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514
6월7일[연중 제9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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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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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Gesw4nSkMsw (전호엽 프란치스코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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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흔들림 없는 신앙과 간절한 기도, 사심 없는 자선>
이번 주간 내내 첫 번째 독서로 토빗기가 낭독됩니다. 토빗의 인간 됨됨이는 탁월했습니다. 그는 법 없이도 살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남이 불행한 꼴을 결코 못 넘겼습니다.
비록 유배지 생활이었지만 토빗은 가산이 넉넉한 부자로 살았습니다. 그는 얼마나 인정이 많았던지 잔치를 벌일 때 식솔들끼리만 즐기는 법이 없었습니다. 유배지에서 죽을 고생을 하고 있던 동포들 가운데 제일 가난한 사람들을 늘 잔칫상에 앉게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동포들의 불행을 늘 자신의 불행으로 여겼습니다. 율법까지 어겨가면서 타향에서 객사한 동포들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섰습니다.
그토록 주님과 동료 인간들에게 충실했던 의인 토빗이었지만 그에게도 불행의 그림자가 덮쳤습니다. 오순절 밤, 죽은 동포를 매장하고 나서 피곤에 지친 그가 마당에서 잠을 자던 중이었습니다.
하필이면 뜨거운 참새 똥이 그의 두 눈에 명중하고 맙니다. 그 길로 그는 시력을 잃고 4년여 동안 암흑 속에 살아가야만 했습니다.
그로 인해 아내 안나가 생활 전선에 뛰어 들어야만 했습니다. 주로 할 수 있었던 일은 품팔이, 남의 집 가사일, 허드렛일이었습니다. 그렇게 죽을 고생을 하며 앞 못 보는 남편을 봉양했습니다.
그런 토빗의 모습에 주변 사람들은 크게 비웃었습니다. “하느님께 충실해도 뭐 특별한 것 없구먼! 그렇게 자선을 베풀었는데, 결국 돌아온 것은 저 모양이군!”
뿐만 아니라 밖에서는 성인군자, 안에서는 무능한 남편인 토빗을 향해 아내 안나도 드디어 분노가 폭발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그 자선들로 얻은 게 뭐죠? 당신의 그 선행들로 얻은 게 뭐죠? 그것으로 당신이 무엇을 얻었는지 다들 알고 있어요.”
당시 토빗이 얼마나 괴로웠던지는 그가 바친 기도를 통해서 잘 파악할 수 있습니다. 토빗의 하루하루가 얼마나 힘겨웠던지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게 더 낫다고.’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토빗이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는 의도로 바친 기도는 결코 아니었습니다.
토빗의 기도에는 진실성이 듬뿍 묻어있습니다. 현재 자신이 처해있는 힘겨운 처지를 아무런 가감 없이 있는 그대로 주님께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마치 바로 눈앞에 주님께서 계신 것처럼, 친밀하면서도 격의 없는 기도를 열정적으로 바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인의 선배로서 토빗이 우리에게 건네는 한 가지 탁월한 본보기가 있습니다. ‘한결같음’입니다. 주님을 향한 그의 신앙은 항구하고 충실했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늘 주님을 찬양했습니다. 건강할 때나 병들었을 때나 언제나 주님께 매달렸습니다.
그토록 충실했고 한결같았던 토빗이었기에, 주님께서는 후에 그가 잃었던 모든 것을 되돌려주셨고, 회복시켜주셨습니다. 축복과 은총을 흘러넘치도록 베풀어주셨습니다.
하느님의 개입과 축복을 이끌어내기 위한 가장 필요한 인간 측의 노력은 흔들림 없는 신앙과 간절한 기도, 사심 없는 자선임을 토빗기는 밝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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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산 자의 하느님, 죽은 자의 하느님>
오늘은 사두가이들이 예수님께 따집니다. 사두가이들은 유대교 신봉자들이었지만, 동시에 지극히 현세적인 인간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권력과 돈에 집중하기 위해 신이 자신들에게 의미 없는 존재로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신은 있되 부활과 내세와 심판 등은 없다고 믿었습니다.
내세가 있다는 말은 지금의 삶에 심판을 받아야 함을 의미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에 관해서는, 모세의 책에 있는 떨기나무 대목에서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읽어 보지 않았느냐?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너희는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혹시 내세에 있을 존재를 믿으면서도 그 존재의 영향은 전혀 받기 싫어하는 현시대의 사두가이들은 없을까요?
유튜브 채널 ‘MBN, 특종세상’에서 ‘빗물을 마시고 풀을 뜯어 먹는 할머니’란 사연이 방송되었습니다. 여기 나온 할머니는 몸도 불편하시면서 지붕에 올라 주워온 것들을 올려놓고 집 안은 온갖 쓰레기로 가득채우며 주위에 피해를 주며 살고 계셨습니다.
이장이 아무리 위험하다고 해도 문을 쇠사슬로 걸어잠그고 못 들어오게 합니다. 마을 사람들이 다 포기한 상태입니다.
할머니가 이렇게 된 이유는 어머니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막내 딸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몸이 쇠약해서 1년 반 동안 매일 같이 절에 가서 기도하고 지극정성으로 돌보았습니다. 그 딸이 지금의 할머니인 것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을 아는 할머니는 결혼도 안 하고 어머니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그 상실감에 어머니와 함께 살던 집이라도 지켜야 한다는 심경으로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할머니에게 어머니는 살아있는 어머니일까요, 죽은 어머니일까요? 할머니에게 어머니는 죽은 자들의 세상으로 가셨습니다. 왜냐하면 더는 할머니에게 영향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할머니가 아무리 어머니를 사랑하고 어머니 위해서 기도 드려도 할머니의 어머니는 할머니의 마음 속에서 돌아가셨습니다.
만약 살아 있는 자들의 세상에 가셨다면 지금 살아있는 자신에게도 영향을 미쳐야 합니다. 어머니는 딸이 그렇게 사는 것을 원치 않으실 것입니다. 딸은 어머니를 보내지 말았어야 합니다. 그러나 어머니를 죽은 자들의 동네로 보내버렸고 자신은 어머니의 체취가 묻은 집만을 살아있다고 여기게 된 것입니다.
죽음으로 그분을 그렇게 완전히 보내버렸다면 그분은 실제로는 어머니를 진정으로 사랑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필요하게만 여겼던 것입니다.
