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년간의 로맨스?
소울메이트. 이 말에 담긴 감정은 어쩌면 ‘연인’이라는 말에 담긴 감정보다 더 애틋하고 각별한 느낌을 자아낸다. 사랑보다 더 깊은 감정ㆍ 그런데 그런 게 과연 가능할까? 특히나 남녀 사이에서, 연인이 아닌 소울메이트로 지낸다? 그것도 한두 해가 아닌 20년을ㆍ사랑보다 더 깊은 감정으로 사랑하는 것, 《원 데이》는 그 묘한 감정의 출렁거림이 실제로는 어떻게 펼쳐지는지를 영화의 장면장면처럼 생생하게 번갈아가며 보여준다.
1988년부터 2007년까지 20년간의 7월 15일. 그 하루의 스토리들을 통해 독자들은 두 주인공 덱스터와 엠마(“Dex & Em, Em & Dex”)의 생각과 마음, 주위환경 따위의 변화를 느끼고 이해하며 함께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의 제목은 《원 데이》, 그날 하루이다.
대학 졸업 파티가 있던 날 밤, 부르주아가 주는 모든 느낌을 즐기는 덱스터와 “부르주아=파시스트”라는 등식을 신봉하는 엠마는 한 침대에서 새벽을 맞는다.
길고긴 입맞춤을 나누며 엠마는 4년 동안 은근 짝사랑해 오던 덱스터에게 여느 여자와는 다른 무엇이 되고 싶었다. 날이 밝으면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될 것임을 뻔히 알면서도.
덱스터에게 원 나잇 스탠드는 그닥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대학시절 늘 시위대 맨 앞에 서 있던 엠마에게 느꼈던 흥미도 그리 유별난 게 아니었다. 그런데 싸구려 침대보가 덮인 엠마의 좁은 침대 위에서 그는 반짝이는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된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여자에게서 느껴보지 못했던 그 어떤 특별한 감정을.
2. 원 나잇, 노 스탠드, 그리고 그 후의 20년
그렇게 ‘원 나잇, 노 스탠드’로 끝난 1988년의 7월 15일, 그날 하루가 특별히 불거져 나와 두 주인공 덱스터와 엠마의 인생의 앞날은 얼마나 크게 달라졌는지 모른다. 물과 기름 같기만 하던 두 남녀가 “같이 뭔가를 하고 싶어”(p.28) 하는 소울메이트로서 펼치는 20년을 거칠게라도 살펴보자.
20대 초반은 두 사람에게 전혀 다른 시간들을 선물한다. 폭발적인 에너지로 치열한 시간을 사는 엠마와 치기어린 멋으로 가득 찬 덱스터의 시간은 그리움과 현실을 저울질하며 조금씩 우정이란 이름으로 자리 잡는다.
20대 후반, 덱스터는 어느새 인생의 모든 것을 경험한다. 우연한 기회에 시작한 텔레비전 업계에서의 성공은 덱스터에게 유명인으로서의 새 생활을 안겨주지만, ‘미디어 피플’로서의 그 화려한 삶 가운데서 덱스터는 인생의 중심점이었던 어머니의 병환으로 휘청거린다. 엠마는 그렇게 무너져가는 덱스터를 애정 어린 안타까움으로 잡아주고 싶었지만, 두 사람 사이의 감정선은 안타깝게 자꾸 엇갈리기만 한다. 하긴, 그런 엇갈림이 없었다면 엠마와 덱스터는 ‘그렇고 그런’ 연인으로 끝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전혀 색다른’ 소울메이트가 아닌!
엠마의 30대 초반은 교사로서 보람찬 인생을 거쳐 작가로서 발돋움하는 시기였다. 찌질한 레스토랑 매니저로 발목이 잡힌 듯하던 그녀의 인생은 그제야 제 길을 찾은 듯 보였다. 다만 한 가지, 덱스터가 그녀의 인생에서 빠져 있다는 것 말고는.
