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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일본여행 [J여동] 원문보기 글쓴이: 바이칼1
대마도 여행15 - 슈젠지에서 최익현 선생 순국비를 보고 고구마의 전래를 생각하다!
2024년 1월 26일 대마도(對馬 쓰시마) 이즈하라(嚴原 엄원) 에 도착하여 한국인이 운영하는 지온
(祈園) 호텔로 들어가 체크인을 하고는 나와 운하를 걸어서.... 가네이시성(金石城) 으로
들어가 정원과 쓰시마번 번주인 소우케(宗家 종가)의 묘소인 반쇼인(万松院 만송원)을 구경합니다.
반쇼인을 뒤로 하고는 걸어 나와 슈젠지 절을 보아야 하니 시가지를 걸어서 운하를 따라 항구
쪽으로 내려가다가 조금 못미쳐서 산쪽으로 난 주택가 골목길을 들어서서
방화벽인 호우카헤키 ほうかへき (防火癖)를 지나 슈젠지(修善寺 수선사) 절을 발견합니다.
절 안에는 묘지가 늘어서 있는데 주지는 밤에는 퇴근하는지 없으니 안으로 들어가 최익현 선생
의 묘를 찾다가 절의 오른쪽 입구에서 최익현기념비를 발견하는데, 大韓人崔益鉉先生
殉國之碑 (대한인최익현선생순국지비) 로 1986년 한일 양국의 유지들이 뜻을 모아 세웠습니다.
대원군이 성년이 된 고종에게 권력을 물려주지 않자 최익현은 1873년에 상소를 올려 이륜두상
이니 올바른 지위에 있지 않은 종친이니 하면서, 천재(天災)가 나타나고 지변(地變)이
일어난다며 대원군을 물러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조정이 발칵 뒤집혀 목숨이 위험할
뻔 했지만 고종은 이를 계기로 대원군을 물러나게 하고 오매불망 갈망했던 친정을 시작합니다.
최익현은 위정척사파니 송시열 계열의 주자 성리학 학통을 제외한 모든 학문을 배척하며 성리학을 통해 지켜온
기득권을 수호했으니 만동묘와 서원을 철폐한 흥선대원군은 패도정치이며, 동학은 토비떼이고 천주교는
사학(邪學)이며... 농민운동은 비적떼이고 갑오개혁도 주자성리학에 충돌하니 반대하고 개항은 결사저지합니다.
이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과 을사조약을 맺자 최익현은 1906년에 74세의 노구를 이끌며 의병
을 일으켰으나 고종의 해산 권고 칙지를 받고 고심하던중 유생 21명과 사서삼경인 맹자를 읽다가
대한제국군(진위대) 에 체포되자 유생들을 해산하고 투항하니 일본군에 넘겨져 여기 대마도에서 죽습니다.
일본은 러일전쟁시 머나먼 만주까지 보급선이 엄청 길어지니 전비 조달이 어려워져 탄약과 무기 및 식량부족에
허덕이는데,.. 지모가 남다은 이토 히로부미는 혜안이 있었으니 이런 사태를 예상하고 미리 조치 를 해둡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러일전쟁 전에 하버드 로스쿨 출신인 가네코 겐타로를 미국에 보내 하버드대학
동문인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니토베 이나조의 "무사도" 책을 선물하니
루스벨트 대통령은 저 책을 읽고는 그만 일본 무사도 정신에 흠뻑 빠져 스스로
"친일파" 로 자처했으며.... 거기에 않고 책을 대량 구입해 미국의 지인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조선땅 진해항에서 출항한 도고 헤이하찌로 제독의 일본 해군이 쓰시마 해전에서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온 러시아 해군을 격파한후 일본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종전 중재를 요청하니, 루스벨트는
러시아와 일본대표를 미국 동부 포츠머스에 불러 러시아를 윽박질러 "종전협정을 강요" 했던 것이라!
이런 인연으로 이토 히로부미 내각에서 육군대신을 지낸 조슈번 출신 가쓰라 다로 총리는 미국 육군장관
태프트와 "필리핀은 미국이, 조선은 일본" 이 서로 갈라먹기로 협정하니..... 이른바 태프트~
가쓰라 밀약 으로 이를 바탕으로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에 와서 을사보호조약(늑약) 을 체결했던 것입니다.
