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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주제찬송 408장
말씀/ 사도행전 15:1–41
요절 / 사도행전 15:11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오늘 말씀의 제목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입니다. 크게 보아서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 아닌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세계선교의 시초요 또 전진기지가 된 안디옥 교회가 커지자 자연스럽게 다양한 배경을 믿음의 사람들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는 유대에서 태어나고 자랐던 정통 유대인들도 있었습니다. 우리 식으로 이야기 하자면 모든 음식 중에서 ‘된장, 고추장’이 최고 소스다고 말하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율법과 할례를 직접 경험하고 또 시행했으며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을 무시하던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배경의 사람들이 어떤 이유로든지 안디옥 교회에 동참하게 되었고 성경선생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보니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교회에 앉아 은혜를 받고 있었고 동일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방인들은 자기들과 비교할 때 다소 자유로와 보였습니다. 너무나 중요한 모세의 율법과 특히 안식일에 축구를 하고 골프를 치는 이방인들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들은 자녀들을 낳아 팔일 만에 할례를 시행하는데 이 이방인들은 자녀가 태어나도 할례를 행하지도 않고 백일잔치하며 즐기는 것을 볼 때 도무지 하나님의 자녀 같지 않아 보였습니다. 문화가 다른 이방인들을 무시하고 속으로 정죄하고 마침내 논쟁을 하고 교회 안에서 이 문제를 가지고 와 결국 심한 다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안디옥 교회는 이 문제를 어떻게 슬기롭게 해결해 나갔습니까? 오늘 말씀의 주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말씀을 보면서 우리도 오늘날 이런 문제가 있는지 또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 못하게 하는 율법이 남아 있는지 살펴보아야겠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것은 진정 무엇일까요? 율법과 전통의 준수입니까? 아니면 은혜로 자녀가 되었다는 믿음입니까? 말씀을 살펴보면서 이 문제를 생각해보겠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다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1절에 보면 성경선생 중에 유대 본토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자신이 예루살렘 유대인이라는 자부심이 매우 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안디옥에 와서도 성경선생이 되어 이방인들에게 성경을 가르친 것을 보면 성품이 매우 훌륭하고 지식과 율법연구를 좋아했던 사람들임에 틀림없습니다. 이들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구원을 받아 믿음의 사람들이요 성경선생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이 자신들에게 적용해야 할 율법과 할례를 이방인들에게도 적용하고 강요했다는 것입니다.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그런데 이들의 가르침은 바울과 바나바가 가르쳤던 교리 즉 오직 예수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와 대립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안디옥 교인들은 혼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들 사이에 적지 않은 다툼과 변론이 있었습니다. 예수를 믿는 믿음 외에도 다른 것이 더 필요하고 그것을 지켜야 비로소 참 신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들의 주장은 뭔가 행위가 있어야 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특히 그들이 조상 때부터 행하여 온 할례는 반드시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 반드시 행하라고 한 규례였습니다. 유대인으로 하여금 유대인이 되게 만든 것 중 아마 가장 중요한 것이 할례의식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러나 보니 복음주의자 바울과 바나바도 더 이상 이 문제에 대하여 자기주장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이 문제를 어떻게 했습니까? 본부가 있은 예루살렘에 몇 사람들을 보내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작정하였습니다. 주장하기 보다는 이 문제에 권위를 가지고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물으려 한 것은 정말 올바른 선택이 아닐 수 없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예루살렘에서도 이 문제가 속 시원하게 해결되지는 못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도 바리새파 믿음의 사람들이 율법과 할례의 중요성을 언급했습니다. 자신들은 이미 할례를 받았고 모세의 율법을 잘 지키고 있으니 율법과 할례가 크게 부담이 되지 않았습니다. 율법과 할례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논쟁되는 것 그 자체가 어쩌면 못마땅했을지도 모릅니다. 정통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지켜온 할례와 모세의 율법이 복음과 매우 밀접하고 그것 없이는 복음이 설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말했습니다.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번에 세계선교보고대회에서 어떤 선교사님이 인사할 때 합장하면서 인사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이 다양한 인사하는 방식임에도 불구하고 저의 마음속에는 선교사가 저렇게 인사해도 되는가 하는 생각이 순간 일어났습니다. 저만 그렇게 생각했을까요? 인사하는 방식은 복음의 본질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한국적 전통이 강한 나의 마음에 그런 의구심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유대적 전통이 강한 바리새파 믿음의 사람들의 그런 할례와 율법의 주장하는 것이 이해될 만도 합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교회의 수장이었던 베드로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습니까? 6,7절을 보십시오.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이야기했습니다. 많은 변론이 있었다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부분도 중요한 것 같습니다.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전달한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고 또 다 들어보는 것이 중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도 어떤 사안이 있을 때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 들어보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이 문제에 대해 하나님의 뜻을 이야기해줍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7-11절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나오는 이방인들에게 그들이 비록 할례를 받지 않았음에도 성령을 부어주신 것을 예를 들어 설명했습니다. 9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사도 베드로의 메시지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하나님 앞에서는 차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둘 다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이라는 뜻입니다. 