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이들을 업신여기지 마라.』
1)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라는 말씀에서, ‘업신여기다.’ 라는 말은, ‘멸시하고 천대하는 것’뿐만 아니라, ‘억압하고 착취하고 박해하는 것’도 포함하는 말입니다. 여기서 ‘천사들’은 ‘수호천사들’입니다.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라는 말씀은, 수호천사들이 ‘자기들이 맡고 있는 작은 이들’의 사정을 언제나 곧바로 하느님께 말씀드린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사실상 “하느님께서 작은 이들을 늘 보고 계시고, 작은 이들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언제든지 곧바로 합당한 조치를 취하신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에서, ‘토빗’과 ‘사라’의 이야기가 연상됩니다. 두 사람이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면서 울며 기도할 때, 그 기도가 곧바로 하느님께 전달되었습니다. “바로 그때에 그 두 사람의 기도가 영광스러운 하느님 앞에 다다랐다. 그래서 라파엘이 두 사람을 고쳐 주도록 파견되었다(토빗 3,16-17ㄱ).”
모든 일이 다 잘 마무리된 다음에 라파엘 천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 이제 보라, 너와 사라가 기도할 때에 너희의 기도를 영광스러운 주님 앞으로 전해 드린 이가 바로 나다. 네가 죽은 이들을 묻어 줄 때에도 그러하였다. 그리고 네가 주저하지 않고 잔치 음식을 놓아둔 채 일어나 가서 죽은 이를 매장해 줄 때, 너를 시험하도록 파견된 자도 나였다.
또 하느님께서는 나를 파견하시어 너와 네 며느리 사라를 고쳐 주게 하셨다. 나는 영광스러운 주님 앞에서 대기하고 또 그분 앞으로 들어가는 일곱 천사 가운데 하나인 라파엘이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는데, 그것은 내 호의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따라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러니 날마다 그분을 찬미하고 찬송하여라(토빗 12,12-15.18).”
혹시라도, 토빗과 사라와 라파엘 천사의 이야기를 ‘옛날이야기’나 ‘동화’ 같은 것으로 생각할 사람이 있을 수 있는데, 만일에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정말로 ‘믿음 없는’ 태도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이라면, 수호천사에 관한 예수님 말씀도 믿어야 하고, 수호천사의 일을 구체적으로 전해 주는 구약성경의 이야기도 믿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수호천사가 있고, 수호천사가 사람들을 늘 도와주고 있다는 것이 우리 교회의 믿음입니다. 그러니 ‘작은 이들’을 멸시하고 박해하는 것은, ‘작은 이들’을 특별히 더 보살피고 계시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큰 죄’입니다.
2) 사람에 따라서, “나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수호천사의 도움을 받은 적이 없다.” 라고 불평하는 사람도 있지만, 수호천사의 도움을 생생하게 체험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많습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은 ‘운이 좋았다. 우연이다.’ 라고 말하면서 그 체험을 깎아내립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에게는 ‘운’이나 ‘우연’은 없습니다. 하느님의 섭리와 자비와 은총이 있을 뿐입니다.
3)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 라는 제자들의 질문은, 하늘나라에 대한 궁금증이나 호기심 때문에 한 질문이 아니라, 자기들 가운데에서 누가 가장 높은 사람인지 알고 싶어서 한 질문입니다(루카 9,46). 제자들의 논쟁을,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신 일에(마태 16,18) 연결해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그 일이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가장 높은 사람’으로 임명하신 일인지 알고 싶어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일은 베드로 사도를 가장 높은 사람으로 임명하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 제자들이 있었던 것 같은데, 당사자인 베드로 사도 자신이 “내가 제일 높다.” 라고 주장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질문에 직접적인 답변을 하지 않으시고, ‘어린이’가 되라는 가르침만 주셨습니다. 이 가르침은 “겸손한 사람이 되어라.” 라는 가르침이기도 하고, “하느님 앞에서, 인간은 누구나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을 깨달아라.” 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끼리 서열 문제로 다투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2)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라는 말씀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의 의미를 설명하신 말씀이기도 하고, 순교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겠다고 약속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사람들에게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주신 희생과 사랑입니다.
‘많은 열매’는 많은 사람들의 구원을 뜻합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인 것은, 믿음과 회개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순교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보면, ‘많은 열매’는 일차적으로 순교자 자신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뜻합니다.
그리고 순교자의 증언을 믿고 받아들인 사람들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도 포함됩니다. 순교자의 희생은 결코 ‘헛일’이 아닙니다.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씨앗으로 삼아서 심는 일입니다.
3) 예수님의 말씀에는 “죽음은 인생의 끝이 아니다.” 라는 중요한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믿는 이들의 죽음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거치는 과정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믿지 않고 원하지 않는 사람들의 죽음은 멸망으로 가는 과정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같은 문’인데, 그 문을 통과한 다음에 도착하는 곳이 완전히 다릅니다. 믿는 이들은 죽음이라는 문을 지나서 하느님 나라에 도착하게 되고, 그곳에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을 믿지 않고 원하지 않는 사람들은 죽음이라는 문을 지나서 ‘두 번째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묵시 20,14). ‘두 번째 죽음’은 영원한 멸망입니다.
어디에 도착해서 어떻게 될지는 죽음이라는 문을 지나간 다음에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서, 내가 무엇을 선택하고 어떻게 사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원한다면, 그 생명을 얻으려고 노력할 것이고, 그 생명을 향해서 나아갈 것입니다. 그냥 원하는 것으로는 안 되고, ‘간절하게’ 원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다 버릴 정도로 간절하게 원해야 그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마태 19,29).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