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직과 지조의, 학처럼 고고한 진짜 선비
-정중동(靜中動)의 수필가 윤모촌 선생님-
최원현/수필문학가
유난히 햇볕이 밝은 오월의 중간 날이었다. 날씨도 나의 염려함을 알았던지 어제까지는 비가 오락가락 했는데 오늘은 언제 그랬느냐싶게 아침부터 더없이 맑은 날이 된다. 사실 걱정을 많이 했었다. 건강이 좋지 못하신걸 알고있던 터라 혹여 추운 날씨에 영향을 받지 않으실까 염려되어 날이 완전히 풀리기를 기다렸던 것이 오늘에야 선생님을 뵙게 된 것이다. 더구나 찾아뵙겠다고 하는데도 나들이 삼아 나오시겠다며 나의 근무처까지 친히 나와 주셨다. 꽤 오랜만에 뵙게 되는데 선생님께선 내가 걱정했던 것 보다 훨씬 신수가 좋아지신 것 같았다.
요즘에 수필을 말하면서 윤모촌 선생님을 빼놓을 수는 없으리라. 수필 이론에 정통하시고 군더더기 하나 없는 정선되고 여과된 수필을 쓰시는 분으로 공히 인정 받고 계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수필을 40대 이후의 문학이라고들 하는데 선생님을 뵈니 그 의미를 깨달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수필의 진수, 수필의 교과서 같은 수필을 쓰시는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어떻게 수필을 써야 할 것인지를 점검해 보는 참으로 귀한 시간이 되었던 것 같다.
세상에는 명문도 많고, 명작을 남긴 작가도 많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내게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고, 그다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작가의 작품에서도 오히려 더 큰 감동을 받을 수도 있다. 물론 작가의 명성이 작품의 수준을 말한다고 하나 꼭 그렇지 않을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두 가지를 다 충족 하시는 분이 윤모촌 선생님이실 것 같다. 윤모촌 선생님은 성품 만큼이나 조용하게 작품을 쓰시는 분이다. 등단하기 무섭게 작품집을 내는 사람도 많고, 해마다 수필집을 내는 사람도 있지만, 선생님은 참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한 편, 한 편 작품을 빚으시는 분이다. 강직한 성품, 결코 옳은 일이 아니면 눈도 돌리지 않으시며, 그렇게 평생을 살아오신 성정만큼이나 선생님의 작품에선 미사여구가 배제되는 대신 토씨 하나까지 꼭 제자리인가를 확인하여 문장의 필요 요소일때만 사용된다.
윤모촌 선생님은 본명이 갑병(甲炳)으로 경기도 땅이면서도 오히려 황해도 장단에 가깝고 군사분계선 북쪽이 되어버려 찾아갈 수 없는 곳이 되어버린 연천군 왕징면에서 태어나 1.4후퇴때 임진강 나룻배를 타고 남하한 후 50여년을 분단의 아픔 속에 살고 계시는 실향민이시다.
조선 청년들이 모두 군국 일제에 끌려가던 때 그것을 면하고자 교직에 발을 들여놓았었는데 해방 이후 잠시 물러났다 다시 들어갔지만 교육계 풍토가 마땅치않아 아주 그만 두셨단다. 그 후 교육 잡지와 신문 그리고 교직 단체에서 일을 했었는데 그것도 타의에 의해 일찌감치 명예퇴직(?)을 하신 후 지금까지 외길 수필의 길만을 지키고 계시다. 선생님은 1959년 서른여섯의 늦은 나이에 함석헌 선생님의 주례로 처가에서 간소하게 결혼예식을 치르셨단다. 교직에 계시던 사모님과의 사이에서 2남 2녀를 두셨는데 모두 결혼하여 살고있고, 그중 셋은 미술들을 전공하여 톡톡히 몫을 한다는 말씀이셨다. 지금은 선생님 내외분과 아들 부부, 손자 셋과 함께 사시는데 금년 100세 되신 장모님도 모시고 계신다고 한다.
사람에게 만남처럼 소중한 것도 없으리라. 특히 첫 만남은 더더욱 소중하다. 선생님께선 처음에 시를 쓰셨다는데 문학과 어떻게 그 첫 만남을 가지셨는지 궁금했다.
