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4월 22일 (금) 충남 논산시 연무읍에 견훤왕릉이 있다 왕릉 올라 가는 길 (이 곳에 수록된 사진들은 크릭하면 모두 크게 볼 수 있음) 후백제를 세워 후삼국 시대를 열었던 견훤은 본래 신라 사람으로 농민군 출신의 아자개(阿慈介)의 아들로 상주 가은현(지금의 문경) 에서 태어났다. 15세때 스스로 성을 견씨로 고친 견훤은 신라의 군인이 되어 공을 세워 비장의 자리에 오른후 신라에 반감을 가진 사람들을 모아 세력을 형성했다 한달 반 사이에 그를 따르는 자가 5,000명이나 되자 서기 892년(진성왕6)에 지금의 광주를 공격해 나라를 세울 기반을 다졌으나 스스로는 왕이라고 하지 않았다. 견훤은 지금의 전주를 차지하고서야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라 했다. 서기 900년의 일이다. 궁예의 후고구려 보다 1년 앞선 때였다 그런데 견훤왕은 왜? 이 곳 논산 땅에 뭍혀 있을까. 정말 이 땅에 뭍혀 있긴 한것인가? 천년도 더 전의 일이니 가늠조차 할 수 없지만 역사가 말하고 있으니 믿을 수 밖에...... 견훤에겐 열명도 더 되는 아들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그 중 4째 아들인 금강에게 왕위를 물려 주려고 했는데 금강의 형들인 신검,용검,양검이 반란을 일으켜 견훤을 모악산 금산사에 가두었다 천신만고 끝에 사위 박영규의 도움으로 금산사를 탈출한 견훤은 왕건에게 자신을 의탁했다. 그의 슬픈 운명의 시작이였다. 자신이 세운 나라를 자신이 없애버리겠다고 왕건에게 군사를 내어 달라고 요청했다. 자신을 배반한 아들들을 직접 벌하겠다고.... 이렇게 후백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936년(고려 태조 19) 의 일이였다. 견훤은 울화병으로 죽었다. 견훤은 죽기전에 자신이 나라를 세웠던 전주가 보이는 곳에 묻어주길 원했다.그래서 맑은 날이면 전주가, 모악산이, 보이는 이 곳에 묻힌 것이다. 견훤왕릉이 이곳에 있는 이유다. 어쨌거나 참으로 슬픈 역사의 현장에 한 참을 머물다 나왔다 그때를..그때를..생각하며..돌아서는 내 마음은 붉어 졌다. 서촌교회 앞에 핀 붉은 벚꽃처럼.. 은진미륵으로 유명한 관촉사가 있는 마을을 대바우" 마을이라고 한다. 마을에는 죽암이라고도 하는 거북 모양의 큰 바위가 있는데 옛날 표진강이 마을 앞으로 흘렀을 때 배를 매었다 하여 배바위 라고 부르던 것이 변형되어 대바우"가 되었다고 한다. 관촉사의 일주문 일주문 뒤에는 매표소와 천왕문이 있는데 천왕문 내에는 사천왕상이 모셔저 있다. 불법을 수호하는 네 명의 외호신(外護神)이다. 왼쪽 윗 사진은 남방신인 증장천왕으로 오른손에 용을 잡고 있고 오른쪽 윗 사진은 서방신인 광목천왕으로 왼손에 탑을 들고 있다. 아랫쪽 왼편 사진은 북방신인 다문천왕으로 비파를 들고 있으며 아랫쪽 오른편 사진은 동방신인 지국천왕으로 칼을 들고 있다. 관촉사로 오르는 계단 옆에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추모비가 있다. 관촉사의 대법당 대광명전 대광명전의 주존불은 비로자나불이다. 불상뒤의 탱화와 화려한 닫집 대광명전 문에 새겨 놓은 꽃 창살 문양 미륵전과 윤장대. 윤장대는 팔각으로 만든 돌릴 수 있는 책장이다. 5층이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고려시대의 4층 석탑 앞에 있는 배례석 (충남 유형문화재 53호) 이다 배례석은 사람이 올라 서던 곳이 아니고 부처님께 예를 올릴때 기물을 올려 놓았던 곳이다. 