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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제목 : 심장이 고장난 꼭두각시 이야기
작가명 : 초코라떼♥
E-mail : applecakesz@hanmail.net
연재장소 : 새싹소설1
총편수 : 59편
장르 : 장편
출처 : 라떼사랑♡Fan Ca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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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깜깜하고 냉기 서린 집 안에
인기척이 났다.
신발장의 불빛 아래 보이는 얼굴은
청현의 얼굴이였다.
청현은 집에 들어오고 아직까지
어두운 거실을 보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씨이. 함보새 아직도 안 들어왔어.”
굉장히 불만에 차있는 목소리다.
청현은 익숙하게 걸어가서는
거실을 환하게 밝히려고 스위치를 찾았다.
스위치를 누르려는 그 순간,
보새의 목소리가 들려 청현은 멈칫했다.
“불 켜지마.”
단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평소보다는 확연하게 다른 보새의
가라 앉은 목소리는 청현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울었나? 하고 고민해 본 청현은
그럴리 없다는 걸 알기에 그저
스위치를 누르려던 손을 내려준다.
보새가 운 걸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던 청현이였다.
“집에 있었어?”
보새의 대답이 없지만,
청현은 그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거실 안에서
익숙하게 걸어나가서는 희미하게 보이는
보새 앞에 멈추어섰다.
무언가 끈적한 액체가 양말을 적셨지만
청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왜 불도 안켜고 이러고 있어.”
“……나…….”
“응?”
말을 하려다 만 보새때문에
청현은 그 자리에 무릎을 굽히고
보이지 않는 보새의 눈높이를 맞추어본다.
“보새야, 어디 아파?”
“그 말 하지…마….”
“알겠어. 무슨 일 있었어?”
“……응.”
보새의 대답에 청현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는
보새에게 손을 내민다.
보새가 보이지 않을 것 같아
친절하게 말까지 해주는 청현이.
“보새야, 내 손 잡고 일어나.”
“내가…….”
“………?”
“내가 죽였어.”
평소에도 수많은 사람들을 죽여왔던 보새였다.
청현은 뜬금 없이 자신이 죽였다며
우울해하고 있는 보새를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람을 죽인다는 건 물론 괴로운 일이긴 하지만,
보새는 그 괴로운 일을 예전부터 참아왔었고
갑자기 이렇게 터져버린다는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청현은 무언가 심상치 않은 사태를 느끼고
조심스럽게 보새에게 물었다.
“누굴…죽였는데? 이시혁?”
“아니, 아니. ……엄마.”
“엄마면… …설마……!”
“맞아, 아줌마. 나랑 피 하나도 안 섞인 엄…마….”
청현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버렸다.
그리고 보새는 자신의 말이 끝나자마자,
다시 한 번 자신의 품 안에서 싸늘히 식어간
엄마가 떠올랐는지 흐느끼기 시작했다.
“흐…흐윽…. 흑…흐…으…흐윽…….”
청현은 보새의 처음 듣는 울음 소리에
어쩔 줄 몰라 안절부절 못하고 있다가,
우선 불부터 키고 보자는 마음으로
스위치를 올렸다가 경악했다.
보새가 앉아 있는 그 거실 구석에는
이미 피가 흥건하게 있었다.
설마 하는 생각에 자신의 양말을 보자
붉게 물들어 있었다.
아까 그 끈적끈적한 액체는
보새의 피였던 것이다.
보새의 얇은 손목에 그어진 선혈은
이제 거의 다 피를 뿜어냈는지,
슬슬 멈추어 가고 있었다.
“보새 너 대체 - !”
“…흐윽……으…나…는…나는…….”
“병원 가자, 보새야.”
“죽지 않을 정도로만… 하아, 그었으니까 괜찮아….”
보새의 말에 청현은 하, 하고
짧은 한숨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누구보다 몸의 구조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가장 큰 이유는, 인생 최대의 목표가
바로 눈 앞에 있는데 자살 따위를 할 리 없었다.
최근 대박 갈비를 가고 나서부터
눈에 띄게 밝아졌던 보새였다.
그 때문에 청현은 한 편으론 미안했고,
한편으로는 기뻤다.
아마도 보새의 ‘어머니’의 지시가 있었을 것이다.
절대 보새가 원해서 죽인게 아니였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지금 저렇게 죽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워할 이유가 전혀 없어야 되는 거니까.
“어머니…가 시키신 일이였어…?”
청현이 묻자, 보새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보새가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청현의 얼굴이 무시무시하게 일그러졌지만
고개를 숙이고 있는 보새로써는 청현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그리고 곧, 청현의 입에서 냉정한 목소리가 나왔다.
“보새야, 힘들면…….”
힘들면. 하고는 말이 없는 청현 때문에
보새는 눈물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들어
청현을 바라보았다.
청현은 그 자리에서 쭈그리고 앉아
보새의 눈높이를 맞춘 후에 진지하게 말했다.
“너무 힘들면, 어머니를 죽여. 도와 줄게.”
#032
순식간이였다.
청현의 말에 보새가 품 안 쪽에 있던,
아침에 그 남자를 죽인 총을 꺼내서
총구를 청현의 머리에 들이댄 것은.
보새의 눈에서 나오는 눈물은 멈추었지만,
아직도 슬픔을 가누기가 힘든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청현은 까딱 잘못하면 자신의 목숨이 날아갈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냉정하고 침착하게 보새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알았어.”
“다시는 그런 말 하지마.”
“알았어, 다시는 안 할게.”
청현의 말에 보새는 총을 내려놓음과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비틀비틀 방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보새의 굳어가는 피와 함께
거실에 남겨진 청현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어렸을 때부터 대체 얼마나 세뇌를 당했으면,
저렇게 한 마디도 못하게 하는 걸까.
보새의 친어머니. 정말 독한 여자라고.
