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와대 입지 최악… 첫 주인부터 피바람 겪어. 위치 옮겨야” ⊙ 북한의 개성과 평양은 수도로서 부적합 ⊙ 재벌 총수가 검찰조사 받으면, ‘산소 자리가 문제다’ 편지 빗발쳐
崔昌祚 ⊙ 65세. 서울대 지리학과·同대학원 졸업. ⊙ 국토개발연구원 주임 연구원, 전북대 지리학과 교수, 서울대 지리학과 교수 역임. ⊙ 저서: 《한국의 자생풍수》 《한국의 풍수지리》 《사람의 지리학》 《도시 풍수》 《닭이 봉황 되다》 《한국풍수인물사》 등.
저만치 앞에서 아버지가 걸어간다. 개간할 땅을 찾는다고 했다. 길은 길로 끝없이 이어졌다. 땅 위의 길은 강에 닿기도 하고 산을 휘돌기도 했다. 언제였던가 다리를 다친 후부터 아버지는 다리를 절었다. 느려진 걸음의 아버지, 길, 산 그리고 땅. 느릿느릿 아버지와 걸음을 맞추며 소년은 길 위에서 땅을 보기 시작했다. 소년은 땅과 어떤 대화를 나눴을까. 혹시 소년이 훗날 정립하게 된 한국 고유 풍수, ‘자생 풍수’ 이론의 싹이 이때 움트진 않았을까. 풍수연구가 최창조 전 서울대 교수의 얘기다.
한국의 전통 풍수 재발견
최 교수는 광복 이후 최초로 한국의 풍수 이론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연구한 인물이다. 전공인 지리학을 숫돌 삼아 전통적으로 내려온 풍수 이론을 엄밀하게 다듬고 벼린 그의 풍수 이론, ‘자생 풍수’에 대중은 귀를 기울였다. 1980~1990년대, 풍수가 미신이 아닌 학문으로 기능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시기였다. 한국의 현대 풍수 연구사가 최창조 이전과 이후로 나뉘는 이유다.
최 교수의 서가가 궁금해진 건 그가 쓴 《사람의 지리학》이라는 책 때문이었다. ‘최창조의 망상록’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최 교수가 책에서 뽑아낸 구절과 그 자신의 글을 뒤섞어 생각을 얘기하는 다소 특이한 방식으로 기술된 책이다. 마치 논문처럼 각 구절의 출처가 주석으로 달려 있다.
가만히 보다 보니 그 출처로 명시한 책들이 좀 의아스러웠다. 지리학에 관련된 책은 물론이고 심리학, 철학 관련 도서, 심지어 소설도 꽤 있었다. 권장도서에 단골로 껴 있는 고전문학이 아닌, 제목도 저자도 생소한 현대 한국 소설이 몇 권이나 포함되어 있는 걸 보며 문득 그의 서가가 궁금해졌다.
서울 신도림역 부근에 있는 그의 집은 널찍한 62평 아파트였다. 아마 ‘한국의 아파트학’이라는 강좌가 생긴다면 ‘매매할 땐 1층은 피하라’가 첫머리에 나올 것이다. 한데 최 교수의 집이 1층이었다. 집에 대해 묻는 사람이 꽤나 많았는지 기자가 궁금한 기색을 보였더니, 집에 대한 설명이 줄줄 나온다.
“특별히 이유가 있어 1층으로 들어온 건 아닙니다. 신도림역 부근으로 위치를 정한 것도 별 이유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때 가지고 있던 돈에 맞추어 구입하다 보니 이 집으로 오게 된 거예요. 1층이라 좋은 점도 꽤 많습니다. 저의 안사람이 깔끔한 성격인데, 집이 전반적으로 어둡다 보니 먼지가 눈에 안 띄어서 좋고, 무슨 일이 일어나면 뛰어나가기도 좋습니다.”
정기적으로 정리하는 단정한 서가
흐트러짐 없이 깔끔한 서가는 주인의 성품을 잘 보여준다.