우리도 하느님을 그렇게 여길 수 있습니다. 만약 하느님께서 나에게 영향을 주지 못하신다면 나는 하느님을 믿으면서도 죽은 자들의 하느님으로 보내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나도 죽은 사람이 됩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살리지 못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죽은 이들의 하느님을 섬기는 이들은 자신의 뜻대로 하면서도 하느님을 섬긴다고 믿습니다.
‘우아한 비디오’에서 꺾인 다리로 달리는 상훈 씨의 사연이 있습니다. 90도로 꺾인 다리로 전북 장애인 육상 선수입니다. 그는 자신을 버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어딘가에 살아있을 어머니를 위해 달린다고 말합니다. 어머니가 자신을 보았을 때 실망하지 않도록 무너지지 않으려 합니다. 그에게 어머니는 죽었던 살았던 살아있는 자의 어머니입니다. 그러니 자신도 살아있는 자입니다.
결국 우리가 죽어서 만나게 될 분이 하느님이신지, 아닌지 그 준비를 하며 살아가고 있다면 하느님은 살아있는 자의 하느님입니다. 그리고 나도 그 덕분으로 삽니다. 죽어도 살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죽어서 하느님을 만날 준비를 하지 않는다면 하느님은 죽은 자의 하느님입니다. 나와는 상관 없는. 그래서 나도 죽은 자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사두가이처럼 되지 말고 살아 있는 자의 하느님을 믿읍시다. 그 증거는 그분 때문에 내가 점점 더 그분 뜻에 맞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는 삶입니다. 이 세상은 살아있는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준비과정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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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1)
‘억울(抑鬱)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소통이 안 되고 꽉 막힌다는 의미입니다. 일본과 중국에도 없는 한자입니다. 영어로도 딱 들어맞는 표현이 없다고 합니다. 이 억울함이 쌓이면 병이 되는데 ‘화병(火病)’이라고 합니다. 이 또한 한국에만 있는 표현입니다. 성서에는 ‘억울’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형의 질투 때문에 죽었던 아벨의 ‘피’가 있습니다. 엄마와 동생의 계략으로 장자의 축복을 빼앗긴 에사오도 있습니다. 형들의 시기와 질투로 이집트로 팔려갔던 요셉도 있습니다. 열심히 일하였지만 파라오의 명령으로 죽어야 했던 히브리인들의 남자아기들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었지만 결국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지 못했던 모세도 있습니다. 다윗의 욕망 때문에 전쟁터에서 죽었던 우리야도 있습니다. 아합왕의 욕심 때문에 포도원을 빼앗기고 죽었던 나봇도 있습니다. 신앙심이 깊었고, 열심히 살았지만 갖은 고난과 고통을 당해야 했던 욥도 있습니다. 성실하게 살았지만 눈이 멀었던 토빗과 열심히 살았지만 조롱을 받아야 했던 사라도 있습니다.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의 침략으로 나라를 빼앗기고 유배를 떠나야 했던 이스라엘 민족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십자가를 지고, 모욕을 당하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배반당하고, 십자가 위에서 죽어야 했던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시간은 직선으로 흘러간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시간은 순환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억울함을 아시고, 풀어주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과 계명을 충실하게 지키면 하느님께서는 죽음의 골짜기에서도 이스라엘 백성을 지켜 주신다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억울함 때문에 화병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억울함을 풀어주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였습니다. 억울함 때문에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잘못과 허물을 성찰하였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의 눈물을 닦아 주실 메시아를 선포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이 시작될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선포했던 메시아, 새 하늘과 새 땅을 시작하는 메시아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이들은 모두 나에게로 오너라. 나의 멍에는 편하고 가볍다.” 예수님께서는 말씀과 표징으로 억울한 이들의 아픔을 풀어 주셨습니다. 절망과 좌절에 빠진 이들에게 희망과 기쁨을 주셨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숨어 있던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너희는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직선의 시간에서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만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순환하는 시간에서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는 함께 합니다. 그래서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에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이 시간의 정점에 ‘부활’이 있습니다. 이것을 서정적으로 표현한 노래가 있습니다. 제목은 “마른 잎 다시 살아나”입니다. 가사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서럽다 뉘 말하는가. 흐르는 강물을/ 꿈이라 뉘 말하는가./ 되살아오는 세월을/ 가슴에 맺힌 한들이 일어나 하늘을 보네/ 빛나는 그 눈 속에 순결한 눈물 흐르네./ 가네. 가네. 서러운 벗들이 가네./ 가네. 가네. 한 많은 세월이 가네./ 마른 잎 다시 살아나 푸르른 하늘을 보네/ 마른 잎 다시 살아나 이 강산은 푸르러” 이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땅 위를 기어 다녀야 했던 애벌레가 하늘을 나는 나비가 되듯이 언젠가 우리는 오욕과 시기의 허물을 벗어 버리고, 좌절과 절망의 허물을 벗어버리고 믿음과 희망의 날개를 펴서 사랑의 나라로 가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주님은 어질고 바르시니, 죄인들에게도 길을 가르치신다. 가련한 이 올바른 길 걷게 하시고, 가난한 이 당신 길 알게 하신다.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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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옛 강론)
‘시간이 햇빛을 받으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광명정대한 햇빛도 중요하지만, 은은한 달빛도 있어야 합니다. 서울대교구의 염수정 안드레아 추기경님은 고인이 되신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님의 장례미사 강론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이 아버지와 같았다면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님은 어머니와 같았습니다. 자상하시고, 겸손하셨고, 검소하셨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면 찾아뵈었습니다. 이제 찾아갈 어르신이 안 계십니다.”라고 하면서 잠시 울컥하셨습니다.
저도 방송을 통해 강론을 들으면서 마음이 아렸습니다. 제가 복음화 학교의 담당사제로 있을 때입니다.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님께 강의를 부탁드리면 흔쾌히 수락하셨습니다. ‘가상칠언(架上七言)’을 주제로 강의를 해 주셨고, ‘칠성사(七聖事)’를 주제로 강의를 해 주셨습니다. 천상에서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과 회포를 푸시면서 한국 교회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달은 지구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고 합니다. 만일 달이 사라지면 지구는 지금과는 달리 생명이 사라진 행성이 될 거라고 합니다. 달은 인력을 통해서 지구의 자전을 지금과 같이 하루 24시간이 되도록 합니다. 그러나 달이 사라지면 지구의 자전은 지금보다 빨라져서 하루는 8시간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자전이 빨라지면 엄청난 크기의 태풍이 발생할 거라고 합니다. 달은 지구의 자기장에도 영향을 준다고 합니다. 달이 사라지면 지구의 자기장은 더욱 강해져서 태양의 빛을 지금보다 많이 차단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지구는 생명이 살기 어려운 행성이 될 거라고 합니다. 달이 사라지면 조수간만의 차가 없어진다고 합니다. 갯벌도 사라지고, 바다의 생명에도 큰 영향을 줄 거라고 합니다. 달의 영향으로 지구의 자전축이 지금처럼 기울어져서 4계절이 생길 수 있다고 합니다. 달은 지구로 떨어지는 소행성의 충돌을 막아 준다고 합니다. 달이 지구를 대신해서 소행성을 받아들인다고 합니다. 달은 신화이면서 우리의 삶을 보듬어 주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입니다.
