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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土地)
작가 소개
박경리(朴景利 1926- ) 소설가. 경남 충무 출생. 1945년 진주 고등 여학교를 졸업하고 결혼했으나, 한국전쟁 중 부군이 납북된 후 창작 활동에 전념하고 있음.
1955년과 그 이듬해에 걸쳐 <현대문학>에 단편 “계산”과 “흑흑백백”이 추천되어 문단에 등장한 이래 “불신 시대”, “암흑 시대” 등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1957년 부정과 악에 강렬한 고발 의식을 보여 준 “불신 시대”를 발표하여 제3회 <현대문학> 신인상을 수상하였고, 여류 작가로서의 기반을 굳건히 하였다. 그의 초기 작품들은 대체로 한국 전쟁 때 남편을 잃고 홀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거나 딸 하나를 데리고 사는 전쟁 미망인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아들 작품에서는 전쟁 미망인들의 삵, 또는 그들의 눈을 통해 사회 현실의 훼손된 국면들을 예리하게 파헤쳤다.
1959년에는 생활고에 시달리는 고독한 여인의 심적 방황을 그린 장편 소설 “표류도”를 발표하여 제3회 내성 문학상을 수상한 것을 계기로 장편 소설의 집필에 주력하였다. 이후 “내 마음은 호수”, “은하”, “푸른 은하” 등의 신문 연재 소설을 발표하는 한편, 1962년에는 전작 장편 “김약국의 딸들”을 발표하였다. “김약국의 딸들”은 이전의 전쟁 미망인을 즐겨 등장시킨 자전적 사건에서 벗어나 객관적인 시선을 확보하였고, 공간적 배경도 전쟁터가 아닌 통영으로 바뀌었으며, 제재와 기법 면에서 다양한 변모를 보인 전환기적 작품이다. 1964년에는 한국 전쟁이라는 민족사의 비극을 생활인으로서의 시각과 전쟁을 수행하는 이데올로기의 시각을 통해 예리하게 부각시킴으로써 역사를 정면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노력을 담은 전작 장편 “시장과 전장”을 간행하여 문단의 주목을 받았고, 이듬해에 제2회 한국 여류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이어 “가을에 온 여인”, “늑지대”, “타인들”, “환상의 시기” 등을 연재하였다.
1969년 이후부터는 대하 소설 “토지”에 몰두하였다. 하동의 대지주 최 참판네 일가를 중심으로 한말에서부터 식민지 시대를 거쳐 조국 광복에 이르는 민족사의 변천을 형상화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보여지는 광대한 스케일과 한국 근대사의 전개에 관한 작가의 독특한 시각은 우리 소설사에서 매우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972년에는 “토지” 제1부로 제7회 월탄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줄거리
<토지>는 하동 평사리의 대지주 최씨 가문의 비극적인 사건으로 문을 연다. 최씨 집안의 안주인인 윤씨부인(최치수의 모친)은 절에 불공을 드리러 갔다가 후에 동학 접주가 되어 처형당하는 김개주에게 겁탈당해 김환(일명 구천이)을 잉태한다. 그 후 김환은 최씨 가문으로 잠입하여 하인이 되지만, 최치수의 아내인 별당아씨와 사랑에 빠져 둘은 지리산으로 도망친다. 최씨 가문의 재산은 탐낸 귀녀와 몰락 양반 김평산의 음모로 최치수는 교살당하고 음모를 꾸민 두 사람은 윤씨부인에게 발각되어 사형당한다. 최씨 집안의 외가 쪽 먼 친척인 조준구는 윤씨부인이 마을을 휩쓴 호열자(콜레라)로 죽자 최씨 집안의 재산을 강탈하려고 한다. 그는 한편으로 최씨 집안의 유일한 생존자인 최치수의 딸 서희를 몰아내고 마을 사람들을 분열시키면서 일본인들의 힘을 빌려 모든 재산을 손아귀에 넣게 된다. 여기에 더해 서희와 자신의 아들 병수를 결혼시키려는 음모를 꾸미자 서희는 충직한 하인 김길상 등과 함께 용정으로 탈출한다. 서희는 용정에서 윤씨부인이 남긴 금은괴를 자본으로 장사에 성공하여 거부가 되고 하인이었던 길상과 혼인한다. 여기까지가 “토지” 1.2부의 개괄적인 내용인데, 국권 상실, 봉건 가부장 체제와 신분 질서의 붕괴, 농업 경제로부터 화폐 경제로의 변환 등 1900년대와 1910년대 한국 사회의 변화가 소설의 밑그림으로 담겨 있다.
