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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의 <동여도(東與圖)> 중 '경조오부도'에서 여의도 부근을 압축한 지도다.
여의도(汝矣島) 율도(栗島) 목양(牧羊) 영등포(英登浦) 백사주이십리(白沙周二十里) 당산리(堂山里)
그 지도에 여의도와 관련된 단어만 골라 나열했다.여의도의 성격을 이 단어에서 잘 찾아 볼 수 있다.
강북에 토정(土亭)이 보인다.이지함이 흙담에 지은 집 토정이다.그 집이 있던 윗토정 아래토정이 있었다.
이 지도에서는 구분하지 않고 토정마을만 표기하고 있다.토정 앞 서강을 건너면 백사장이 20리나 펼쳐진 곳,
백사주이십리(白沙周二十里)가 나온다.언젠가 우리는 원산의 명사십리(明沙十里)에 감탄했다.
이곳은 두 곱절이나 넘는 백사주이십리(白沙周二十里)의 절경이 전개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그 옆에 밤섬(栗島)이 있다.거기에 여의도가 가까이 있고 야트막한 목양(牧羊)도 보인다.
현재는 밤섬과 여의도가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그 사이로 한강이 흐르고 있다.
옛 기록은 밤섬과 여의도가 거의 하나의 섬이었다고 전한다.아무튼 한강 물이 오랫동안 퇴적작용에 의해 모래가
쌓이고 쌓여 생긴 섬이다.여의도는 조선시대엔 말 목장이었다. 그래서 여의도 모래벌판을 ‘양(養)’자에 ‘말’자를 붙여
‘양말벌’이라고도 불렀다. 현재 국회의사당 자리에는 50m가량 높이의 양미산(양말산)이 있었다.
그 앞 섬 안쪽에 있다고 해서 ‘안양말벌’이라고 했다. 이 야산은 국회의사당을 지을 때 흙을 깎아서 둑을 쌓는 데 이용했다.
<대동지지>와 <동국여비고>에는 양말벌에서 양이나 염소를 많이 길렀다고 기록돼 있다.
“여의도는 밤섬 서쪽에 있는데 맑은 모래벌판이 육지에 닿아 있고 여기에서 양을 놓아기른다.”<대동지지>
“여의도는 예전에 목장이 있어서의 양 50마리, 염소 60마리를 놓아기른다.”<동국여지비고>
명종실록은 여의도 사람들의 색다른 풍속도를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다.
“그 관서의 전복(典僕)들이 관원에게 지공할 돼지와 양을 기르는 일 때문에 그 섬에 집을 짓고 살고 있는데 그들의 풍속이 족친(族親)끼리 서로 혼인을 하여 사촌이나 오촌도 피하지 않는가 하면 홀아비나 과부가 있으면 아무리 가까운 친척이라도 다른 곳으로 보내어 결혼시키지 않고 마음내키는 대로 같이 살면서도 조금도 괴이하게 여기지 않고 있습니다.이는 대개 섬의 사면이 모두 물이고 인접한 마을이 없어 사람들의 이목(耳目)이 미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출입하기 위해 물을 건널 적에 예사로 물이 깊으면 벗고 얕으면 걷고 건너는가 하면 남자는 끌고 여자는 붙들고 가는데, 그들의 추잡한 행실은 오로지 여기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섬의 인가(人家)를 모두 철거하여 본서(本署) 근처로 이주시키고, 만약 남녀가 전처럼 섬에 출입하는 자가 있으면 무거운 율(律)에 좌죄시키소서.
그리고 관원에게 지공하는 것과 가축을 기르는 일은 일체 남자가 하게 하여 추잡한 폐단을 근절시키소서.“
백사장에서는 민들레, 냉이를 캐서 나물을 무쳐먹고, 밤섬과 서강 사이를 흐르던 한강가에서 소쿠리로 재첩과 조개를 잡아
끓여먹었다고 전한다. 비가 오고 나면 한강철교 아래로 물고기를 잡으러 갔는데 팔뚝만한 잉어도 자주 잡혔단다.
여의도는 그런 모래섬이었다.
여의도에서 밤섬을 가는 데 강은 아주 얕았던 것으로 보인다.명종실록에 나온 기사에서
이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강을 서로 업고 건너주는 섭수꾼의 이야기가 이 사실을 잘 증명해 주고 있다.조선조 ‘명종실록(明宗實錄)’ 11월 4일 기록이다.
“한강 잉화도(仍火島: 여의도), 남녀가 사로 안거나등에 업고 강을 건너는 품이
야하기 그지없다.”날이 가물어 물길이 얕아지면 사람을 업어 도강시키는 이른바 직업적인 섭수꾼이 등장하고 있다.섭수꾼은 얕은 물을 건너준다는 뜻의 섭수(涉水)에서 비롯된 말이다.
