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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1)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우리 주님께서는 때로 악에서 선을 이끌어 내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인류 구원 사업이 한 인간의 배신, 특히 당신이 사랑하셨던 제자의 배신으로부터 본격화된다는 것이 참으로 특별하고 아이러니합니다.
유다 이스카리옷의 배신을 잘 알고 계셨기에, 마음이 무척이나 산란하셨던 예수님께서 누군가를 직접 지목하지는 않으셨지만, 넌지시 한 마디 던지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그러자 제자들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몹시 근심하며 다들 스승님께 이렇게 질문을 던집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참으로 놀라운 일이 또 벌어집니다. 이미 스승님을 배신하기로 굳게 마음을 먹은 유다 역시 똑같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배신자 유다의 그 속 보이는 질문에 예수님의 마음은 더욱 참담해지고 암울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끝끝내 공개석상에서 결정적 배신자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를 존중해주십니다. 어쩌면 예수님의 그런 태도는 마지막 순간까지 유다가 돌아올 것을 기다리신다는 표현이 아니었을지...
이처럼 우리 주님께서는 때로 악에서 선을 이끌어 내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예수님의 인류 구원을 위한 축제의 무대는 지극히 성스러운 장소가 아니라 배신과 타락, 죄와 이기심이 난무하는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한복판입니다.
뿐만아니라 오늘 우리의 거듭되는 배신과 반역에도 불구하고 우리 죄인을 위한 예수님의 인류 구원 사업은 흔들림 없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들 가장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등에 비수를 꽂힌 적이 있습니까? 가장 절친했던 친구로부터 사기를 당한 적은 없습니까? 가장 가까운 사람, 가장 사랑했던 사람으로부터 치떨리는 배신을 당한 적은 없습니까?
어찌 보면 유다의 배신, 베드로 사도의 배신, 요한 사도를 제외한 나머지 사도들의 배신은 오늘 우리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습은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사랑했던 제자로부터 배신당했지만, 그래도 그를 향한 연민과 측은지심의 시선을 보내신 예수님이셨습니다.
유다의 결정적 배신으로 인한 수난과 죽음의 길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혹독한 것이었지만, 그것마저 아버지의 뜻임을 알아차렸기에, 묵묵히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 예수님의 모습이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2)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마태오 26,14-25
인생이 무대라 여기면 평화의 길이 보인다
무대공포증이란 게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공포를 느끼지 않으려면 무대에 서지 않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어차피 무대에 섰다면 무대공포증을 느끼는 것은 무대를 준비하고 그 위에 나를 세운 누군가를 배신하는 일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정해주는 역할을 거부한 가리옷 유다는 어떤 심판을 받았을까요?
예수님은 그를 두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
무대는 누군가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장소입니다.
그리고 그 작가가 준 역할과 대사를 완벽하게 구현하지 못하면 트라우마가 생기고 무대에 오를 때마다 공포에 휩싸여야 합니다.
무대에서는 그곳에 올려준 이의 의도대로 잘할 자신이 없다면 언제나 공포 속에서 올라야 합니다.
가수 보아 씨는 이른 나이에 일본에서 데뷔하게 됩니다.
십 대 중반의 나이에 춤을 추며 노래를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쇼케이스 무대에서 음 이탈을 몇 번 일으킵니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비판의 목소리는 어린 보아를 주눅들게 하였습니다.
그녀는 무대에 오를 때마다 1년씩 늙어가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합니다.
만약 무대에 오를 필요가 없는 사람이라면 노래 부르며 음 이탈을 겪는 것은 두려울 게 없습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무대가 아니라면 사람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양심상 죄를 지으면 하늘이 두려워지고 이웃에게 밝혀지는 것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아무리 인생이 무대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불안과 두려움, 긴장과 걱정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입니다.
행복해지고 싶다면 그냥 인생이 누군가에 의해 올려진 무대라고 여기면 어떨까요?
영화 ‘버드맨’은 20년 전 버드맨이라는 영웅물로 유명했던 한 남자배우가 이전의 영광을 다시 찾고자 하는 노력을 그렸습니다.