“아파하고 있는데…왜 몰라주는 겁니까….”
청현이 원망스러운 목소리로
허공에 대고 말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연락을 취하는 방법도 항상 ‘어머니’ 쪽에서
오기 때문에 청현은 보새의 ‘어머니’에게
말 할 기회가 없다.
게다가 보새 모르게 죽이려고 하더라도
‘어머니’의 거처가 어딘지 모르니
쉽사리 죽일 수도 없었다.
그리고 죽인다고 하더라도 보새가 알아낼 것이다.
“보새도…당신 자식인데…….”
청현은 오늘, 보새의 친어머니라는 그 여자가
죽이고 싶을 정도로 증오스러웠다.
.
.
.
보새는 배게에 얼굴을 파묻었다.
자꾸만 자신의 품에서 싸늘해진
엄마가 떠올랐다.
죄송스럽다는 말 외에는 할 말이 없었다.
죽지 않아도 될 목숨을 죽게 만든건,
다른 이유도 아닌 자신과 만나서였으니까.
“……하…….”
청현의 말이 머릿 속에서 윙윙 울렸다.
어머니를 죽이라고, 자신이 도와준다고.
자신은 어머니를 절대 죽일 수 없었다.
아니, 죽일 수 없었다가 아니라…
죽이지 못해 - .
그래도 어머니는 나의 유일한 ‘핏줄’.
아버지에게서 버려진 불쌍한 나의 가족.
어머니마저 죽어버리면,
난 정말 이 넓은 세상에서 외톨이가 되어버리는거니까.
.
.
.
디리링디링_
여느 때와 똑같은 알람 소리에
보새는 눈을 번쩍 떴지만 어제와는 달리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어제 일이 마치 영화처럼 스쳐지나갔다.
청현의 머리에 총을 들이댄 것까지도.
대체 앞으로 청현의 얼굴을 볼지 걱정됐다.
그러다가 문득, 언제부터 그런 걸 걱정했냐고
스스로를 위로했지만 아픈 머리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착잡한 마음을 뒤로 하고
보새는 아무렇지 않은 듯 표정을 감추고는
문을 열고 거실로 나갔다.
거실에는 청현이 어느새 분장을 마쳤는지,
찌질한 모습으로 소파에 앉아 뉴스를 보고 있다가
문소리를 들었는지 보새와 눈이 마주쳐버렸다.
“잘 잤어?”
청현은 –
항상 같은 그 미소로 어제와 다름 없이
보새에게 아침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마치, 어제 일은 처음부터 일어나지도 않았다는 듯이.
“……응…….”
“그리고…아줌마 시체는 내가 알아서 할테니까,
걱정하지 말구. 알았지?”
“……응.”
목이 메여왔다. 아까보다 머리가 더 지끈거렸다.
미안하다고 한 마디만 하면 되는데
그 말을 하는게 너무나 힘겹게 느껴졌다.
말 하려고 마음 먹으면 자꾸만 목이 메여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청현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못한채
계속해서 자신을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보새를 의아한 듯 쳐다보다가
이내 보새에게 싱긋 웃으며 말했다.
“보새야, 미안해 하지마.”
“……….”
“힘들면 말 안 해도 돼. 다 알아.”
“……….”
청현은 또 그렇게 보새에게 웃어주었다.
아침에 깼을 때부터 지끈거리던 머리는
일어난지 꽤 됐음에도 불구하고
나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심해져 버렸다.
“학교 갈거야? 힘들면 내가 말 해놓을게.”
청현이 보새에게 말했다.
청현은 아마도 보새가 가지 않더라도
학교에 갈 작정인 것 같았다.
보새로서는 차라리 그 편이 나았다.
청현을 하루 종일 보면 죄책감에 견딜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
“안 갈거야?”
보새는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청현은 그제서야 보던 TV를 꺼버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 위에 있던 가방을 들고는
문 밖으로 나가려다가 보새에게 말했다.
“아, 밥은 식탁 위에 차려놨으니까 꼭 먹어. 알겠지?”
#033
청현이 나가버리고 보새는
나오려던 눈물과 숨을 단숨에 삼켜버리고는
식탁으로 터벅터벅 걸어가서는
혼자 의자에 앉아버렸다.
청현은 분명 자신을 또 배려해 준거다.
평소같았으면 밥은 꼭 같이 먹어야 된다고
징징대고 보채서 결국에는 같이 먹었을텐데,
그러면 내가 자신보다 더 불편해할 거 아니까.
그러니까 자리를 피해준거다.
아마 오늘 저녁에는 늦게 들어오겠지.
조금 식은 밥과 국을 보며
보새는 수저를 들다 말고 멈칫했다.
청현 앞에서는 꾸역꾸역 참아왔던 눈물이
갑자기 멈출 새도 없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6년 동안 딱 3번 울었는데
첫번째로 울었던건 처음으로 사람을 죽였을 때.
그리고 벌써 이틀동안 두번이나 울었다는 사실이
보새를 놀라게 했다.
엄마의 죽음으로 인해 자신이 많이
약해진 것 같아서 괜시리 짜증이 나버렸다.
아니, 어쩌면 엄마를 만난 그 순간부터
보새는 조금씩 약해지고 있었다.
“후우, 이러면 안 돼. 이런건.”
혼잣말을 하던 보새는
평소에는 잘 먹지도 않고 깨작이던 아침밥을
푹푹 퍼서 입으로 꾸역꾸역 밀어넣었다.
밥그릇이 전부 깨끗해져서야 보새는 먹는 것을 멈추었다.
아까보다 정신이 맑아지는 것도 같았지만
아픈 머리는 더 심해져버렸다.
시야가 비틀비틀 거리기까지 했다.
대체 왜 이렇게 머리가 아픈거지…….
