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승만 연구원과 기념관
연세대의 이승만 연구원은 신촌 캠퍼스가 아니라 청와대 뒤편 부암동에 있다.
광화문에서 택시타고 자하문 터널을 지나자마자 내려 45도 경사의 좁은 길을 올라가면 ‘이승만 연구원’ 문패가 달린 건물이 나타난다.
오래된 2층짜리 저택을 개조한 연구원은 거실부터 이승만 관련 서적으로 가득 차 있다.
이곳의 핵심부는 2층 한가운데 위치한 수장고 이승만 관련 15만 건의 문서, 1만 9000장의 사진이 소장돼 있다.
항온, 방습 기능의 첨단 장비가 24시간 작동 중인 가운데 이승만이 1903년 옥중에서 읽은 영어 성경책을 봤을 때 잠시 감전된 듯한 느낌이었다.
1904년 언더우드 선교사가 미국의 주요 인사들에게 쓴 추천서도 있다.
국보급 자료를 바탕으로 연구원이 지금까지 출간한 이승만 관련 서적이 91권이나 되었다.
올해 들어 150만명 이상 관람객을 끌어들인 ‘건국 전쟁’이 촉발한
이승만 재평가 열기는 30년 가까이 그에게 천착해 온 이승만 연구원으로부터 도움받은 측면이 적지 않다.
이승만 연구원이 연세대가 아니라 부암동 주택가에 자리 잡고 활동해 온 배경에 이건희 전 삼성그룹회장과 독립투사 최기식씨의 딸 최송옥 여사가 있었다.
이건희 전 회장은 1995년 조선일보가 1월 1일부터 ‘거대한 생애 이승만 90년’ 장기 연재를 시작한 후 유영익 교수로부터 이승만 연구를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해 조선일보는 12월 26일까지 매회 1개 면을 할애하며 이승만을 재조명하는 거대 기획을 총 65회 연재했다.
예술의 전당에서 44m의 대형 연보가 등장하는 ‘이승만과 나라 세우기’ 전시회도 열었다.
조선일보의 이승만 장기 연재가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건희 전 회장은 흔쾌히 50억원을 내놓았다.
이어서 2년 뒤인 1997년 일제시대 이승만을 도왔던 독립투사 최기식씨의 딸 최송옥 여사가 자신이 살던 건물을 기증했다.
현재 이승만 연구원으로 사용되고 있는 건물로 대지를 합쳐 시가 60억 규모였다.
연구원 운영 자금, 건물이 확보되자 이승만의 양자 이인수 박사가
이화장에 보관중이던 자료를 모두 기증했다.
당시 이승만에 대해 싸늘했던 분위기 때문에 현대한국학연구소 이름으로 연구를 시작했다.
2011년 류석춘 교수가 원장을 맡으면서 “왜 이승만 연구를 숨어서 해야 하느냐”며 독립한 후, '이승만 연구원' 현판을 내걸었다.
이승만의 호를 딴 우남(雩南) 학술회의도 개최하며 저변을 확대했다.
연세대와 기업인, 독지가의 노력이 합쳐서 지난해까지 대한민국 국무회의록과 이승만의 한시집을 포함, 100권 가까운 서적을 발간하며 이승만 열기가 확산되는 토대를 만들었다.
‘농지개혁 연구’ ‘이승만과 기업가 시대’를 통해 이승만이 지향한 자유민주주의, 시장 경제의 중요성도 일깨웠다.
대한민국을 태어나서는 안 될 나라로 폄훼하는 일부 좌파가 지식 시장을 점령하고 있는데, 이승만 연구에 있어서는 물적, 질적으로 앞설 수 있게 한 것이다.
현재 성금 모금 중인 이승만 기념관이 세워지면 이곳에 전시될 자료의 상당수를 이미 체계적으로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깊다.
이승만 연구원은 탐구 능력을 갖춘 대학, 사업으로 번 돈을 환원한 기업인, 뜻있는 독지가가 힘을 합쳐
선(善)을 이룬 성공 사례이다.
대한민국이 전 세계가 놀랄 만큼 주목받는 국가가 된 배경에는 각 계 지도자들의 역할이 컸지만 여전히 제대로 된 평가를 못 받는 이들이 많다.
특히 '사업보국(事業保國)'은 사업을 통해 나라를 이롭게 한다는 의미로, 기업경영을 통해 국가와 우리 사회에 기여하겠다는 뜻을 담고 있다.
기업의 사명에 대한 많은 철학적 사유도 여기서 출발한다. 삼성을 세운 이병철 창업회장은 평소 '사업보국'을 강조했다.
기업 활동으로 국가와 인류사회에 공헌하고 봉사한다는 사업보국(事業報國)의 이념은
인재제일(人材第一), 합리추구(合理追求)와 함께 대 내외적으로 공포된 삼성의 창업이념이다.
아버지의 창업이념을 계승 발전 시킨 이건희 전 회장은 알게 모르게 사업보국(事業保國)에 이바지 하였다.
또 독립운동가 최기식씨는 경기도 연천의 큰 부자 였다. 사랑방에는 언제나 식객들이 몰려 들었는데 모두가 독립투사 였다.
그런 독립운동가 최기식의 딸 최송옥씨는 전재산을 연세대에 기증하면서‘이승만기념 사업회’에 써달라고 했다.
1998년에는 묘비가 없던 이승만 대통령의 묘역에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라는 묘비를 세운 장본인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건국 대통령 이승만”이라는 묘비를 세우려 했으나
정부의 반대로 그 묘비는 묘역앞에 묻어야 했다.
이처럼 이승만 연구원이 보여준 3각 협력이 이승만을 재 평가하는 토대를 마련한 것이다.
앞으로 이승만 기념관이 송현광장 넓은 부지에 세워지고 이승만 연구원이 소장하고 있던 많은 유물들이 이곳에 전시되면 나라를 사랑한 이승만 건국 대통령을 만날수 있을것 같다.
또한 송현광장 왼쪽엔 이승만 기념관이 들어서고 오른쪽엔 이건희 기증관이 들어설 예정이어서 이건희 회장이 기증한 2만점이 넘는 희귀한 보물들도 함께 감상할수 있게 된다.
모두가 2028년 준공을 목표로 추진하고 있다.
○ 이승만 기념관
서울 도심에 이승만 전 대통령 기념관을 설립하겠다는 계획에 불교계와 시민단체 반발이 커지는 가운데, 시민들 목소리는 엇갈리고 있지만 건립하는게 맞다고 본다.
○ 송현동 건립부지는...
1997년 미국에 반환받았고 기업 손을 거쳐 2년 전 서울시가 넘겨받아 공개했다. 전체 넓이는 3만7천여㎡, 서울 광장의 3배에 달한다.
송현광장은 경복궁 동쪽과 맞닿아 있고 근처에 국립현대미술관이 있고 인사동과도 가까워서 시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 계획은...
열린 송현광장에는 이건희 미술관을 짓고 나머지는 녹지 공간으로 남기겠다던 애초 계획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 기념관 건립도 병행해서 추진되고 있는것이다.
불교계는 기념관 건립을 반대하고 나섰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종교 방송 설립과 군종 장교 제도 도입에 특정 종교에만 특혜를 줬고, 1954년에는 '정화 유시'로 불교계에 갈등을 일으켰다며 서울시와 관계를 단절하겠다고까지 경고했다.
진보 진영의 시민단체 역시 1인 시위에 나서며 반대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반민특위를 해산하면서 친일파를 재등용한 점을 지적하며 반독재 민주주의 운동인 4.19 혁명을 촉발한 인물이라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