나라가 기울기 시작하던 1902년의 일이다. 내탕금에 굶주리던 황실에서는 한강을 건너는 모든 사람들에게 나룻배삯 말고도 도진세(渡津稅)라는 미명의 도강료를 얹어 받았던 일이 있다. 나룻배의 발, 착장에 가가를 지어놓고 도강료를 받았다.불만이 비등하던 차에 드디어 폭발, 반란으로 번지고 말았다. 도강료를 받는 가가를 불사르고 소동을 벌였다.
1910년에는 일본 상인 우에다(上田)가 마포나루에서 여의도까지 배다리(舟橋)를 놓고 마포쪽에서는 우에다 자신이
여의도쪽에서는 우에다 부인이 거적을 깔고 앉아 도강료를 받았다. 다분히 일본 상인적 발상이었다.한번 건너는데 현금일 경우
8전, 현물일 경우 쌀 반되값이었다하니 착취에 가까운 도강료였다.
노량진 쪽에서 흘러온 한강은 여의도 동쪽에서 샛강과 갈라선다.그 동쪽 일대는 서쪽 양말산 일대보다는 풍광이 수려했다고 한다.
이곳 강은 서강(西江)이다.중국에서 온 귀빈은 한강에 배를 띄워 선상 환영연을 배풀었다.그 배가 한강진 제천정을 지나 서호에
들어서면서 환영연 분위기는 절경에 한껏 고조되었다고 한다.마포 쪽의 기암절벽이 강가에 즐비하고 여의도 밤섬 잠두봉 선유봉이
강의 좌우에서 시립하고 있다.그 명승 사이를 유람하는 선상 환영연은 서강의 절경과 어우러져 중국에서도 유명했다고 전한다.
특히 동쪽 여의도는 경치가 빼어나 사대부의 별장지대로 각광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세조의 장자방 한명회가 압구정을 처음에는
이곳에 마련해다고 전한다.성종 때 저자도 근처 지금의 압구정동으로 옮긴 것으로 기록에는 나온다.
김수온 (金守溫)은 '압구정기(狎鷗亭記)'에서 압구정이 화도(火島) 여의도에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왕도(王都)에서 남으로 5리쯤 가면 양화진(楊花津)의 북쪽과 마포(麻浦)의 서쪽에 언덕 하나가 우뚝 솟아
환히 트이고 강물로 빙 둘러 있어 세상에서 화도(火島)라 일컫는다. 이전에는 우양(牛羊)의 놀이터로 되어
위는 민둥민둥하고 아래는 황폐하여 어느 누구도 거기를 사랑하는 자가 없었는데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공(韓公)이
그 위에다 정자를 짓고 노니는 땅으로 삼았다. 공이 이 정자에 오를 적에 흰 갈매기가 날아서 울고 지나가니
공은 말하기를,
“이상하도다. 갈매기라는 새는 대개 천지와 강해(江海)로 집을 삼고 예나 지금이나 풍월로 생애를 삼아서
뜰 듯 잠길 듯하며 자기들끼리 서로 친근하여, 올 적에는 조수를 따라오고, 갈 적에는 조수를 따라가니 아무튼
천지간에 하나의 한가한 물건이다. 사람치고 기심(機心)을 잊어버린 것이 저 갈매기와 같은 자가 어디 있으랴.” 하였다.
-김수온의 압구정기에서
이종묵 서울대 교수(국어국문학)는 "한명회가 여의도에 계유정란 이후 정자 압구정을 마련하였고 성종 7년(1476) 동호의
두모포 건너 강의 남쪽으로 옮겼다"고 설명했다.
일제강점기 여의도에는 간이 경마장이 설치된 적도 있다.양말산이 자리한 곳에 경마장이 있었던 것으로 보고있다.
경마는 처음에 현재 용산동 미군 부대가 있는 곳에서 시작되었으나 당시 이곳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의 반대로 장소를
물색하다가 여의도로 옮기게 된 것이다.여의도에서 경마가 벌어지는 날, 철도국에서는 남대문에서 노량진까지 임시 열차를 운
행하고 경성 우편국은 임시 전화를 가설해 줄 정도로 요란하였다.
경마 주최 측은 관람객의 편의를 위해 노량진 쪽 한강인도교에서 여의도까지 판자를 깔아 걷기에 편리하게 하고, 이촌동과 여의도 사이에는 나룻배를 준비하였다.경마가 열리던 날은 맑은 가을날이었다. 휴일인데다가 일본에서 만주까지 장거리 시험 비행기가 여의도에 기착할 예정이어서 약 1만 명의 군중이 여의도로 몰려들어 대 혼잡을 이루었다. 이때 쇄도하는 인파로 경마장 관람석이 무너져 부상자가 발생하고, 노량진에서는 관람객을 태운 자동차가 언덕에서 굴러 한때 교통이 마비되었다고 신문에 보도되었다.
