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 대자집에서 간단히 구운 계란과 과일을 먹고
6시 30분 경 홍천성당으로 향했다.
어제 감곡에서 마쳤으면 이번 여행에서 가지 못할 성지인데
여주까지와서 숙박을 했기에 그리운 사람들도 만나고
홍천성당과 풍수원 성당까지 순례하게 된 것이다.
1시간 남짓 운전하여 홍천에 도착하니 시외터미널이 나오며 식당들이 영업을 했다.
그 동안 아침에 영업하는 음식점이 없어서 아침을 제대로 먹지 못했기에
얼른 차를 주차시키고 여러 음식점 중에서 '가보자토종순대국밥'을 택했다.
집에서 홀로 집을 지키고 있을 친구가 생각이 나서 뼈해장국을 시켰다.
그리고 뼈는 주인에게 포장해 달라고 했다.
날씨가 추워 며칠 후까지 상하지는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24시간 영업을 하는 집을 비롯해 5~6개 업소가 영업중이었다.
아마도 군부대도 있고 버스터미널 근처이기 때문인것 같았다.
제시간에 아침을 처음 먹은 것 같다.
79. 홍천 성당
홍천 지역에 언제 천주교 신앙이 전파되었는지는 불분명하나
1903년 풍수원 본당 교세 보고서에 송정 공소가 언급된 것으로 보아
공소 설립 시기는 1902-1903년 사이로 추정된다.
홍천 성당은 1950년대 석조 성당의 전형을 보여주는 건축물로
보존 및 연구 가치가 높아 2005년 4월 15일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162호로 지정되었습니다.
80. 풍수원 성당
1888년 6월 본당이 설립된 풍수원 성당은 1909년에 낙성식을 가진 건물로서
한국인 신부가 지은 첫 번째 성당이고 한국에서 네 번째로 지어진 성당이다.
또한 강원도 최초의 서양식 벽돌건물이자 한국에서 일곱 번째로 지어진
고딕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이다.
특히 이 성당은 신자들이 직접 벽돌을 굽고 아름드리 나무를 해오는 등
건축 소재를 스스로 조달했는데 그 영성은 오늘날 신자들이 본받을 만한 것이었다.
또한 1982년에 강원도 지방 문화재로 지정된 역사적 유물이기도 하다.
81. 강원 감영
강원 감영(監營, 觀察使營)은 강원도 관찰사가 정무를 보던 청사로,
강원도에서 원주가 가졌던 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 줄 뿐만 아니라
옛 감영의 모습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 상황에서 조선 시대 감영의 모습을 보여 주는
귀중한 장소이자 건물이라 할 수 있다.
전국 각 지방의 감영(監營)은 천주교도들을 잡아들여
이들에게 배교를 강요하고 온갖 고문을 일삼았다.
그래서 어느 감영이든 대부분 그때 흘린 순교자들의 피와 고통의 역사가 전해져 온다.
원주 강원 감영의 박해 역사도
대부분 문헌으로 남지 못하고 다만 구전으로 전해지고 있다.
82. 원동 주교좌 성당
천주교 원주교구 주교좌 본당.
본래 명칭은 원주(原州) 본당이었으나 1957년 6월 1일
원주시 학성동에 본당을 분할하면서 원동으로 개칭하였다.
1896년 8월 17일 풍수원(豊水院) 본당에서 분리 · 신설되었으며,
주보는 천주 은총의 모친.
원동 성당은 건축사적으로 돔형 종탑의 독특성과 양호한 보존상태
그리고 1970년대 민주화 운동과의 관련성 등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04년 12월 31일 대안리 공소(등록 문화재 제140호)와 함께
근대문화유산 등록 문화재 제139호로 지정되었다.
83. 대안리 공소
“정오에 한강 지류(支流)를 건너 맞은 편 여인숙에서 점심을 들었다.
거기에 대안리 교우들이 마중 나와 있었다.
아침에 40리 길을 왔고, 오후에 갈 길은 가까운 30리이다.
10리쯤 남겨 두고 아름다운 무지개와 함께 비가 내렸다.
조제 신부가 기다리고 있었다.
11월 12일, 성당에는 드브레 신부가 만든 신부 방이 딸려 있다.
축성해 달라고 했다. 그것은 진짜 성당이기에 성당 축성 예절로 축성했다.
성당은 성모님께 봉헌되었다. 미사를 드리고 35명에게 견진을 주었다.
성당 축성을 하기 위해 큰 잔칫상이 차려졌다”
(뮈텔 주교의 1910년 일기 중에서).
원주교구 대안리 공소(원주시 흥업면 대안 1리 659)의
초창기 역사를 알려주는 거의 유일한 기록이다.
