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 출신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은 우리 시대 최고의 테크니션이며 스타일리스트답게 [도그빌]에서도 독창적인 실험을 멈추지 않는다. 쉴새없이 흔들리는 헨드 헬드 카메라 기법으로, 시험받는 지고지순한 사랑을 표현한 [브레이킹 더 웨이브]와, 전쟁을 배경으로 파괴되어 가는 인간성을 직시한 [유로파]로 칸느 심사위원 대상을, 그리고 뮤지컬 스타일을 한 차원 높게 응용, 존재의 방식에 질문을 던진 [어둠 속의 댄서]로 칸느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바 있다.
그의 영화는 항상 논란을 불러 일으킨다. 그것은 당대의 대중들을 자극하려는 그의 도발적 자세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현재적 명성에 안주하지 않고 모험적 시도를 거듭하는 예술적 새로움에 기인한다. 따라서 센세이셔널리즘만 추구하는 사이비 작가라는 그에 대한 일부의 비난은 잘못된 것이다.
**연극적 스타일의 차용
[도그빌]은 의심할 바 없는 우리 시대 최고의 영화 중 하나이다.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창의적 상상력으로 가득차 있다. 연극적 스타일을 영화로 차용, 제한된 무대공간을 오히려 장점으로 변용하며 인간심리에 대한 깊은 통찰을 이끌어낸다. 3시간동안의 긴 런닝타임(178분)은 오직 제한된 무대공간 안에서만 펼쳐진다. 마을에 갇힌 여주인공 그레이스가 도그빌 밖으로 탈출을 시도하는 유일한 씬도, 오직 트럭 위로만 화면을 제한하여 공간을 집중시킨다. 버드 아이스 뷰로 찍힌 카메라 앵글은, 사과상자가 실린 트럭의 짐칸을 덮은 천을 투명하게 처리하여, 그 안에 누워있는 그레이스를 보여주고 디졸브 편집으로 고단한 여행을 드러낸다.
[도그빌]의 첫 장면은 버드 아이스 뷰로 시작해서 무대 가까이 줌인된다. 커다란 무대 위에 흰 분필로 길이 그려져 있고, 느릅나무도 없는 길 바닥에는 ELM ST.(느릅나무 길)라고 쓰여 있다. 개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역시 흰 분필로 DOG이라고 쓰여 있다. 8가구가 살고 있는 집 역시 분필로 구획되어 있다. 집도 담도 없다. 인물들은 집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 문을 열고 닫는 동작을 한다. 마임과 함께 음향 소리가 삽입되어 있어서 외부공간과 내부공간을 넘나드는 것을 구분해준다.
몇몇 가구들은 표현주의적 무대장치처럼 간결하게 핵심만 표현한 채 무대 위에 서 있다. 길의 끝에는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 등장하는 것같은 나무 한 그루가 설치되어 있고, 마을 뒤쪽의 험준한 산이나 탄광 역시 간단한 셋트로 표현되어 있다. 이런 간결한 무대장치는 관객들로 하여금 서로를 볼 수 있게 해준다.
조명을 이용하여 낮과 밤을 구분하고, 보통 때는 극히 제한된 공간과 인물에만 빛이 떨어진다. 주변은 암흑으로 뒤덮여 있다. 우리들의 시선은 카메라 프레임으로 제한되기 이전에 의도적인 조명에 의해 한곳으로 집중된다. 긴 런닝타임동안 그러나 클로즈업에서 롱샷을 넘나드는 프레임, 핸드 헬드나 급격한 줌 인/아웃 샷, 패닝 등 감독의 유효적절한 다양한 연출 기법으로 지루함을 느낄 수도 없다.
***[도그빌]의 내러티브
미국 록키산맥 근처에 있는 아주 작은 시골마을 도그빌, 어느 날 갱단에 쫒기는 그레이스(니콜 키드만 분)가 8가구 밖에 살지 않는 이 마을에 들어오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낯선 이방인을 경계하는 주민들의 결정으로 그녀는 2주의 유예기간을 얻어 마을에 머문다.
그레이스는 주민들의 일을 거들어 준다. 주민들은 따뜻한 미소로 그녀를 반기고 그녀의 존재는 천사처럼 생각된다. 특히 도덕적인 톰(폴 베타니 분)과 그레이스 사이에는 서로를 사랑하는 감정이 싹튼다.