방으로 들어간 보새는
샤워를 하면 조금 나아질 것도 같아서
샤워를 급히 했지만, 아픈 머리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보새는 결국 두통에 못이겨 침대에 쓰러지듯이 누워서는
눈을 질끈 감았다.
금새 잠들어버린 보새의 숨소리는 거칠었다.
가끔가다가 많이 아픈 듯 끄응 하는 신음 소리가 나기도 했다.
“……하아…하아…….”
잠든 건지, 아니면 고통에 눈을 못 뜨는 건지
보새는 뒤척이며 그렇게 1시간을 보냈고,
시간이 조금 더 흐른 후에 보새의 핸드폰이
우웅 – 하고 울렸다.
보새는 힘겹게 눈을 뜨더니
손으로 몇 번 탁자를 헛 짚더니 핸드폰을 찾아서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전화 받은거냐? ]”
“……왜…….”
시혁의 전화였다.
보새는 아프다는 걸 들키기 싫어
간신히 한 글자를 끄집어내서는 말했다.
“[ 너 오늘 왜 학교 안 왔냐? ]”
“사……상관 하지마.”
“[ 말 더듬기 놀이하냐? 밖으로 나와라. ]”
뜬금 없이 장소도 시간도 말하지 않은채
아파 죽겠는데 밖으로 나오라는 시혁 덕에
보새의 머리는 더욱 지끈거리기 시작했고,
짜증까지 나기 시작했다.
귀찮았다.
이렇게 자신에게 찾아오고 귀찮게 했던 사람은
청현, 단 하나 뿐이였는데 그런 사람이 하나 더 늘다니.
보새는 지금 이 상황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 보새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혁이
충격적인 말을 내뱉었다.
“[ 나 지금 너희 집 앞이다. 집에 있는거 다 알아.
빨리 나와라, 기다릴 테니까. ]”
뚝.
제멋대로 말하고 끊어버리는 시혁 덕에
보새는 이맛살이 찌푸려져버렸다.
정말 자기 멋대로인 남자에다가 싸가지까지 없다.
잠시라도 나와 같은 눈을 했다고 생각한건
나만의 착각이였나.
바로 어제 시혁의 살인 의뢰를 받은 보새로서는
시혁이 자신의 집 앞에 계속 있는다는게
마음에 걸렸기 때문에 비틀비틀 일어나서는
한 걸음 한 걸음 힘겹게 내딛어 혹시 몰라서
보안 장치를 전부 꺼버리고 밖으로 나가기 전에
숨을 돌렸다.
그리고 당당한 걸음걸이로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밖에서는 이시혁이 담배를 태우고 있다가
보새가 나오는 것을 보고 땅바닥에 비벼 껐다.
“왜 학교 안 나온거냐?”
“니가 상관할 바가 아니잖 - .”
갑자기 머리가 핑 – 하더니
순식간에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보새는 넘어질 뻔 하다가 이내 중심을 잡고
다시 제대로 섰지만,
앞에서 보새를 뚫어져라 보고 있던 시혁은
그런 보새를 이상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보새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상관할 바 아니잖아.”
“상관이고 뭐고…너 아프냐? 안색이….”
보새는 자신의 이마를 짚으려던
시혁의 손을 탁 쳐버렸지만,
그와 동시에 정신을 잃고 시혁의 품에
안길 수밖에 없었다.
“뭐야, 이거…불덩이잖아…….”
#034
시원하다 - .
.
.
.
“하아…하아……으…윽…….”
얼굴이 화끈거리는게 열이 많이 나나봐.
근데 대체 여긴 어디지……?
우리 집은 아닌데, 설마 나 지금 –
“일어났냐?”
납치 당했을 리가 없지.
내 정체를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아무도…….
안심하자.
보새는 자신의 바로 옆에 있던
시혁의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휙 돌렸다.
그러자 보새의 이마 위에 올려져있던
물수건이 툭. 하고 옆으로 떨어졌고,
시혁은 떨어진 물수건을 다시 물에 담갔다가
한 번 짜서는 보새의 이마 위에 얹어주었다.
“뭐……하는 짓이야….”
“어제랑 너무 다른거 아니야?”
“……….”
다를 수밖에 없잖아.
어제랑 오늘의 세상이 다른데.
보새가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시혁이 보새의 몸을 다시 눌러서
억지로 눕도록 만들어버렸다.
그덕에 보새는 시혁을 죽일 듯이 노려보다가
이내 입을 열어서 신경질을 냈다.
“뭐하는 짓이야?!”
“너 많이 아팠어. 아직 열도 좀 남았고.”
“하, 니가 무슨 상관인데?”
“너한테 관심 생겼다고. 저번에 말한 것 같은데?”
시혁이 얄밉게 웃어보였다.
보새는 당장에라도 밀치고 일어나고 싶었으나,
몸이 무겁고 뜻대로 움직이질 않는걸 봐서는
열이 많이 났다는 시혁의 말이 사실은 사실이였나보다.
아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던게
이것 때문인가 싶었다.
순간 보새는 어제 손목에 길게 그어놓은
칼자국이 생각나 반대쪽 손으로 손목을
만져보았다가 붕대가 잘 감겨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보새의 표정을 읽은건지,
시혁은 짐짓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손목 내가 붕대 감아 놨어. …왜…그랬던거냐.”
“상관할 거 없잖아.”
“병원은 가봤냐?”
“아니, 갈 필요 없어. 별 거 아니니까.”
별 거 아니라는 보새의 말에
시혁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열이 펄펄 끓길래 우선 가까운
자신의 원룸으로 데려와 간호하다보니,
손목에 칼로 그은 듯한 상처가 있었다.
처음에는 놀랐지만 그래도 우선
치료가 먼저라는 맘으로 붕대를 감았는데
고작 깨어나더니 하는 말이 별 거 아니라니.
