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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신경이 쓰여.
"오늘 실험 끝! 그런데 우리 데이터, 전에 흡착 실험했던 다른팀이랑 좀 다르지 않아?"
미영은 동의를 구하며 비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비누는 가만히 인상을 쓰다 실험노트에 이것저것 끄적였다. 무엇을 끄적이는지 궁금해 미영은 옆에 찰싹 달라붙어 열심히 쳐다보지만 이내 자리를 잡고 공학용 계산기를 꺼내는 비누를 보며 어깨를 으쓱하며 기열을 쳐다보았다.
"우리도 어서 실험 마무리 해야지. 다른 팀들 벌써 다들 실험실 떠났다."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실험조교가 실험실 안으로 들어와서 두리번 거리더니 비누네 실험팀으로 다가왔다.
"기열아! 아직 안끝났어?"
기열은 자신보다 한학번 위인 조교를 바라보더며 눈썹을 찡그리다 입술을 살짝 내밀고는 비누쪽을 가르켰다. 그 모습이 키가 백 팔십센티가 넘는 기열을 아이처럼 보이게 했다.
"한비누. 뭐 문제있어?"
조교가 비누가 앉아있는 테이블로 다가왔다.
"저.. 조교님.. 데이터가 안나와요. 이거 다른팀은 데이터 다들 잘 나왔던 실험이죠?"
그 말에 조교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손바닥을 싹싹 비비며 비누 옆에 앉았다. 알면서 굳이 왜 그렇게 걸고 넘어가냐는 듯한 말투이다.
"알잖아! 다들 결과가 마음에 안들게 나왔으면 실험값 조작했겠지 뭐."
그 말이 끝나자 기열과 미영은 동시에 눈을 돌려 비누의 눈치가 어떤지 살펴보았다. 왠지 꽉 막힌 것 같은 저 녀석, 이제껏 실험결과값에 소수점 한자리도 조작하지 않았을 것같은 고지식한 저 녀석이 어떻게 대답할까 호기심이 어린 눈빛들이다.
"아..네..."
별 반응없는 비누의 대답에 미영은 제대로 김샌 표정이다. 뭔가 고지식한 녀석이 어떻게 그럴수 있느냐며 조용조용한 목소리로 따박따박 따지면 뭔가 재미있을 것 같았는데 아쉽다는 눈빛이다.
"아마, 지난주쯤 유누팀이 이 실험 했을걸? 궁금하면 데이터 어떻게 나왔는지 언니한테 물어보도록 하지?"
조교의 말에 비누는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고개를 들어 조교의 눈을 바라봤다. 그 눈빛이 뭔가 하고싶은 말을 가득 담고있는 듯 해서 조교는 순간 흠칫 놀랐다. 예쁜 눈이다. 그 눈을 바라보던 기열또한 메마른 표정을 지을 때에도 눈에 무언가를 담고 있는 저 아이가 하고싶은 말이 무엇인지 저 눈빛을 읽을 수 있는 독심술이라도 있길 바랐다.
"제 생각엔.. 이 실험은.. 이 실험장치로는 영원히 제대로 된 결과를 얻을 수 없을 것 같은데.."
비누가 입을 열었다. 자신이 하고싶은 말이 무엇인지 정확히 콕 집어 차근차근 조용조용 말하자 미영은 신이 난듯 오호라하는 표정을 지으며 입술에 웃음을 머금은채 비누와 조교를 번갈아 바라봤다.
"응? 이거 몇년동안 사용한 기계인데?"
조교는 말이 안된다는 듯 비누를 쳐다봤지만 삼년동안 과탑의 자리를 한번도 내려놓지 않은 이 아이, 어떻게 보면 자신보다 더 많은 것을 아는 이 아이에게 논리적인 헛점이 잡히지 않기 위해 조심히 질문했다.
"이거.. 흡착제 양이 부족해요. 저 흡착제양으로는 우리가 수업시간에 배웠던 그런 결과는 얻을 수 없어요. 흡착제를 넣을 수 있는 저 통을 훨씬 더 큰 것으로 바꾸던가 해야할거에요."