니토베 이나조 (新渡戸稲造) 는 일본의 화폐 5천엔권에 나오는 인물로 메이지시대에 독일과
미국에 유학하고 와세다 대학교, 버클리 대학교, 스탠포드 대학교, 컬럼비아 대학교
및 제네바 대학교 교수를 역임하고 유엔 사무차장을 지냈으며 도쿄여자대학을
설립하고 도쿄대 총장을 역임한 인물로 무엇보다도 “武士道 무사도“ 라는 책을 쓴 것입니다!
일본 총리대신 가쓰라 다로는 조슈번 하기시 요시다 쇼인의 제자이니 청일전쟁때 3사단장
으로 중국의 영구를 점령했으며 1905년 일본 총리로서 루즈벨트 대통령의
특사 미국 육군장관 윌리엄 태프트 와 만나 태프트-가쓰라 협정을 맺은 장본인 입니다.
훗날 태프트가 대통령이 되자 일본은 1912년에 벚꽃 3천 20 그루를 워싱턴에 심으니 최대 축제 라? 워싱턴시
당국은 해마다 3월 말에서 4월 초까지 '벚꽃 축제' 를 열어서 관광객을 끌어들이니 미국은 물론 일본등 전
세계에서 수십만명의 관광객이 몰려들고 워싱턴 관광 수입의 3분의 1 가량을 이 기간에 벌어들인다고 합니다?
워싱턴 포토맥 강변을 따라 만들어진 인공 호수 (타이들 베이슨) 를 따라 수천
그루의 벚꽃이 완전히 개화하면 그 화려함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
인데다가... 벚꽃이 피면 덩달아 일본 대사관과 기업들도 바빠지기 시작합니다.
미·일 관계의 끈끈함을 과시하려는 세미나가 줄을 잇고 축제를 후원 하는 일본 기업들의 간판 이 워싱턴
시내 곳곳에 들어서니 벚꽃 만큼이나 화려한 일본의 “소프트 외교” 가 이때 빛을 발하니
벚꽃은 일본과 미국 양쪽에 굳건한 미·일 동맹을 상징하는 거목(巨木) 으로 효자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유구한 역사를 지닌 문화 강국 조선은 언제부터 나라가 기울기 시작했을까요? 조선이 나라를 유지할 기회는
없었던 것일까요? 1866년 조선이 5차레에 걸친 천주교 탄압으로 그간 12명에 이르는 프랑스 신부와 만명
이 넘는 조선인 천주교도를 학살하자 프랑스가 쳐들어온 병인양요때가 위기이자 기회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때 대원군이 프랑스와 전쟁하지 않고 천주교인 학살에 대해 사과와 배상후 개항을 했더라면.... 유학을 국교
에서 끌어내리고 천주교를 허용하며, 사대부 선비들의 목숨 같은 삶 자체인 과거제도를 폐지하고 젊은이
백명을 선발해 프랑스에 유학보내 서구문명을 배우게 해서 돌아오면 관리로 임용하고 기업과 학교를
세우며 노비해방, 천민 폐지, 반상의 신분제도를 폐지하고 신무기를 도입해 군대를 서양식으로 개편했더라면...
제 1차 아편전쟁은 헌종 말인 1840년에 일어나는데, 청국의 수군과 영국 해군 사이에 ‘제1차
천비해전’ 이니.... 29척 광동 제독 관천배(關天培) 의 수군과 단 2척 영국 엘리어트의
함대가 포격전을 벌인 결과 중국 군함 26척이 부숴진데 비해, 영국 군함 2척은
중국 배의 “포탄 사거리 밖” 에 있었으니 배도 멀쩡 한데다가 사망자도 전혀 없었습니다.
그리고 제 2차 아편전쟁은 철종 중기인 1856년에 터져 하늘같던 상국 중국이 서양 열강에 참패하고 무너
지고 있다는 사실은 조선은 애써 무시했으며 1860년 원명원이 불타고 함풍제가 겨울에 피서산장
으로 도주한 것을 알고 위로 사신을 보냈으나 나라를 지킬 군사력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책도 없었습니다.