문득 생각합니다. 하느님이 안 계시다면 어떨까? 역사와 신화도 의미가 없어질 것입니다. 신앙 때문에 순교하신 분들의 죽음도 의미가 없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디로 가야하는지에 대한 물음도 의미가 없어질 것입니다. 성모님의 순명도, 요셉 성인의 순명도 의미가 없어질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음도 의미가 없어질 것입니다.
줄이 끊어진 연은 하늘을 날지 못하고 추락하기 마련입니다. 가련한 이와 고통 중에 있는 이와, 억울한 이들이 의지할 곳이 없어질 것입니다. 타인을 위한 희생과 나눔이 위로 받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두가이파 사람은 부활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마치 하느님이 안 계시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산 이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의 삶이 끝나면 하느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이 시작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삶은 마치 애벌레가 나비가 되듯이, 전혀 새로운 차원이 삶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토빗과 사라’는 하느님께 간절하게 기도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두 사람의 기도를 들어주셨고, 라파엘이 두 사람의 고통을 치유하도록 파견되었습니다.
우리의 삶이 사두가이파 사람들처럼 현재와 순간에만 머물러서는 안 될 것입니다. 시간이 햇빛을 받으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되지만, 하느님의 말씀과 함께 하면 영원한 생명이 될 것입니다.
“주님, 명령을 내리시어 제가 이 곤궁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제가 이곳에서 벗어나 영원한 곳으로 들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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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강론)
신문 홍보나 성지순례로 비행기를 탑승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사람마다 선호하는 좌석이 있겠지만 저는 주로 복도 자리를 선택합니다. 옆 사람에게 방해 받지 않고 화장실을 다녀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할 때는 약간 고민할 때가 있습니다. 물냉면인지 비빔냉면인지를 놓고 잠시 고민하기도 합니다. 짬뽕인지 짜장면인지를 놓고도 잠시 고민하곤 합니다. 그래도 그런 고민은 잠시이고, 선택에 따른 책임이나 피해는 없습니다. 자동차나 가전제품과 같이 가격이 비싸고, 오랫동안 사용하는 것들은 선택에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전에 이런 광고가 있었습니다. “순간의 선택이 십년을 좌우합니다.” 꼼꼼히 살펴보고, 다른 제품과 비교해 보고, 사람들의 평가를 찾아보고 선택하면 도움이 됩니다. 평생을 함께하는 배우자라면 선택의 차원이 달라집니다. 상대방의 건강, 외모, 능력, 재력, 성격, 종교, 학력을 고려해야 합니다. 저는 ‘사랑하는지, 성실한지’를 살펴보라고 조언합니다.
저는 교사나 군인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초등학교 때 3년간 같은 담임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4학년 2반, 5학년 1반, 6학년 3반이었는데 선생님이 저를 선택하신 것은 아니었겠지만 공교롭게도 같은 담임 선생님이 되셨습니다. 어린 제게 선생님은 존경의 대상이었습니다. 전 과목을 가르치셨습니다. 때로는 엄하셨지만 사랑으로 대해 주셨습니다. 저도 교사가 되면 좋겠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어릴 때 사촌형님이 장교가 되어서 왔습니다. 형님이 입은 군복이 멋있어 보였습니다. 소위 계급장도 빛나보였습니다. 당시에는 대통령도 군인 출신이었습니다. 군대의 조직과 문화가 사회의 조직과 문화를 선도하던 시대였습니다. 운명처럼 제게 주어진 선택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신학교에 가서 사제가 되는 것입니다. 성당에서 만난 친구들 중에는 사제가 되겠다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신부님께서 입으시는 수단과 제의도 멋져 보였습니다. 구교우 집안으로 부모님의 후원과 기도가 있었습니다. 저는 큰 고민 없이 신학교를 선택하였습니다. 저의 선택이기도 하지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셨던 것처럼 하느님의 부르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제로 지내는 것에는 ‘교사와 군인’의 모습이 있습니다. 강론과 교리를 통해서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교사의 모습입니다. 교회의 조직과 규율을 따라야 하는 것은 군인의 모습입니다. 사제가 되면서 저는 교사의 역할도, 군인의 역할도 함께 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어르신들이 이렇게 말하고 했습니다. “사람이면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 사람답게 사는 기준이 있었습니다. 불쌍한 이를 도와주는 측은지심의 마음입니다.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게 지내는 사양지심의 마음입니다.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뉘우치는 수오지심의 마음입니다. 그릇된 것은 버리고 옳은 것을 따르는 시비지심의 마음입니다. 신뢰를 저버리지 않는 믿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사람답게 사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없는 사람은 ‘싸가지’가 없다고 야단치셨습니다. 싸가지가 없다는 것은 4가지의 마음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성공하고, 권력을 갖고, 재물이 많아도 4가지의 마음이 없다면 사람답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제자답게 사는 기준을 알려 주셨습니다. 첫 번째는 ‘희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몸소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십자가를 외면하였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을 비난하셨습니다. 두 번째는 ‘겸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이는 꼴찌가 되어야 한다. 잔치에 초대 받으면 윗자리에 앉지 마라.” 악의 유혹은 교만의 문으로 들어옵니다. 겸손은 하느님께 가까이 가는 지름길입니다. 세 번째는 ‘가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하는 부자청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따라라.” 부자였던 청년은 슬퍼하며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 우리는 소유의 삶이 아니라 존재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자신의 재물을 기꺼이 가난한 이들에게 나눌 수 있었던 자캐오는 존재의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이 집은 구원받았다.” 신앙인인 우리는 ‘희생, 겸손, 가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의 영광이 아닌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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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12,18-27: 살아있는 이들의 하느님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구약의 모세 오경만을 성서로 인정하였고, 거기에 영생에 대한 언급도, 천사도 영혼에 대한 언급이 없었기 때문에 죽은 이들의 부활을 믿지 않았다. 오늘의 질문은 신명 25,5이하에 나오는 규정에 근거한 것으로서 아주 과장된 질문이다. 이 질문은 부활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어리석게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사두가이들은 죽은 이들을 다시 살리시는 하느님의 권능을 보지 못한다.
