독자의 정신세계와 심미안에 일대 파문을 일으키는 행위와 다름이 없다. 이런 견해는 김명아 시인의 시를 일독하면서 깊어졌다.
*모든 시는 그림이다.
시로써 진실을 드러내는 방법은 여러 가지일 수 있다. 언어가 유일한 표현 수단인 시로 그림[心象-image]을 그려낸다는 것은 이미 고전적 수법이다. 그럴지라도 그 ‘마음의 그림’이 앞에서 언급한 문학적 진실을 담아내고 있느냐가 열쇠다.
이를 테면 다음 작품에서 보여주는 김명아 화법[畫法-詩法]은 그런 차원에서 유의미한 성과를 보여주고 있다.
출항을 기다리는 여수항 오동도등대 마을에서
첫 불을 밝히고 화물선 모여들고
썰소리 돌아오는 바다를 듣는다
신발코는 모두 집 쪽으로 돌려놓은
손길을 따라 지금도
집집마다 불을 밝히고 있다
불빛을 따라 해가 미끄러져 들어온다
어딘가에서부터 나를 깨우는
곁에 앉아 토닥이는 손짓이 있다
몇 해가 흘렀을까
눈길 닿는 곳마다 솟대 세우고
비와 천둥을 부르며 감겨든다
차오르는 목울대, 웅크린 어둠살 너머
붉은 해가 떠오른다
법당에 나비가 날아들었다
지난여름 햇살이 꽃살문으로 출렁인다
밤낮이 갈마들고 향초는 불을 물고
솟아오르듯 번진다 나비가 좇던 악보
망설이다 삼켜버린 음표, 붉은 악보가
하늘에 펼쳐졌다 내려놓은
그러나 달려온 얼굴이다
― 김명아 「붉은 악보」 전문
이 작품에는 사람의 삶이 음악일 수 있고, 그 음악이 빛으로 승화되면서 사람살이의 모습들이 오케스트라처럼 울려 퍼지는 한 폭의 대형화를 완성해 내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붉은’이라는 형용사가 그려내는 색채 감각과 ‘악보’라는 시각적 형태가 그려내는 청각적 울림의 형상들이 묘하게 어울리면서, 사람살이의 모습들을 합주해 내는 느낌이다. 흔히 공감각이라는 말들을 시에 적용시키지만, 그런 용어가 아니더라도 사람살이의 모습들은 본래부터 공감각적 형태로 존재할 뿐이다. 따로 떼어서 공감각이라는 말을 하지 않아도, 이 작품이 그려내는 ‘마음그림’은 이미 소리와 색채가 조화되어 울리는 교향곡의 세계에 접근하고 있는 셈이다.
출항을 예비하는 어촌 마을에 ‘첫 불’이 밝혀지고, ‘집집마다 불을 밝히고 있다’. 이 불이 노래하는 색채는 ‘신발코는 모두 집쪽으로 돌려놓은’ 것처럼, 어부들의 무사귀환을 비는 소망의 노래가 될 것임은 분명하다. ‘만선의 기쁨’ 따위를 ‘밝힌 불’에서 찾는 독자가 있다면 문학 작품의 진실이 무엇을 담아내야 한다는 것에 대한 주의가 부족한 셈이다. 결코 ‘만선’에 앞선 ‘귀선’의 무게가 담고 있을 ‘사람살이’의 진면목을 노래하고자 함이다.
왜 붉은 악보인가? ‘붉은’이 은유하고 상징하는 밝고 희망차며 상서로운 기대와 기도의 심정이 함축된 세계다. 배 한 척의 안전은 망망대해에 비하면 ‘칠성판’ 한 널빤지에 불과하다. 그 널빤지에 의지해서 부귀영화를 꿈꾸는 어부는 없다. 아니 없어야 한다. 그저 가족들의 하루 먹을거리에 값하면 그것이 붉은 해 덕분이며, 즐거운 삶의 노래가 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붉은’은 상반된 두 세계의 함축성을 예비하고 있는 셈이다.