일본은 쇼군과 번주로 부터 학자들과 무사들까지도 일본을 지킬 방책에 대해 토의했으니.... 에도막부가
아편전쟁에 대한 정보를 싱가폴의 영자지 신문을 네델란드인을 통해 입수하고, 중국 남부와 동남아
상인들에게 정보를 수집해 바다를 방어할 대책을 고심했던데 비해, 조선은 중국 관보를 보며
사신이 북경시내가 평온하다는 말에 모두 안도하고 없었던 일로 치부해 잊어버린 후에 허송세월 합니다.
흥선대원군은 면제배갑 개발이나 서양의 화륜선과 신식무기를 복제를 해보려는
시도라도 했지만.... 최익현은 일본이 윤요호를 끌고 올 때까지도 서양에
대한 적개심만 품을뿐 구체적으로 어떻게 방어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중국의 이홍장과 개인적인 서신을 교환하던 영의정 이유원과 개화파 리더인 우의정 박규수까지 서양사정
에는 무지해서..... 고종 앞에서 중국 일개 성의 인구가 몇명이냐에 답변을 못하거나 서양에는
세금이 없다는 허무맹랑한 답변을 할 정도인데, 최익현을 비롯한 지방 유생들이 서양을 알리가 만무합니다.
그저 "공맹정주" 를 외우면서 문명인 답게 죽자! 송나라가 몽골에 멸망하여 천하의 문명이 사라
졌어도 훗날에 명나라가 다시 일어났고, 명나라가 오랑캐에 망했어도 조선이 소중화가
된 것 처럼 죽어도 도통은 누군가가 이어준다! 는..... 송시열식의 정신승리가 기반
이었으니 조선이나 대한제국이 망하더라도 성리학의 도통만 이으면 된다는 사고방식이라?
최익현은 봉건 신분질서를 무너뜨리는 개혁은 결사반대했는데 동학농민운동은 폭도들로 처단해야 한다고
했고, 1895년 최홍집 친일정권이 일본공사 이노우에의 지시를 받아 시행한 갑오개혁인 왕실과 정부
재정 분리, 행정과 경찰 분리, 재판소 설치, 반상의 신분제도 철폐, 노비 해방, 천민제도 철폐 그리고 500
년간 강고하게 유지해온 과부제혼금지제도 폐지 등에 대해서 유학의 근본 이상에 어긋난다며 반대했습니다.
슈젠지 절을 나오면서 생각하니 문득 국제신문에 실린 “부산 영도구 청학배수지전망대 쉼터에 있는 조내기
고구마를 짊어진 농부 조형물이 추울까봐 걱정됐는지 누군가 목도리를 선물했다” 라는 기사가 떠오릅니다.
부산여행특공대의 추천 리스트에 영도 조내기고구마 역사기념관(청학동)이 거점으로 제시된 걸 보고,
무릎을 쳤다. 영도구 청학동 높은 지대에 자리한 이 기념관은 설날 당일에만 문을 닫고 연중
개관하는데.... 봉래산 정상까지 걸어갔다 올 수 있으니 봉래산 정상에서 보는 부산 풍경은 절경입니다.
우리나라 고구마 시배지에 세운 조내기 고구마 역사관 자체는 단출한 편이다. 2층에는 카페,
3층 옥상에 전망대가 있는데 어디서든 바다 경치가 좋다. 청학배수지전망대쉼터는
‘조망의 강자’ 이니 오죽하면 물을 공급하는 공공시설인 배수지에 전망대쉼터를
만들었겠는가. 이곳에 있는 조내기 고구마 농부· 절영마 동상 곁에는 운동기구도 있습니다.
고구마나 감자와 고추는 임진왜란 이후에 조선에 들어왔으니.... 고구마는 전분이 발달한
덩이뿌리를 말하니 탄수화물이 풍부하고 병충해에 강해 감자와 함께
전통적인 구황작물로 여겨졌으며, 오늘날에도 풍부한 단맛으로 널리 사랑받는 채소입니다.
고구마는 남아메리카 원산이며 멕시코 고산지대에서 기원한 것으로 추정되니 콜럼버스등 대항해
시대 탐험가들이 신대륙에서 원주민들의 고구마를 가져와 보급했으리라 추측하는데....
