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람의 나이가 아흔아홉 살이 되었을 때,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말씀하셨다.
"나는 전능한 하느님이다. 너는 내 앞에서 살아가며 흠없는 이가 되어라." (1)
'아흔아홉 살이 되었을 때'는 아브람이 하란을 떠난 지 24년이 되었고(창세12,4).
그의 첩 하가르가 이스마엘을 낳은지 13년이 되는 해였다(창세16,16).
그런데 창세기 16장의 마지막 내용인 이스마엘이 출생한 기록이 나온 후, 곧 바로
13년이나 건너뛴 것은 그 동안 하느님의 계시가 아브람에게 없었던 것을 암시한다.
이처럼 장시간 동안 하느님의 계시가 없었으므로, 아브람에게는 이스마엘에 대한
애착이 강해졌을 것이고, 그를 통한 약속의 성취를 계속 기대했을 것이다.
이것은 창세기 17장 18절의 '이스마엘이나 당신 앞에서 오래 살기를 바랍니다'
라는 아브라함의 고백에서 엿볼 수 있는 사실이다.
또한 13년간의 침묵은 창세기 17장에 나오는 새로운 하느님의 계시와 약속을
아브라함이 매우 놀라운 사건으로 여길 수 있게 하는 이유가 된다.
그동안 이스마엘을 중심으로 자신의 기업을 확장해 가려던 그 모든 생각이 옳지
않았다는 것을 한순간에 깨닫게 되었을 때 아브라함의 좌절은 심각했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약속이 새롭게 주어지는 것을 통해 아브라함은
그 좌절의 혼란속에서 다시금 믿음을 일깨우는 계기를 가지게 된 것이다.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나타나'로 번역된 '와예라'(wayera; appeared)는 단순 재귀형이 사용되어
'그리고 그는 자신을 보여주다'이다.
여기서 '보여주다'에 해당하는 '라아'(raah)는 자신이 직접 경험하고 숙고하여
깨달아 아는 것을 의미한다(창세11,5; 에제21,26; 호세9,10).
말하자면 주님께서 자신을 보여 주시는데, 아브람이 직접 경험하여 구체적으로
깨달아 알도록 보여 주신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자신을 보여 주신 이유는 이스마엘이 약속의 자녀가
아니라는 것과 동시에 사라이를 통한 이사악의 출생 약속이 임박했음을
말씀하시기 위한 것이다(창세16,16; 17,19).
'나는 전능한 하느님이다'
히브리어 문장에서 주어가 어떤 단어의 접두어나 접미어로 사용되는 것이
보통이지만, 여기서처럼 '나는'에 해당하는 인칭 대명사 '아니'(ani)가
독립적으로 사용된 경우는 바로 지금 하느님께서 자신을 공적으로
소개하시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전능한 하느님'은 '엘'(el; '하느님')과 '샷다이'(shaddai)의 복합어이다.
여기서 '엘'(el; '하느님')의 어원인 '울'(ul)은 '능력 있다', '강하다'는 의미이다.
또한 '샷다이'(shaddai)는 '~하는 자'(she; 셰)와 '충분한'(dai; 따이)의
복합어로서 '충족적인 자'를 의미한다.
따라서 '전능한 하느님'은 권능이 있으면서 또한 '(자기)충족적인 하느님'임을
나타내는 명칭이다.
이 명칭은 특별히 사람과 계약을 세우실 때 사용되는 하느님의 명칭이다
(창세28,3; 43,14; 48,3).
이 명칭이 주로 계약과 관계되어 사용된 것은 하느님께서 한번 맺으신 계약은
그 어떤 경우에라도 반드시 지킬 수 있는 강력한 힘을 지니신 자기 충족적이신
분이심을 보여 주시기 위함이다.
'너는 내 앞에서 살아가며'
'너는 내 앞에서 살아가며'로 번역된 '히트할레크 레파나이'(hithhallek lepanai)
는 직역하면 '너는 내 얼굴 앞으로 스스로 걸으라'이다.
여기서 '히트할레크'(hithhallek)는 '걷다'(walk)는 뜻이 있는 '할라크'
(hallak)의 재귀형이므로 '자기 스스로 걷다'란 의미가 있다.
그리고 '레파나이'(lepanai)는 '얼굴'을 의미하는 '파님'(panim)에
'~을 향하다'는 뜻이 있는 전치사 '레'(le)가 결합된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하느님께서 아브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결정하여 어떤 일을
하더라도 하느님 대전에 하는 것처럼, 즉 하느님을 의식하고 의롭게
행동해야 함을 명령한 것이다.
'흠없는 이가 되어라'
'흠없는 이가 되어라'로 번역한 '웨흐예 타밈'(yehye tamim)은 직역하면
'그리고 너는 완전하라'는 명령형이다.
그런데 '타밈'(tamim; perfect)이란 용어는 하느님께 바치는 제물로 사용되는
흠이 없는 동물을 표현할 때도 쓰였다.
하느님께서는 흠없는 제물만 받으신다(레위22,14~25).
그러나 이 단어가 사람에게 사용될 때는 도덕적으로 성실하고 깨끗한 자로서
하느님과 친교를 나눌 수 있는 자를 가리키는 데 쓰였다(시편15장; 101,6).
이것은 노아를 묘사할 때도 쓰인 말로서(창세6,9), 아브람은 믿음이 없는 세대
가운데서 도덕적으로 성실하고 깨끗하여 하느님과 친교할 수 있는 자세를
갖춤으로써, 하느님의 완전하심을 보여 줄 수 있는 모습이 되라고 하느님께로부터
명령받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흠없는 이가 되어라'고 명령하신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아브람이 하가르를 첩으로 취한 것이 하느님께는 완전하게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브람의 지난 13년간의 삶을 한순간에 뒤돌아보게
하는 명령이었다.
둘째는 모든 인간이 하느님 대전에서 절대적인 의미로 완전할 수 없지만,
그것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도덕적으로 순결할 것과 성숙할 것에 대한 요구이며,
아브람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인 모든 성도들이 추구해야 할 삶의
자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