3.4부는 1.2부와 연속선상에 놓이면서도 시대, 배경, 인물의 변화와 변천에 따라 이야기의 축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3.4부의 시간적 배경은 2,30년대인데, 이 시기 한국 사회의 격변이 소설의 중요한 관심사로 자리잡고 있다. 특히 3.1운동이 실패로 돌아갔음이 확인되고 일제의 총독 정치가 가혹해지기 시작한 1920년대 식민지 상황의 암울한 분위기가 무겁게 소설을 누르고 있다. 국권을 빼앗긴 식민지 백성들은 굳건히 발붙이고 살 정착지가 없기 때문에 자연히 여기저기 떠도는 삶을 영위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현실은 소설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어 소설의 무대가 다변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1부에서는 평사리, 2부에서는 용정으로 거의 국한되어 있다시피 한 소설의 무대가 3,4부에 와서는 서울, 부산, 진주, 평사리, 그리고 국외로는 간도 일대와 일본까지 확대된다. 여기에 민족주의, 공산주의, 무정부주의 등 독립 운동의 여러 노선이 제시되며, 지식인들의 사상적 경향과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면밀한 분석도 시도된다. 이런 가운데 1,2부의 주역들은 하나둘씩 세상을 떠난다. 용이와 그의 아내 임이네는 병으로 죽고, 기생으로 전락한 끝에 이상현의 씨를 낳고 아편 중독자가 되고 만 기화(봉순)는 끝내 서희의 비호와 정석의 애끓는 연정을 뿌리치고 투신 자살한다. 동학 잔당이 세력을 규합하여 독립 운동을 벌이려던 김환은 고문 끝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용정 공노인의 부인과 조준구의 악착 같은 부인 홍씨도 세상을 뜬다. 이들의 죽음과 함께 “토지”에서는 이들의 후손들이 점차 주역의 자리를 차지한다. 서희의 두 아들 윤국과 환국, 용이의 아들 홍이, 조준구의 아들 꼽추 조병수 등이 소설의 전면으로 나온다. 이와 함께 3,4부에 오면 새로운 인물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대부분 인텔리 계층으로 작가는 이들을 통해 희망 없는 식민지 상황의 암울함을 드러낸다. 임역관의 딸 명빈과 명희를 비롯해 귀족층의 조용하, 급진적 사회주의 사상가 서의돈, 극작가 권오송, 성악가 홍성숙, 조선에 대해 동정적인 일본인 오가다 지로, 유인실, 강선혜, 황태수 등과 진주 쪽의 박효영, 허정윤 등이 그러하다.
일제의 식민지 지배가 극단적 양상으로 치닫는 1940년대를 배경으로 해방의 감격까지를 다루고 있는 5부는 “토지” 대단원의 장이다. 송관수의 죽음, 길상을 중심으로 한 독립 운동 단체의 해체, 길상의 관음탱화 완성, 오가다와 유인실의 해후, 태평양 전쟁의 발발, 예비 검속에 의한 길상의 구속, 양현 · 영광 · 윤국의 어긋난 사랑 등이 이어지면서 대하소설 “토지”는 거대한 마침표를 향하여 달려간다.
<토지>와 한국 근대사
1부의 시간적 배경은 1897년 8월 한가위에서부터 1908년 5월까지이다. 이 시기에 러일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귀결되어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고 전국 각지에서는 의병이 일어나게 된다. 이러한 역사적 격랑은 밑그림으로 “토지”는 최참판가의 몰락과 조준구의 재산 탈취 과정을 다룬다.