보아하니 자신이 그은 상처 같은데,
별 거 아니라는 말은 말이 되질 않았다.
“너 – .”
“진짜 별 거 아니야. 지금 몇 시야?”
“……저녁 8시, 죽 끓여놨으니까 - .”
“사양할게. 늦었으니까 나 가볼게.”
“뭐?”
보새의 차갑고 냉정한 말에
시혁은 이맛살을 더 찌푸리며 보새에게 말했고,
보새는 괜시리 시혁이 더 미워져서
벙쪄있는 시혁을 뒤로하고 바로 나와버렸다.
시혁의 집은 보새의 집에서
정말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보새의 집에서 200미터 거리에 있는
세븐 일레븐이 바로 시혁의 원룸 옆에
자리하고 있었으니까.
보새는 집으로 걸어갔다.
아까보다는 훨씬 더 상쾌한 기분이였다.
집으로 들어가기 전, 보새는 잠시
멈칫해야만 했다.
집의 불이 켜져 있었던 것이다.
보안 장치를 끄고 갔었으니,
청현일수도있었고, 혹은 청현도
자신이 아는 어느 누구도 아닌
제 3자일 수도 있었다.
보새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서는 순식간에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안에는 다행히 청현이 거실에 서서는
안절부절 못하고 왔다갔다거리고 있었다.
곧 청현은 보새를 발견했고,
보새에게 달려들었다.
“보새야!!”
보새는 청현의 돌진(?)에 당황해서는
조금 움찔 하면서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갔고,
청현은 그런 보새를 뜬금 없이 덥썩 안아버렸다.
“류청현, 너 이게 무슨 짓이 - .”
“걱정했잖아! 학교 갔다 와서 바로 다시 나가려고 하는데
보안 장치는 다 꺼져있지, 너는 집에 없지…….
무슨 일 생긴 줄 알았다구, 나는…. 걱정 좀 시키지 마라…. 응?”
보새는 그렇게 멍하니 있다가
청현의 품 안에서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청현에게 안겨있자 청현의 시원한 향수향이 느껴졌다.
“어디있었던 거야?”
“아파서…….”
“아팠어?!”
“응. 근데 이젠 괜찮아. …병원…갔다 왔어.”
“병원?”
평소에 병원이라면 질색을 하는 보새라
청현은 많이 의심하는 눈치였지만,
보새가 안 아팠는데 아팠다고 거짓말 할
위인은 아니였기에 그냥 넘어갔다.
그러다 갑자기 뭔가 떠오른 듯
아. 하더니 청현은 보새를 풀어주고는
고개를 숙이며 심각한 목소리로 보새에게 말했다.
“보새야….”
“………?”
“그…아주머니 유골. 지금 집에 있는데, 내일 뿌릴래…?”
#035
“유…골…? 설마 벌써 태운거…야…?”
“응. 증거가 남는건 너에게 안 좋으니까.”
“……고마워.”
보새는 숨을 잠시 멈추었다.
이제는 냉정해져야만 했다.
자신이 이시혁을 조금 더 빨리 죽였더라면.
그래서 자신이 ‘엄마’와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랬다면 엄마는 어쩌면 죽지 않았을 지도 몰랐다.
그리고 혜경이라는…딸을 만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보새가 생각에 빠져 있을 때, 청현이 보새에게 말했다.
“유골. 내일 니가 뿌려드려.”
“아니, 내가 안 뿌릴거야.”
“뭐?”
보새의 대답에 청현이 놀랐는지
즉각 반응해버렸다.
그런 청현을 보고 보새는 픽 웃더니
청현에게 담담하게 말했다.
“나 엄마 진짜 딸 찾아줄거야. 혜경…이….
찾아서, 그 아이가 유골 뿌리게 할거야.”
“뭐…?”
청현의 얼굴에는 당혹감이 서려있었다.
보새가 봤을 때, 그건 얼빠진 얼굴이였다.
“엄마 딸 대신해서 뿌려드리긴 싫어.
면목도 없어. 진짜 딸 찾아서 데려다주는게,
그게 마지막으로 내가 엄마한테 해줄 수 있는 일이니까.”
보새는 정말 담담해 보였다.
이제 마음을 정말 굳게 먹은 것 같았다.
혜경이를 찾고, 이시혁을 찾고.
엄마에게 용서를 빌고.
그리고 죽는 것.
그게 보새의 소망이 되어버렸다.
“근데 나 정말 못됐나 봐.”
“응…?”
“엄마 성함도 모르고 있었어. 너 혹시…알아?”
보새가 청현에게 묻자, 청현은 고개를 내저었다.
“괜찮아. 찾으면 다 나오겠지, 뭐.”
“아…응…. 나도 찾아볼게, 보새야.”
“그럼 고맙고. 혈에서 도와주는거라면 - .
나 혼자 찾는 것보다 두배는 더 빨리 찾겠지.”
혜경이라는 그 아이.
보새의 능력이라면 삼 일 내로 찾아낼 수 있었다.
대박 갈비에대해 알아낸 후에 ‘엄마’의 이름을 알아내고.
그 후에 가족 관계 일일이 알아내서 신용 조회 하면 되니까.
아니, …어쩌면 죽었을 지도 몰랐다.
그 오랜 시간 동안 나타날 수도 없었다면,
보새가 아는 경우로는 딱 두 가지 경우밖에 없었다.
사창가에 있던가 혹은. 이미 죽었던가.
당장 오늘에서부터라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아직 몸상태가 좋지 않은 관계로
내일부터 시작해야겠다고 다짐하는 보새였다.
방으로 들어가서 마저 자려는 보새를
청현이 불러세웠다.
“보새야 - .”
“응?”
청현은 보새에게 난처한 듯 웃어보였다.