전 재산을 털어 연극을 만들었고 다행히 흥행합니다.
그런데 정작 영웅이 되는 것은 연극에서 주인공을 연기한 젊은 배우입니다.
자신도 그 연극에서 인정을 다시 받고 싶지만, 아무도 한물간 배우를 인정해주지 않습니다.
그의 귓속에서는 이전의 영광이었던 버드맨이 분명 이전의 영광을 다시 얻을 수 있다고 종용합니다.
그는 결국 진짜 권총으로 자기 얼굴을 쏩니다. 연극의 완성을 위해서.
연극은 자기 영광이 아닌 보는 관객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영화 블랙스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주인공은 자신 때문에 발레를 포기한 엄마의 뜻을 이뤄주기 위해 살인까지 불사합니다.
우리 안에도 우리만의 무대를 만들고 그 안에서 자기 영광을 추구하라는 유혹이 있습니다.
어차피 우리는 타인이 만든 무대에 서든지, 자기가 만든 무대에 서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유다는 자기 무대를 자기가 만들고 버드맨처럼 자기 영광을 추구하려 하였습니다.
결과는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해 공포에 휩싸여 자살하였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인생이 누군가에 의해 창조된 무대라고 여길 필요가 있습니다.
그때 감독이 원하는 배역과 역할만 제대로 할 수 있다면 공포로 살아갈 이유가 없어집니다.
배우 정유미 씨는 무대공포증과는 사뭇 다른 무언가를 겪고 있습니다.
연기를 할 때는 정말 신들린 연기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사람들 앞에 서면 어쩔 줄을 몰라 합니다.
심지어 울음을 터뜨리기까지 합니다.
대학생 때 연극 대사를 잊어버린 트라우마 때문에 그런다고 하지만, 사실 대인공포증처럼 보입니다. 그녀는 연기할 때는 그런 두려움이 거의 없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어떤 말을 하고 어떤 모습을 보여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사실 나에게 배역이 주어지고 대사가 주어진다면 더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대로 충실히 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평소에 사람들 앞에서는 역할이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두려운 것입니다.
마음의 평화를 원한다면, 그리고 혹시 심판이란 게 있어 태어나지 않는 게 좋았다는 심판을 받지 않으려면 그냥 이 무대가 창조되었고 그 창조자가 그리스도라는 분을 보내서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살면 된다는 것을 알려주었다면 그대로 한 번 살아봅시다.
나쁠 게 없습니다.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살면 그만입니다.
내가 이미 죽었으니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리스도로 사니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삽니다.
그러면 감독과 관객 모두에게서 영광을 받게 됩니다.
3)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마태: 26,14-25: 사람의 아들을 배반한 그 사람은
유다 이스카리옷은 예수님을 없애려 하는 대사제들에게 가서 “내가 그분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15절) 하자 그들은 은전 서른 닢을 내주었고 그때부터 유다는 적당한 기회를 노렸다. 유다는 바로 최후의 만찬 뒤 예수님께서 겟세마니 동산에 혼자 계실 때 그 일을 했다. 진리의 말씀이 배반당하는 시간은 그분 곁에 충실한 지지자들이 거의 없는 때다. 무교절 첫날 제자들이 예수님께 “스승님께서 잡수실 파스카 음식을 어디에 차리면 좋겠습니까?”(17절) 제자들은 모여서 파스카 만찬을 나눌만한 집이 없었다. 재산을 모두 포기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아무개”라는 사람을 찾아가 “나의 때가 가까웠으니 내가 너의 집에서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축제를 지내겠다.”(18절) 하시며 축제를 준비하게 하신다. 그 아무개는 주님의 제자들을 받아들인 첫 사람이었다. 그는 제자들의 말을 듣고 장소를 제공해 주었다. 우리 자신도 이제는 주님을 위해 손님방을 마련하여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와 함께 식탁에 앉으셔서 파스카 음식을 먹고 있을 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21절)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배반자에게 어떻게 하셨는가? 만찬 전에 그분은 유다의 발을 씻어 주셨고, 누구인지 밝히지 않으면서 회개의 기회를 주신다. 이 말씀 때문에 나머지 제자들은 혼란에 빠졌지만, 유다의 구원을 위하여 그렇게 하셨다. 제자들은 자신에 관하여 묻고 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22절). 이 근심을 없애주시려, 예수님은 “나와 함께 대접에 손을 넣어 빵을 적시는 자, 그자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23절) 하신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근심에서 구해 주고자 결정하셨을 때, 유다의 정체를 밝히신다. 유다는 시간을 주었지만 변할 수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24절) 유다는 악마의 도구로 쓰이고 말았다. 이 불행은 유다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그리스도께서 넘겨지신 것은 악마 때문이지만, 그 일이 이루어지는 데 도구가 된 자들도 불행하다고 말씀하신다.