30대 초반은 덱스터에게 잔인했다. 그는 더 이상 인기몰이 유명인이 아니었고, 특별한 여인이라고 믿었던 실비와의 ‘속도위반’ 결혼은 그를 다른 세상 사람으로(무엇보다 ‘한때 유명인이었던 평범한 아빠’로) 만들었다. 그는 새로운 자신에게 전혀 만족할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엠마와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었다는 것. 그가 결혼을 하고 아빠가 되는 모습을 엠마는 절친으로, 아이(재스민)의 대모로 덱스터의 곁을 지켜주었다. 물론, 얼떨결에 덱스터의 결혼 소식을 들은 엠마의 맘은 착잡하다. “내가 너 안 보는 동안, 매일 매일, 정말 날마다 난 네 생각을 했어. 이렇게든 혹은 저렇게든. … 그런데 오늘 여기서 널 보니까, 그래, 내 베프를 다시 찾았구나 싶었거든. 그런데, 결혼에, 아기에! 덱스, 나 너 때문에 정말 정말 행복해. 그런데 이상하게도 난 또 너를 잃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든다.”(pp.464~465)
뉴 밀레니엄에 접어든 30대 중반, 덱스터는 모든 것을 잃었고, 이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어 파리생활을 즐기고 있는 엠마를 찾아간다. 엇갈리기만 하던 서로에 대한 감정을 확인한 두 주인공의 30대 후반은 너무나 행복하고 순탄해 보이며, 그 나이대에 걸맞게 안정되어 보인다.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감정을 얘기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렇게 산전수전 다 겪은 친구 사이에는 어여쁜 표현이나 다정한 관심 같은 게 불필요해지는 것 같았다.” 작가는 그런 토마스 하디의 말로써 30대 후반을 다룬 4부를 여는 에피그램을 삼고 있다.
그런데, 클라이맥스를 지나 해피엔딩을 앞둔 듯하던 덱스터와 엠마의 러브스토리는, 그러나 큰 반전으로 요동친다. 세인트스위딘스데이(7월 15일)에 비가 내리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인생은 코미디뿐만 아니라 비극으로도 구성된다는 사실을 저자는 이 책 한권으로 단단히 일러주겠다고 단호히 맘을 먹은 듯, 비 내리는 런던 거리에서 여주인공 엠마 몰리는 인생의 가장 행복해 보이는 정점에서 홀연 숨을 거둔다. 그리고 그 상처를 견뎌내야 하는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도 다시 그 7월 15일(“예전까지는 대수롭지 않던 날이었으나, 우울한 무게감을 갖게 된”[p.648] 그날)을 중심으로 애잔하게 펼쳐진다.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주인공들의 생각과 삶의 모습은 독자들을 깊이 빨아들인다. 세월이 흐르며 변하는 게 있고,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게 또 있다. 그 굵직한 주제를 흡인력 강한 구도 속에 탁월하게 녹여낸 《원 데이》, 그래서 “『시간여행자의 아내』 이후로 이토록 별난 러브스토리를 본 적이 없다. 어떤 독자든 이 이야기에 흠뻑 빠질 테고, 어떤 작가든 자신이 이 이야기를 썼더라면 하고 바랄 것이다.”(토니 파슨스)라는 평가를 자아내는 것이다.
3. 또 하나의 주인공: 러브스토리 + 사회소설
엠마와 덱스터의 20년간의 어울림을 따라가다 보면, 그날 하루, 7월 15일에 마치 모든 게 일어난 듯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 소설의 또 다른 주인공은 ‘그 20년 내내 끊임없이 변화해온 영국사회’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에든버러에서 대학을 졸업한 두 사람은 ‘뉴 레이버’라는 기치를 내건 토니 블레어의 노동당이 집권하기 직전, 격렬한 인두세 시위가 벌어지곤 하던 런던으로 근거지를 옮긴다.
젊은 주인공들에게 그곳은 기회의 땅 같아 보였다. 누군가(가령 덱스터)는 그 기회를 잡는가 하면, 누군가(가령 엠마)는 그 도시 앞에 굴복하고 말았다.
