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1.25일 개최한 2009 복지선진도 충북사회복지 자원봉사대회에서
한형수 봉사자님께서 충청북도의회 의장 표창 및 체험수기 최우수상 수상 하였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체험수기 최우수상
-- 봉사의 삶- 한형수
창문 너머로 빨갛게 물든 단풍잎이 하나 둘 씩 떨어지는 모습을 보며, 이제 올해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또 올 겨울 유난히 추울 것이라는 예보가 있는데, 그늘지고 소외 된 곳에서 생활하고 있는 불우 이웃들의 겨울나기가 내심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저는 충북 음성의 작은 시골마을에서 태어나 풍족하지는 않지만 부모님의 따듯한 보살핌 속에 생활하면서 항상 어렵고 힘든 이웃들의 고충과 고달픔 등을 함께 보고 자랐습니다.
그러면서 성장하면 반드시 나보다 못한 환경에 있는 사람들을 도와가며 살겠다는 작지만 소박한 꿈을 담고 살아 왔습니다.
그 후 결혼과 함께 단란한 가정을 꾸리며, 나름대로 성공했다고 생각 한때 차츰 어려운 이웃에 대해 눈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특히 저희 집은 사람들이 자주 왕래하는 곳에 위치해있어, 평소 사람들을 좋아하는 제 성격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수시로 드나들며 세상사는 얘기면, 가정 사 등을 털어 놓는 사랑방이 되었습니다.
저는 천성이 남의 어려운 모습을 보면 내 일은 팽개치고서라도 도와줘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 집안 식구들에게 핀잔도 많이 들어 왔습니다.
한 20여 년 전으로 기억 되는데 한번은 어느 추운 겨울에 두 어린 남매가 저녁시간이 한참 지난 시각에 집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서성거리고 있어, 얼른 집안으로 데려다 따듯한 밥을 지어 먹이고, 잠을 재워 이튿날 버스를 태워 집에 돌려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그 아이들과 부모가 함께 찾아와 제 손을 잡고 고마움의 표시로 고추를 한 푸대 가지고 왔습니다.
알고 보니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생계를 꾸려가던 아이들의 부모가 너무나 힘들고 어려운 생활을 하다 보니 자주 싸우게 되고 심지어, 이혼하자고 할 정도로 심각한 상태까지 갔으며, 이때 아이들 생각에 “우리 때문에 엄마와 아빠가 싸우는 구나”라는 생각에 두 남매가 몰래 집을 빠져나와 잘 알지도 못하는 외할머니 집을 찾아가겠다고 무작정 버스를 탔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들 부부는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열심히 살자고 약혹하고, 그 뜻을 전하기 위해 저를 찾았다는 겁니다.
그때 저는 아주 작은 마음에서 비롯된 배려가“남에게는 큰 도움이 되는 구나”라는 것을 알게 됐고, 이 때 부터 더욱 열심히 남을 도와주어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했습니다.
저는 1995년 음성지역에서 유일하게 여성들로 결성된 목련로타리(봉사단체) 회원에 가입하면서 봉사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처음으로 사회에 노출돼 봉사를 하면서, 나 자신에 대한 반성과 ‘진정 봉사의 길을 가고 있는가?’를 반목하면서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그러던 중 지난 2000년 우리사회가 IMF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시절 우리사회에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고 있다는 언론 기사를 접하고 저는 음성군사회복지협의회를 찾아가 “내가 도울수 있는 일이 있느냐”며 문의 했고, 음성군사회복지협의회에서 “일반사람들이 많이 꺼리는 독거노인들을 위한 목욕 봉사가 많이 모자란다.”며 “도와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여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다”고 시작한 것이 벌써 10년이 다 되어 갑니다.
처음에는 뜻을 같이하는 봉사자 몇 명과 함께 주로 오지 산골등에 혼자 생활하고 있는 노인들을 대상으로 목욕봉사를 시작 했지만 점점 봉사 인원이 줄게 되고 결국 저 혼자 계속해서 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어떤 날은 아침부터 오후까지 이곳저곳을 다니며 10여명의 노인들을 씻겨주어야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봉사활동이 끝나고 나면 온 몸이 녹초가 되어 집에 오자마자 곯아떨어지기 일쑤였습니다.