“해방전에는 인도의 시성 타고르의 시를 즐겨 읽었었는데 광복이 되고 어수선하게 지내는 어느 날 고향친구가 해방 후 최초로 나온 시동인지라며 ‘시탑(詩塔)’이라는 동인지를 1집부터 4집까지 들고 와서 주면서 나더러도 시를 쓰라고 권했어요. 그때까지 문학 같은데 뜻을 둘만큼 여유가 없었기도 하지만 그 친구가 시를 쓰는지도 모르던 터인데 그 친구의 권유도 있고 해서 조병화, 박두진 선생의 시집과 작고시인들의 시 및 소설을 열심히 읽다보니 문학에 빠져들기 시작했고, 시를 흉내내 보기 시작 했어요. 그러다가 49년 11월 한국일보 전신인 ‘太陽新聞’ 신인시단에 장만영, 김기림선생의 천(薦)으로 시가 실리고, 그 후로 두 세번 더 실렸어요. 그런데 6.25전쟁이 터지고 국민방위군으로 마산까지 끌려갔다 북상길에 대전에서 머물게 되었는데 그때 ‘호서문학’ 회원이 되었어요. 상경하여 주간 교육신문에 근무하기까지 시에 매달렸었지요. 그러다가 1979년 1월 그러니까 56살때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오음실 주인? ?梧陰室主人)이 당선되면서 본격적으로 수필을 쓰게 되었어요. 사실 그때까지 수필을 쓴 것은 호서문학회에 있을 때 것까지 해서 1! 0여편 정도였으니 시에 더 열정적이었다고 하겠지요.“
정식으로 문단에 나오신 것이 ‘79년 신춘문예이니 어찌 생각하면 늦출발이라 생각되기도 하지만 이미 20대부터 문학에 관심을 갖고 40여년간 시를 읽고 쓰시며, 교직과 교육관련 신문 및 교육단체에 몸담고 계시면서 늘 글과 함께 하셨으니 다져진 바탕이 표면상으로는 늦출발이지만 오랜 세월의 필력으로 나타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선생님께서 수필쪽으로 방향을 바꾸신 것도 시로는 하고싶은 말을 다 풀어낼 수 없어 수필을 해야겠다 마음을 정하고 뒤늦게 수필을 쓰기 시작했다고 하셨다.
선생님은 그동안 세 권의 수필집을 내셨다. 첫번째가 ‘정신과로 가야할 사람’이고, 두번째가 ‘서울 뻐꾸기’ 그리고 세번째는 선집이라 할 수 있는 ‘산마을에 오는 비’이다. ‘산마을에 오는 비’가 출간되자 95년 11월 14일자 한국일보에선 ‘적확하고 유려한 문장, 수필의 참맛 새록새록’ 이란 제호아래 ‘윤모촌, 15년 수필생활 대단원’, ’산마을에 오는 비 출간’의 기사를 실었는데 그 기사의 인터뷰 내용중 ‘문장만으로 남이 알아볼 수 있는 글을 써야 한다’고 강조하시던 내용이 기억난다. 글이 곧 사람이라고 했는데 선생님을 뵈면 그 말이 이해되는 것 같다.
‘모촌(牟邨)이 백년전 이 땅에 태어났다면 그도 어쩌면 남산에 살 것이요, 나막신을 신고 딸각발이의 별명으로 고집 부리는 샌님이었을 것이다. 모촌(牟邨)이 천육백년전 중국의 진(晋)나라에 태어났다면 그도 어쩌면 쥐꼬리만한 봉록의 벼슬을 내동댕이치고 가난과 강직을 지조처럼 지키는 도잠(陶潛)같은 꼬장꼬장한 선비였을 것이다.’