84. 용소막 성당
강원도에서 세 번째로 설정된 100년이 넘은 성당
용소막 성당은 강원도에서는 풍수원, 원주에 이어
세 번째로 1904년에 설정된 교회다.
병인박해 이후 수원 지방에서 피난 온
몇몇 신자 가족들로 교우촌이 형성된 이곳에는
성모영보수녀회를 설립하고 성경 번역에 큰 자취를 남기고 선종하신
선종완 라우렌시오 신부의 유물관이 설치되어 있다.
▒ 선종완(宣鍾完) 신부
선종완(1915~1976, 라우렌시오) 신부는
성서학자이며, 성모영보수녀회 설립자다.
1958년부터 1963년까지 구약 성경을 나누어 번역하였고,
1960년 3월 5일 3명의 수녀 지원자로 성모영보수녀회를 설립하였다.
1968년부터 8년간 신구약성경 공동 번역의 가톨릭 전문 위원으로
성경 번역 사업에 힘을 쏟아,
선종 전날 병상에서 원고 교정을 모두 마치는 정열을 보였다.
85. 묘재
묘재는 남종상 요한 성인의 아버지인 남상교 아우구스티노가 관직에서 물러나
신앙생활에 전념하기 위해 이사한 곳으로 남종상 성인이 살던 곳이다.
이곳은 1백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남종삼 성인과 그 부친 남상교(南尙敎, 1784-1866년) 부자의
뜨거운 신앙과 애끊는 육친의 정이 넘쳐흐른다.
남종삼 성인은 103위 한국 성인 중에서 가장 높은 벼슬에 오른 분이다.
86. 배론 성지
심산유곡(深山幽谷), 계곡이 깊어 배 밑바닥 같다고 하여 '배론'이라 불린다.
한국의 카타콤바라 할 만큼 풍성한 신앙의 유산을 지닌
배론의 옹기 토굴에서는 명주 자락에 1만 3천 3백 11자로
울분과 신심을 기록한 '황사영 백서'가 쓰여졌고,
바로 옆의 초가에서는 이 땅 최초의 서구식 대학인 신학당이 섰으며,
김대건 신부에 이어 한국인으로는 두 번째 신부였던
최양업 신부가 이곳 배론에 묻혀 있는 것이다.
사람의 눈을 피해 신앙을 지켜 가던 옹기 마을에
최초로 역사적 사건이 터진 것이 바로 황사영 백서 사건이다.
창원(昌原) 황씨 성을 가진 사영은 나이 16세에 장원급제,
정조가 친히 등용을 약조할 만큼 앞길이 창창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정약종으로부터 천주학을 전해 듣고는
알렉시오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벼슬길을 마다하고 고난의 길을 택한 그는
1801년 신유박해가 터짐과 동시에
서울을 빠져 나와 배론으로 숨어든다.
그 해 8월 주문모 신부의 처형 소식을 들은 그는 낙심과 의분으로
북경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는 탄원서를 적는다.
하지만 백서를 품고 가던 황심이 붙잡히고
황사영도 대역무도 죄인으로 능지 처참의 극형에 처해진다.
이 때가 그의 나이 27세.
이 사건으로 그의 홀어머니는 거제도로, 부인은 제주도로,
외아들 경헌은 추자도로 각각 유배되고 십수 명이 공범으로 처단된다.
백서의 원본은 근 1백여 년 동안 의금부 창고 속에 숨겨져 있다가
1894년에야 비로소 빛을 본다.
뮈텔 주교는 1925년 한국 순교자 79위 시복식 때 이를 교황 비오 11세에게 봉정했고,
현재 백서는 바티칸 박물관 내 선교민속 박물관에 소장 · 전시되어 있다.
제천 ES 리조트 숙소로 가는 길에 약초 밥상 '원뜰'에서 이른 저녁을 먹었다.
메뉴판에 있는 약초로 빚은 '남자술' 한 잔을 시키니
주인장 왈 30도가 넘는 술이라 운전은 못한다고 했다.
믿음직한 기사분이 옆에 있어 괜찮다고 하여 한 잔 했는데
추웠던 몸이 스르르 녹아내리는 듯 했다.
나오면서 제천약초가 유명하기에 당귀와 둥글레를 구입했다.
5시경 숙소에 이틀 묵을 짐을 풀고 그 동안 누적된 피로를 풀었다.
숙소가 25평은 되는 것 같아 2명이 쉬기에는 운동장 같았는데
이틀 전 묵었던 공주한옥마을 행랑채 5배는 되어 보였다.
예약해준 조카에게 전화를 걸어 고마움을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