은진미륵과 석등은 보물이다.(관촉사석조미륵보살입상, 218호, 관촉사석등 232호) 고려 초기인 968년경 만든 석조미륵불은 우리나라 석조불상 중에서 가장 큰 불상으로 크기가 17.8미터나 된다. 관촉사 석등도 미륵불과 같은 시기(968년)에 만들었다.(크기 5.45미터) 조성연대를 알 수 있는 고려의 석등으로 대표작이다. 미륵불은 허리 윗부분(상반신)과 아랫부분(하반신)을 따로 만들어 암석에 조각한 발 위에 올렸다 관음보살로 왕이 세운 석상을 미륵이라 부르는 까닭은 왕의 의지와는 다르게 백성들은 더 나은 삶과 더 나은 미래를 원한 바램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미륵불에 의지하고자 했던 백성들의 고통이 관음보살을 미륵불로 만들었다. 그래서 미륵불엔 백성들의 눈물이 담겨있다. 미륵불 앞의 제단 천년을 두고 사람들은 이 제단앞에 엎드려 기도 했다. 삼성각 크릭하면 글씨를 크게 볼 수 있다. 미륵불에서 본 절 마당 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인연을 맺었다. 아름다운 동행 5670 대광명전이란 현판이 걸려 있던 큰 법당 후면엔 대웅보전이란 현판이 걸렸다. 관촉사 전경 관촉사의 석문에 해탈문이란 글이 새겨 있다. 안쪽에서 본 해탈문 천년전 부터 이 땅에 있던 풍경, 미륵불과 석등과 석탑. 입덕문은 돈암서원의 정문이다. 입덕문을 들어서면 마주 보이는 곳에 사계 김장생(1548~1631) 선생이 후학들과 강학을 하던 양생당 건물이 좌측에 서재(정의재)와 우측에 동재(거경재)를 거느리고 서 있다. 양성당 앞 마당의 비는 "돈암서원원정비"로 서원을 세우게 된 배경과 사계 선생의 행적을 새긴 비이다 비문은 송시열이 지었고 글은 송준길의 글이다. 제목은 김만기가 썼다 ( 2014년 10월 23일 촬영) 비 문의 일부 (동춘당 송준길의 글씨) 돈암서원의 강당인 응도당(凝道堂) 이다 응도당 측면에 비바람을 막기 위해 만들어 놓은 눈썹처마가 이채롭다. 돈암서원 현판이 걸려 있는 응도당의 우물 마루에서 눈을 감고 상상 속으로 들어갔다. 귀 기울이면 학동들의 글 읽는 소리가 들려올 것 같았다. 문화해설사 뒤의 건물은 서재와 장판각 그리고 사당이다. 좌로부터 장판각, 사당, 그리고 김장생 선생이 강학하던 양생당과 서재(정의재) 건물이다. 정회당 건물을 꽃들이 에워 쌓았다. 아! 나른한 봄 풍경이여.... 마음이 허허롭다. 책을 찍어내던 판본들이 보존되어 있는 장판각 장판각 뒤에 있는 사당으로 들어 가는 내삼문은 삼문이 서로 떨어져 있는 특이한 구조다 사당인 숭례사. 이 곳엔 김장생선생과 그의 아들 김집, 그리고 송시열과 송준길선생의 위패가 모셔있다. 서원은 1543년 풍기에 최초의 백운동 서원이 세워진 이후 전국에 많은 서원이 세워지기 시작 했는데 돈암서원은 1634년(인조12) 에 김장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했다. 현종 원년인 1660년에 사액서원이 된 돈암서원은 1871년(고종8년)에 시행된 서원 철폐령 떼에도 훼철되지 않고 남은 47개 서원중의 하나이다. 밤중에 조명을 했던 시설인 정료대"다. 불우리,관솔대' 라고도 한다. 전사청 고려태조 왕건이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후삼국 통일의 과업을 완성한 후 창건 했다는 개태사 서기 936년 이 곳 황산벌에서 견훤의 아들 신검으로 부터 항복을 받은 왕건은 통일의 대업은 부처님의 은혜와 하늘의 도움이라 여기고 황산을 천호산으로 개명하고 개태사를 창건했다. 