앞에서 예비한 상반된 세계를 2연에서 암시한다. ‘솟대 세우고/ 비와 천둥을 감겨’들며, ‘웅크린 어둠살 너머’로 비로소 “붉은 해가 떠”오르고야 만다. 이것이 어촌-어부들이 기원하는 사람살이의 진실이다. 이 짓을 담보하기 위해 어촌의 집집마다 ‘불을 밝혔으며’ 그 불빛을 따라 ‘해가 미끄러져 들어’오지 않겠는가! 사람살이의 풍경이 비로소 새로운 전운을 맞는다. 미끄러져 들어온 것은 만선을 이룬 어선이 아니라, 바로 ‘해’가 된다.
모든 항해가 순항은 아니다. 모든 어선이 순풍을 만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사람살이의 노래는 언제나 비가悲歌를 준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법당에 날아든 나비’는 누구의 화신인가? ‘나비가 좇던 악보’는 어디에서 노래를 잊었는가? ‘망설이다 삼켜 버린 음표’는 왜 끝내 노래가 되지 못했는가? ‘붉은 악보’는 왜 ‘하늘에 펼쳐졌다 내려놓은’ 채인가?
이 모든 의문과 질문에 대한 대답이 바로 ‘그러나 달려온 얼굴’이다. 출항의 기쁨이어야 할 뱃노래[붉은 악보]가 어느덧 비보를 듣고 달려온 잃어버린 가족들의 애틋한 ‘얼굴’을 담은 ‘비가悲歌’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그래서 인생이다. 언제나 순풍에 돛을 달고, 만선의 기쁨을 노래하면서 귀항하는 것만이 인생길은 아니다. 그래서 사람살이의 기쁨을 노래해야 할 ‘붉은 악보’는 어느덧-순식간에 사람살이의 비극을 그려내는 ‘슬픈 악보’로 바뀔 수 있어서 인생그림이 되는 것이다.
그런 과정을 담아내는 한 편의 시는 그래서 오감을 통해서 느낄 수밖에 없는 사람살이의 종합적 세계를 그려낼 뿐이다. 그것을 기쁨의 뱃노래를 부르거나, 혹은 상실의 아픔을 아로새긴 얼굴이거나, 그런 선택과 공감은 순전히 독자의 몫일 따름이다.
다만, 눈물 젖은 국밥을 먹어본 인생만이 ‘붉은 악보’가 담아내고자 한 인생 반전의 비극적 정황을 사유의 길목에 두고자 할 것이다.
*모든 시는 질문이다.
문학은 인생의 해답을 제시하는 글쓰기가 아니다. 문학 작품은 인생의 길에 놓인 정답지가 아니다. 다만 문학적 말하기[글쓰기]는 무엇이 알고 싶은 건지, 질문의 길안내 역할일 뿐이다. 또한 문학적 글쓰기[말하기]는 시간 낭비벽이 있는 이들을 위한 해설서로 값할 뿐이다. 그래서 소설은 밖[객체-사회]를 안[주체-자아]로 끌어들여 질문하고 해설하려 하며, 시는 안[주관-자아]를 밖[객관-사회]를 끌어내어 질문하고 해설하려 할 뿐이다.
그런 질문과 해설을 따라가는 독자가 이르는 종착점이 ‘깊은 사유’와 ‘미적 감동’에 이른다면 그것으로써 문학은 제 역할을 다한 셈이다.
김명아 시인의 신작 중에 질문의 방식으로 인생을 들여다본 작품이 눈길을 끈다.
