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저녁 O박사의 아파트 근처 술집에 들러 저녁식사를 겸하여 고기 구워 먹으면서 소줏잔을 기울이는데, M군의 고기 굽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는데...뭐 그의 학부 전공은 그 옛날의 시각으로 봐선 첨단과학 분야랄 수 있었던 전자공학이라더만 어디서 고기 굽는 재주는 익혀서 우릴 즐겁게 해주는지...나중에 들은 이야기로 그는 국내 대기업에 다니면서 직원등산, 회식, 놀이 등 직원 친목행사를 주도적으로 기획하고 이끌었다던데, 이른바 친목행사의 '도꾸이 ( とくい [得意])였다고나 할까. 도꾸이? 하! 또 일본말을, 쩝. 모르면 찾아보시길...
식당을 나와 O박사의 집에 들어간 게 아마 해시(亥時) 무렵이었으리라. 하지만 적어도 한강 이북에서는 술 마시는 데선 2인자(1인자 역시 우리 동기 Y군이었다는데 설마 우리학교 출신이 모두 술꾼은 아니겠지?)라 자부해왔던 M군이 그냥 얌전하게 잠자리에 든다는 건 꿈엔들 생각할 수 없을 터. 허접스런 안주(집주인 O박사가 들으면 서운해 하겠구만)를 앞에 두고 또 다시 권커니 자커니 하고 있었지만, 나의 가장 큰 장점은 나의 꼬라지를 안다는 것 아닌가? 해서리 종일 운전해서 피곤하단 핑계를 대곤 나 혼자 다른 방으로 가서 잠을 청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남부지방에서 살다 11월 초의 중부지방, 그것도 내륙지방인 영월에서 불을 때지 않은 방에 잤으니 구안괘사(口眼喎斜)에 걸리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을 정도로 새벽 4시에 잠을 깨고는 더 이상 추워서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 해서리 혼자 살그머니 집밖으로 나가 1시간여 동안 온 동네를 이리저리 헤집고 다녔는데, 새벽임에도 바깥 기온은 크게 낮지 않았던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다시 집에 들어가 자는 둥 마는 둥 2시간 가까이 뒤척이고 있던 차에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 일어나 보니 O박사가 라면을 끓여내고 있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이래 아침식사로 처음 먹어보는 라면 맛은 얼큰하니 맛이 좋았는데, M군은 어느새 소줏병을 꺼내 혼자 잔을 기울인다. 간간이 고전을 들먹이며 술을 마시는 모습이 역시 술꾼다운 풍모를 보여준다.
아침식사 후 곧장 영월군, 정선군, 그리고 태백시의 경계에 있는 함백산으로 70여 km의 거리를 달려갔다. 첩첩산중의 도로를 달리는데 어느 순간 눈 앞에 좌악 펼쳐진 호텔, 모텔, 그리고 유흥음식점들이 우리들의 눈을 휘둥그렇게 만들었으니...O박사가 이곳에 카지노가 있기 때문에 각종 숙박시설과 음식점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고 설명하니, M군은 중고차 구매할 때 이곳에 오면 쉽게 살 수 있다고 덧붙인다. 카지노에서 돈을 잃으면 마누라도 눈에 봬지 않는데 그깟 자동차 쯤이야 눈썹 하나 까딱 않고 팔아 치운다는 게 노름꾼들의 속성이래나 뭐래나...
새벽공기 가르며 차는 시원하게 뚫린 산중 도로를 잘도 달렸지만 계속해서 오르막길이다 보니 엔진소리가 장난이 아니었다. 오르고 오르면 못 오를 리 없다던가? 1시간 정도 고갯길을 쉬지 않고 오르다 보니 드디어 만항재(아라리고갯길)에 올랐다. 우리나라에서 자동차로 오를 수 있는 고개로선 가장 높은 곳에 있다고 하는 그 높이가 1,330m나 된다는구만글쎄. 아까부터 차 속에서 M군이 귀가 멍하다고 하더만 괜한 엄살이 아니었네그랴.
잠시 만항재에서 헤맨 게 어디서부터 함백산 산행을 시작해야 할지 도무지 가늠도 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어디에도 안내판을 찾을 수 없었다. 해서리 그곳에 있는 구멍가게에 들어가 물어보니 조금 아래로 내려가면 등산로 입구가 있다고 말해 줬다. 다시 차를 몰아 왔던 길로 3분 정도 내려가니 널찍한 주차장에 화장실까지 갖춘 등산로 입구가 나왔다. 차를 주차하고 산행을 시작했는데, 안내판을 보니 함백산 정상까지 2.7km라고 되어 있었다. 근디 산을 올라보니 야트막한 야산으로 걷는 데 전혀 힘을 들지 않은 게 지레 겁을 먹었다는 기분이 들었다.
발등까지 덮는 낙엽을 밟으며 산을 오르는 기분이 무척 좋았는데 이게 웬일? 잠시 오르다 보니 왼쪽 조금 떨어진 곳에 찻길이 있고 차들이 오락가락하는 데다 주차할 공간까지 두어 군데 나타나다 보니 공연히 억울한 생각까지 들었다. 마을 뒷산 정도 높이의 산을 몇 번 오르내리다 보니 평지가 나오고 다시 등산 안내 표지판이 나왔다. 여기가 바로 함백산 등산로 입구라는 것이다. 아항! 함백산 등산을 위해 차를 몰고 왔을 땐 태백선수촌 입구를 찾아가면 되는 거구나(나중에 등산을 마치고 갈 때 보니까 함백산 등산로 입구라고 쓰인 팻말이 여러 군데 있는 걸 확인했다).
여기서부터 함백산 정상까지는 겨우 0.9km라고 안내판에 쓰여 있어서리 나도 모르게 힘이 불끈! 그런데 그게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기까지는 10분이 채 경과되지 않을 때였으니...산을 오를 땐 언제나 겸손해야 한다는 걸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지만 0.9km란 숫자에 순간 이성을 잃어버린 거라 봐야 하리라. 단급장완(短急長緩)이랄까, 무릇 거리가 짧으면 경사가 급하고 거리가 길면 경사가 완만한 게 세상사 아닌가...온통 바위로만 이루어진 가파른 급경사를 오르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으니 모처럼 얼굴에 땀이 비오듯 쏟아지고 숨이 가빠 왔다. 한 순간 삐끗하면 미끄러져 구르든지 다리가 부러질 수 있는 위험한 등산을 하게 되다니, 그것도 이렇게 늙은 나이에 말이지...
어찌어찌해서 함백산 정상에 올랐다. 30여 년전 지리산 천왕봉에 올라보고 이 나이에 이렇게 높은 산을 올랐다니 내가 생각해도 믿을 수가 없을 정도였으니... 함백산은 남한에서 여섯 번째로 높은 산으로 해발 1,572.9m에 이른다고 한다. 정상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니 곳곳에 1,000m를 넘는 고봉들이 늘어서 있고 조금 낮은 산의 능선을 따라 풍차들이 열심히 돌고 있는 게 보였다. 맑은 날에는 태백산, 월악산도 보인다더만 오늘은 중국에서 날아온 황사가 조금 끼었기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다며 O박사가 아쉬워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오늘의 함백산 산행이 내겐 꿈같은 산행이자 역사적 이룸의 순간에 다름아니었다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