그래선진 몰라도 개태사에는 왕건의 어진을 모신 어진전이 있다. 사진은 어진전의 모습. 전각안에 모셔 있는 고려태조 왕건의 어진 대웅전인 극락대보전의 소박한 모습 극락대보전내에 모셔저 있는 삼존석불입상(보물 제219호) 모든 사진은 크릭하면 크게 볼 수 있음 우측 석불입상의 아랫부분. 개태사의 철확 철확은 큰 솥으로 지름이 3미터, 높이가 1미터, 둘레가 9.4미터나 된다. 뫼산자 (山) 모양으로 지은 요사채 대웅전에서 바라 본 황산(천호산)의 모습 김장생 묘소 입구의재실앞에 세워진 비 (울당 김선생 각제 기사비) 김장생 묘소 일원(기념물 47호) 앞에 있는 광산김씨 문중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은 건물 재실인 염수재이다. 언제 지은 건물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입구에 효자 김재경의 정려가 1864년(고종1) 에 내려진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지어진 집이란건 알 수 있다. 대문을 들어 서면 전면에 4칸짜리 건물이 보이는데 재실인 염수재(念修齋)다. 염수재 앞의 잘 다듬지 않은 정료대가 오히려 정감이 있다. 염수재 좌측 뒤로 사당으로 가는 길이 있다. 김장생과 두 부인을 모신 불천위사당이다. 사당 뒷쪽에 김장생선생의 묘가 있다. 김장생 선생의 묘는 제일 위쪽에 곡장이 둘러 있는 묘이다. 석물이라곤 문인석 한쌍과 혼유석과 묘비 뿐이다. 묘비와 묘를 바라보며 우측에 있는 문인석 묘의 후경 선생의 묘에선 사당과 재실과 멀리 천호산까지 보인다. 여긴 계백장군의 유적지다. 사진은 황산벌이 잘 보이는 곳에 지어 놓은 황산루 이고. 전망대에서 본 황산벌. 서기 660년 계백장군이 이 곳 어디에선가 5,000의 군사를 이끌고 5만의 신라군과 맞섰던 곳. 얼마나 절망적이고 얼마나 비통 했을까 그럼에도 4전 4승을 하며 이틀간이나 버텼던 위대한 장군 그이름 부여계백. 님의 이름은 영원히 빛나리라. 계백장군의 묘 사당인 충장사 계백장군의 동상이 있는 언덕에서 바라 본 황산루 장군의 동상 아래 바다같은 탑정호가 보인다. 윤증 선생의 고택앞에 있는 연못이다. 천원지방을 상징하는 네모의 못에 둥근 섬을 만들었다. 윤증고택 주변에 봄 꽃들이 활짝 피었다. 고택의 사랑채이다. 누마루 위에 "이은시사"란 현판을 걸었다. 세속의 욕심을 버리고 은거하며 사는 집"이란 뜻이다 사랑채로 오르면 축대 위에 '일영표준"이라고 새긴 돌판이 있다. 윤증 선생의 11대손인 윤하중이란 분이 천체를 관측하기 위해 만든 표지석이라고 한다. 며느리 방이 있는 동쪽의 작은 공간에 있는 정원이다. 사랑채에 있던 신랑이 안채를 거치지 않고 작은 쪽문으로 몰래 들어올 수도 있고 재실이 있는 공간으로 나갈 수도 있고 담너머 바같 동정도 살짝 엿볼 수 있는 며느리만이 즐길 수 있는 비밀의 공간이다. 공연히 마음 설레이는, 이 집에서 제일로 마음에 드는 공간이였다.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 두근거리는.... 아 아!! 문고리를 잡는 상상에 행복하여라. 며느리의 방이다. 부엌 뒤의 작은 문이 며느리방 뒷문으로 통하는 작은 정원이 있는 곳이다. 대청마루의 뒷 문. 나무를 판자로 만들어 양쪽 문이 대칭 되도록 무늬를 맞춘 고급 인테리어다. 뒷 뜰의 장독대다. 해가 떠서 질때까지 하루 종일 볕이 지지않는 곳이다. 