최 교수의 서재는 안방에 딸려 있는 방에 있었다. 인터뷰 약속을 잡기 위해 전화 통화를 하며, 그가 했던 ‘서재랄 게 따로 없다’는 말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
책들은 양면으로 빼곡히 크기별로, 분야별로 단정히 꽂혀 있었다. 지리학, 과학 등 분야의 단행본부터 학술서적, 각종 백서, 연구집, 사전까지 다양한 책이 모나지 않게 제자리에 자리 잡고 있는 책장이었다. 찬찬히 살펴봤다. 손님 방문에 대비해 급히 정리한 모습은 아니었다. 오랜 기간 자신의 기준에 맞게 공들여 배치한 듯한 배열이었다. 상당히 많은 책이 있었지만 어쩐지 단출해 보이는 것도 그 때문인 듯했다. ‘생각보다 책이 없다’고 일부러 짓궂은 감상을 늘어놨다. 최 교수는 “정기적으로 책을 솎아낸다”고 응수했다.
“안 보는 책은 정리해서 재활용으로 내놓습니다. 내놓으면 금방 없어지더군요. 요즘엔 곧잘 도서관에서 빌려 읽기도 합니다. 구하기 힘들고 비싼 도록도 도서관에 신청하면 구매해서 가져다 놓더라고요.”
서가를 본 이상 어떤 책을 주로 읽는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최 교수는 당황한 듯 글자 그대로 머리를 긁적대더니 ‘그야말로 잡식성’이라고 일축했다. 최근 그의 관심사의 단초라도 얻을 수 있을까 싶어 최근에는 어떤 책을 읽었는지 묻자, ‘근래 출간된 한국 소설을 몇 권 읽었는데 제목이 잘 생각이 안 난다’는 답이 돌아왔다.
최 교수는 연신 ‘별볼일없는 서재’라며 작업실로 쓰는 문간방으로 가자고 재촉했다. 문간방으로 향하며 둘러본 집안 풍경은 퍽 인상적이었다. 기자는 그동안 취재 때문이든, 친교 때문이든 중년을 넘긴 부부가 사는 집을 여러 번 방문했다. 공통적인 특징은 살아온 시간이 집안 여기저기에 널려 있다는 점이었다. 사진, 기념품, 오래된 전자제품, 이런저런 잡동사니. 최 교수의 집은 여느 집과는 좀 달랐다. 세월의 더께가 보이지 않는다고 할까, 꼭 필요한 것들만 꺼내놓은 듯했다. 거주하는 사람의 나이를 가늠하기 힘든 집이었다.
자생 풍수의 시조, 도선
작업실로 쓰는 방 안, 어깨 넓이 두 배쯤 되는 폭의 자그마한 앉은뱅이 책상 위에는 노트북이 올려져 있고, 그 옆에는 몇 권의 책이 각 맞춰 쌓여 있었다. 《도선비기 상중하》 《불교교리사》 《도선국사와 한국》 등 고려 시대 인물 ‘도선’에 관련된 책들이었다.
―도선에 관한 책이 많습니다.
“도선 평전을 쓸 생각입니다. 의문점이 굉장히 많은 사람이에요. 도선에 관한 기록이 거의 없어요. 신라 말기를 거쳐 고려 건국 시기를 살아낸 사람이에요. 신라 시대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사람이 갑자기 고려 시대가 되어서 고려의 지배 이데올로기가 된 거예요.
왕건의 집안에서는 도선을 대단한 사람으로 생각했지요. 그런데 죽은 지 150년이 지나서야 국사 칭호를 받았어요.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도 ‘한국 풍수의 시조는 도선이다’ 이렇게 나오는데 정작 기록이 없어요. 고려와 왕건에 관한 책을 읽으며 든 생각이, 왕건이 자신이 배반한 궁예에게 어떤 심리적인 빚이라고 해야 할까요, 죄의식 같은 걸 갖고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궁예가 포악해서 왕건이 모반을 일으켰다고 하는데, 사실 그 시절 호족 중에 포악하지 않은 사람이 있었을까요. 심리적 보상 때문에 궁예 대신 도선을 국사로 추대한 셈이죠.”