이를테면 들쑤신 개미집이 잿더미로 변하고 흘러가던 강물이
얼어붙은 수면위로 나뒹구는 돌멩이를 잠든 거울에 던졌는지
그러니까 가장 오래된 나미브사막에서 수혈된 붉은
사막의 속살을 바람의 채찍 받으며 타조가 달리고 있는지
어쩌다 질주할 수 없는 유목민의 밤하늘을
타조 깃털 두르고 포식자의 눈을 피해 걸어 나올 수 있는지
어디쯤에서 먹구름 몰려오고 기다리는 우기가 찾아와
깃털로 알을 품고 일어나 부화된 숨소리 들을 수 있는지
누군가 찾는 이 있어 모퉁이 가로등 기침하고 벨이 울리고
머뭇거리다 숨어드는 헛꽃을 부르는 신호 들을 수 있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늦가을 빗소리에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북소리 들으며 주저앉은 횡단보도를 깨울 수 있는지
언제부턴가 불씨 나누던 땅의 눈꺼풀이 감기고
심장에 도착한 마지막 얼굴 위해 무릎 내어줄 수 있는지
아직도 창턱 넘어 반사된 달빛넝쿨이 새벽이슬에 숨을 불어
넣고 터널 속을 빠져나오는 뒷모습 비춰주고 있는지
그렇게 얼음기둥 세우고 벼랑으로 내딛던 웃자란 망설임 몰려와
여름밤 폭죽소리 한가운데 집 한 채 세우는지,
― 김명아 「그것을 아는지」 전문
이 작품은 아홉 개의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질문만 있지 대답-정답-해답은 없는 글쓰기[말하기]다. 이 질문을 대하면서 다음과 같은 독자의 질문도 함께 던져진 셈이다.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왜 묻는가?”이다.
매우 재미있는 발상이요, 질문법이다. 가만히 뜯어보노라면 이런 질문법이 담고 있을, 질문하는 자와 질문을 받는 자의 관계가 결국은 순환관계에 있음을 눈치 챌 수 있다. 질문하는 자가 곧 질문을 받는 자이며, 질문을 받는 자가 곧 질문하는 자이다. 이때 ‘자[者]’에 ‘인간-인류’를 대입하면 왜 질문자와 질문을 받는 자가 동일인이지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순환관계 속에 놓인 자[인간-인류]는 자신의 옹색한 처신에 대한 깊은 사유를 시작하는 효과를 덤으로 얻을 수 있다.
또 하나는 질문을 던지는 은유적 진술이 매우 개성적이라는 점이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문학적 진실을 획득하는 데 기여하는 절반의 효과는 ‘미적 감동’이라고 했다. 미학적 공감은 곧 ‘미학적 표현’에서 건질 수 있다. 궁금한 것의 대상을 수식하는 언어적 장치[혹은 비유적 진술]들이 독자의 심미적 현을 건드려주기에 충분하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들쑤신 개미집이 잿더미로 변하고 흘러가던 강물이/ 얼어붙은 수면위로 나뒹구는 돌멩이를 잠든 거울에 던졌는지”와 같은 진술은 상징화된 세계들을 은유의 맥락 속에서 자유롭게 약동하도록 풀어놓은 형국이다. 세계[객체]를 인식하는 자아[주체]의 타성화 된 인식방법에 경종을 울리는 셈이다.
우리는 항상 보는 대로만 보려하고, 들리는 대로만 들으려 하는 타성적 존재다. 그런 인식방법에 길들여짐으로써 보이지 않는 실상을 외면하게 되고, 들리지 않는 생명의 소리를 무시하게 된다. 나[자아]는 이렇게 보고 있는데, 너[타자]는 어떻게 보고 있는가, 질문함으로써, 우리의 세계 인식에 대한 고정관념에 파열음을 내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자극은 독자의 사유체계에 일종의 경종이 되어 ‘잠든 겨울’을 맞을지도 모르는 위기 앞에서 삶의 자세를 새롭게 성찰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의 진술 방식이 보여주는 또 다른 특징이 주목할 만하다. 아홉 개 질문은 아홉 개의 연을 이루며 진행된다. 각 연의 서두는 모두 ‘부사적 용어’들로 시작하고 있으며, 각 연의 끝은 ‘~(있-었)는지’로 멈춰 있어 종결어미가 생략되어 있다. [아홉 개의 연=아홉 개의 질문]이 모두 같은 형태로 되어 있다.