평소와 비슷한, 거의 똑같은 미소였지만
보새에게는 그 비슷한 미소가 어색하게 보였다.
청현은 잠시 보새와 눈을 마주치더니만 조용히 입을 열었다.
“혜경이 찾는거. 그거 신경쓰지 마.”
“…왜?”
“내가 최선을 다해서 찾아볼게. 그러니까 너는 - .”
“………?”
말을 잇지 못하는 청현 때문에
보새는 방 문 앞에 서서 문을 열지도 못하고
그렇게 서있어야만 했다.
결국 보새는 짜증스런 목소리로
청현에게 말했다.
“류청현, 할 말 있음 빨리 해줘.”
“아, 미안. 그러니까 보새 너는 신경쓰지말라구.”
“뭐?”
“빠른 시일 내로 찾을게. 그러니까 너는 마지막 타깃.
그거에만 신경써. 알겠지?”
청현의 말에 보새는 그저 웃어보이더니
청현에게 말했다.
“고마워, 류청현.”
“아니야. 이게 너한테도 나한테도 - .”
“근데 말이야.”
“………?”
“적어도 내가 찾아야 할 것 같아. 그나마 속죄하는 길 같아.”
그리고는 보새는 방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그런 보새의 모습을 보고서
청현은 그저 한숨을 내뱉을 뿐이였다.
그리고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보새보다…내가 더 빨리 찾아내야 하는 건가. 하아….”
#036
다음 날, 보새는 일어나자마자
샤워를 후다닥 마쳐버리고는
거실로 나갔다.
거실에는 청현이 왠일인지
분장하지 않고서 보새를 기다리고 있었다.
보새는 원래 오늘 학교에 가지 않을 작정이라
교복을 입고 있지 않았지만,
청현이 교복도 입지 않고,
분장도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의아해졌다.
“류청현. 학교 안 가?”
“응. 오늘은 바쁜 일이 생겨서.”
“아. 잘 갔다 와.”
“보새 너는 오늘도 안 가게?”
“응. 나 하루종일 찾아서 오늘 내로 끝내고 싶어.”
“아… 응, 알겠어. 그럼 갔다 올게.”
“어.”
청현은 보새에게 아침 인사만 하려고 했었는지
대충 할 말을 끝난 뒤에 바쁜 듯 나가버렸다.
보새는 어차피 ‘혈’의 일일테니 신경 끄기로 했다.
청현이 차려 놓은 아침을 대충 먹고서는
소파에 앉아 바로 노트북을 켜서 찾기 시작했다.
.
.
.
“이거…뭐야…?”
.
.
.
보새는 어이 없을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대박 갈비라는 곳.
의외로 등록 되지 않은 불법적인 곳이였고,
게다가 그러니까 아줌마를 찾는게 더 어려워져버렸다.
혹시라도 엄마가 혜경이의 실종 신고나
혹은 기타 등등 다른 신고라도 했을까 봐
경찰청까지 해킹해서 경찰 조사기록을 봤지만,
‘혜경’이라는 이름으로 들어온 것들은
전부 쓸 데 없는 것들이었다.
사창가에 아는 사람들에게 시켜
물어봤지만, 그 때 그 당시 ‘혜경’이라는
여자들은 단 한 명을 제외하고 전부 고아였다.
“이 한 명에 걸어야 하는건가…….”
보새는 몇 시간째 노트북이랑 씨름했던 터라
손을 뒤로 뻗어 기지개를 쭈욱 켰다.
그리고는 당장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어
그 여자와 약속을 잡으려고 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당장은 안 된다.’였다.
김사장인가 뭔가랑 단 둘이 여행가서는
일주일 후 쯤에나 돌아온다면서.
“…진짜 그 여자가 엄마 딸이면……. 정말 엄마 딸이면….”
그럼 나는 뭐라고 해야 하는 거지…….
“당신의 친어머니가 - .”
돌아가셨습니다…? 웃긴다.
보새가 여러가지 생각으로 착잡해하고 있는데,
우웅. 하고 보새의 핸드폰이 울렸다.
[ 보새야 뭐해? ]
[ 그냥 있어. 하늘이 너는 뭐하는데? ]
[ 아직 세 신데 학교지^^* ]
그제서야 오늘이 화요일이고,
자신이 학교를 벌써 이틀이나 빠졌다는 걸 실감했다.
그런데 막상 답장할 말이 없어서 고민하다가
결국 답문을 보냈다.
[ 나 집 ]
[ 오늘도 아픈거야? ]
[ 조금 ]
[ 시혁이는 만났어? ]
[ 어제? ]
그리고 나서 온 답장에
보새는 하마터면 기절초풍할뻔 했다.
[ 아니 오늘 간다고 했는데 안 갔어? ]
툭. 하고 보새의 핸드폰이 떨어졌다.
그리고 그 순간 딩동 하고 초인종이 울렸다.
창 밖으로 내려다본 대문에는 이시혁이 서있었고,
곧 창문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보새를 발견했는지
손을 스윽 들어보였다.
보새는 오늘도 역시 보안 장치를 끄고
쿵쿵 기분 나쁜 듯 발소리를 내며 걸어나갔다.
대문을 벌컥 열자 오늘은 어울리지도 않는
꽃다발을 들고 시혁이 서 있었다.
“뭐 하는 거야?”
“어제는 아픈거 모르고 결석 때메 온거였고.”
“오늘은?”
보새의 질문에 시혁은 꽃다발을
보새의 눈앞에서 흔들흔들 거리면서 말했다.
“아픈거 알았으니까 병문안.”
#037
“집 넓네.”
보새의 집 안에 들어온 시혁의 감상평이였다.
보새는 소파 에 풀썩 앉아서 짜증나는 듯
거실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이것저것 만지고 있는
시혁을 기분 나쁜 눈초리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 보새의 따사로운 눈초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시혁은 그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만져보다가
방 문고리를 돌리려고 했다.