예전엔 집 터 였지만 지금은 장독으로 가득 찬 명재고택의 장독대를 돌아 봤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시계바늘 방향으로 돌며 쉴새없이 셔터를 눌러 댓다. 이 집 며느리가 지켜 볼지도 모른다. 며느리방 옆 정원을 따라 쌓은 담을 따라 걸었다. 사당을 돌아 동산으로 오르고 느티나무 옆에서 감탄도 하면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도 훈련이다. 윤증은 송시열의 제자였으나 윤증의 아버지가 죽은 후 행장을 쓰는 과정에서 둘의 사이가 틀어저 송시열은 노론으로 윤증은 소론으로 갈라섰다. 윤증이 소론의 영수가 된 이유다 1636년에 일어난 병자호란때 강화도로 피난했던 종친들과 사대부 그리고 백성들은 강화도가 청군에 함락되자 수모를 당하는 것이 죽음보다 못하다고 자결하는 이가 많았는데 김상용.김익겸,등 관료들은 물론 아녀자들도 부지기수였다. 이때 윤증선생의 아버지 윤선거도 모친,부인등과 함께 피난 갔다 부인만 자결하게 하고 혼자 살아 왔다고 해서 비난을 많이 받았다. 윤선거는 이후 부인에게 속죄하는 마음으로 평생 혼자 살다 죽었는데 이 때문에 노론과 소론이 갈라지는 계기가 됐다. 윤증고택 입구에 있는 정려각이다 윤선거의 부인 공주이씨를 기린 정려이다. 윤증고택과 이웃해 있는 노성향교. |
출처: 바위솔 원문보기 글쓴이: 바위솔
첫댓글 ~이렇게 자세한 설명과 영상이 마치 직접 탐사하는 느낌입니다. 소중한 자료 잘 읶히고 갑니다.~~~
너무나 자세한 설명과 다시 또현장에서 설명을 듣는 느낌입니다 정말감사합니다
이보다 더 정확하고 자세한 자료는 박물관에도 도서관에도
없을것 같습니다 미처 못보고
몰랐던 장소랑 해설을 여기서
다시 보고 알게되어 감사드립니다 정말 수고 많이 하신 덕분에 유익한 시간 갖게되어 감사드립니다
열심히 보고 들으며 공부한다고 했는데...
봄정취에 취해서 잠시 지나쳤던 공부를 사진보고 설명글 읽고 다시합니다.
탐방날 애 많이 쓰셨구요..좋은곳 탐방하게 됨음 감사 드립니다.
논산 여행은 아름다움 그 자체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직접 탐방하여 해설을 들으며 보았으나 ,현장사진과 함께 자세한 설명을 글로서
올려주시니 재미있고, 머리에 저장이 되는듯 합니다. 논산에 아름답고
슬픈 후백제의 역사나 문화 유산이 있는 줄은 모르고 있었지요.
좋은 장소 선정해 주셔 감사할 뿐입니다. 감사드림니다 **
함께한 시간 즐거웠으며 해박한 지식으로 해설사 역활에 충만 했습니다.
회장님 취임을 축하 합니다.
예습. 역사의 현장. 복습
듣고 돌아서면서 잃었든 역사의 한부분을 다시 기억 해봅니다.
감사 합니다. ^&^
첫 원정 탐방 감사함을 전합니다 ...역사방 방장 되심도 축하드립니다 역사탐방 방 자주 오도록 하겠습니다
바위솔님의 후기 사진을 보면서~ 우리가 참 멋진곳을 다녀 왔구나 새삼 느낌니다.
사이사이의 멋진 해설은 이해와 현장감을 더해 더욱 마음에 와 닿게 하는군요
수고하심에 감사하고 다시 그날을 새길수 있어서 고맙습니다.~~^*^
함께한듯 후기 읽으며 역사 공부합니다.
늘 해박하신 지식으로 푸근한 해설과 넉넉한 마음쓰심을 느끼며 올려주신 글들을 잘 보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자주 뵐 수 있는 글들을 반갑게 마주 하도록 하겠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재교육 잘 받고 갑니다.감사합니다.늘 건안하십시요.
설명과 함께 올리신 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