그런 저를 보고 남편은 “밖에서 무엇을 하길래 그렇게 피곤하냐?”고 면박을 주기도 했지만 나중에 모든 사실을 안 남편이 열심히 하라고 후원을 아끼지 않아 힘든 줄 모르고 목욕봉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목욕 봉사를 갈 때 마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한창 젊었을 때 가정을 위해 거친 삶을 살아 오셨을 텐데 노후에 버림당한 것처럼 혼자 한 겨울 추위 속에 명마와 싸우며 외로운 생활을 하는 모습이 너무도 안타까워 마음이 씁쓸하게 합니다.
그래서 늘 수혜자가 부모라는 생각으로 정성껏 목욕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이제껏 수많은 분들을 씻겨 드렸지만 특별히 기억에 남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 중 지난 2002년 삼성면의 한 시골마을을 찾아 당시 80세였던 한 할머니를 찾아 갔을 때입니다.
남의 손을 빌려 처음으로 목욕을 하게 된 이 할머니는 첫 대면부터 목욕하길 완강히 거부하면서 손도 잡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오랜 시간 할머니와 이런저런 세상 살아오신 이야기를 들으며, 닫혔던 마음의 문들 열게 한 뒤 정성껏 씻겨 드렸더니 그제 서야 “친 딸 보다 손길이 부드럽네” 하시며, “언제 또 올 수 있나! 꼭 기다리겠다.”며, 살갑게 저를 대해주셔서 마음을 뭉클하게 했습니다.
그 후 한 달 정도 지난 뒤 그 할머니를 찾았더니 제가 다녀간 뒤 얼마 후 병세가 악화 돼 세상을 떠나셨고, “그 때 목욕 시켜주길 참 잘했다”는 얘기를 동네 사람들에게 듣고 마치 내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처럼 마음이 슬펐던 기억이 있습니다.
또 지난여름 한 집안 식구 5명 모두가 장애인이었던 감곡의 한 가정을 방문했을 때 일입니다.
모든 식구가 장애인인 관계로 집안 청소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고 또 칠순 노모는 치매로 인해 대소면을 아무데나 버려서, 온 집안 악취는 물룐 여름 해충으로 들끓고 있었습니다.
이 때 저는 가족 전체 건강에 심각한 영향을 주겠다는 생각에 함께 갔던 봉사자들과 청소부터 해주자고 했습니다.
그러자 함께 간 봉사자들이 집안에서 풍겨 나오는 냄새를 참지 못하고 모두가 밖으로 뛰쳐나가 버렸습니다.
저는 이들에게 “좋은 환경에서 하는 봉사가 무슨 봉사이겠느냐?”고 말한 뒤 혼자 청소를 시작 했습니다.
이 후 제가 땀을 뻘뻘 흘리는 모습을 본 봉사자들이 제 뜻을 이해한 듯 함께 집안 구석구석을 청소해 주고 5명 전 가족을 대상으로 목욕을 해드리고 힘든 일과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이밖에도 저는 목욕봉사를 하면서 수 없이 많은 노인들을 접하고 그들이 남에게 밝히지 못하는 수많은 사연을 들었고, 또 그 사연을 혼자 가슴에 간직한 채 봉사활동에 임하고 있습니다.
대부분 목욕대상 수혜자 대부분이 오랫동안 씻지 못하고 생활하고 있어, 불결한 주위 환경과 냄새 등으로 처음 방문하게 되면 대하기가 부담스러운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봉사의 사전적 의미인 “자신의 이해를 돌보지 않고 몸과 마음을 다해 일하는 것“처럼 진정한 마음에서 열심히 봉사를 하면, 악취가 아름다운 향기가 되고, 쏟아지는 땀방울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습니다.
저는 이 같은 마음으로 앞으로 힘닿는데 까지 봉사를 실천할 계획입니다.
비록 저 같은 한사람이 시작한 작은 봉사가 한 알의 밀알이 돼, 불우한 환경에서 어렵게 살아가는 이웃들에게 우리 사회에 따듯 손길이 구석구석 이어지면 하는 바람을 갖고 열심히 봉사자의 길을 걸어갈 각오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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