그리고 그 순간 보새의 참았던 화가
폭발해버렸다.
“열지마!!”
“아, 쏘리. 그냥 신기해서.”
씨익 또 얄미운 웃음을 짓던 시혁은
보새 바로 옆에 같이 앉아버렸다.
그 때문에 보새는 시혁에게서 좀 더 떨어지려고
자리를 옮기려고 했지만,
시혁의 손이 보새의 가는 손목을 잡아버렸다.
“뭐야?”
“나 병문안은 핑계고, 할 말 있어서.”
시혁의 표적이 갑자기 진지해져버려서,
보새는 엉덩이를 떼려다가 다시 앉았다.
시혁은 그런 보새에게 살짝 웃어보이고는
말했다.
“내가 곰곰이 생각해 봤거든.”
“………?”
“너 나랑 사귀자. 아니, 사겨보자.”
사귀자라고 하다가 ‘사겨보자’로
갑자기 말을 바꾸는 시혁 때문에
보새는 정신이 없었다. 머리가 띵했다.
사귀자라는 말도 어처구니가 없는데,
사겨보자니. 무슨 실험하는 것도 아니고.
“뭐?”
“솔직히 난 너 안 사랑한다.”
시혁의 계속되는 폭탄발언에
보새는 픽. 헛웃음이 나와버렸다.
“좋아하는지 안 좋아하는지도 모르겠고….”
시혁의 말이 계속되면 될수록
보새는 더더욱 황당해지기 시작했다.
좋아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사랑은 더더욱 아니다.
근데 한 번 사귀어 보자.
지금까지 시혁이 한 말을 정리하자면 그랬다.
“근데 자꾸만 눈에 밟히거든.”
“……….”
“어제 너 아플 때도 신경쓰였고, 그리고 그 손목.”
“……….”
“그건 더 신경쓰이고. 더 눈에 밟히고.”
“……….”
“학교 안 오니까 신경쓰이고…걱정되고. 또 아픈가 – 해서.”
“……….”
“그래서 사귀어 보고, 결정하려고. 모르겠거든 나는 아직.”
미친놈.
이 한 글자가 보새의 머릿속에서
계속 윙윙거렸다. 이시혁 저 놈은.
정.말.로. 미.친.놈.이었다.
“하. 니가 그렇게 말하면 내가 덥석 사귈 것 같아?”
“그러니까 제안이잖아. 사귀어보자고.”
“내가 거절한다면?”
“그럴 리는 없지.”
너무나도 자신만만하게 그럴 리 없다는
시혁을 보고 보새는 코웃음을 쳤다.
대체 뭘 믿고 지금 저렇게 당당한 걸까.
“왜?”
정말 궁금했다. 왜?
왜 저렇게 당당할 수 있는 걸까.
항상 좋은 표정, 좋은 말 한 것도 아니었고
기분 나쁘게 짜증나는 투로 말해왔었다.
게다가 자신이 꼬리쳐서 사귀자고 한 것도 아닐텐데.
“너도 나한테 관심이 있을테니까.”
“하…?”
당당한 시혁의 표정과 말투에
보새는 이상한 기분이 들어 결국 대답했다.
“좋아. 사겨봐.”
더러워. 이시혁.
너는 처음부터 끝까지 내 인생동안,
17년 이 짧지만 전부인 내 인생동안,
너는 세상에서 두 번째로 최악이고
두 번째로 더럽고 두 번째로 재수 없어.
첫 번째는 니 아버지고.
“내가 널 정말 사랑하게 되면 - .”
“………?”
“그 땐 비밀 하나 말해줄게. 가장 큰 비밀.”
“그래? 그럼 니가 날 사랑한다고 하는 그 날,
나도 내 비밀 하나 말해줄게.”
니가 나한테 사랑한다고 하는 그 순간.
내 지긋지긋한 운명이랑 너와 나의 더러운 인연.
그리고 내가 널 죽여야 하는 그 비밀.
모든 걸 다 말해준 후에 죽여줄게.
니가 날 사랑하는 그 순간,
넌 죽는거야. 이시혁.
“좋아.”
#038
“내가 사귀자고 말한 것도 처음이고.
사귄 것도 니가 처음이라 지금 나 - .”
“……….”
“되게 쪽팔리고 되게 기분 좋다.”
“미친놈.”
“오늘은 쪽팔려서 그냥 간다. 몸조리 잘해라.”
니가 말 안해도 잘 할거거든. 이라고
쏘아붙이려다가 팔랑팔랑 의미 없이
손을 흔들어주었다.
이시혁이 나가고나서 30분 정도 후에,
청현이 집으로 들어왔다.
바쁜 일은 이제 좀 수월해졌는지
아침보다는 표정이 확실히 풀어져있었다.
“하려던 일 잘 됐나봐?”
“응. 잘 됐어.”
“아, 그리고. 나 오늘부터 이시혁이랑 사겨.”
“뭐어?!”
보새의 덤덤한 폭탄 선언에
청현은 목을 꽉 죄고있던 타이를
슬슬 풀어내려가다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 때문에 보새도 덩달아 놀라서
인상을 살짝 찌 푸려버렸다.
“아…맞다, 그럼 이제 죽이는거야?”
“아니.”
“왜? 너 설마….”
설마 그 새끼가 정말 좋아진 건 아니지?
청현은 이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돌아올 보새의 대답이 두려워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보새는 그런 청현을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다가
청현을 위해 친절히 대답을 해 주었다.
“이시혁 좋아지고 말고가 문제가 아니야.
그리고 그런 일은 절대 없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구.”
“그럼 뭐가 문젠데? 그 새끼가 먼저 사귀자고 한 거.
아니야?”
“맞아. …근데 그 미친놈이….”
“………?”