사두가이들은 부활을 부인했지만, 주님께서는 부활을 인정하셨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24절) 하시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26절) 고 죽은 이들의 부활에 대해 확실하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 자체가 그분이 하느님이심을 증명하는 결정적인 증거였다.
우리의 부활한 몸은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몸처럼 될 것이다. 이 세상을 떠난 뒤 부활하여 천사들과 같아질 그리스도인들에게 약속된 것은 혼인이 지닌 육체적 요소들의 회복이 아니다. 혼인이라는 것은 인간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생명을 이 세상에서 계속 이어가는 방법이다. 그래서 자식을 낳는 것이 혼인의 목적이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장가를 들고 시집을 가는 것이다.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25절) 부활한 다음에는 다시 죽는 일이 없어 혼인의 필요성이 천국에서는 없어진다는 의미이다. 모두가 천사들과 같아서 일곱 형제와 차례로 결혼한 그 여자도 부활한 다음에는 그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예수님은 탈출 3,6의 말씀으로 증명하신다. 하느님은 당신 자신을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하느님이 이렇게 성조들의 하느님이라면 그들은 다른 모습으로 살아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씀이다.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있는 자들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교부들은 ‘살아있는 인간이 하느님 최대의 영광’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살아있다는 것은 목숨이 붙어있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 안에 하느님의 뜻 안에 살아있다는 의미이다. 예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마태 8,22). 이들은 구원의 길을 모르고 하느님도 모르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들을 말한다.
언제나 하느님 앞에 살아있는 우리가 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하느님께서 살아있는 우리들의 하느님이 되시지 않겠는가? 당신을 떠나 죽은 자들이 되지 말고 그분의 뜻을 올바로 실천하면서 언제나 살아있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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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그분께서는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에 관해서는, 모세의 책에 있는 떨기나무 대목에서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읽어보지 않았느냐?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너희는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마르 12,24-27) 부활과 영원한 생명에 관해서 말하기 전에 먼저,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을 때, 그들을 에덴동산에서 내보내면서 하느님께서 하신 말씀과 일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자, 사람이 선과 악을 알아 우리 가운데 하나처럼 되었으니, 이제 그가 손을 내밀어 생명나무 열매까지 따 먹고 영원히 살게 되어서는 안 되지.’ 그래서 주 하느님께서는 그를 에덴동산에서 내치시어, 그가 생겨 나온 흙을 일구게 하셨다. 이렇게 사람을 내쫓으신 다음, 에덴동산 동쪽에 커룹들과 번쩍이는 불 칼을 세워,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지키게 하셨다."(창세 3,22) 아담과 하와는, 즉 인간들은 원래는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는 존재로 창조되었는데, 죄를 짓는 바람에,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이(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이) 차단되어 버렸습니다.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창세 3,19).” 라는 말씀도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릴 기회를 박탈한다는 말씀입니다. 만일에 하느님의 그 조치가 ‘영구 조치’ 라면, 부활과 영원한 생명이 없다는 사두가이들의 주장은 옳은 것이 됩니다. 그러나 그 조치는 ‘모든 사람’에게 영구적으로 적용된 ‘영구 조치’가 아니라 ‘임시 조치’였을 뿐입니다. 창세기 5장의 ‘아담의 족보’에 나오는 ‘에녹’이라는 사람이 좋은 예입니다.(창세 5,22-24)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니, 한 번도 제대로 사용해 보지도 못하고 차단할 길은 처음부터 만들지도 않으셨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먹지도 못할 생명나무를 창조하지는 않으셨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지혜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정녕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불멸의 존재로 창조하시고, 당신 본성의 모습에 따라 인간을 만드셨다. 그러나 악마의 시기로 세상에 죽음이 들어와 죽음에 속한 자들은 그것을 맛보게 된다."(지혜 2,23-24) “그러나 의인들은 영원히 산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보상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그들을 보살피신다."(지혜 5,15)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이 하느님의 원래 계획입니다. 의인들은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서 그 생명을 얻고, 하느님의 뜻을 거역한 악인들은 그 생명을 얻지 못하게 됩니다. 이렇게 구약성경에도 의인들의 부활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막혀 있던 ‘생명나무의 길’을 다시 열어 놓으신 분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라는 말씀은, 지금의 가족이 그쪽에서는 해체된다는 뜻은 아니고, 새로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는 일은 없다는 뜻입니다. <지금의 가족이 가족인 줄도 모르게 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사랑은 이곳에서나 그곳에서나 영원히 남아 있습니다.>
“천사들과 같아진다.”라는 말씀은, 세속적이고 육적인 욕망을 초월하게 되고, 그래서 인간 세상의 온갖 다툼과 갈등 같은 것들이 없다는 뜻입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라는 탈출기 3장 6절의 말씀은, 탈출기 본문에서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이 하느님으로 섬겼던 분이라는 뜻인데, 예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이 하느님 앞에서 살아 있고, 지금 하느님을 섬기고 있다.”라는 뜻으로 해석하셨습니다.<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라는 말씀은, “하느님은 ‘죽음이라는 것’에게 당신의 자녀들을 빼앗기는 무기력한 신이 아니라, 당신의 자녀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느님이시다.”라는 뜻입니다.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라는 말은, “죽어서 소멸될 존재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만 그들을 지배하는 신”이라는 뜻이고, “산 이들의 하느님”이라는 말은, “인간을 영원히 살 수 있게 해 주시는 하느님” 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죽은 이들의 하느님’은 하느님이 아닙니다.>