이런 특징을 알기 쉽게 도식화 하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질문[1연] “이를테면……/ ……던졌는지 [그것을 아는지]”,
두 번째 질문[2연] “그러니까……/ ……있는지 [그것을 아는지]”,
세 번째 질문[3연] “어쩌다……/ ……있는지 [그것을 아는지]”,
네 번째 질문[4연] “어디쯤에서……/ ……있는지 [그것을 아는지]”,
다섯 번째 질문[5연] “누군가……/ ……있는지 [그것을 아는지]”,
여섯 번째 질문[6연] “그럼에도……/ ……있는지 [그것을 아는지]”,
일곱 번째 질문[7연] “언제부턴가……/ ……있는지 [그것을 아는지]”,
여덟 번째 질문[8연] “아직도……/ ……있는지 [그것을 아는지]”,
아홉 번째 질문[9연] “그렇게……/ ……있는지 [그것을 아는지]”,
이런 진술방식은 결국 인간의 존재 방식에 대한 동어 반복적인 질문인 셈이다. ‘인간은 질문하는 존재’라는 문학적[철학적] 정의가 진리라면, 과연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왜 물어야 하는가?”를 시적 정서에 의지해서 던지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서 ‘그것을 아는지’는 이 작품의 제재이자 제목으로 기능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지칭하는 진술 내용은 “……/ ……”에 담겨 있는 셈이다. 진술의 효용성을 살리면서 동시에 인간 삶의 전 방위적 사유의 깊·넓이를 함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거칠게 질문의 항목을 채우자면,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심지어 자신이 자신에게] 끊임없이 묻고 또 물어야 하는 ‘존재’이며, 그 존재의 ‘이유와 방식’에 대하여 질문함으로써, 우리의 삶을 심미적으로 깊이 있게 성찰할 수 있게 한다는 대답이 아홉 개 은유의 맥락 속에, 동어 반복적 패턴으로 던져지고 있는 셈이다.
*모든 시는 새로움의 새로움이다.
“한 시인이 살아남을 수 있는 첩경은 결국 기존의 시인과는 다른 ‘새로움’을 확보하는 일이다. 시의 새로움은 시적 대상이나 주제 혹은 표현 방식의 일신에서 이루어지는데, 구체적으로 문명이나 사상, 서정, 형식(언어), 장르의 차원에서 실현될 수 있다.”(이형권『공감의 시학』) “모든 창작은 결국 새로운 형식의 창작이다.”는 말이나, “표현 형식의 새로움이 내용을 강조하고 미학적 발견을 새롭게 한다.” 등의 견해는 창작이 결국은 새로움의 새로움을 강조하는 주장으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다 할 수 없을 것이다.
‘새로움의 새로움’이 결코 낯선 말이 아니다. 현대 시학의 핵심 개념이 된 ‘낯설게 하기-defamiliarization’나, 앞에서 시를 정의하면서 언급했던 ‘주관-주체의 객관화’ 등도 결국은 ‘새로움의 새로움’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동일한 개념 군에 속한다 할 것이다.
김명아 시인의 작품에서 ‘새로움의 새로움’ 특징을 언급하기에 적합한 작품은「더블베이스 앙상불 -바시오나 아모로사」다.