수필가요 시인인 허세욱 교수께서 윤모촌 선생님을 두고 쓰신 글인데 아마 이보다 더 윤모촌선생님을 잘 표현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윤모촌 선생님의 수필은 향수의 문학이라고 일컬어진다. 행정구역상으로는 분명히 경기도인데도 갈 수 없는 땅이 되어버렸고, 설혹 통일이 된다 하여도 군사분계선 지역이어서 아무것도 남아있을 수 없는 곳이 되어버렸다는 고향에 대하여 유난히 향수에 젖는 선생님은 그런 고향의 이미지를 수필 속에서 우리에게 때로는 경각심으로, 때로는 안타까움으로, 때로는 가정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하는 것으로 깨우쳐 주신다. 그래서 ‘고향에서 사는 길이, 비바람 속의 나그네같은 고된 행로라 할지라도, 동산에 뜨는 달의 정처럼 아름다움을 간직하게 해주는 곳이 고향이다’(실향기1)고 했고, ‘어머니는 내가 마지막 뵙던 날의 모습을 하고 영원히 내 가슴 속에 살아계시리라’(어머니)고도 했다. 그런 그였기에 ‘고향을 잊지 못하는 사람은 인생의 길에서 지친 사람이다’고 스스로를 관조하고, 마음 속에 갇혀있는 이야기들이 너무 많아 ‘아무에게라도 말하지 않고서는 그대로 지나쳐 버릴 수 없는 것들을 쓰고 싶었다’고 제1수필집 ‘정신과로 가야 할 사람’의 발문에선 밝히고 있다.
윤모촌선생님의 수필문학엔 고요한 관조가 있고, 그러면서 치열한 삶의 풍자가 있으며, 역사의식이 누구보다도 뚜렷하고, 정(情)의 세계, 풍류(風流)의 세계, 애련한 향수(鄕愁)와 회한(悔恨)의 세계가 그분만의 독특한 문장력을 힘입어 독자를 사로잡는 마력이 있다. 뿐만 아니라 그런 속에 의연하고 단호한 의지를 나타내고 있는데 차주환 교수님이 ‘향수의 문학’이라 하신 것처럼 그 모든 것들이 두고온 고향을 향한 향수로 이어지면서 가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민족적 가책으로까지 이어진다.
우리 역사를 되돌아 볼때 지금 70-80세, 그러니까 1910년 말에서 1920년도 초에 태어나신 분들만큼 갖은 수난의 역사를 다 겪으신 분도 없을 것 같다. 한일합방으로부터 일제 강점기, 6.25전쟁, 4.19, 5.16, 유신정권, 광주민주화운동, 문민정부, 50년만의 여야 정권교체 등 어찌 생각하면 역사의 증인이라기 보다도 산 역사이신 분들이다. 그런 역사적, 시대적 체험 속에서 형성되었던 문학적 글감들이 새롭게 재 구성되고, 글감 자체로 무르익어가기도 했지만 시로서는 그 많은 이야기들을 다 못한 채 갇혀 있다가 신춘문예 당선이후 수필이란 구실을 찾아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겠는데 그것도 윤모촌 선생님 특유의 탄탄한 문장력과 심혼을 기울인 작업으로 탄생된 것들로서 그것들을 오늘 우리가 읽고 있는 것이다. 해서 윤모촌 선생님의 수필엔 단순한 시대적 삶의 체험만이 아니라 그 바탕에는 은은하게 향수와 조국애가 깔려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선생님은 좋은 수필의 정의를 “삶의 의미나 가치를 재발견케 하는 것이면 좋은 수필이다”고 하시고, 좋은 글이란 시가 언어를 절제하는 것처럼 산문도 군더더기를 제거하고 함축적인 의미를 독자에게 전달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씀 하신다.뿐만아니라 때로 그것을 독자가 받아들일 수 없을 경우도 생기는데 곧 명문은 쓰기도 어렵지만 명문을 가려 볼 줄 아는 것이 더 어렵다는 말로서, 주옥같은 명문이라도 그것을 독자가 소화할 수 없고, 알아보지 못한다면 그 또한 문제가 아니냐는 것이다. 그래서 명문이라고 자타가 인정하는 글들이 오히려 독자를 확충시키지 못하고 있으며,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흥미 위주의 글들이 베스트 셀러가 되는 것도 그런 연유겠으나 참으로 좋은 글은 말을 하지 않고도 독자의 상상력을 일으켜 낼 수 있어야 하며, 그 상상은 독자의 몫이 되게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선생님께선 수필 이론가로서의 명성도 높으셔서 선생님이 쓰신 <수필문학의 이해>는 여전히 사랑받고 있는 수필 교과서가 되고 있다. 선생님께 수필평론은 어때야 하는 지 여쭤 보았다.