만일에 부활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되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1코린 15,13-14)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이 지은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이들도 멸망하였을 것입니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코린 15,17-19)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지 않는다면야 ‘내일이면 죽을 몸, 먹고 마십시다.’"(1코린 15,32ㄴ) 우리가 우리 자신의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믿는 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은 이론이 아니라 실제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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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예수님 시대에 살던 대다수의 유다인들은 죽은 이들이 다시 살아나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일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 시대의 유다 분파들 가운데 바리사이들과 에세네인들은 죽은 이들의 부활을 믿었지만, 사두가이들은 이에 전혀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사두가이들은 고대 이스라엘의 관습을 바탕으로(신명 25,5 참조) 매우 극단적인 상황을 가정합니다. 일곱 형제가 같은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는데 모두 후사를 남기지 못한 채 죽고 그 부인도 나중에 죽게 된다면, 부활 때에 그 부인은 누구의 아내가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곧 사두가이들의 관점에서, 부활에 대한 믿음은 이러한 복잡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허무맹랑한 주장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반박은 이렇습니다. 부활 때에는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혼인하는 일이 없기에 누군가의 남편이나 아내가 될 일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살아 있는 이들의 하느님이시며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자기 계시 속에 죽은 이들의 부활 개념이 이미 내포되어 있다고 설명하십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사두가이들의 ‘잘못된 생각’(12,24.27 참조)을 드러내시면서 그들이 부활에 대하여 잘못 생각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지적하십니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 하느님에 대한 오해나 잘못된 생각은 그분을 잘 알지 못하는 데에서 비롯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을 더 잘 알려고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이십니까? 솔직히 그동안 배운 것들과 내가 알고 있는 것들로 충분하다는 자만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얕은 지식에만 기대어 하느님과 신앙에 관한 이런저런 생각들을 자기 방식대로 펼치다 보면, 실재하시는 하느님과 다른 허상을 그분으로 착각하는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하느님을 잘 알 수 있는 길은 그분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말씀을 통하여 당신을 계시하시기 때문입니다. 바쁜 삶 가운데에도 조금씩 시간을 내어 성경 읽기를 실천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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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 주신 하느님의 이름입니다. 이 이름이 우리에게 전하는 의미는 하느님께서 살아 계신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두가이들도 하느님을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ㅈ야곱의 하느님”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에서 시작된 하느님을 향한 신앙을 그들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이름이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전달되었는지, 또 성경 어디에 기록되어 있는지를 알고 있었지만, 그 이름이 지닌 본질에는 머물지 못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잘못된 출발점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마르코 복음사가는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마르코 복음 12장 18절)이라고 명확하게 언급합니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그들에게 하느님께서는 살아 계신 하느님이 아니라, 성경책에 기록된 죽은 하느님이 되고 맙니다.
그들은 하느님에 관하여 이야기할 수는 있었지만, 살아 계신 하느님을 체험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살아 계신 하느님을 믿고 고백하는 신앙인이 아닌, 자신들의 신념으로 살아가는 사상가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고 우리도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살아 계신 하느님을 체험하지 못한다면 우리도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과 같은 사람으로 남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어떻게 체험하고 만나고 있습니까? 하느님을 성경 속 등장 인물로만 생각하지는 않았는지요? 또는 전례 안에서만 찾으려고 하지 않았는지요? 기도할 때만 하느님을 찾지는 않았는지요?
하느님은 성경 속이나 전례 안에서만, 또는 기도할 때만 계시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일상 가운데, 우리와 함께하시는 “살아 계신 하느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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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 <복음>에 나오는 ‘사두가이들의 부활에 관한 질문’과 ‘예수님의 답변’은 ‘불신의 페러다임 paradigm’과 ‘믿음의 페러다임 paradigm’의 차이를 잘 보여줍니다.
사두가이들의 ‘영적무지’와 예수님의 ‘신적지혜’가 대조를 이룹니다. 곧 ‘영적무지’로 인한 구속과 속박을, ‘신적지혜’로 인한 자유와 해방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믿음’에 달려 있음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마르코 복음 12장 24절)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사두가이들의 영적무지를 두 가지로 지적하십니다.
곧 ‘성경에 대한’ 무지와 ‘하느님의 능력에 대한’ 무지로 말씀하십니다. ‘성경에 대한 무지’에 있어서, 그들은 모세오경만을 받아들였고, 인간의 합리적 사고의 범주로써 성경을 이해하려 했고, 내세와 부활과 영적존재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부활한 상태를 마치 지상에서의 삶과 동일하게 여기고, <신명기> 25장 5절-10절에 나오는 ‘수혼법’으로 부활에 대해 따지고 듭니다.
그들은 합리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부활한 상태, 곧 초월적인 실재인 부활체를 마치 지상에서의 삶과 동일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부활한 상태를 영적 존재로, 마치 천사와 같이 장가가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는 존재로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믿고 있는 모세오경인 <탈출기> 3장 6절을 인용하시면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은 이미 죽었지만, 하느님 앞에서는 살아있으며 부활하게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또한, 그들의 ‘하느님 능력에 대한 무지’를 말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합리적 사고와 이성적 판단 아래, 하느님의 권능을 제한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었습니다.
곧 인간을 죽이기도 살리기도 하실 수 있으며 부활케 하시는 하느님의 초월적인 권능을 무시했고, 고작 하느님의 부활의 능력이 마치 죽은 사람을 죽기 전의 생활로 되돌려놓는 정도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단지 되살아난다는 것만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 안에서 다시는 죽지 않을 새로운 존재로 변화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새롭게 변화된 부활체에 대해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자, 내가 여러분에게 신비 하나를 말해 주겠습니다. 우리 모두 다 죽지 않고 변화할 것입니다. ~ 죽은 이들이 썩지 않는 몸으로 되살아나고 우리는 변화할 것입니다. 이 썩는 몸은 썩지 않을 몸을 입고, 이 죽는 몸은 죽지 않는 몸을 입어야 합니다.”(코린토 1서 15장 51절-53절)
그렇습니다. 이러한 ‘영적 존재에 대한 무지’와 ‘하느님 권능에 대한 불신’이 그들로 하여금 부활에 대한 믿음의 거부를 가져왔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 믿으면, 신적지혜가 열릴 것입니다. 불신은 우리를 끝없이 속박할 뿐이며, 믿음은 우리를 진리에로 이끌어갈 것입니다.
그러면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성경을 몰랐기에, 영적 무지에 빠지고 불신에 떨어졌습니다.
다시 한 번, 예수님의 말씀을 새겨들어 봅니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생각에 속박되어 있는 것이 아니냐?”(마르코 복음 12장 2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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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마르코 복음 12장 24절)
주님!
제 안에 당신이 얼마나 생생히 살아 계신지를 알게 하소서!
영적 무지와 불신을 몰아내시고, 제 생각이 빗나가지 않게 하소서!
제 생각에 빠져 허상에 끌려 다니지 않게 하소서!