성공한 젊은 미디어 피플이 맘껏 누리는 런던의 흥청망청하는 분위기, 공립학교에서의 고군분투 ‘카르페디엠’ 실험, 스탠드업 코미디언의 꿈을 키우는 젊은이(‘섹스 유머로 무장한 촘스키’의 꿈!), 결혼식 패턴의 변화, 런던 교외화와 외국인노동자들의 유입, 트레이시 챕먼, 자미로콰이, 매시브 어택, 더 스미스, 퍼블릭 에너미 등의 뮤지션 이야기, 국제사면위원회, 출판업계, 금융업계, 외식업계 등 런던 특유의 사회경제적 무늬들 등 1988년부터 2007년까지 영국 사회와 문화, 정치지형이 변화하는 모습들이 촘촘하게 얽히고설켜 어디서도 접하기 힘든 ‘사소한 디테일들의 스펙터클’을 만들어 보여준다. 번역자 후기에 쓰여 있듯, 이런 스펙터클한 디테일들은 “영화의 휙 지나가는 거친 화면으로는 좀처럼 메워지기 힘든, 섬세한 텍스트가 아니면 접하기 힘든 풍경들”(p.685)을 살필 수 있게 해준다.
이는 무엇보다 원저자 데이비드 니콜스가 세심하게 의도했던 바이기도 하다. “책을 쓰며 90년대 음악을 잔뜩 찾아 들었다. 그 시절의 옛 《라디오타임즈》 목록을 뒤지며 그때 TV에 뭐가 나왔는지를 살폈다. 그 시절에 블레어와 다이애나 얘기만 있었던 건 아니다. 이 책은 두 소울메이트의 사랑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그 시대를 수놓았던 사소한 디테일들의 스펙터클을 기록한 것이기도 하다.” 그 결과, 탁월한 영국 사회소설의 전통이 애틋하고 감동적인 러브스토리와 만났다. 달콤하고도 별난 러브스토리이면서 동시에 예리한 사회소설로서 이 책을 읽을 수 있는 까닭이다.
이와 관련한 닉 혼비의 평가를 보자. “큼지막한 구도이면서도 빨아들이는 맛이 탁월하다. 어찌나 신통방통한지 술술 읽어내리게 된다. 지나온 우리 시대 20년간의 문화와 정치의 디테일들이 살아 숨 쉬는 소설이다. ‘휴가지 소설’임을 내세우는 책들에 늘 속아온 독자들에게 꼭 휴가지로 들고 가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은 책이다.”(닉 혼비) (참고로, 닉 혼비와 데이비드 니콜스는 2009 더램 북 페스티발에서 “관계에 대하여”란 주제의 대담 프로그램을 무대에 올린 바 있다.)
4. 영화화: 앤 해서웨이가 선택한 로맨스
2012년 겨울 개봉한 영화 《원 데이》는 원작자인 데이비드 니콜스이 직접 각색하고, 《언 에듀케이션》으로 명성을 얻은 네덜란드 출신 감독 론 쉐르픽이 메가폰을 잡았으며, 세계인이 사랑하는 배우 앤 해서웨이가 주연을 맡았다. 뉴욕에서 태어난 미국 처녀 앤 해서웨이는 어떻게 요크셔 태생 영국 처녀 엠마 몰리를 연기하게 되었을까?
“이 소설을 읽기 전에 시나리오부터 먼저 봤어요. 부엌 식탁에 앉아 읽었는데, 세상에, 몇 시간이 흘렀는지 어느새 가족들이 내 옆에 앉아 저녁식사를 하고 있는 거예요. 완전 푹 빠졌던 거죠. 마법에 홀린 듯한 그런 경험이었어요. 이렇게 사랑스런 영국 아가씨 캐릭터를 미국 여자가 연기한다는 게 웃기는 일이긴 하지만, 전 당장 제 매니저에게 전화해서 제가 반드시 이 엠마 몰리 역을 맡아야 한다고 일렀어요.”
데이비드 니콜스는 오랜 연기자 경력을 지닌 작가다. 그래서인지 그의 책을 읽다보면 영화의 장면들이 지면 위에 펼쳐지며 살아 움직이는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