“수필평론에 있어서 평론자는 무엇보다 자질을 갖춰야 되는데 첫째 인격면으로, 둘째 수필문학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어야겠어요. 그리고 평을 받는 자세는 자질 부족의 평이 아니라면 원칙상으로 겸허하게 받아들여야지요. 또한 평의 내용에 있어서 문장은 물론 삶의 의미나 가치 추구의 평이 될때 좋은 평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수필평론이 어렵다고들 말하지만 사실 정론(正論)일 때라면 어려움이 있을리 없겠지요. 요즘에 수필평론이 드문 이유도 수필평론이 있을 만큼 수필 자체가 문제를 제기하는 글이 아닌데에 있다고 봅니다. 이와 반대로 소설의 경우는 허구로 씌여진 그 허구가 문제를 제기하기 때문이지만 수필은 허구의 세계가 아니므로 평론의 세계를 구축할 만큼의 대상이 아닌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내겐 참으로 소중한 시간이 됨을 느꼈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느낌처럼 독자들에게도 나 이상의 절실함과 충격적인 도움이 되는 말씀으로 전해져야 한다는 책임감과 부담감 마저 들었다. 해서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가장 좋은 수필이란 어떤 것일지 듣고 싶었다.
“현역은 물론 작고한 수필가의 글 중에는 많은 수작이 있습니다. 가장 좋은 수필을 말하라고 하나 그렇게 말하기 보다는 인상에 남는 것을 말하는 것이 쉽겠군요. 그러나 이것도 수필의 성격상으로 구별되는 수작들이 있으므로 다 열거할 수는 없고, 내가 기억하는 것을 말하라면 역시 수필의 성격상으로 말하게 될 것 같군요. 첫째 선이 가늘면서 섬세한 서정의 글로 윤오영, 피천득 선생의 글을 들 수 있겠고, 둘째 선이 굵고 호방한 기운이 있는 김소운의 세계를 들 수 있겠군요. 그리고 문사(文士)의 풍류가 문장마다 나타나는 근원(近園)과 간결한 필치로 풍자와 해학을 펼치는 이장규(李章圭), 삶의 깊이를 관조하여 삭막한 일상에 윤기를 불어넣는 김우현(金于玄) 등의 작품을 수작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선생님의 작품중에서 대표작을 선정 하신다면 어떤 작품이 될까요?
“오음실 주인이 가장 애착이 가고, 모든 작품이 소중하게 여겨집니다. 대표작을 말하라고 하지만 내가 좋다고 해서 대표작이 되는 것이 아니므로, 독자에 의해 가려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수필이 어떤 글인가를 모르면 수필처럼 쓰기 쉬운 글이 없고, 수필의 진수(眞髓)를 알면 수필처럼 어려운 글이 없다는 근원(近園)의 말을 빌려 수필을 말씀 하시는 선생님께 끝으로 우리 수필문학이 발전키 위해선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인지에 대해 한 말씀 부탁 드렸다.
“이 문제에 대해 여러 설이 있으나 수필은 개인적인 것에 본질이 있으므로 공동 선을 위한 진실한 삶과, 그와같은 인격체의 발로가 본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지향한 수필이 많이 나오면 그것이 곧 수필의 발전이라 할 수 있겠지요.”
선생님과 말씀을 나누다 보니 언제 어떻게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게 많은 시간이 흘러가 버렸다. 그런데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있으면 선생님의 음성엔 웬지 슬픔이 젖어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드는데 그것은 지나치게 예민한 나만의 느낌일까? 고향집 뒤 바위 밑에 몰래 심어둔 삼(蔘)을 그리면서 ‘이 세 뿌리는 40년 묵은 산삼이 돼, 지금은 군사분계선 북방, 완충지대 속에서 이 봄에도 잎사귀를 피우고 있을 것이다’(실향기1)며 향수병을 앓고 계시는 선생님. 아마도 내가 느낀 슬픔도 그런 향수병에서 감지된 것이었을 것 같다.