다시 방 안을 둘러보니 책장 하나를 통째로 차지한 전집 한 질이 보인다. 민음사에서 출간한 세계문학전집이다. 직접 구입했는지 묻자 ‘민음사에서 보내준 것’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최 교수와 민음사 박맹호 회장의 각별한 관계를 생각하면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대 교수직을 그만둔 후 1년 넘는 기간 동안 최 교수는 박 회장의 충청도 보은 집에서 생활했다. 2013년에 펴낸 《한국풍수인물사》 내지에는 ‘풍수 공부를 계속할 수 있도록 성원해 주신 박맹호 회장님께 이 책을 바칩니다’라는 글이 쓰여 있다.
―민음사에서 책을 많이 내셨는데 제일 많이 팔린 책은 뭡니까.
“저도 참 신기하게 생각하는데, 《한국의 풍수사상》이 가장 많이 팔렸고, 지금도 제일 많이 팔리는 책이라고 합니다. 어떤 분들이 구입하시는 건지 궁금해요. 책을 절판하지 않고 계속 내주고 있는 민음사에도 고맙고요. 민음사에 많은 임프린트 출판사들이 있지 않습니까. 거기서 나오는 신간이 저희 집으로 옵니다. 꽤 많은 양이라 어떨 때는 소화하기가 힘들 정도예요.”
‘참척을 당할 수도 있다’
—《한국의 풍수사상》에서 발복(發福)을 염두에 둔 ‘음택(陰宅)’, 즉 무덤 자리를 보는 풍수를 부정하고, 산 자가 거주할 집을 고르는 양택의 중요성을 강조하신 게 화제가 되었지요.
“부모가 죽은 후에도 기대려고 하는 건 너무한 것 아닙니까. 음택을 보는 건 중국에서 들어온 겁니다. 우리나라 고유의 자생 풍수에서는 음택을 보지 않았어요. 안 좋은 입지도 고치고 치유해, 더불어 같이 사는 상생을 추구하는 풍수였어요.”
—그러면 교수님의 부모님께서 돌아가셨을 때도 무덤 자리를 보시지 않고 모셨나요.
“저의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에 당신이 직접 무덤 자리를 지정하셨습니다. 돌아가신 후 형님이 걱정이 됐는지 저에게 좀 같이 가보자고 하더군요. 가서 봤더니 음택 풍수로 보자면 좋은 자리는 아니었어요. 하지만 그 자리에 서서 앞을 바라보니 왜 거기에 자신을 묻어달라고 했는지 아버지의 마음을 알 것도 같더군요. 당신이 개간하고 싶어했던 땅이었어요. 그래서 그냥 거기에 모시자고 했습니다.
당시에 ‘최창조는 어디에 부모 무덤을 쓰는지 보자’ 하면서 전국의 내로라하는 지관들이 아버지의 무덤 자리를 보고 갔다고 해요. 어떤 사람은 저에게 그 자리가 매우 안 좋은 자리라며 ‘(자손이 부모보다 먼저 죽는) 참척(慘慽)을 당할 수도 있는 자리다’라는 말까지 했어요. 그런데 그 후로 쭉 저희 집안에는 별일이 없습니다. 어머니는 수목장으로 모셨고요. 제 아들이 한번은 이런 말을 했어요. ‘아버지, 할아버지를 거기에 모셔서 아버지가 서울대에서 잘린 거 아니에요?’ 그래서 제가 ‘야 인마, 잘린 게 아니고 그만둔 거야’라고 했지요.”
서울대 개교 이래 최초로 자진 사직
인터넷을 검색해 보면 요즘에도 각지의 지관들이 ‘최창조 부친 무덤 답사기’를 쓰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전까지 전남대 지리교육과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최 교수는 1988년 서울대 지리학과로 자리를 옮겼다. 4년 후인 1992년에 서울대를 떠났다.
—서울대 지리학과 교수직을 그만두신 게 학계에서 큰 화제가 되었지요.