“나 좋아하지도 않고, 사랑하는 건 더더욱 아닌데.
사귀어 보고 나서 지 마음을 결정하시겠대.”
“하…아…?”
청현도 처음 보새가 그랬듯이
어처구니 없다는 티를 팍팍 내고 있었다.
보새는 그런 청현의 반응에 별 일 아니라는 듯
어깨만 으쓱할 뿐이였다.
“밥은 먹었어?”
청현은 마음 정리(?)가 된건지
예의 편안한 미소를 띄우며 보새에게 물었고,
보새는 대답하기 귀찮았는지 고개만 저었다.
밥을 차리려는지 셔츠 팔목 단추를 풀어
걷어올리고는 부엌으로 가려는 청현을
보새가 불러세웠다.
“류청현.”
“응?”
“궁금한게 있는데 말이야.”
“뭔데?”
청현은 이제는 앞치마까지 두르고는
보새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보새는 그런 청현을 빤히 쳐다보더니,
이내 대수롭지 않다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너…엄마랑 원래 아는 사이는 맞는 거지?”
“응?”
“그러니까, 엄마랑 알고 있었던 사이였지?”
“아, 응….”
사실 청현이 ‘아니’라고 대답한다면
그건 확실히 의심스러운 일이였다.
아무도 가지 않는 고깃집에 보새를 데려가 놓았고,
분명 엄마도 ‘청현’이라는 이름을 알고 있었으니까.
“근데 엄마 이름도 몰라?”
“못 찾았어?”
“응. …그 대박 갈비도 등록 안된 곳이고.”
“아…그런건 몰랐는데.”
청현이 정말 몰랐다는 표정을 짓자
보새는 고개를 끄덕이며 청현에게
두 번째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넌 거기 어떻게 안거야?”
“그냥. 길 가다가 한 번 들려봤는데 장사도 안 되는 것 같아서.
몇 번 갔었어. 근데 맛도 괜찮고…그 날 조용한 곳 하니까
딱 거기가 생각났을 뿐이야.”
“아…응. 알았어….”
보새의 대답에 청현은 살짝 웃어보이고는
뒤돌아 그대로 부엌으로 들어가버린다.
청현이 들어가버린 부엌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보새는 이내 혼자 중얼거린다.
“…류청현…너 이상해….”
류청현 너,
거짓말할 때는 맨날 정색하잖아.
한 개도 안 웃고.
대체 뭘 숨기고 있는거야…?
#039
어색한 분위기로 청현과의 식사를 마친 보새는
청현의 잘 자라는 인사를 건성으로 받아치고는
방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청현의 태도는 확실히 수상했다.
저녁을 먹는 내내 어색하게 반찬을 권한다던가
그러다가도 혼자 심각하게 생각에 빠지다가
보새가 부르면 언제 그랬냐는 듯 모른 척을 한다던가.
“뭐…또 쓰잘데기 없는 거겠지.”
보새는 그렇게 단정짓고는 노트북을 켜고
하던 작업을 계속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뒤지고 털어 보아도 나오는게 없었다.
마치, 엄마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은
투명인간인 것처럼.
“후우…. 오늘 밤 잠자긴 글렀네.”
보새는 밤을 새야겠다고 생각하며
해킹 작업에 더욱 몰두하기 시작했다.
이 세상에 ‘투명 인간’이라는 건
존재할 수 없는 법.
분명 어딘가에 자취를 남겼을 것이다.
보새의 엄마가 실존 했다면.
.
.
.
눈이 빡빡하게 충혈되기 시작하자
보새는 물을 마시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밖에는 놀랍게도 청현이 자지 않고 있었다.
청현도 무언가 찾고 있었는지,
거실 소파에 앉아 노트북으로 뭔가 작업하다가
보새가 나오자 청현도 놀랐는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아직 안 잤어?”
“응.”
“잘시간 훨씬 넘었는데… 안자고 뭐했어?”
“그냥 이것 저것.”
보새는 한 쪽 벽에 있는 전자 시계를
흘깃 바라보았다. 시간은 벌써 새벽 3시.
보새만큼은 아니지만 청현도 일찍 자는 편이다.
일찍 잔다기 보다는 ‘규칙적이게 생활’하는 편이다.
그런데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뭘 하고 있는걸까?
보새는 살짝 궁금했지만
어차피 저렇게 혈안이 되어서 할 일은
조직 일 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묻지 않고 그저 물 한 병을 가지고 방으로 들어왔다.
“후아…털어서 먼지 안 나오는 사람은 없는데.
왜 이렇게 힘든거지…. 고작 사람 한 명 찾는건데.”
보새는 노트북 앞에 다시 앉아서
잠시 눈을 감고는 고개를 뒤로 젖혀서
어깨를 툭툭 토닥였다.
그리고 보새는 다시 작업에 집중했다.
.
.
.
짹짹 – 하는 참새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벌써 아침이 된 모양이였다.
아직까지도 열심히 찾고는 있었지만
아무래도 희망은 그 사창가의 여자 한 명 뿐인 것 같았다.
곧 디리링디링_하고 울리는 알람을
신경질적으로 꺼버린 보새는
갑자기 울리는 핸드폰에 놀라버렸다.
발신인은 어머니였다.
보새는 아침부터 전화한 어머니에게서
이상한 감정을 느끼며 전화를 받았다.
“네.”
“[ 언제 끝낼거니. ]”
“잘 되가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 후우…. 그 대박갈비는 확실히 처리한거니? ]”
어머니의 질문에 보새는 멈칫했다.
참 잔인하고 무서운 여자.
이런 여자가 내 친어머니이자 세상에 날 낳아준 사람.
“…네…. 확실히 처리했어요.”
“[ 그리고 가장 중요한 그 일은? ]”
“그것도 잘 되가고 있습니다.”