믿음으로 기뻐하고, 진리 안에서 자유롭게 하소서.
당신 안에서 변화되고, 제 삶이 성화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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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근본정신은 살아있어야 합니다. 예수님 시대에 사두가이들은 그 무리의 숫자는 적었으나 영향력은 무척 컸습니다. 그들은 모세 오경만을 권위 있는 경전으로 인정하고 예언서나 성문서는 성경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모세오경에서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은 것은 하느님의 계시로 믿을 필요가 없고, 믿어서도 안 된다고 주장하였으며 무엇보다 부활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많이 배운 사람들을 대표하는 그들이지만 정작 알아야 할 것은 알지 못했습니다. 유식한 무지를 행세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부귀와 영예를 누리는 이 세상으로 충분하다는 자기만족에 빠져 있었는가 봅니다. 그들은 사후 세계를 현재 세상의 단순한 연장 또는 재현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여러 형제가 함께 사는’ 상황에서 ‘한 형제가 아들 없이 죽었을 경우’(신명25,5) 그 대를 이어 주어야 한다는 ‘수혼법’의 특수한 규정을 들어 ‘후사를 남기지 못하여 일곱 번이나 결혼한 여자는 부활한 후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 하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이것은 부활신앙의 허구성을 조롱하고 싶은 마음에서 한 질문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마르12,25.26)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죽은 이들이 다시 살아나는 세상은 지금의 세상이 연장되는 것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세상, 새 생명이 주어지고 새 창조가 이루어진다는 말씀입니다. 동시에 아브라함과 이사악, 야곱이 우리에게는 죽은 인물이지만, 그분에게는 살아있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살아계신 하느님과 관계를 맺고 그 안에 충실하게 머무는 이들은 비록 죽었을지라도 ‘나는 너의 하느님이다.’라는 그분의 말씀과 능력에 의해 언제까지나 그분 안에서 살아있게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들은 부활한 삶을 사는 이들입니다. 그러나 마음의 문이 닫힌 사람은 그분을 만날 수 없습니다. 자기 안에 갇혀있는 사람은 결국 죽은 사람이요, 거기서 나오는 사람은 산 사람입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먼저 자기 주제를 알고 살리시는 하느님께 마음을 열어야 하겠습니다.
살아있는 이들의 하느님은 세월이 가도 변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진리이기에 세월에 구애됨 없이 살아계십니다. 부활의 삶을 믿지 못하고 엉뚱한 질문을 한 사두가이들은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마르12,24). 는 예수님의 질책을 들어야 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여전히 같은 질문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혹 우리도 고정관념과 선입견, 편견에 매여 있지는 않은지요? 우리의 생각과 틀을 넘어서서 우리를 부르고 계신 주님,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큰 가능성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느님께서 생명의 창조주이심을 입증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영원한 삶의 희망에로 이끄십니다. 부활을 믿는 이의 삶은 이 세상의 산고를 겪으며 기쁨과 평화를 간직합니다. 그러나 부활을 믿지 않는 이들은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기 때문에, 현실에 타협하며 그저 먹고 마시고 즐기며 온갖 세상 것에 매이고 맙니다. 그러므로 부활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오늘을 인내하며 지금 여기서부터 영원을 사는 기쁨 속에 산 이들의 하느님을 만나시길 빕니다. “하느님의 능력을 믿는다면, 그분을 죽음까지도 극복하시는 ‘산 이들의 하느님’(12,27)으로 고백할 수 있게 된다.”(손희송)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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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하느님 아버지를 만나려면 어디로 가면 될까요? 성당, 피정의 집, 성지, 성체 조배실…. 이런 곳을 우리는 기도하는 장소로 생각합니다. 즉, 하느님과 대화하고 만나는 곳으로 떠올립니다. 실제로 이런 곳이 도움 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과의 만남을 더 쉽게 해 줍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이런 곳에서만 계실까요?
우리가 많이 바치는 기도인 주님의 기도를 떠올려 보십시오. 그 시작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입니다. 성당에만 계신 분도 아니고, 피정의 집이나 성지, 성체 조배실에만 계신 분이 아닌, ‘하늘에 계신’ 하느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땅에는 안 계신다는 것일까요?
하늘을 바라보십시오. 보이지 않는 하늘이 있습니까? 물론 실내에 있으면 자기 눈에 하늘이 보일 리 없겠지만, 이 건물 위에도 하늘이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어디에나 있는 ‘하늘’인 것입니다. 그리고 높은 곳에 올라가면 아래가 잘 보입니다. 나의 시력 때문에 잘 안 보일 뿐이지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위치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어디에나 계시는 하느님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것을 보고 계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한정된 공간에 갇혀 계신 분이 아니라, 어디에나 계시고 또 어떤 상황에서도 어떤 순간에서도 계신 분이십니다. 결국 하느님을 만나려면, 장소를 찾는 것이 아닌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먼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으로 우리를 지켜 주시는 하느님을 받아들이며 매 순간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사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의 언어와 논리로만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모습을 이 세상의 언어와 논리로만 따지는 것은 잘못된 태도입니다. 오늘 복음의 사두가이들은 스스로 이런 함정에 빠져서 예수님께 시비를 걸고 있습니다. 그들은 부활을 부정하려고 인간의 논리로 하느님 나라를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부활이 지상의 삶이나 논리를 뛰어넘는 것이며, 하느님과 맺은 살아 있는 관계에 속하는 것임을 가르치십니다. 즉,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것은 당시의 사람에게 맞게 활동하시는 하느님, 살아 있는 하느님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도 생생하게 살아 있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하느님이 되십니다.
하느님을 세상의 논리로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세상의 판단 아래에서는 하느님을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반대편에 서면서 하느님과 함께 할 수 없게 됩니다. 우리가 간절한 원하는 참 행복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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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오늘을 살다>
마르코 12,18-27 (부활 논쟁)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이 예수님께 와서 물었다. “스승님, 모세는 ‘어떤 사람의 형제가 자식 없이 아내만 두고 죽으면, 그 사람이 죽은 이의 아내를 맞아들여 형제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고 저희를 위하여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래서 둘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지만 후사를 두지 못한 채 죽었고, 셋째도 그러하였습니다. 이렇게 일곱이 모두 후사를 남기지 못하였습니다. 맨 마지막으로 그 부인도 죽었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다시 살아나는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에 관해서는, 모세의 책에 있는 떨기나무 대목에서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읽어 보지 않았느냐?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너희는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오늘을 살다>
어제가 아닌
오늘을 살다
어제가 낳은
오늘을 살다
어제를 품어
오늘을 살다
내일이 아닌
오늘을 살다
내일을 낳을
오늘을 살다
내일을 품어
오늘을 살다
오늘이 아닌
오늘을 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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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탄식이 기도가 되는>
어제 저의 강론을 오늘 돌아보니 아쉬움이 남습니다. 저는 어제 토빗을 완성형 인간으로 그리고 참되고 완전한 선행의 본보기와 행복한 선행의 본보기로 제시했는데 그것은 요지부동의 선행과 요지부동의 행복이었지요.