둘 다 하나님 앞에서는 은혜로만 구원을 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구원의 문제에서 만큼은 다른 요인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 이방인의 유대개종은 할례가 필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으로 인해 달라졌습니다. 율법으로는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할 수 없고 변화도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베드로에게는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에게 자신을 보내 그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신 하나님과 그 하나님의 뜻을 체험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런 체험을 증거한 베드로의 결론적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10, 11절을 다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베드로는 그들이 지금까지 지켜온 할례와 율법을 멍에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구원을 받게 하는 것은 바로 우리나 이방인이나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됨을 분명히 말하였습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솔라 그라시아, 솔라 피데, 솔라 스크립트. 바로 그것입니다. 바로 솔라 그라시아, 다시 말해 오직 은혜입니다. 다른 것으로는 결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돈으로도 구원을 받을 수 없고 선한 행위로도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인간은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는 전적으로 무능력자입니다. 평생 두려움과 불안으로 어디로 가야할 지 어떻게 살아야할 지 알 수 없는 존재입니다. 어디에서 왔으며 또 죽은 후에는 어디로 가는 지 알 수 없는 존재로 죽음과 죄가 주는 두려움과 무력감으로 절망하며 살다 결국에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죽어야 할 존재입니다. 추악한 욕망과 심한 경쟁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이 사회와 세계를 보더라도 인간 그 자체는 절망적인 존재인지 알 수 있습니다. 구원이 절실히 필요한 존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죄와 사망으로부터의 구원은 다른 것으로 결코 오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이루어집니다. 주님의 일방적인 구원의 은혜가 없다면 그 누구도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그 마음에 평화를 누릴 수 없습니다. 돈과 권력과 명예와 지식으로도 인간은 그 근본적인 불안과 두려움으로부터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자식을 잘 키웠다고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인간에게는 근본 불안과 두려움이 있습니다. 다른 것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구원이 신선한 아침의 공기처럼 내려야 합니다. 가뭄으로 메마른 땅에 단비가 내려야 하는 것처럼 주님의 은혜가 메마른 영혼위에 내려야 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마음에 내립니까? 믿기만 하면 그 은혜가 단비처럼 내립니다. 그것이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아멘만 하면 됩니다. 그것이 구원입니다. 그 때 이 불안하고 두려운 세상에서 하늘 평화와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는 어디로 가는 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말씀해주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올 자가 없느니라.” 우리의 삶의 모든 것이 다 주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시편 기자 다윗의 고백처럼 우리가 백 번 양보해서 심지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음은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를 믿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그런 경우 보다는 늘 주님으로 말미암아 푸른 초장과 쉴 만한 물가로 늘 인도함을 받는 경우가 더욱 많습니다. 맞습니까? 이것이 바로 주님의 일방적인 구원이 아니겠습니까?
베드로가 믿음과 복음에 대하여 결론을 내린 것을 이번에는 예루살렘 교회 책임자인 야고보가 정리해주고 편지글로 남깁니다. 13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야고보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배경이 되는 구약말씀을 근거로 이방인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복음 역사에 들어오게 되는지 설명합니다. 17,18절 말씀처럼 이러한 이방인 복음역사와 구원의 역사는 하나님이 이미 약속한 말씀임을 상기시켜줍니다. 선지자들이 이미 그것을 예언하며 알려주었습니다. 19-21절을 보십시오. 야고보의 의견도 베드로의 의견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19-21절입니다.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라 하더라.”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배우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굳이 이방인을 유대인으로 만들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유대인으로서 굳이 이방인처럼 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본질이 아닌 표면적인 일일 분입니다. 바울이 로마서 앞부분에서 분명히 제시해주었습니다. 참 믿음의 사람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겉으로 표시 내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참 믿음의 사람이란 내면에 표시됩니다. 다른 사람이 아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하나님이 알게 되는 그런 사람이 참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아직 믿음의 세계에 어린 사람들을 그 어떤 것으로도 멍에를 지워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믿음의 사람이 있다면 그나 그녀가 더 잘 걸을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아주고 마침내 이 세상에서 믿음의 거인이 될 수 있도록 더욱 사랑하고 격려하고 지켜봐주어야 할 것입니다. 바리새인처럼 자꾸만 율법의 자를 대고 틀리나 안틀리나 감시한다면 그나 그녀는 금새 말라 죽어버릴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오늘은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얻게 된다는 말씀을 배웠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주님의 자녀로 선택받음에는 오직 주님의 은혜에 의한 것입니다. 구원에는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다 자격 미달입니다. 자신이 현재 구원을 얻고 있음은 무언가 잘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지금 숨 쉬고 있는 것, 지금 일을 열심히 하고 있는 것, 지금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사는 것, 그리고 지금 함께 주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을 다짐하고 더욱 새롭게 되고자 하는 것, 이 모든 것들이 다 주님의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늘 마음에 간직함으로써 우리가 이 세상에 대하여, 이웃에 대하여 또 동역자와 아내와 남편과 자녀와 부모님에 대하여 사랑과 은혜와 행복의 메시지를 전해야 겠습니다. 구원은 오직 주님의 은혜임을 믿습니다.
요절을 읽고 마치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경주센터 이모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