비누의 조근조근한 대답과 대책에 조교는 잠시 얼어버렸다. 아주 간단하지만 해결책을 내놓은 비누에게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거니와 실험실 문 앞에 담당교수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아하니 비누와 조교의 대화를 들을만큼은 들은듯했다.
아시아를 대표하는 과학인 100인에 선정된 민교수, 4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그는 꽤 유명세를 달리는 교수인지라 성격이 까탈스러움에도 불구하고 학교에서든 공대에서든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민교수가 비누가 실험장치에 오류가 있다고 말하는 것을 들어 버린 것이다.
"너 한비누야? 아님 한유누야?"
실험실 앞에 떡하니 서있던 민교수가 비누를 향해 물었다.
"비누요..."
그 대답에 민교수는 큰 소리로 웃었다.
"아! 비누 만들러 화공과 온 한비누! 그래 네 말이 정답이다. 저거 흡착제 들어가는 통이 너무 작아. 그래서 흡착할 수 있는 시간 자체가 너무 부족해서 유체 역학책에 나오는 그런 그래프를 얻을 수 없을거야."
비누의 말이 맞다고 대답하는 민교수를 보며 미영은 정말 재미난 구경났다는 듯 조교의 표정을 살폈다. 자존심이 상한 싸늘해진 표정, 비누는 항상 이렇게 적을 만들었나보구나. 자신이 느낀 그대로 보는 그대로를 말했을테지만 원래 자신의 뛰어남을 모르는 사람이 평범한 다른 사람에게 자신도 모르는새 상처를 남기고는 그들의 적이 되는거니까.
시계를 한번 흘끗 쳐다보던 민교수는 자신이 비누의 담당교수가 아닌 것이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비누에게 물었다.
"너는 담당 교수님이?"
그 질문에 비누는 맑은 눈으로 대답했다.
"이교수님이요. 저는 향료팀이에요."
민교수는 왜 저런 아이가 고루하게 향료팀에 들어갔는지 안타깝다는 시선이었다. 물론 화공과의 수많은 학생들이 향료파트에 매력을 느끼지만 미래를 생각한다면 향료보다는 자신이 이끄는 광촉매 분야에 들어왔어야 했다. 안타까운 듯 다시 시계를 한번 흘끗 쳐다보고는 학생들에게 정리를 지시했다.
"다섯시 반이네. 실험장치 정리하고 다들 집에 가라."
민교수가 자리를 뜨자 조교도 조용히 일어났다.
"실험실 정리하고 그리고 그만 귀가해"
"선배. 밥이나 사줘요"
미영의 말에 기열이 살짝 인상쓰자 미영은 얼른 비누의 팔짱을 꼈다.
"와~ 한비누 이렇게 마른것봐. 얘는 정말 코딱지만한게 뼈밖에 없다. 그치? 선배. 비누는 밥도 못챙겨 먹고 다니나보다."
미영은 비누의 가느다란 팔을 들어 이리 돌려보고 저리 돌려보더니 기열에게 이 가느다란 팔 좀 보라는 듯 기열의 가슴팍 앞에 비누의 팔을 올려보였다.
"알았어. 임마."
백 팔십센티가 조금 넘는 약간은 마른 체격의 기열, 그리고 다른 여학생보다는 키가 큰 백 칠십센티미터의 약간 통통한 미영, 그 뒤에 서면 금세 가려져버릴 백 오십센티가 조금 넘는 갸냘픈 아이 비누가 엘레베이터에서 내렸다.
작은 비누가 앞에 서 있고 그 뒤를 마치 보디가드인듯 기열과 미영이 뒤따르고 있었다.
톡톡.
기열은 앞에서 걷고 있는 비누의 머리통을 손가락을 두드렸다. 가는 목이 부러져라 비누는 고개를 뒤로 치켜들며 기열의 손가락을 쳐다보았다. 주차장을 가리키는 손가락, '아. 차가 있나보구나.' 비누는 로봇처럼 방향을 틀어 주차장쪽으로 향했다.
"오오오! 선배 아버지가 휴먼 생활화학 대표라더니 학생이 끌 수 없는 이런 좋은 차를?"