“서울대 교수라는 게 참 대단한 자리더군요. 그전에 전남대에 있을 때는 무슨 얘기를 해도 별로 문제나 이슈가 되지 않았어요. 전남대에 잘 있는데 통일부 장관을 지낸 류우익 교수가 저를 서울대로 이끌었어요. 안 가겠다 계속 거절을 하니, 저희 어머니한테까지 전화를 했어요.
서울대 교수가 되고 나서는 불편한 일이 거듭해서 일어났지요.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을 하니, 교수 체면에 자전거가 뭐냐는 말이 들어오고, 포니를 타고 다니니까 품위 없다고 하고, 넥타이 안 맨다는 지적도 받았으니까요. 저를 비난한 사람들이 각자 1년에 한두 번씩만 저를 건드려도 당하는 사람은 얼마나 자주겠어요.
제가 학교를 그만둔다니까 류 교수가 말렸지요. 사직서를 내러 가니까 교무 직원이 그래요. 서울대가 생기고 고위직에 임용이 된다든가 하는 이유 없이 스스로 그만둔 사람은 제가 최초라고요. 제 사직서를 수리하지 않으려고 당시 총장이었던 이수성 전 총리께서 출근을 안 하기도 했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후에 이문열 작가랑 여행을 갔을 때였나, 이런 얘기를 하더군요. ‘당신이 미디어에서 주목을 받았기 때문에 다른 교수들이 괴롭혔던 것’이라고요. 글쎄, 저는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때 서울대를 그만둔 걸 후회하시나요?
“아뇨, 단 한 번도 후회한 적 없습니다.”
재벌 총수와 풍수
학계에서 내쳐지다시피 한 그에게 손을 내민 건 기업이었다. 지난 1998년 작고한 SK의 최종현 회장이 바로 그 주인공. 손길승 당시 부회장이 집으로 찾아왔다. 몇 번 거절 끝에 이뤄진 만남에서 최 교수는 최 회장에게 왜 나를 만나려 했는지 물었다. 최 회장은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기업인은 이득이 나지 않는 곳에는 투자하지 않는다. 우리 회사 직원들은 전 세계를 상대로 비즈니스를 해야 한다. 그런데 도통 자신감이 없다. 이들이 자긍심을 갖게 하고 싶다. 우리나라에도 우리 고유의 것이 있었구나 알 수 있도록 해주면 안 되겠나.”
최 교수는 SK 임직원을 상대로 강연을 하기 시작했다. 기업인들과의 인연의 시작이었다.
—최종현 회장은 풍수를 믿었나요?
“이런 일이 있었어요. 최 회장님은 암으로 돌아가셨지요. 투병하실 때 워커힐 호텔 경내에 지은 집에서 살고 계셨어요. 그곳이 집터로 좋지 않다는 얘기가 SK 쪽으로 들어갔는지 최 회장님이 저에게 어떠냐고 물으셨어요. 가서 보니 과연 좋은 형국은 아니었어요. ‘전통 풍수의 관점에서 보면 이러저러한 이유 때문에 좋은 곳은 아닙니다’ 말씀드렸지요. 그랬더니 최 회장님이 그러더군요. ‘나는 이렇게나 많은 사람이 일하고 있는 큰 기업을 이끄는 사람이다. 그런 데에 신경을 쓸 수는 없다. 게다가 이 집은 내 소유도 아니다’ 결국 그 집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기업인들에게 풍수를 보는 지관들이 많이 접근을 하나 봅니다.
“한 번씩 재벌 총수들이 검찰조사를 받는 일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 기업의 회장 비서실로 편지가 빗발칩니다. ‘돌아가신 누구누구 회장님의 묏자리가 좋지 않아서다. 옆으로 1m만 옮겨도 좋아진다’ 등등의 내용이지요. 저에게 가져오면 제가 훑어보고 이렇게 얘기해 줘요. ‘1m 옮겨서 더 안 좋아지면 어떡하려고 합니까. 그런 문제가 아니니 신경 쓰지 마세요.’”
자생 풍수의 핵심은 裨補
황해북도 사리원시 정방산에 있는 성불사. 도선 국사가 창건한 걸로 알려져 있다.