여의도 바로 앞에 밤송이 모양을 한 섬 밤섬(栗島)가 있었다.
<동국여지비고>는 밤섬 율도(栗島)를 이렇게 전한다.
밤섬은 길이가 7리였다.경성의 서남쪽 10리 지점에 있으니 곧 마포의 남쪽이다.
뽕밭이 있는데 공상(公桑)으로 지금의 내의원(內醫院)에 속한다.섬 안에 늙은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는데 세상에서는 고려의 김주(金澍)가 손수 심은 것이라 전한다.
500년 전 조선의 한양 천도와 함께 배 만드는 기술자들이 처음 정착한 밤섬이다.
밤섬에는 1967년까지 62세대 443명이 살고 있었다. 대부분 고기잡이와 배 만드는 기술자였다.
일부는 뽕나무와 약초(감초) 재배, 염소 방목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밤섬 주민 중 배 만드는 기술자가
52세대를 차질할 정도였으니 가히 밤섬은 한강변의 조선업 중심의 대표 섬이었다.
일제 때는 강제징용수첩을 받은 청년층 조선목수가 17명이었다.
조선업의 형태는 지방에서 주문을 받아 적업하는 것과, 공임을 받고 다른 지방에 고용되는 경우였다.
배 짓는 사업이 번성하던 시절에는 돈벌이가 꽤 괜찮았다. 당시 가장 큰 배는 18m 정도로 사람을 싣거나
자갈과 모래 등을 운반했고, 고깃배는 15m 정도였다. 배 모양은 앞이 뾰족하고 날씬한 것이 특징이었다.
마포주민 이봉수(83)씨가 재현한 황포돛배는 12m 가량이었고, 주로 충청도 서산 지방의 실치잡이 배로 쓰였다.
사람, 소, 짐을 실어 나르는 나룻배는 9m 정도였으며, 자갈·모래를 싣는 자갈배는 6~7m 정도였는데 나룻배보다
목재가 더 두꺼웠다.
"밤섬은 현대에 들어서도 전기나 수도가 전혀 들어오지 않았고, 1968년 밤섬을 떠날 때까지
주민들은 등잔불이나 남폿불을 사용했다. 물은 한강 물을 퍼다가 그대로 마셨다.”
밤섬 배목수인 최창선(64)씨는 증언했다.
“우물이 있었지만 짠맛이 나서 먹을 수가 없었다. 한강 물 떠다가 먼지만 가라앉혀서 마셨는데,
오래 둬도 벌레가 생기지 않았다” 최씨의 증언이었다.한국전쟁이 터지면서 쇠퇴의 길을 걸었다.
그리고 그들은 다른 직업을 찾아 전전했다. 이 섬에는 마씨 인씨 석씨 선씨 등 희성이 많이 살았다.
1968년 2월 10일 오후 3시 김현옥 시장이 폭파 단추를 눌렀다.
밤섬을 폭파하게 된 것은 여의도에 제방을 만듦에 따라 한강물의 흐름을
좋게 하기 위한 것이 첫째 목적이었고, 다음으로는 폭파 부산물인 돌을
제방공사에 쓰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여의도와 밤섬은 현재와 같이
500m 이상의 거리를 두게 되었다.
폭파 공사로 밤섬은 중심부가 파헤쳐지고 9개의 작은 섬으로
나누어졌다.밤섬은 그 뒤 30여년 동안 형태의 변화를 겪게 된다.
상류 쪽 작은 섬에 퇴적물이 쌓이면서 점차 커져 크기가 비슷한
두 개의 섬이 되었다.
“한강 한가운데 돌과 모래로 된 섬 밤섬(율도)1만7300평이 없어진다. 서울시는 10일 상오 밤섬 폭파작업에 착수, 5월 말까지 제거작업을 한다. 폭파이유는 하구를 넓혀 현재 공사중인 여의도를 홍수에서 구해내기 위한 것. 500년 동안 운명의 혜택을 모르고 살아온 이 밤섬은 62가구 443명이 도선업과 어업으로 살아온 서울의 명소. 행정명칭은 서울 마포구 서강동 15통 6반. 도둑이 없고 질병이 없다는 이 섬엔 ‘부군신’이란 사당이 있다. 이 고장은 500년 동안 수도물과 전깃불을 모르고 살아왔으며 한강물로 밥을 지어 먹고 살아왔다는데도 탈이 없다. 또 전기대신 집집마다 부군등이라는 조롱불을 켜서 마을을 밝게 하고 있다.(…)주민들은 서울시가 와우산에 마련한 연립주택에 집단이주 된다”- 1968년 2월10일자 경향신문에서-
1967년 12월 25일 성탄일 여의도에서 거행된 '여의도 건설 기공식'이다.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 그리고 아들 박지만 군,김현옥 서울시장이 여의도 개발을 알리는 '버튼'을 누르고 있다.