요지부동搖之不動이란 흔들어대도 부동 곧 끄떡없음을 말함이지요. 이것은 안빈낙도安貧樂道처럼 수행을 통해 도사 또는 완전의 경지에 올라 아무리 누가 흔들어대도 그 사랑과 행복이 끄떡없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돌아보니 거기에 하느님이 빠져있었습니다. 이는 하느님이 필요 없는 초인으로 제가 토빗을 묘사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토빗은 하느님이 필요 없는 초인이 아닙니다 인간의 모욕에 크게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이고, 하느님께 울며 탄식하는 사람입니다.
선행의 대가가 이런 거라면 죽는 것보다 못하다고 탄식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탄식이 독백이 아니라는 점이고 탄식이 향하는 곳도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이라는 점입니다.
이 인간에게 모욕당하고 저 인간에게 하소연하는 식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탄식하고 그래서 탄식이 기도가 되는 그런 식입니다.
"그 무렵 나 토빗은 마음이 몹시 괴로워 탄식하며 울었다. 그리고 탄식 속에서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일곱 형제와 살다가 죽은 여인이 저세상에서는 누구의 부인이 될 것인지 사두가이들이 묻고 주님께서 답하시는 얘기가 나오는데 여기서 주님은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의 천사와 같을 것이다”라고 답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토빗기와 주님의 대답을 연결하여 묵상하니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초인이 되는 것을 선택할 것인가? 천사가 되는 것을 선택할 것인가?
우리 인간이 죽은 다음에도 여전히 인간으로 살지는 않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관계의 재편이 저세상에서는 있게 되고, 완전히 하느님 중심의 관계로 재편될 것이며, 그래서 다시 인간이 된다고 하더라도 천사와 같은 인간이 될 것입니다.
그것을 저는 지금부터 살고 싶습니다. 이 세상에서 초인으로 살지 않고, 이 세상에서부터 천사와 같은 삶을 살고 싶습니다.
하느님이 필요 없는 초인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무는 천사처럼, 탄식이 기도가 되는 천사처럼 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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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살아 계신’ 주님과 만남의 여정>
-희망과 기쁨, 찬미와 감사-
성모성월 5월에 이어지는 예수성심성월 6월도 참 아름답습니다. 날로 푸르름이 짙어가는 계절이요 일년중 가장 꽃들이 많이 피어나는 계절이기도합니다. 요즘은 ‘밤꽃’향기가 그윽하고 얼마전에는 ‘메꽃’들을, 엊그제는 올해 처음으로 ‘달맞이꽃’을 발견했고 예전 써놨던 글도 떠올랐습니다.
“꽃같은 만남보다 더 좋은 만남이 있으랴
꼬박 일 년 기다렸다 피어난 꽃이다
꼭 일 년만의 만남이다
밤꽃, 붓꽃, 메꽃, 달맞이꽃...
모든 꽃이 그렇다
꽃같은 반가운 만남이 되려면
일년은 꼬박 기다려야 하는구나.”-2001.5.20.
샛노란 달맞이꽃이 참 청초하고 아름다워 병마病魔와 투쟁중인 분에게도 위로와 치유의 은총을 청하며 사진을 보냈고 반가운 답신도 받았습니다.
“올해 첫 만남의 달맞이꽃! 싱그럽고 상큼하고 예쁩니다. 정신이 번쩍듭니다. 희망의 끈을 놓지 않겠습니다. 신부님, 달맞이꽃 위로와 축복속에 평화롭게 지내겠습니다. 살아 있음으로 보이는 모든 것이 아름답습니다.”
꼭 일년 만에 때되니 피어나는 파스카의 꽃들입니다. 만남의 선물, 만남의 기쁨, 만남의 행복입니다. 어제 피정지도때도 반가운 꽃같은 만남도 잊지 못합니다. 방학동 성당 글로리아 성가대 15명의 오전 피정 미사가 있었습니다. 휴대폰마다 '하늘과 산'의 수도원 로고를 붙여드리고 베네딕도회 수도영성에 대해 말씀드렸고, 함께 행복기도문도 읽었습니다. 미사 강론중 덕담이 생각납니다.
“글로리아 ‘천사’ 성가대같습니다. 모두 흰셔츠를 입으니 천사들 같아 눈이 부십니다. 제일 아름다운 6월 예수성심성월에, 가장 아름다운 요셉 수도원에, 가장 아름다운,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러 온 여러분은 참 행복한 아름다운 분들입니다. 오늘은 방학동 성당 글로리아 성가대의 요셉수도원 방문 축일같습니다.”
역시 젊음은 아름답습니다. 활짝 웃는 젊은 분들의 모습이 꽃처럼 예뻤습니다. 만남중의 만남이 살아 계신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날 때 꽃처럼 피어나는 모습들입니다. 전례의 궁극적 목적이, 참 많이 강조하는 것이, 살아 계신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우리는 일년만이 아니라 날마다, 하루에도 수차례 성전에서의 찬미와 감사의 공동전례기도를 통해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납니다. 살아 계신 주님과의 만남에 대한 감사기도 일부입니다.
“끊임없는 찬미와 감사의 기도와 삶중에 당신을 만나니
당신은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며
희망과 기쁨, 평화와 자유를 선사하시나이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수없이 반복하여 나눈 기도문이지만 늘 새롭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이 거룩한 미사전례를 통해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납니다. 어제 복음에 이어 오늘 복음에서도 주님은 사두가이들의 공격을 받습니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의 황당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가상적 질문을 받습니다.