—최태원 SK 회장도 풍수에 관심이 있습니까.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최종현 회장님이 돌아가신 후 한 번도 최태원 회장을 만난 적이 없어요. 손길승 전 회장님은 요즘도 가끔 만납니다. 예전에 을지로에 있는 SK텔레콤 사옥을 지을 때 손 회장님이 찾아오셨어요. 건물 설계도 두 가지를 내어놓더니 어떤 게 좋겠느냐고 묻더군요. 두 안이 아주 달랐어요. 그중에 한 가지, 일반적이지 않았던 디자인을 가리키며 ‘이걸로 정해졌군요’라고 말했지요.
그랬더니 손 회장님이 그렇다고 하면서 한숨을 내쉬더라고요. 사내 투표에서 이걸로 정해졌는데 건물이 휘어진 모양이라 괜찮겠느냐고요. 풍수적으로 보면 좋지 않은 모양이었어요. 그래서 제가 옥상에 일종의 ‘윈드차임’을 거는 게 좋겠다고 제안을 했습니다. 살기가 흩어지게 하려는 의도였지요. 그리고 회사 내에 ‘최아무개라는 사람이 이렇게 하면 괜찮다더라’라고 했다고 소문을 내라고 말씀드렸지요. 휴대폰과 관련된 회사라 건물 모양을 이렇게 만들었다는 소문도 내라고 했고요.”
—‘비보책’을 쓴 거군요.
“자생 풍수의 주요 특징 중 하나가 바로 비보(裨補)입니다. 1997년에 북한을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개성과 평양 지역을 둘러봤지요. 황해도 사리원 정방산에 있는 성불사도 갔었습니다. 도선 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오는 절입니다.
입지조건이 한마디로 이상했어요. 사각형 모양의 산지에 둘러싸인 분지의 중앙에 있어 정방산에서 내려오는 물은 다 이곳으로 모이는 거예요. 침수가 잘 될 수밖에 없지요. 그 당시 관리인이 장마철만 되면 법당 마당까지 물이 찬다고 말하더군요. 도선 국사가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이런 데에 왜 절을 세웠을까. 두 가지 목적이 있는 거예요. 하나는 상주하는 스님들을 홍수에 대비한 노동력으로 활용하고자 한 것. 두 번째는 어머니 같은 땅을 보듬고 치유하며 살겠다는 의지의 표명. 세상에 자애로운 어머니만 있는 건 아니잖아요. 땅도 마찬가지예요. 살기 좋은 명당만 찾아다니는 건 진정한 풍수가 아닙니다.”
‘봉건 도배의 터잡기 잡술’
1945년 9월 9일 아베 노부유키 조선총독은 항복문서에 조인했다.
—북한에서는 풍수를 믿던가요?
“말도 마세요. 가는 곳마다 안내원이 있는데, 하나같이 저를 보자마자 다른 말도 없이 이 말부터 하더군요. ‘봉건 도배들의 터잡기 잡술’을 왜 하냐고요. 대꾸하면 분위기가 이상해질 것 같아 그냥 듣고만 있었어요.
그렇지만 사상을 넘어 어떤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관념들은 완전히 벗어버릴 수 없지요. 좀 어울려서 친해진 다음 ‘부모님은 어디에 모셨습니까’ 물어보면 하나같이 얼굴에 화색을 띠며 이렇게 대답하더군요. ‘좋은 명당 자리를 찾아 잘 모셨습니다.’ 저도 모르게 나오는 거죠. 김일성종합대의 리정남 교수는 ‘봉건 도배의 잡술’ 대신 ‘민족지형학’이라는 표현을 썼던 게 기억납니다.”
—개성과 평양은 수도로 볼 때 어떻습니까.
“개성은 분지 지형으로 규모가 작습니다. 공기도 참 안 좋더군요. 주산인 송악산이 달아나려는 형국이라 비보를 썼다는 얘기가 있었는데 가서 직접 확인하고 왔지요. 오수부동격이라 해서 다섯 짐승이 서로 견제해 개성을 떠나지 못하게 하는 방책입니다. 쥐는 고양이를, 고양이는 개를, 개는 호랑이를, 호랑이는 코끼리를, 코끼리는 쥐를 두려워한다고 해서 이 다섯 짐승의 석상을 세워 안정을 도모한 방책입니다. 평양도 수도로 삼기엔 너무 좁아요. 게다가 퇴적 지형이라 부적합합니다.”