김현옥 시장은 여의도 개발의 도시설계를 당시 가장 유력한 건축가 김수근에게 맡겼다. 당시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 부사장 김수근은 후배인 윤승중, 김원, 김석철 등에게 이 일을 맡겼다.
“한강개발계획을 세워라. 첫째, 여의도에 제방을 쌓아서 가능한 한 많은 택지를 조성한다. 둘째, 여의도와 마포·영등포를 연결하는 교량을 가설한다. 셋째, 한강을 사이에 두고 남북의 제방도로를 연차적으로 축조함으로써 한강 홍수를 방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자동차가 고속으로 달릴 수 있도록 한다.”
김현옥 서울시장이 여의도 건설을 주축으로 하는 한강개발 3개년계획을 착안한 것은 1967년 8월이었다.
같은 해 9월 서울시는 한강개발 3개년계획을 수립했다.
1968년 6월 1일 서울시가 수해를 방지하고 현대식 택지로 조성하기 위해 7,533m의 윤중제를 축조하여 한강의 기적이
열매를 맺게 됐다. 이날 오전 10시15분쯤 공사현장에서 베풀어진 윤중제 준공식에는 박정희 대통령 내외를 비롯, 삼부요인,
주한 외교사절, 각계대표, 시민, 학생 등 1만 여명이 참석했다. 윤중제란 여의도 공사 착공에 앞서 1967년 말 김현옥 서울시장이
현장을 둘러보며 <강 가운데 우뚝 솟아 둥그렇게 쌓아 놓은 둑>이란 의미로 즉흥적으로 만들어낸 낱말이다.
그 날 준공식 모습을 당시 신문의 기사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이날 준공식장에는 1백발의 오색불꽃이 하늘을 덮었다. 식이 끝난 뒤 서울지구 예비군 13개 중대가 시범 행진을 했다."
마포대교 남단 동쪽 언덕 아래 작은 잔디밭에 '漢江開發'비가 있다.'漢江開發' 글씨는 박정희 대통령이 썼다고 비문은 밝히고 있다.
서울시는 윤중제 준공을 1968년 말까지 계획했었으나 서울시장의 강한 의지와 한강건설사업소장의 밤낮없는 투지로 예정 기일의
80%를 앞당겨 준공, 한국 기술진의 새기록을 수립했다. 이 공사에는 연인원 52만 명이 동원되었다. 20∼30m 폭의 윤중제 위에는
길이 7.5km의 4차선도로가 마련되었고 둘레에는 15년생 수양버들이 7m 간격으로 1천 그루가 심어졌다. 가로등은 30m간격으로 1개씩 506개가 가설돼있으며 윤중제 강변둘레에는 2m폭으로 36만7천2백35장의 잔디가 곱게 깔렸다. 윤중제가 완공된 뒤 도로가 건설되고 아파트가 건설되는 등 여의도 개발이 본격화됐다.
한때 '쓸모없는 땅' 그토록 외면당했던 여의도다,그 여의도가 이제 대한민국 정치와 경제 언론의 중심지가 되었다.
여의도 서쪽에 국회의사당이 들어섰고 공중파 방송국 3개가 여의도에 있었다.주요 금융기관이 몰린 곳도 여의도다.
여의도 지상의 도시구조물로는 가히 어디 내놔도 손색없는 현대적인 도시기능을 갖춘 곳 여의도다.
1950년 한국전이 끝나고 서해안 임진강이 북으로 넘어갔다.한강의 서해쪽 물길이 막힌 것이다.이웃 마포 항구도시가
제 기능을 잃으면서 서강의 수운(水運)이 마비된 것이다.경상상인들을 중심으로 번성했던 마포 덕을 본 여의도도
그만큼 위축될 때가 있었다.서강이 이제 수운(水運)의 기능을 되찾는 길이 급하다.여의도에 국제규모의 항구를 건설한다는
소식이 들린지 5~6년이 지났다.관계기관의 협의도 끝났다고도 했다.정권이 바뀐 탓인지 그 후로 소식이 없다.
그 소문대로 여의도에 항구가 들어선다면 옛 마포항의 영화를 되찾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한국의 번영이 여의도 항구에서 오대양 육대주로 뻗어가는 그 미래를 기대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