2부는 1911년 5월 간도 용정촌의 대화재로 시작되어 1917년 여름까지이다. 여기서는 지리산 동학 잔당의 모임을 제외하고는, 국내 정세나 사건보다 간도를 둘러싼 중국과 러시아의 정세가 중요한 배경을 이루고 있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의 결과가 중국에 미칠 영향이라든지, 1917년 러시아 혁명 전 케레스키 내각에 대한 독립 운동가들의 견해 등이 자주 소설의 전면에 등장한다. 이야기는 서희의 복수, 곧 최씨가의 귀환을 향해 집중되어 있다.
3부는 1919년 3.1운동 이후에서부터 1929년의 원산총파업, 광주학생사건 무렵까지가 시간적 배경이고, 소설 안에서는 사회주의 성향의 독서 단체인 계명회 사건이 1929년에 일어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복수 후 허무에 부딪친 최서희가 지어미의 삶을 살게 되고, 김환이 죽음에 이르면서 이야기의 중심은 송관수 등의 민중적 삶과 서울의 임명희를 둘러싼 지식인과 신여성들의 삶으로 이동한다.
4부는 1930년부터 1937년 중일전쟁과 1938년 남경학살에 이르는 시기가 그 배경이다. 무대는 서울, 동경, 만주에서 하동, 진주, 지리산까지 더욱 확대되고 이야기의 중심은 더욱 다원화된다. 길상의 출옥과 군자금 강탈 사건, 유인실과 오가다의 사랑이 그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5부는 1940년 8월부터 1945년 8월 15일의 해방까지가 그 배경이다. 역시 확대된 공간과 더욱 복잡해진 인물 속에서 해방의 날을 기다리는 민족의 삶들이 펼쳐진다. 양현과 영광의 사랑이 중요한 갈등을 이루면서 소설의 대단원을 향해 달려간다.
<토지> 제1부의 가계의 주요 인물 계보
■ 보기 × 부부 관계, ∞ 형제 또는 남매 관계, : 정인(情人) 불륜 관계 ■
(1) 최참판 댁 일가
조준구
조현갑 → × → 조병수
↓ 홍씨
최참판 → 최모 → 최모 → 최모 → 최치수
× × × × × → 최서희
모씨 모씨 모씨 윤씨부인 별당아씨
: ↘ :
김개주 김환(구천)
∞
우관 스님 → 김길상
(2) 최 참판 댁 노비
바우 할아범 박수동
×
간난 할매 삼월이
봉순네 → 봉순 삼수
김 서방 ┏ 남이 순이
× → ┃ ∞ 연이네
김 서방 댁 ┗ 개똥이 돌이
귀녀 복이 등
: → 강두메(두매)
강 포수
(3) 평사리 작인
월선네
× → 공월선 김영팔
공모 : ················ 정한조
∞ : : 강봉기
공 노인 이용 : 서금돌
× : → 이흥 막딸네
강청댁 : 야무네
: 윤보(목수)
칠성 ...............: 영산댁(주모)
×
임이네
김이평 ┏ 선이
× → ┣ 두만
두만네 ┗ 영만
핵심 정리
갈래 : 장편 대하소설, 가족사 소설(전 5부 16권)
배경 : 시간(1897년 한가위부터 1945년 8․15 광복까지). 공간(중국과 한국)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
주제 : 격동기 민족의 한과 강인한 생명력. 한국 근대사의 인물들이 겪는 식민지적 고통과 운명을 통한, 민족의 한과 의지.
'토지'의 상징성 : 삶의 터전으로서의 토지는 농경 사회에서 목숨과도 같은 것이다. 토지에 대한 믿음과 이에 대한 믿음을 깨뜨리는 외부 세계의 대립 속에서 각 인물들이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등장 인물
최서희 : 최씨 가문을 이어가는, 굳은 의지를 지닌 인물. 최치수와 별당아씨의 외동딸. 최씨 집안의 마지막 핏줄. 조준구에게 재산을 빼앗기고 용정으로 가서 부(富)를 이룩함. 공노인과 임역관의 중개로 빼앗긴 토지의 대부분을 회수, 길상과 헤어져 귀국을 감행, 진주에 자리잡음. 몰락한 조준구로부터 집문서를 넘겨 받아 가문의 재건과 복수를 마감한다. 양현이를 윤국과 짝을 맺어 며느리를 맞이하고자 하는 집착이 양현의 거부로 좌절되고 길상의 재수감, 윤국의 학병지원으로 또 다른 한의 그림자가 생긴다. 이런 고통은 그 동안 방어적이고 폐쇄적이던 서희의 가슴을 열어 놓는 계기가 되어 자기 주장이 강하고 기상이 센 성격의 여인상에서 정감 있는 어머니 상으로 변한다.