더블베이스가 비행을 시작한다
기댄 듯 붙잡은 듯 흔들거린다
가장 낮은 곳으로 춤추듯 호흡하며
수직의 현을 탔다 거장의 팔은
악기를 안고 도약하듯 해와 달을 넘나들며
천천히 변주된 선율을 연주했다
짧고 굵은 활이 현을 그었다 떼었을까
울림통은 바흐의 하프시코드 협주곡을
들려주었고 벌판에 중후한 몸통으로
키다리신사는 섬세한 귀를 열었다
피치카토 주법으로 코끼리를 데려오거나
묵직한 저음의 발자국이 현 위에서
동굴 속으로 사라지기도 했다
마지막 악장이 끝날 때까지
관객과 호흡하며 치닫던 더블베이스는
박수를 녹여냈을까 휘파람을 반죽한
달의 눈물은 건기의 물웅덩이를 채우고
저물녘의 징검다리를 건너며
장거리 전화를 붙들고 푸른 문으로 사라졌다
― 김명아 「더블베이스 앙상블 - 바시오나 아모로사」 전문
굽은 참나무를 펴는 힘이 음악에 있다. 음악은 어쩌면 시보다 더 직정적直情的이며, 시보다 더 은유적이다. ‘클래식음악=순수음악’이란 등식이 성립한다면, 시보다 더 순수한 인간의 성정에 직접적으로 파고들어오기를 주저하지 않는 예술 형식이 바로 음악이라고 생각한다. 음악적 감동이 주는 ‘미학적 추체험’을 어찌 시가 주는 ‘미학적 감동’과 동일 선상에 놓을 수 있으랴![여기에 대해서는 유보적 입장을 가지고 있지만, 논의의 전개를 위해 일단 이렇게 양보하고 본다!]
그러나 말이다. 아무리 순수음악이 주는 직정적 감동의 질량이 막중하다 할지라도, 음악은 일단 ‘음악적 진실’인 ‘철학적 사유’의 측면에서 시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음악이라고 해서 철학적 깊이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음악은 사유의 깊이를 건너기 전에 반드시 ‘감각’의 깊은 강을 건너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는 말이다. 감각-감정의 강을 건너오면서 ‘사유’의 노 젓기를 소홀히 하거나, 망각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시는 그렇지 않다. 사유의 숲에 든 다음, 감각-감정의 늪을 건너게 되어 있다는 점에서, 시와 음악이 사유와 정감을 추체험하는 순서에서 차이가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생각해 본다. ‘시의 옷을 입은 음악’이라면 어떨까? 아니 시의 구성 요소로서의 음악성[리듬-운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클래식음악에 시의 옷을 입혀서 ‘사유의 깊이-미학적 감동’을 그려낸다면 어떻겠는가, 하는 발상 말이다.
이런 발상에 대하여 김명아 시인은 위의 작품으로 응답한다. 음악의 몸에 시의 옷을 입힌 정도에서 벗어나, 음악의 육체가 시의 영혼을 만나 비로소 온전한 생명체로 승화된 느낌이다. 시적 화자의 감상안이 있어 비로소 음악은 ‘새로움의 새로움’이 되어 인구에 회자되며, 사라지지 않는 음의 진동을 유지할 수 있게 된 셈이다.
사실 시의 표현 수단이 매우 제한적이고 옹색하다고 불평들을 한다. 이렇게 본다면 음악 예술이야말로 가장 옹색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기계-기술적 혜택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소리예술인 음악은 연주와 동시에 허공으로 사라지는 비극적 운명을 타고났다.[이에 비해 시는 언어라는 영원불멸한 인간됨의 도구를 표현수단으로 하지 않는가!] 그런 소리 예술인 음악에 시의 영혼을 입힌 감상안이 있어 ‘음악의 시’가 아니라, ‘시의 음악’이라는 새로움을 선보이고 있는 것이다.
필자도 베를린 필 하모닉-열두 첼리스트들이 연주하는 CD를 소장하고 즐겨 듣는다. 이 음반을 들을 때마다 느끼는 바이지만, 그 육중한 저음들이 서로 어우러지면서 울려내는 진동에 크게 전율하곤 한다. 이에 비해 오케스트라를 구성하는 악기 중에서 가장 거대한 [몸집의]육중함과 오케스트라의 협화음에서 차지하는 저음 파트의 역할을 생각할 때, ‘더블베이스’만으로 구성된 앙상블의 연주가 특별하고, 그 효과가 매우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필자는 김명아 시인의 이 작품을 통해서 그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었다. 아니 해소 정도가 아니라, 직접 앙상블의 연주를 감상했을 때보다 더 깊은 ‘생각의 단서’와 더 진한 ‘공감의 아름다움’을 공유할 수 있었다.