유다도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25절) 하고 묻는다. 다른 제자들은 주님이라고 했고 유다는 스승님이라고 한다. 주님을 배반한 것이 아니라, 스승님을 배반한 정도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예수님께서는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25절) 하시며 빌라도에게 하신 말씀으로 유다를 책망하신다. 이는 예수님과 다른 제자들 앞에서 빛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완전히 가리는 말이다. 어두운 밤으로 들어가겠다는 말이다.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나는 어떠한 자세로 그분을 따르고 있는가?
4)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우리는 나이 들면서 늙을 운명이고, 병들 운명이며, 죽을 운명입니다. 이런 운명에서 벗어날 방법은 아무리 생각해도 없습니다. 만약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 없다면 우리의 삶도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운명으로부터 피하길 바라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이론적으로 절대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피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합니다.
인생 자체가 고통이고, 존재 자체가 고통이기에 그냥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 고통을 그대로 적시하고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고통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사실 고통은 이 세상 창조 때부터 이렇게 결정되어 있었습니다.
“너는 사는 동안 줄곧, 고통 속에서 땅을 부쳐 먹으리라.”(창세 3,17)
따라서 고통은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견디는 것입니다. 견디면서 그 안의 하느님을 발견하고 함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러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으로 모든 고통 속에서 함께 하셨습니다. 이렇게 주님도 고통을 피하지 않으시기에 우리도 피할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십자가는 고통입니다. 화려한 장신구가 아닙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이 고통을 안고서 주님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특히 자기가 십자가를 짊어져야 합니다. 그 누구도 자기 고통을 대신 짊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한 ‘날마다’입니다. 날마다 안고 지나가야 하는 고통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참 힘들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안락한 삶이라는 보증수표를 받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삶에서 어떤 끔찍한 일도, 나쁜 일도 경험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증수표가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환난과 고통 중에서도 구원받는 존재이지, 환난과 고통에서 구원받는 존재가 아닙니다.
제자들은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스승을 팔아넘길 것이라는 말을 듣고 몹시 당황스러워합니다. 그들은 몹시 근심하며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묻습니다. 솔직히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도 의아합니다. 자기도 모르게 주님을 팔아넘길 수도 있음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요? 특히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예고를 들으면서 불안한 마음을 이렇게 표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실제로 팔아넘길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유다도 예수님께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묻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따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의 안락과 풍요로움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날마다 주님을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을 배신하지 않고 함께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지어낸다(일체유심조 / 一切唯心造)(화엄경).
5)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 (마태26,25)
우리가 내뱉는 말들은
아무 의미 없는
우리의 생각에 불과할 때가
많다네.
그러니 우리는
초라한 변명을 늘어놓는
우리의 어두운 마음을
주님께서
다 지켜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우리의 뜻보다
주님의 뜻을 담은
진실 된 말을 해야 한다네.
6)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
스승을 배반할지 그렇지 않을지가
유다 자신의 의지에 달려 있음을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유다의 모습이 제 안에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슬퍼집니다.
가리옷 유다가 예수님을
은전 30냥에 예수님을 팔아넘긴 것은
잘못된 인간적 기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기준과 잣대로 예수님을 바라보고
거기에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던
유다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자유의지로
순간적 판단을 잘못한 것입니다.