후사가 없이 일곱 형제의 맞이가 죽자 그의 아내는 동생 여섯의 아내가 되었는데 부활후에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는 참 무례하고 불손한, 모욕적인 궤변에 가까운 질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친절히 부활에 대해 귀한 진리를 알려주십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중 살아 계신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 배우는 부활의 희망이요 기쁨입니다.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그리고 사두가이들이 신봉하는 모세오경을 근거로 살아 계신 하느님 안에서 참으로 주님을 믿고 살았던 이들이 부활의 삶을 산다는 사실을 밝혀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하고 말씀하셨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다. 너희는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뿐 아니라 우리 하나하나 이름을 넣어도 그대로 통합니다. 그러니 사람눈에 죽은 형제자매들이지 주님을 믿다가 죽은 이들은 하느님 안에서 다 살아 있음을 믿게 됩니다. 참으로 이런 살아 계신 주님이야말로 우리의 참희망이자 참기쁨임을 새롭게 깨닫게 됩니다. 참으로 이런 살아 계신 주님을 믿고 만나는 이들에게 절망이나 원망, 실망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 토빗서의 토빗의 살아 계신 주님을 향한 간절하고 진솔한 참회의 기도가 감동적입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 가장 아프게 한다는 말도 있듯이 아내 안나에게 시달리다 탄식하며 울다가 바치기 시작한 토빗의 기도 시작부분이 참 멋지고 아름답습니다. 기도는 이렇게 시작하는 것임을 배웁니다. 토빗의 하느님 중심의 삶이 얼마나 확고한지 깨닫습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의로우십니다. 당신께서 하신 일은 모두 의롭고, 당신의 길은 다 자비와 진리입니다. 당신은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런 하느님의 거울에 자신을 비춰볼 때 정말 너무나 부끄러워 저절로 참회의 기도를 바치는 토빗입니다. 토빗의 입에 담아 참회기도를 바치는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토빗에 이어 불운했던 라구엘의 딸 사라에 대한 일화가 계속됩니다.
사라역시 최측근인 아버지의 여종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심한 모욕을 듣자 슬픔이 북바쳐 울면서 기도를 바칩니다. 오늘 제1독서에는 생략되었지만 ‘사라의 기도’도 ‘토빗의 기도’만큼이나 감동적입니다. 역시 사라의 첫 기도 말마디가 하느님 중심의 찬미와 감사의 삶을 확고히 해줍니다.
“자비하신 하느님은 찬미받으소서. 당신의 이름은 영원히 찬미받으소서. 당신께서 하신 모든 일이 당신을 영원히 찬미하게 하소서.”
하느님 찬미의 사랑으로, 찬미의 기쁨으로, 찬미의 행복으로, 찬미의 맛으로 살아 갔던 ‘찬미의 백성들’ 이스라엘처럼, 수도자는 물론 믿는 우리들 역시 찬미의 사랑, 찬미의 기쁨으로 살아가는 ‘찬미의 사람들’입니다. 찬미와 감사의 기도와 삶이 살아 계신 하느님을 만나게 합니다. 주님의 응답을 받으니 해피엔드로 끝나는 토빗과 사라의 기도입니다.
‘바로 그때에 그 두 사람의 기도가 영광스러운 하느님 앞에 다다랐다. 그래서 라파엘이 두 사람을 고쳐 주도록 파견되었다.’
만남중의 만남이 살아 계신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평생 ‘살아 계신 주님과 만남의 여정’중인 우리들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죽는 그날까지 살아계신 주님과의 만남이 계속되도록 도와 주십니다.
“주님, 당신께 제 영혼 들어 올리나이다.”(시편25,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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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마르12,27)
'산 이들의 하느님!'
오늘 복음(마르12,18-27)은 '죽은 이들의 부활에 대한 논쟁'입니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이 예수님께 와서, 율법에 따라 일곱 형제가 한 여자와 혼인하여 모두 후사를 두지 못한 채 죽었을 경우, "그들이 다시 살아나는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마르12,23) 하고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십니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잔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너희는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마르12,2425.27)
믿어야 할 교리를 요약해 놓은 사도신경 끝부분에서 우리는 이렇게 신앙고백합니다. "죄의 용서와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죄의 용서를 통한 지금 여기에서의 부활과 죽음이후 저 세상에서의 영원한 부활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믿고 있는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십니다. 산 이들의 하느님을 믿는 이들은 늘 죽지 않고 살아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죽음의 상태에서 다시 부활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오늘 독서(토빗3,1-11ㄱ.16-17ㄱ)는 참새 똥에 눈먼 토빗과 여종에게 모욕적인 말을 듣고 죽으려고 마음 먹었던 라구엘의 딸 사라가 하느님께 드리는 간절한 탄원기도입니다.
"바로 그때에 그 두 사람의 기도가 영광스러운 하느님 앞에 다다랐다. 그래서 라파엘이 두 사람을 고쳐 주도록 파견 되었다.(토빗3,16-17)
이제와 영원히 죽지 않기 위해서 나도 간절한 탄원기도를 드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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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XlZt6vp-4h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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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마르 12, 27)
하느님 앞에서
너무나
부끄러운
우리들의
사랑입니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살아있는
이 시간을
서로 함께
더 사랑하는
기쁨입니다.
삶을 이해하는 것이
관계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오늘이라는
사랑의 주제를
벗어나는
우리들 마음입니다.
미래는
우리의 것이 아닌
온전히 열려있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란
살아계신
하느님과 함께
오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을 놓치지 않고
사랑을 놓치지 않고
사는 것이 복음의
참된 기쁨입니다.
살아있음이
아닌
죽음과
아직
오지 않은
가정법에
길들여진
어리석은
우리들 삶입니다.
결혼도
수도생활도
지금 이 시간에
충실한 사랑의
여정입니다.
오늘을 나누어
먹는 관계가
살아있는 부활의
시간입니다.
찢어져 버린
관계에는
우리가 없습니다.
갈팡질팡하는
관계가 아닌
믿음의 관계가
함께 걸어가는
관계입니다.
앞서가지 않는
인생의
동행과 동반의
보폭이 진실로
서로를 사랑하는
보폭입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들로
오늘의 평화를
깨뜨리지 않습니다.
뗄레야 뗄 수 없는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처럼
혼인도
수도생활도
서로를
속이지 않는
진실한 사랑으로
익어갑니다.
오늘도
같은 마음으로
아름답게
익어가는
사람과 사람의
소중한
마음이길
기도드립니다.
마음을 잃어버리면
살아있는 부활의
기쁨도 잊어버립니다.
하느님의 시간은
사랑과 믿음
감사의 시간임을
이제야
알게됩니다.
산 이들의
하느님께서
우리와 나누시는
참된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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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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