제임스 쿡은 태평양의 폴리네시아에서 고구마가 자라는 것을 발견했다고 보고하기도 했습니다.
아시아의 경우 스페인이 태평양을 건너 필리핀 마닐라를 점령하여, 멕시코의 은을 명나라의
복건지방 상인들에게 파는 갤리온 무역을 시작했는데 이 때 선원들의 식량으로 싣고
온 고구마를 복주(福州) 의 상인 진진룡(陳振龍 1543 ~ 1619) 이 명나라에 가져
갔는데 1594년 복주에 기근이 들자 금학증(金學曾)이 구황작물로 처음 보급했다고 전해집니다.
1608년 농학자 서광계가 재배법을 정리했고, 이후 명나라 전역에 퍼져 류큐 왕국(오키나와)에도 전래
되었는데, 일본의 경우 1609년 류큐 왕국이 일본의 사쓰마 번(가고시마현 )에 복속되고 1705년
마에다 리에몬 이라는 어부가 본토에 가져간 것이 시초로, 사쓰마 지역에서 보급되었기
때문에 '사쓰마 지역의 마(이모, 芋)' 라는 뜻에서 '사쯔마이모(サツマイモ)' 라는 명칭이 붙었습니다.
한반도에 고구마가 들어온 때는 조선시대 후기에 해당하는 18세기 후반으로, 감자가 들어온 시기
(19세기 초반) 와 비슷한 무렵이니.... 고추나 담배의 전래와 혼동하여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일본으로부터 들어온 것으로 오해되기도 하나, 임진왜란 당시에는
일본에도 고구마가 보급되지 않았으니.... 고구마와 감자는 훨씬 나중에 보급된 구황작물 입니다.
임진왜란 무렵에는 토마토는 물론이고 고추, 담배, 감자, 고구마가 없었으니 흉년에는 백성들의 삶이
참으로 어려웠는데, 하기사 다른 작물도 조선 토종은 드물고 대부분 외래종이니.... BC 2세기
한나라 무제때 장건 이 서역 을 다녀오면서 호두, 배, 은행, 생강, 계피, 차, 백반, 설탕, 장뇌,
석류, 포도, 깨, 콩, 오이,마늘, 녹두, 시금치, 당근, 무화과 와 파 가 중국에 들어온후 조선에 전해집니다.
고구마가 조선에 전래된 경위는 조선 영조 39년(1763)에 조선 통신사 조엄이 일본 쓰시마(대마도)에서
고구마를 목격하고 이듬해 제주도와 동래부(부산) 영도에서 이를 기르기 시작했다는 설이
정설이니, 조선 통신사들이 사신으로서 일본으로 갈때 군고구마 가게를 보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영조가 " 그 종자를 가져와서 심어보라." 하고 명하여 부산 영도에 심은 것이 시초로 여겨집니다.
연해 지방 고을에는 이른바 고구마(甘薯, 감저)라는 것이 있습니다. 고구마는, 명나라의 명신(名臣)인 서광계
(徐光啓)가 찬술한 《농정전서(農政全書)》에 처음 보이는데 칭찬하며 말하기를 '그것은 조금 심어도
수확이 많고, 농사에 지장을 주지 않으며, 가뭄이나 황충에도 재해를 입지 않고, 달고 맛있기가 오곡
과 같으며, 힘을 들이는 만큼 보람이 있으므로 풍년이든 흉년이든 간에 이롭다.' 고 하였습니다.
수천마디를 늘어놓으며 이렇게 까지 상세하게 말한 것을 보면 그 말이 반드시 속인 것은 아닐 것입니다.
고구마 종자가 우리 나라에 나온 것이 갑신년(1764) 이나 을유년(1765) 즈음이었으니, 지금까지
30년이나 되는 동안 연해 지역의 백성들은 서로 전하여 심은 자가 매우 많았습니다.
그 먹기 좋고 기근 구제에 효과가 있는 것은 중국의 민(閩)·절(浙) 지방과 마찬가지 였습니다.