미영은 기열의 SUV를 보며 나즈막히 휘파람을 불었다. 뜻밖에도 기열의 배경이 너무나 좋아서 놀란 것인지 평소 비누답지 않게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돌려 기열을 쳐다봤다. 신경쓰지 않은 듯한 단발머리가 몸짓과 함께 바람에 살짝 날렸다.
"선배님, 정말 휴먼 생활 화학?"
처음이다. 비누가 누구에게 먼저 관심을 표하는 것은.
기열은 이 아이도 어쩔 수 없구나라는 생각에 고개를 로봇처럼 좌로 가다 멈추고 다시 우로 가다 멈췄다.
"휴먼 아니니까 어서 차에나 타"
능청스럽게 뒷자석에 잽싸게 타버리는 미영을 따라 비누가 뒷자석에 오르려고 하자 미영은 비누의 머리통을 콩 찍으며 웃었다.
"상석은 나 혼자면 족해. 너는 앞에 타. 운전하는 사람 옆에 누군가는 타줘야 그게 예의지?"
비누는 조수석에 앉아 가지런히 손을 모으고 앉았지만 조금은 긴장되는지 손가락을 계속 꼼지락거렸다.
"아아아아! 잠깐만 세워주세요!"
밖만 멍하니 바라보던 비누가 차를 멈춰달랜다. 차를 세워 비누의 시선을 따라잡으니 그 곳엔 어김없이 유누가 있다. 비누와는 달리 예쁘게 풀어내린 긴 생머리, 하얀 피부에 어울리는 까만 머리와 신경쓰지 않은 듯 하면서도 꽤 여성스러움을 돋보이게 하는 원피스를 입은 유누는 작은 체구임에도 불구하고 지나가는 모든 사람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평소와 다름없이 민정과 서영이 유누의 팔짱을 끼고 있고 그 주변에 그녀들의 보디가드라도 되는 듯 여러명의 남학생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언니!"
허수아비처럼 가는 팔을 흔들며 비누가 소리쳤다.
충분히 들릴법한 거리인데 유누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유누가 비누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척 연기를 하고 있다는 것은 비누를 제외한 모두다 느낄 수 있었다. 같은 차안에 있던 기열과 미영도.
순간 고개를 살짝 돌려 비누를 쳐다보던 유누, 차갑게 다시 고개를 돌리다 비누 옆에 있는 기열을 보고는 한껏 귀엽게 깡총깡총 뛰어왔다.
"어? 기열오빠, 미영언니, 우리 비누랑 어디 가세요?"
차창을 연 비누 앞에 선 유누는 비누가 아닌 기열을 바라보며 질문했다.
"밥"
기열의 짧은 대답에 유누는 살짝 눈웃음을 흘렸다.
"아. 나도 아직인데."
마치 유누가 적군이라도 되는냥 미영과 기열은 차가운 표정으로 동시에 입을 열었다.
"우리팀만!"
그 말에 비누는 원망어린 표정으로 기열을 쳐다봤지만 차마 여선배인 미영한테는 원망 어린 시선조차 주지 못했다.
그 차가운 경계를 의식한건지 유누는 기다리는 친구들에게 가야한다며 오던 걸음과는 다른 얌전한 걸음으로 친구들쪽으로 걸어갔다.
"한비누, 일란성 쌍둥이인거 싫진 않아?"
미영의 직설적인 질문, 기열은 이렇게 예의없는 질문을 아무렇지도 않게 툭툭 던져대는 미영이 때론 존경스러웠다.
"중학교때 과학선생님이 일란성 쌍둥이는 한 개의 수정란에서 시작된거라고 설명해줬을 때, 저는 정말 기뻤어요. 언니와 저는 완벽히 같은 유전자를 갖고 있다는게 정말 자랑스러웠어요. 우리 언니처럼 멋지고 매력있는 사람이 나의 언니라는 것도 행복한데 거기다 나와 동일한 DNA라니.. "
비누의 작지만 행복에 젖은 설풋 짓는 미소에 미영은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데려다줄게."