—그러고 보면 한반도 여기저기 답사를 많이 다녔습니다. 요즘도 답사를 다니고 강연을 하십니까.
“답사는 계속 다니지요. 지난여름에는 답사를 하다가 사고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길이 없는 곳까지 어떻게든 가서 봐야 풍수가 제대로 보이기도 하거든요. 그만 발을 헛디뎌 아래로 떨어졌어요. 앞니가 다 상했습니다. 치과에 갔더니 의사가 정말 행운이라고 하더군요. 머리가 깨지거나 했으면 어쩔 뻔했느냐고, 이가 상해서 다행이라고요.
강연은 웬만해서는 잘 안 나갑니다. 실컷 자생 풍수에 대해 얘기를 해도 강연이 끝나면 와서 물어보는 게 한결같아요. 부모님 산소 자리 평가해 달라는 얘기예요. 두 시간 동안 떠든 소리가 산소 자리는 중요하지 않다는 얘기였는데… 안 들었다는 거죠.”
청와대는 풍수적으로 어떨까
최 교수는 청와대의 입지를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최창조 교수는 청와대의 입지를 상당히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청와대 터는 경복궁의 내맥이 내려오는 길목입니다. 용에 비유하면 몸통에 해당하는 자리입니다. 땅을 훼손하지 말고 반드시 보호해야 하는 곳이에요. 《조선왕조실록》에도 지금의 청와대 터를 절대 건드리지 말고 보호하라는 지시가 여러 번 등장합니다. 이런 곳에 일본인들이 총독 관저를 지은 거예요.
김대중 대통령 시절 청와대에 들어가서 내부를 구석구석 돌아봤습니다. 양기가 상당히 세더군요. 저 같은 사람은 일주일도 못 버틸 정도입니다. 그런 면에서 현 대통령은 여성이라 조금은 나을 수도 있겠지요. 청와대만큼 양기가 센 곳은 계룡산에 있는 어느 골짜기 정도입니다. 한 여자분이 매일 치성을 드리며 살고 있더군요.”
최 교수는 청와대 얘기를 하며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과거 청와대에 살았던 인물과 그들의 운명이 적혀 있었다.
청와대를 지은 것은 제3대 조선총독이었던 사이토 마코토(齋藤實)였다. 청와대의 첫 주인이었던 그는 일본에 돌아간 후 1936년 젊은 장교들에 의해 살해됐다.
사이토의 뒤를 이어 총독이 된 야마나시 한조(山梨半造)는 뇌물을 받은 게 드러나 구속되고 총독 자리에서 물러났다. 7대 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郞)는 2차대전 전범 재판에서 무기형을 선고받았다. 8대 총독 고이소 구니아키(小磯國昭)도 연합군 군사 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지목돼 종신형을 선고받아 옥중에서 병사했다.
9대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는 항복문서에 조인해 미국의 하지 중장에게 건넨 치욕을 겪은 인물이다. 그는 한반도에 있던 일본인들을 외면하고 짐을 가득 실은 배에 가족들만 태워 부산에서 일본으로 도망치다가 폭풍을 만나 짐을 다 잃고 부산으로 되돌아오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광복 후 그곳을 차지한 인물들의 운명도 순탄치만은 않았다. 감옥에 간 것만도 여러 명이고 심지어 자살자도 나왔다. ‘다른 곳으로 그 터를 옮겨야 해결될 문제’라고 최 교수는 말했다.
행정수도 이전 반대했다가 전화 폭탄
최 교수는 행정수도 이전에 적극적으로 반대하기도 했다. 지난 2004년 쓴 글에서 그는 ‘(행정수도 건설 예정지가) 도시가 될 수 없는 성격의 땅이었기에 지금까지 그런 용도로 사람들이 의지해 온 곳’이라며, ‘좋고 나쁨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용도에 맞느냐 맞지 않느냐의 문제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웬만한 고위관료와 기업 임원들은 서울을 본가로 삼아 출퇴근을 할 것이 자명’하다고 했다. 그의 예언은 그대로 현실이 됐다.