살아오신 날로 따지면 상당히 늦게 수필인의 길로 들어 서셨지만 여느 수필가보다도 뛰어난 수필과 이론으로 우리 수필계에 우뚝하신 윤모촌 선생님. ‘내 글에는 거짓이 끼지 않았음을 밝혀둔다. 이것은 나의 수필 본질에 대한 신념이요, 내 수필의 양심이다. 나로선 어느 시대가 되건 수필은 인격적 삶의 실체(實體)이고, 그것을 본질이라고 믿을 따름이다“(산마을에 오는 비, 책머리에서)면서 무엇보다 수필은 자기의 진실이어야 함을 강조 하시는 말씀이다. 진실, 수필에서 그렇게 강조하는 진실한 자기 체험의 고백, 그러나 이 시대 우리의 삶을 생각해 볼 때 과연 얼마나 진실에 근접해 있는지 의문스럽기만 하다. 결국 우리 삶속에 진실이 없다면 좋은 수필은 나올 수 없다는 말이 아닌가. 그런면에서 선생님은 또 한 번 자랑스런 수필인일 것이다.
“그저 수필을 쓸 따름이고, 문학 이상도 이하도 아닌 글 - 거짓없는 말을 하고 싶은 것 뿐이다.“ (수필을 쓰면서 중) 어쩌면 수필을 쓰면서 이보다 더 적절한 수필의 동기가 필요할 수 있을까? 진실한 자기 체험에 대해 하고싶은 말을, 하지 않고는 못견디는 꼭 해야만 할 말을 절제된 언어와 수려한 문장으로 독자 앞에 내놓을 때 독자와 작가가 공감하는 좋은 수필이 되지 않을까.
수필문단에 끼치신 지대한 공로와 수필작품의 우수성으로 ‘한국 수필문학상’과 ‘동포문학상’ 본상을 수상키도 하셨던 선생님은 수필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나 후배 수필가들에게 지금도 기회가 되는대로 따스한 가르침을 펴고 계시다. 그러나 ‘나는 가끔 옥중(獄中) 새벽 창가에서 여명(黎明)을 알리는 장닭의 유량한 울음에 시름을 달랬을 선열(先烈)들의 상심(傷心)을 상상해 보는 때가 있다. 좀 도둑을 지키는 개소리만이 들리는 새벽의 창가에, 여명을 알리는 그 장닭의 울음소리가 듣고싶다. 힘차게 새벽을 여는 소리’.(새벽 닭 우는 소리) 처럼 무언가 아직도 열리지 않는 것에 대한 긴 바램으로 기다리시는 새벽 닭 울음소리는 또 무엇일까? 하지만 선생님도 이젠 고향은 잃어버린 채 고향에서보다 더 오랜 삶을 살아버린 곳에 고향의 의미를 부여할 수 밖에 없으신가보다.
‘추억 속의 고향은 언제나 아름답다. 젊거나 늙거나 마음의 문을 열고 살 수 있는 곳이 고향이다’(실향기2) 그렇기에 선생님의 고향병은 어쩌면 민족 분단의 우리 역사와 민족이 앓고있는 공통의 향수병이 되는 것 아닐까.
수필이론에 밝으면서 정통 수필의 진면목을 펼쳐내시는 한국 수필문학의 자존심이라 해도 지나침이 없으실 선생님의 가슴 속 고향, 어쩌면 수난의 역사를 살아오신 아픔과 슬픔까지 달관하여 진주를 아몰리는 진주조개처럼 수필이란 진주로 빛나는 고향을 일궈보고 싶으신 최선의 시도는 아녔을까? 문학에서 수필이 차지하는 비중에 대해서는 “굳이 비중을 따져 말하기는 어렵고 문학에서 수필은 빠질 수 없는 장르”가 아니겠느냐고 하시는 선생님. 백내장 수술까지 받으신 눈이지만 선생님의 동공 가득, 어머니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찰랑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아이처럼 맑은 선생님의 눈에서는 여전히 수필을 사랑하는 진한 사랑의 빛이 풀잎 위의 아침 이슬마냥 넘쳐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곧고 바른 길을 간다는 것은 늘 고독하고 외로운 길일 것이다. 허나 그만큼 보람도 크고 더욱 먼 훗날이 되면 더 큰 자랑이 될 것이다. 아무쪼록 건강하셔서 남은 삶 내내 향기높은 수필 더 많이 남겨 주시고, 더 많은 가르침으로 수필의 길을 가는 이들과, 삶 자체가 수필이 되어갈 모든 이들에게 밝은 빛이 되어 주시길 기원한다. 선생님을 만나보니 날이어서일까. 하늘 빛이 가을날인 양 더욱 밝고 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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