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강원도 - 삼척에는 오십천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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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4.01.10. 01:30조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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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척에는 오십천이 흐른다
『택리지』의 삼척에 대한 기록을 보자.
고성과 통천 다음으로 삼척에는 기름진 땅이 많다. 삼척은 논에 종자 한 말을 뿌리면 40말을 수확한다. 그러나 이 세 고을에선 인물이 나지 않는다. 앞에서 열거한 강원도의 아홉 고을은 모두 해안에 접하므로 주민은 고기 잡고 미역 따며 소금 굽는 것을 생업으로 하고, 땅은 비록 메말라도 부유한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서쪽의 백두대간이 너무 높아서 다른 나라와도 같아, 잠시 구경하고 머무르기에는 좋지만 오래 살 곳은 못 된다.
삼척은 본래 실직국(悉直國)이었다. 신라 파사왕 때 신라에 병합되었고, 경덕왕 때 삼척군이 되었으며, 조선 태조 2년에는 목조의 외가 고을이라 하여 부로 승격되었고, 태종 13년에 예에 따라 도호부로 개칭되었다. 류사눌(柳思訥)은 「형승」조에서 “천 길 푸른 석벽이 겹겹으로 두르고 있고, 오십 맑은 냇물이 졸졸 흐른다”라고 하였다. 또한 김수온은 『죽서루기』에서 “북쪽으로 큰 영을 의지했고, 서쪽으로 큰 냇물을 임했다”라고 하였다.
삼척 오십천
오십천은 삼척시 도계읍 구사리 백산에서 원통골로 넘어가는 큰덕샘에서 발원하여 삼척시를 가로지르는 하천이다. 발원지에서부터 동해에 이르기까지 50여 번을 돌아 흐른다 하여 오십천이란 이름이 붙었다.
『여지도서』「풍속」조에는 “무당과 귀신을 믿는다. 검소하며 꾸밈이 없다”라고 실려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풍속」조에 따르면, 삼척에서는 “고을 사람이 오금잠(烏金簪, 금비녀)을 작은 함에 담아 관아 동쪽 모퉁이 나무 밑에 감추었다가 단옷날이면 끄집어내 제물을 갖추어 제사한 다음 이튿날 도로 감춘다. 전해오는 말로는 고려 태조 때 물건이라 하나 제(祭)하는 이유는 알 수 없다. 예전부터 전해오는 일이므로 관에서도 금단하지 않는다.”
이곳 삼척시1)에는 오십천이 흐른다. 오십천은 삼척시 도계읍 구사리 백산에서 원통골로 넘어가는 큰덕샘에서 발원하여 삼척 정상리에서 동해로 들어가는 59.5킬로미터의 강이다. 『동국여지승람』에서는 “오십천은 부성 남쪽 105리에 있다. 수원(水源)이 우보현에 있으며, 죽서루 밑에 와서는 휘돌면서 못이 된다. 또 동쪽으로 흘러 삼척포가 되어 바다로 들어간다. 부에서 수원까지 마흔일곱 번을 건너야 하므로 대충 헤아려서 오십천이라 일컫는다”라고 하였다. 정구는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겹으로 된 벼랑은 층층 누각을 버티었고
붉은 기와는 맑은 흐름을 굽어본다
여러 구렁은 서쪽을 따라
구불구불 백 굽이나 내려왔다
흰 돌 하얀 모래 깨끗하기에
홍진의 발을 씻고 싶구나
나는 여울은 돌다리에 뿌리고
급한 물결은 주옥(珠玉)을 뒤집는 듯하다
샘물이 달고 땅이 또 기름져
반곡(盤谷, 중국 태행산 남쪽에 있는 땅 이름으로 샘물이 달고 땅이 기름진 곳을 이름)에 왔는가 의심된다
산이 둘리고 초록이 우거졌고
길이 돌아서 간다는 것이 돌아오는 듯
여기에 오니 세상 뜻 적어져서
가려고 하다가 도로 묵는다