악한 영도 선한 영과 함께 공존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도 주님께서 주신
자유의지의 오남용으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배반할 때가 수없이 많습니다.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이라는 영화에서
악역을 담당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자유의지로 선택하는 건 우리 인간의 몫입니다.
처음부터 그렇게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7)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마태 26, 25)
정말 서슴없이
거짓을 고백합니다.
우리 영혼을
더럽히는 것은 언제나
우리자신이였습니다.
잘려나가는
가지처럼
아픔이 있습니다.
이스카리옷 유다는
탈출이 아니라
스스로를 가두는
배신을 선택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저버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을
버리는 것입니다.
성주간은
십자가를 지겠다는
십자가의 각오가
절실히 필요한
때입니다.
착각과 거짓에서
벗어나는 길은
우리자신을 똑바로
보는 것입니다.
혼자 살고싶어
도망치는
우리들 삶입니다.
고통을 견딜만한 힘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만남에 상처를 주는 것은
언제나 우리자신이었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라 생각했는데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자신조차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참으로
우리자신을 아는
회개의 성주간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십자가에 우리자신을
맡기는 것이 참된
희망입니다.
희망을 죽이지
마십시오.
그 어떤
인간적인 것에도
놀라지 마십시오.
주님의 십자가에
머무르십시오.
이것이 우리의
근본적인 희망입니다.
8)이병우 루카 신부님
"내가 그분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마태26,15)
'탐욕의 배반!'
오늘 복음(마태26,14-25)은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는 말씀'입니다. 배신자 유다 이스카리옷이 '은돈 서른 닢'에 예수님을 팔아넘깁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가치가 '은돈 서른 닢'(약1200만원)에 불과하다니???
마태오 복음은 다른 복음과는 달리,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한 동기를 '탐욕'에서 찾습니다. 성주간 월요일 복음에서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려는 마음으로 매우 값진 향유를 아낌없이 사용한 마리아의 모습과 큰 대비를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이유는 우리에게 사는 길, 이제와 영원히 사는 길을 가르쳐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의 육화와 땀과 수난과 죽음이 곧 부활에 이르는 길이요, 진리이요, 생명이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러고 보면 유다의 배신 행위도 하느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지는 작은 도구였고, 필요했던 도구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배반자 유다는 하느님의 자비로 나아가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배반과 다른 결정적 이유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배반한 후,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이 나서, 슬피 울었습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종종 예수님을 배반합니다.
이스카리옷 유다처럼 탐욕에 눈이 멀어 예수님을 배반하기도 하고, 현실 앞에 놓여져 있는 근심과 걱정에 눈이 멀어 예수님을 잊고 사는 배반을 하기도 합니다. 그밖에도 육의 행실들, 곧 교만, 인색, 시기(질투), 음욕, 분노, 나태(게으름)로 예수님을 배반합니다.
성주간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을 묵상하는, 전례주년 안에서 가장 거룩한 주간입니다.
나의 육적인 충동들을 잠시 내려놓고, 극진한 사랑의 표징인 십자가를 바라봅시다!
복음 말씀
<사람의 아들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6,14-25
14 그때에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유다 이스카리옷이라는 자가 수석 사제들에게 가서,
15 “내가 그분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들은 은돈 서른 닢을 내주었다.
16 그때부터 유다는 예수님을 넘길 적당한 기회를 노렸다.
17 무교절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께서 잡수실 파스카 음식을
어디에 차리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18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도성 안으로 아무개를 찾아가,
‘선생님께서 ′나의 때가 가까웠으니
내가 너의 집에서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축제를 지내겠다.′ 하십니다.’ 하여라.”
19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대로 파스카 음식을 차렸다.
20 저녁때가 되자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식탁에 앉으셨다.
21 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22 그러자 그들은 몹시 근심하며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기 시작하였다.
2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나와 함께 대접에 손을 넣어 빵을 적시는 자, 그자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24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
25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가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 하고 대답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