2주뒤, 주민들의 만장일치 찬성에 의해 그레이스는 도그빌에 머물게 된다. 마을 사람들의 짜투리 일을 도와주는 조건이었지만, 그녀를 찾는 경찰의 실종자 포스터가 붙으면서 주민들은 조금씩 동요한다. 이제 그들은 경찰이나 갱단에 밀고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각자 그레이스에게 무리한 요구를 뻔뻔하게 하기 시작한다.
****주제와 밀착된 다양한 테크닉
[도그빌]의 카메라는 핸드 헬드로 쉴새없이 움직인다. 인물의 캐릭터를 드러내는 극단적 클로즈업 쇼트에서 인물 사이의 거리를 보여주며 갈등을 심화시키는 롱쇼트에 이르기까지 프레임은 적절하게 사용되고 있다. 카메라는 인물에서 인물로 빠르게 패닝을 하고, 극단적인 줌인/ 줌아웃 쇼트를 사용함으로써 제한된 무대공간의 답답함을 가볍게 벗어난다.
이런 인위적 카메라 기법은, 관객들이 무대 위의 사건이나 인물과 거리를 두게 하고, 동화되는 것을 차단한다. 브레히트의 서사극 이론에 등장하는 이화효과를 창출시킨다.
*****조명의 역할과 효과
[도그빌]에서 주목할 것은 조명의 움직임이다. 기본적으로 낮과 밤을 구분하는 조명은 보통 때 극히 제한된 공간과 인물만 비춘다. 주변은 암흑으로 뒤덮여 있다. 우리들의 시선은 카메라 프레임으로 제한되기 이전, 의도적 조명에 의해 한곳으로 집중된다.
주위가 캄캄한 암흑 속일 때, 대부분 인간의 어두운 면이 노출된다. 주민회의 경우에도, 처음 그레이스를 받아들이는 씬은 주위의 하얀 벽면이 드러나는 낮씬으로 찍혀져 있다. 그러나 마을에 수배자 전단이 붙고 그레이스의 처지가 점점 궁핍해졌을 때, 그레이스의 처지를 이용하려는 이기적 욕망이 마을 사람들에게 싹트는 씬은 어둠 속에서 일어난다.
낮이 되면 무대 주위가 하얀 벽으로 드러나서 바닥의 어둠과 뚜렷하게 대비된다. 도그빌이 갇힌 공간이라는 것을, 그레이스는 더 이상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면서도, 지금 우리는 실제가 아니라 한 편의 드라마를 보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해준다.
*******인간성의 본질에 대한 형이상학적 고찰
라스 폰 트리에는 영화의 순수함을 되찾기 위한 운동으로 [도그마 선언]을 발표했고 많은 동료들과 함께 상업성에 오염되어 가는 영화예술의 순수함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 [도그빌] 역시 인간의 내면에 잠복해 있는 이중성과 야만성을 무섭도록 섬찟하게 폭로한 작품이다.
특히 결말부분의 충격적 반전은 인간 본성과 함께 권력의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게 만든다. [제가 사람들을 용서하기 때문에 거만하다는 말씀인가요?]라는 그레이사의 대사는 이 영화의 터닝 포인트이다.
비록 그레이스와 갱단 보스 사이에서 진행되는 권력에 대한 차 안의 대화가 지나치게 우의성을 드러내는 것이며 작위적 설정이라는 비판을 할 수 있어도, [나는 더 나은 삶을 위해 나의 권력을 쓰고 싶다]는 그레이스의 발언은, 이 영화가 우리 시대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하나의 우화이며 은유라는 것을 보여준다.
[도그빌]의 주제는 인간성의 본질에 대한 것이다. 과연 인간의 선한 의지는 어디까지 지속될 수 있는가. 인간들은 자기들의 이기적 욕망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가. 선과 악의 경계는 무엇인가. 이런 본질적 질문들이 영화를 보고난 뒤에도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은, 이 영화가 비록 우화적 형식을 채택하고는 있지만, 삶의 깊은 곳을 응시하고 있기 때문이다.찰라적이고 일회적인 가벼운 주제가 범람하는 소비적 영화풍토 속에서 라스폰 트리에의 이런 형이상학적 시선은 우리를 오래도록 붙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