오십천이 휘돌아가는 깎아지른 절벽 위에 관동팔경 중 하나이며 보물 제213호로 지정된 죽서루가 있다.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죽서루는 객관 서쪽에 있다. 절벽이 천 길이고 기이한 바위가 총총 섰다. 그 위에 날아갈 듯한 누를 지었는데 죽서루라 한다. 아래로 오십천에 임했고 냇물이 휘돌아서 못을 이루었다. 물이 맑아서 햇빛이 밑바닥까지 통하여 헤엄치는 물고기도 낱낱이 헤아릴 수 있어서 영동 절경이 된다”라고 하였다. 공민왕 때 강릉에 안겸사로 왔던 정추는 그의 시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죽서루 그림자 맑은 냇물에 일렁이며
못 위의 산 빛이 작은 누에 가득하다
가절(佳節)에 멀리 와 노니 느낌이 많아
석양에 가려다 다시 머뭇거린다
일찍이 황학루를 때려 부순 사람 있음을 들었더니
지금은 백구와 친한 사람 없음이 한스러워라
언덕을 끼고 붉은 도화 봄도 늙어가니
나팔 부는 소리는 진주(삼척의 옛 이름)를 찢으려 하네
죽서루는 고려 충렬왕 때 『제왕운기』를 지은 이승휴가 처음 지었다고 한다. 고종 11년에 태어나 충렬왕 때까지 개성ㆍ강화ㆍ삼척을 전전하며 살았던 동안거사 이승휴는 감찰대부라는 높은 자리에 오른 뒤 기울어가는 고려 왕조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국정을 문란케 하는 친원 세력의 횡포와 충렬왕의 실정을 비판하였다. 하지만 자신의 충정이 반영되기는커녕 날이 갈수록 임금의 미움만 받게 되자 그는 아무런 미련 없이 두타산 자락 지금의 천은사 자리에 용안당(容安堂)이라는 초막을 짓고 은둔 생활을 하며 『제왕운기』를 쓰기 시작하였다.
원나라의 지배 밑에서 신음하는 우리 민족의 뿌리를 단군으로 귀착한 그는 우리 문화의 우수성과 올바른 왕도의 길을 역설하였다. 이승휴는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와는 다른 각도에서 역사를 보았고, 『삼국유사』에서조차 다루지 않은 발해사를 짧은 글로나마 우리 민족의 역사로 다루었다. 두 권으로 된 『제왕운기』 하권의 첫머리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요하 동쪽에는 한 건곤이 따로 있으니 뚜렷하게 중국과 갈라지고 구분된다. 큰 파도 넘실넘실 삼면을 둘러싸고 북쪽에는 육지가 실같이 이어져 있다. 그 가운데 지방이 1000리 여기가 조선이니 강산 좋은 형세 그 이름이 천하에 퍼졌다. 밭 갈고 우물 파는 예의의 나라 화인이 이름 해서 소중화(小中華)라 일렀도다. 처음에 누가 개국해서 풍운을 열었던고. 석제의 자손 그 이름이 단군이라.
죽서루
죽서루는 오십천의 협곡이 끝나가는 곳에 있어 절벽의 지형과 길게 늘어선 송림 등이 태백산과 어우러져 절경을 자아낸다.
그가 죽은 뒤 100년이 지나지 않아 고려는 조선 태조 이성계에게 허물어지고 말았다. 관동팔경 중 바다에 접하지 않은 유일한 건물이며 제일 큰 누정인 죽서루는 그 뒤 태종 3년에 삼척부사 김효손이 중창하였는데, 정면 7칸에 측면 2칸의 장방형 평면을 이룬다. 죽서루를 세울 당시 죽죽선이라는 이름난 기생이 살던 집이 있어 이름을 죽서루라 지었다고 한다. 율곡 이이를 비롯한 여러 명사들의 시가 걸려 있는데, 「제일계정(第一溪亭)」은 허목이 썼고,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는 이성조가 썼으며, 「해선유희지소(海仙遊戱之所)」는 이규헌이 쓴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삼척에는 오십천이 흐른다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8 : 강원도, 2012. 10. 5., 신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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