—행정수도 이전에 반대한 것 때문에 노무현 대통령 재임 시기 한동안 고초도 겪으셨지요.
“그것 때문에 전화번호를 바꿔야 할 지경이었습니다. 행정수도 논란 이전에도 항의전화를 받은 적이 있었어요. 음택에 대한 저의 주장 때문이었어요. 성균관의 유생들로부터 수도 없는 전화를 받았어요. 이분들은 기본적으로 토론을 하는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신 분들이었어요. 일출 후와 일몰 전에만 전화를 하셨고, 자신의 주장과 그 근거를 논리를 갖춰 설명해 주셨지요. 물론 제 생각이 바뀌지는 않았지만요.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 지지자들은 달랐습니다. 제 번호가 어떻게 퍼졌는지, 한밤이고 새벽이고 시도 때도 없이 전화를 합디다. 받자마자 다른 말도 없이 육두문자부터 날리더군요. ‘네가 뭔데 노 대통령의 뜻을 반대하느냐’는 게 주장의 핵심이었습니다. 가족들이 많이 속상해 했지요.”
—명당은 결국 무엇입니까.
“‘기찻길 옆 오막살이’라는 동요가 있지요. 기찻길 옆은 최악의 주거 입지조건입니다. 오막살이는 최악의 주거환경이고요. 그런데 아기는 그곳에서 잘도 잡니다. 그 아기에게는 거기가 명당인 셈이지요. 명당은 찾는 게 아니라 만들어가는 겁니다. 자신에게 맞는 곳에서 자신에게 맞는 방법으로 생활하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인생을 연극이라고 치면, 땅은 무대입니다. 좋은 무대를 만들려고, 땅을 고르고 꾸미지요. 그렇지만 아무리 무대를 잘 꾸며도, 각본이 나쁘고 배우가 연기를 못하면 제대로 된 연극이 나올까요. 결국 중요한 것은 땅 위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각과 행위입니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진 게 그 위에 부실하게 건물을 지은 인간의 탓이지, 땅의 잘못이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결국 중요한 건 사람, 풍수는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기 위한 ‘사람의 지리학’입니다.”
그 말을 듣자,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당대의 풍수연구가가 그만의 선유동에 앉아 제목도 기억 못 할 현대 소설을 읽어대는 이유를 말이다. 그는 사람들을 읽고 있는 것이다. 이 땅 위에서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을 읽어내고 이해하며, 최창조는 느린 걸음으로 자신의 지도 위에 명당의 이정표를 세우고 있다. 마치 그의 아버지가 그랬듯이 말이다.⊙
풍수연구가 최창조의 추천도서
책을 몇 권 추천해 달라고 하자, 최 교수는 별 망설임 없이 두 권을 댔다. 《쿠오 바디스(Quo vadis)》와 《오만과 편견(Pride and Prejudice)》. 최 교수는 “학창 시절에 읽었던 책입니다. 《오만과 편견》은 지금은 내용도 잘 기억이 안 나지만 읽었을 때의 느낌은 간직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쿠오 바디스 : 폴란드의 작가 헨리크 시엔키에비치(Sienkiewicz)가 쓴 서사시다. 폴란드 출신의 기독교 신자인 리기아와 로마 귀족 마르쿠스 비니키우스의 사랑을 그리며, 고대 로마의 부패와 잔인함을 묘사했다. 폴란드 민족의 운명을 은유적으로 예언한 이 작품으로 작가는 1905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오만과 편견 : 영국의 작가 제인 오스틴(Austen)의 작품으로 현재까지도 영문학의 고전으로 읽히고 있다. 19세기 초반 잉글랜드의 전원마을을 무대로 엘리자베스와 달시의 연애를 통해, 당시 오스틴이 속해 있던 사교계의 폐쇄적인 문화를 그려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