우리나라 풍속에 처음 보는 것이라 맛있는 군것질 거리로만 여기고 있을뿐 식량을 대신해 흉년을 구제하지
못하기 때문에 신은 항상 한스럽게 여겨왔습니다. 이 곡물은 민(閩)·절(浙) 지역에서만 성하고 우리
나라가 종자를 얻은 것도 일본에서였으니, 이것 성질이 남방의 따뜻한 지역에 알맞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구마가 처음 들어왔을 때는 백성들이 다투어 심어 생활에 보탬이 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후 영과
읍의 가렴주구가 심해지니 사나운 관리가 문에 이르러 고함을 치며 수색을 하였으니 관에서
백포기를 요구하고 아전은 한 이랑씩 다 거두어 가니 심은 자는 곤란을 당하고 아직 심지
않은 자는 서로 경계하여.... 심고 가꾸는 것이 점점 처음만 못해지다가 이제는 희귀하게 되었습니다.
백성들에게 주어 심기를 권장하고 풍속을 이루게끔 해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좋은 혜택을 받기를 문익점
(文益漸)이 가져온 목화씨처럼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번식도 하기 전에 관리들이 가렴주구를
행하여 어렵사리 다른 나라에서 가져온 종자를 오래 자랄수 없게 하고 씨받이 종자까지
먹어버렸으니, 어떻게 종자를 취할 수 있겠습니까. 《정조실록》, 정조 18년(1794) 12월 25일 3번째 기사
정조실록에 보면 전래된 것은 1764년 이고 일본에서 전래되었다고 적고 있는데, 상품작물이라 돈이 된다고
생각한 농민들이 많이 재배했으나 탐관오리들이 수탈을 해대자 재배를 포기했으니, 다음해 농사 짓는데
써야 할 종자를 보관할 이유가 없는지라 그냥 종자까지 먹어치워버려 농사가 줄어들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마치 제주도에서 감귤농사를 짓는데 관리들이 열매를 맺을 즈음 찾아와 그 수량을 조사한후
수확시기에 그 수량에 맞추어 세금으로 거두는데.... 자라면서 떨어지기도 하고 아이들이
지나면서 따 먹기도 하니 숫자가 크게 부족한데도 원래 숫자대로 세금을 강징하니
오히려 감귤을 사서 바쳐야 할 지경이라..... 농부들은 감귤 나무 뿌리에 독을 뿌려 죽입니다.
또 전복을 따는 물질 해녀는 원래 남자들이 했는데 바닷속 작업이 힘들고 조난사고도 당하고
잠수병에 걸리는데.... 서울의 임금님과 조전 대신들이 학수고대하는 것이 제주도 전복
이라! 관리들이 악착같이 많은 수량을 세금으로 거두고 그 과정에서 자기몫도 챙기니
어부들은 다 뺏기고 나면 가난해서 장가도 못가니... 어느 처녀가 시집을 올려고 하겠습니까?
노총각으로 늙어 죽을 지경이 되니 남자 해녀들이 하나, 둘 육지로 도주해 버리자 다급해진 제주도 관리들은
여자들을 강제로 바다로 밀어 넣었고, 이후 해녀는 여자들 몫이 되었는데 이들이 육지로 도망칠까 두려운
조선 조정은 “제주도 여자들은 육지로 가는 배를 탈수 없다” 라는 법 까지 만들어 단속했으니.... 아! 조선이여!
정조 시대에 아전(관리) 들의 수탈로 고구마 농사를 지을수 없을 정도였는데, 죽은후 나이어린
임금이 등장해 외척인 안동 김씨들이 세도 정치를 하니 부정부패와 수탈은 더 심해
졌는데.... 근본 원인은 아전들은 월급이 거의 없었으니, 그럼 적당히 알아사 백성들을
수탈하고 착취해서 먹고 살라는게 조선이니, 민란이 끊이지 않으면서 조선은 점차 쇠락해 갑니다.
골목길을 걸어 내려와서는 식당가에 도착해 저녁을 먹기 위해 여러 음식점, 그러니까 이자까야 (居酒屋) 를
한곳, 한곳 두루 살피는데.... 여긴 여행 온 한국인들이 많이 찾으니 한글 메뉴를 비치한 곳도 많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