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기도)
주님,
어제는 믿음의 지체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서로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이 날로 더해 가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쓰시는 공동체가 되게 하옵소서.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십자가 보혈을 의지합니다.
정결케 하옵소서.
오늘도 아버지 품속의 평안을 누리게 하옵소서.
성령님, 의지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52.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53.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54.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55.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57.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58.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59.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8:1.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본문 주해)
51~53절 : 스데반이 구약의 흐름을 한 줄로 꿰어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하였다. 그 후 할례도, 율법도, 성전도 모두 자기 자랑과 자기 치장으로 사용하는 유대인들을 거침없이 고발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한 구약의 선지자들을 그들의 조상들이 핍박하고 죽였듯이, 이제 마음과 귀에 할례받지 못한 자들인 그들이 이 땅에 오신 메시아를 죽였다는 것이다.
54~60절 : 스데반이 죽음의 순간에도 온 몸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이를 말한다. 스데반이 한 증거에도 이를 갈았는데 그가 이와 같이 말하자 유대인들이 더욱 견딜 수 없어 그를 성밖으로 끌어내어 돌로 친다.
스데반은 자기의 영혼을 주님께 부탁하면서 무릎을 꿇고 크게 부르짖으며 기도한다.
그 기도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하나님께 했던 기도이다.
“주 예수님, 내 영혼을 받아 주십시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그리고 스데반은 순교한다. 성경은 이를 ‘잔다’고 표현한다.
자는 것은 쉬는 것이니, 그가 영원한 안식에 들어간 것을 말하는 것이다.
8:1절 : “사울은 스데반이 죽임 당한 것을 마땅하게 여겼다. 그 날에 예루살렘 교회에 큰 박해가 일어났다. 그래서 사도들 이외에는 모두 유대 지방과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졌다.”(새번역)
스데반이 순교하고, 훗날 사도 바울이 된 사울이 드디어 등장한다.
(나의 묵상)
전에 스데반의 길고 긴 설교의 말씀을 참 지겹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또 옛날에 초교파로 진행된 ‘성경 맥 잡기’ 공부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이 본문을 가르친 강사(서울서 오신 젊은 목사)가 웃으면서 ‘쓸데없이 나서면 이런 꼴 당한다’고 표현을 하면서 강의를 했다. 나는 속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물론 나도 지겹다는 생각은 했지만, 스데반이 쓸데없는 일을 했다면 이렇게 긴 본문을 왜 성경에 실었을까 생각했었다. 그때 그분은 목회자만이 설교해야 하는데 집사 주제에 설교했다고 했다. 설교나 복음 전하는 것은 목사가, 집사는 그저 교회 중심의 일에나 헌신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때는 내가 잘못 배웠지만, 주님께서 올바로 알게 해 주시니 감사하다.
직분이 있든 없든 또 그 직분이 무엇이든 진실로 성령충만하다면 어떠한 방법으로든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어쨌든 스데반이 설교하고 난 뒤 돌에 맞아 죽는다.
그가 돌에 맞아 죽을 만큼 잘못한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너무도 잘 증거 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자랑하며 자기 치장으로 삼았던 할례와 율법과 성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는 것임을 나타내는데, 그것도 모르고 예수를 죽인 그들을 그들의 조상들과 함께 싸잡아 비판했기 때문이다.
스데반이 구약의 흐름을 한 줄로 꿰어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한 결과, 유대인들은 광분하여 그를 돌로 쳐 죽인다.
그들의 마음의 정곡이 찔려 괴로웠기 때문에 돌을 쳐든 것이다.
그런데 마음의 정곡이 찔려 회개한 무리도 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행2:37)
똑같이 마음에 찔렸지만 베드로가 예수님을 증거 했을 때는 돌을 든 것이 아니라, ‘어찌할꼬’ 했다. 이는 베드로가 스데반보다 설교를 더 잘 해서가 아니다.
복음 앞에 회개하는 심령이 있고, 또 대적하는 심령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통해 3천 명을 회개하게 하심으로 예루살렘 초대 교회의 근간을 마련하시고, 스데반의 순교를 통해 복음이 이방으로 흘러가게 하시는 조치이시다.
어떠한 결과가 기다리든 스데반처럼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잘 증거 했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 두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는 나 자신이 복음으로 충만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매일 말씀 앞으로 나아가 주님과 교제한다. 성령께서 복음으로 충만케 해 주실 것을 기대하고 기도한다.
둘째, 일상의 삶이 십자가에 연합되는 것이다.
내 삶 속에 성경적이지 않은 것들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이다. 비록 세상에 밝지 못하고, 촌스럽게 시대에 뒤처지는 모습일지라도...또 좀 어려움을 당할지라도 정직하게 행하는 일이다. 뿐만 아니라, 자기의와 나의 주장의지를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은 너무도 중요하다.
이러한 것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하는 전도는 참으로 헛헛하다. 자기만족은 됐을지 몰라도 주님의 만족에는 어림도 없을 것이다.
사실 복음으로 충만하다면 성령께서 십자가에 연합되도록 이끄시니 이 모든 것은 순서대로가 아니라, 동시에 이루어지겠다.
성령께서 매일매일 다듬어 주시고 간섭하여 주실 것만을 기대한다.
그래서 돌에 맞아 죽어가는 순간에 자신을 변호하시고 맞아 주시려고 하늘 보좌에서 일어서신 주님을 보는 것처럼 나도 하늘의 주님을 바라보며 살기를 원한다.
나의 삶의 현실이 때때로 비참하고, 때때로 황망스러울지라도, 그때마다 십자가에 연합되기를 소원한다. 스데반처럼 돌에 맞아 죽는 순교는 아닐지라도, 십자가에 연합됨으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존재가 되길 기도한다.
이 땅에서의 내 삶의 여정을 마칠 때 나를 위해 일어서시는 주님을 나도 보게 되기를 원한다.
(묵상 기도)
주님,
성경에 능통한 스데반이 예수님을 잘 증거하듯이
저도 복음을 잘 증거 하게 하옵소서.
대상과 상황에 따라 잘 증거 하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또한 제 삶이 복음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주님의 영광이 드러남을 기억합니다.
억지로 행하는 자가 아니라,
성령의 이끄심을 받기에 기쁨만이 넘치게 하옵소서.
그렇게 살다가 내 삶의 여정을 마칠 때
나를 위해 일어서시는 주님을 나도 보게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