“더블베이스가 비행을 시작한다”고 그 연주의 시작을 알린다. 그 육중한 몸매가 비행飛行하려면 얼마나 힘찬 발진의 에너지를 내공해야 염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가히 짐작할 만하다. “피치카토 주법으로 코끼리를 데려오거나/ 묵직한 저음의 발자국이 현 위에서/ 동굴 속으로 사라지기도 했다”면서 더블베이스만으로 이루어내는 앙상블의 미학을 형상화한다. 그러니까, 허공으로 사라지고야 말 운명인 더블베이스의 몸매를 시의 영혼으로 살려내고 있는 셈이다.
그런 앙상블에 노출된 시적 정서가 도달한 세계가 있어 비로소 ‘음악의 시’가 아니라, ‘시의 음악’으로서 새로움의 가능성을 보인다. “달의 눈물은 건기의 물웅덩이를 채우고/ 저물녘의 징검다리를 건너며/ 장거리 전화를 붙들고 푸른 문으로 사라졌다”고 결구한다.
“우리가 왜 시를 읽는가?”라는 질문은 당연한 것처럼 여긴다. 그러나 “우리가 왜 음악을 듣는가?”라고 질문하면 웬 생뚱맞은 질문이냐며 힐난을 듣기 십상이다. 이를 바꾸어서 “우리가 왜 예술을 가까이 해야 하는가?”라고 묻는다면, 아마도 모든 사람이 솔깃한 대답을 기대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왜 예술을 감상하며 우리 삶의 가까이에 두어야 하는가? 이런 우문에 대하여 김명아 시인은 이 작품의 결구로 적확한 응답을 마련한다. ‘달의 눈물[예술적 감동]’은 ‘건기의 물웅덩이[메마른 인간의 성정]’을 채우기[위로하기] 때문이다. ‘저물녘의 징검다리’를 건너본 적이 있는가? 하루의 노동을 끝내고, 평안과 사랑이 깃든 곳을 향하는 ‘귀갓길의 행복’에 목말라 하는가, 아니면 그런 행복에 몸서리쳐 본 적이 있는가, 어느 쪽이라도 상관없다.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음악은 굽은 참나무를 펴듯이 우리를 다독이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이 삶의 감동이 주는 사유의 파장을 나 혼자만 간직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멀리 있는 사랑하는 사람이나, 잊을 수 없는 누군가에게]장거리 전화를 걸면서[소통하면서], 우리는 고단한 하루를 접고 희망 찬 내일로[푸른 문으로] 당당히 사라질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음악만으로, 몸이 없는 소리예술인 음악만으로 어떻게 이런 시적정서의 맥락에 옷을 입힐 수 있겠는가? 음악의 시로서가 아니라, 시의 음악으로서 새롭게 접근할 때, 비로소 음악은 삶의 철학이 되며, 시는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아름다움의 실체가 되는 것이다. 그런 어법을 김명아 시인은 이 작품에서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이밖에도 김명아 시인이 대표작으로 꼽은 작품「합니다 사이에 팝니다」를 언급하고 싶었다. 발상의 역전 현상을 새롭게 전개하고 있어, 보는 이의 눈꺼풀을 한 겹 벗겨내는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웃음이 남아 있는 볼트를 사고 화장이 지워진 너트를 팔았다 꿈이 깨는 날 톱니바퀴는 필요 없었다” 이 작품의 첫 구절을 읽으면서 단박에 우리가 저지르고 있는 비본질적 삶의 방식이 아프게 다가왔다. ‘현실적 자아에 충실 하느라-본질적 자아를 포기했다’로 읽혔기 때문이다.
이렇게 ‘새로움의 새로움’을 거침없이 탐구하는 김명아 시인의 시의 어법은 결국 “모든 시는 사람에 관한 새로운 이야기이며, 그 새로움[인식-감성]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작업”이라는 문학적 명제에 대한 온당한 대응으로 보인다. 시대[사회]와 인간[주체]의 세계를 탐색하는 감명아 시인의 시법에 깊은 공감을 보내며 [시인조명]의 숙제에 갈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