“[ 잘 되간다, 잘 되간다하지 말고 빨리 끝내! ]”
“…네….”
보새는 밤샘 작업으로 인해
잔뜩 짜증이 나있는 상태였는데
어머니의 전화를 받고 결국 우울해져버렸다.
어머니의 전화는 항상 기쁘지 않았다.
언제나 긴장한 상태로 전화를 받아야만했고,
보새는 그런 긴장감이 무척이나 싫었다.
가끔, 자신의 타깃이 아줌마 였을 때.
그리고 그 아줌마가 정말 평범하게 아이를 사랑해주는
그런 여자였을 때.
보새는 왠지 원망스러웠고,
한편으론 미안했다.
“[ 그럼 이만 끊으마. ]”
“잠깐만요, 어머니!”
“[ …또 할 말이 있는거니? ]”
“…네. …어머니는….”
보새는 잠시 숨을 들이켰다.
“어머니는 단 한 순간이라도… 절 사랑했나요?”
돌아올 대답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기대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다를지도 모른다는 그런 기대를.
“[ 요즘 헛소리를 많이 하는구나. 정신 못 차렸니?
사랑? 나한테 사랑받고 싶으면 죽이란 말이야!! ]”
…그래요. 당신의 그 말만 믿고
지금까지 몇 백 명을 살인했지만,
당신은 나에게 단 한 번도 사랑을 주지 않았어요.
단 한 번도.
그래서 난 가끔, 아니 항상.
당신을 원망해.
“네, 알겠습니다.”
#040
교복을 입고 나온 보새 덕에
청현은 아침부터 놀라고 말았다.
“오늘 학교 가려구?”
“응. 많이 빠졌잖아. 이제 나가야지.”
보새와 마음이 맞은건지, 어쩐건지는 몰라도
청현도 오늘은 학교에 갈 예정이였는지
찌 질이처럼 변장하고 밖에서 신문을 보고 있었다.
둘은 어색하게 아침 식사를 마쳤다.
보새도 그렇 지만 청현도 밤을 꼬박 샌건지
눈이 퀭했다.
밥을 먹고 밖으로 나와 타박타박 걷고 있는데
청현이 졸린 목소리로 하품을 하며 물어왔다.
“어제 그 아줌마 딸 찾은거야?”
“응.”
“뭐 좀 나왔어?”
“아니. …사창가 여자밖에는.”
“아….”
그 뒤로는 또 조용했다.
요즘 들어서 청현이 눈에 띄게 이상해져버렸다.
항상 조잘대던 청현이였는데 요새는 잠잠했고,
무언갈 숨기는 것 같기도 한데 아닌 것도 같고.
거짓말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는데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았다.
“류청현, 너 나한테 뭐 숨기는 거 있어?”
“아니~ 내가 너한테 숨기는게 뭐가 있겠어~”
저렇게 촐싹대면서 말하는걸 보면
또 멀쩡한 것 같기도 했다.
약간 서먹서먹한 상태로 도착한 교실에는
아이들이 오랜만에 온 보새를 보고는
놀라는 눈치들이였다.
그들이 아는 보새는 수업은 딱 하루
그것도 몇 시간 하다가 나가버렸고,
그렇게 수업을 빠지는데도 선생님이
터치를 하지 않아 ‘대기업의 딸’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주로 옥상에 있는데 그 곳에는 거의
하늘과 시혁이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아이들은
보새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하지만 보새는 오늘 무척이나 피곤했기 때문에
신경을 끄기로 결심하고 엎드려서 잠을 청했다.
.
.
.
“우음…….”
“잘 잤어?”
보새가 일어난 것은
벌써 3시간이나 지난 3교시 중반 쯤이였다.
청현은 나름대로 열심히 딴짓을 하다가
보새가 낸 소리를 듣고 보새에게 물었다.
“아. 어….”
무의식적으로 주위를 빙 – 둘러보던 보새는
시혁과 하늘을 발견하곤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뻔 했다.
지금까지 반에 진득이 앉아서 있었던 적은
단 한 번 뿐이였고,
시혁과 하늘도 보새와 마찬가지로
반에 있는 시간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같은 반이라고 생각하는 건
무리였던 것이었다.
게다가 자신이 관련된 일이 아니면
아예 관심을 끄는 보새의 성격으로 봐서
보새는 완벽하게 모르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보새야, 왜 그래?”
“아, 아니. 쟤네 둘 - . 우리 반이였어…?”
“응. 원래부터 우리 반이였잖아. 난 니가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청현의 말에 보새의 말문이 턱하고 막혔다.
사실 어느 반에 가든 상관이 없었기 때문에
반배정에는 보새의 손이 전혀 미치지 않았다.
그런데 이 둘과 정확히 같은 반이 되었다니.
무언가…
탐탁치 않았다.
보새가 멍하니 시혁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을 때,
우웅 – 하고 보새의 핸드폰이 울렸다.
문자 한 건, 시혁에게서 온 것이었다.
[ 내 얼굴 닳아 ]
저 자식, 안 보는 척 하면서 다 보고 있었어.
보새는 괜히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 같아서
고개를 휙하고 돌려버렸다.
그러자 다시 우웅 – 하고 울리는 핸드폰.
[ 이 시간 끝나고 옥상으로 와 ]
보새는 그 문자를 보고 픽 웃더니
한 자 한 자 정성들여 답장을 보내주었다.
[ 싫어. ]
[ 그냥 오라면 와 끌고 간다 ]
보새는 인상을 찡그렸다.
끌고간다니. 시혁이 자신을?
코웃음밖에 안 나오는 이야기였다.
때마침 끝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고,
시혁이 벌떡 일어나서는 보새 쪽으로 왔다.
보새는 그 때까지만해도 당당하게 시혁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다음,
시혁의 급작스런 행동에 보새조차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