기열은 비누에게 커피를 건네주며 차의 시동을 켰다. 너무나 작아서 저 커피컵을 들 수나 있을까 걱정스러운 손, 그 손이 커피를 차안에 음료받침대에 내려놓고 또다시 꼼지락거렸다. 기열은 운전하는 동안에도 흘깃흘깃 비누의 꼼지락대는 손가락을 쳐다보았다. 신경이 쓰여 미칠것만 같은 손가락, 그렇게 꼼지락대다가 다 부서지고 흩어져서 남아버릴 것도 없을 것만 같은 그 손가락이 신경쓰여 비누의 손을 꼭 잡았다.
놀래서 푸다닥 난리를 치며 손을 뗄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비누는 조용히 숨을 내쉬고는 다시 손가락을 더 신경질적으로 꼼지락거렸다.
"그 손가락, 꼬물꼬물대는것좀 좀 참아줘. 신경쓰여서 운전 못하겠어"
그 차가운 한마디에 비누는 모든 움직임을 정지시켰다. 비누의 손가락은 더이상 꼼지락대지 않는데도 기열은 아직도 비누의 손을 꼭 잡고있다.
"자 여기에 내려주면 되는거야? 정말 집 앞으로 안가되 돼? 시간이 좀 늦은것 같은데."
기열은 차를 세우고는 비누의 손을 잡고있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스물 여섯, 그동안 꽤 여러번 연애도 해보았는데 이렇게 긴장되다니.. 스물 둘의 비누, 어디다 두고 물어보면 열 두 살처럼 보일지도 모를 이 아이, 이 아이의 작은 손을 잡은 자신의 손에 차가운 땀이 촉촉히 배였지만 한번 놓으면 다시는 잡을 수 없을까봐 계속 잡고 있던 그 손을 기열은 더욱더 꼭 잡았다.
꼭 잡힌 그 손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비누가 고개를 들어 질문을 가득 담은 눈으로 기열의 눈을 바라봤다.
'아.. 어떻게 무슨 말을 해야하는거지?'
기열은 이 상황에 대해 자신이 어떻게 설명해야하는건지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어색했다. 그냥 비누에게 신경이 쓰일뿐 여자로서 느껴지는 감정은 아니었기때문에 다짜고짜 서로 남녀로 알아가자고 말할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잠시 고민하고 잠시 어색했고 잠시 그 손을 잡은 자신의 충동적인 행동을 후회했다.
비누가 입을 연다. 물음을 잔뜩 담고 있던 눈망울이 드디어 질문을 터뜨렸다.
"선배..."
그 한마디를 내뱉는 시간이 마치 영겁의 시간처럼 느껴졌다.
"응.."
기열은 긴장해서인지 자그마한 쇠소리로 대답했다.
"정말로 휴먼 생활 화학..이에요?"
하. 어린아이처럼 의문이 가득 담겼던 그 눈빛이 저거였나? 그게 묻고 싶었던 거였나? 기열은 우스웠다.
혼자 살짝 웃음을 터뜨리다 비누의 연분홍빛 아랫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대었다. 박하향, 비누에게는 박하향이 났다.
오랜만에 심장이 콩닥이는 느낌, 그 짧은 시간동안 기열의 심장이 간질이게 콩닥였다. 입술을 떼자 비누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똑같은 표정으로 기열을 바라보고 있었다.
"휴먼.."
다른 여자아이가 저렇게 물었다면 참 속물이라고 생각했을텐데 비누의 질문에는 그런 것이 아닌 다른 것에 대한 의문이 담긴 듯 해 자신이 꼭 진지하게 대답해줘야만 할 것 같았다.
"아니."
기열의 대답에 비누는 이제 더이상 궁금증이 가득한 눈빛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스위치가 금세 내려간 사람처럼 이제 기열에게는 궁금한 것이 더 이상 없다는 듯 폴짝 차에서 뛰어내려 골목으로 들어갔다.
비누의 뒷통수를 쳐다보던 기열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차창을 열었다. 창문을 여니 차 안에 배어있던 비누의 박하향이 넘실댄다. 참 이상하다. 감각할 수 없었던 배어있던 향이 창을 연 후에야 느껴지다니. 창으로 들어오는 가을바람이 비누가 남기고 간 박하향만큼이나 시원하고 상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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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읽어습니다 추천드려요 ^^
항상 댓글 남겨주시고,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
무슨 실험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