김길상 : 신분이 다른 서희와 결혼한 독립 운동가. 고아 출신으로 연곡사 우관 스님의 보호로 자라다가 최씨 집안으로 심부름꾼으로 들어가게 된다. 침모의 딸 봉순의 은근한 사모를 받지만 서희에 대한 동정과 연모의 정을 가진다. 서희의 몰락 과정에서 그녀를 끝까지 보호한다. 용정으로 함께 이주하여 서희가 부를 축적하는 데 크게 기여, 드디어 둘은 결혼한다. 서희의 귀국에 동행하지 않고 간도에 잔류, 독립 운동에 투신한다. 2년의 감옥 신세를 지고 진주에 은둔. 동학당 조직을 재건하려 하나 좌절, 원력(願力)을 모아 관음탱화를 완성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정리한다.
구천 : 최참판 댁의 머슴. 출생의 비밀로 인해 괴로움을 겪는 인물
최치수 : 최참판 댁의 당주. 병약하고 냉소적이며 신경질적인 인물
조준구 : 최치수의 이종형으로 최참판 댁의 재물을 탐내는 욕심 많은 인물.
상현 : 이동진의 아들로서 서희를 사랑하나 실패하여 방황하는 지식인.
이해와 감상
박경리의 “토지”는 모두 5부 16권으로 되어 있는 대하소설이다. 동학농민전쟁과 갑오개혁, 을미의병 등이 차례로 역사의 연표를 채우고 지나간 1897년 한가위에서부터 해방의 감격을 맞는 1945년 8.15까지 격동의 한국근대사가 “토지”의 시간적 배경을 이룬다. 여기에 경남 하동의 평사리를 비롯하여 지리산, 서울, 진주, 간도, 러시아, 일본에 걸치는 방대한 공간 위로 무수한 인간들의 드라마가 펼쳐진다. 완간까지 26년간의 집필 기간과 원고지 30.000매가 넘는 분량도 기록적이지만 “토지”는 진정 그 문학적 성과에서 한국 현대 문학사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럼 이야기의 처음으로 돌아가 본다.
동학농민전쟁이 실패로 돌아간 뒤, 조선의 식민지화는 걷잡을 수 없는 흐름을 타게 되었다. 러시아와 일본은 각기 아관파천과 명성황후 살해를 통해 조선의 식민지배를 꾀했다. 일본 낭인들의 국모 시해라는 전대미문의 치욕을 맛본 유생들은 단발령을 계기로 수하들과 농민군 잔여세력을 규합하여 전국적인 의병투쟁을 전개하지만,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을 뚫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는 가운데서도 농민군의 분발에 당황하고 일본의 이른바 내정개혁 강요에 몰린 정부는 갑오개혁을 단행한다. 왕권 제한, 조세의 금납화, 도량형 통일, 문벌 타파, 과거제 폐지, 노비법 폐지, 과부의 재혼 허용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갑오개혁은 농민전쟁에서 집약적으로 분출된 봉건체제의 내부모순을 누그러뜨리려는 시도였음에는 틀림이 없으나 그것이 일본의 조선 내 영향력을 강화시키는 쪽으로 작용했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이었다.
박경리(70)씨의 대하소설 “토지”는 농민전쟁과 갑오개혁, 을미의병 등이 차례로 근대사의 연표를 채우고 지나간 1897년 한가위로부터 문을 연다. 이후 일제의 본격적인 식민지배와 민중의 끈질긴 독립 투쟁, 그리고 2차 대전에 이은 해방까지의 긴박한 역사를 큰 호흡으로 훑어 내려갈 소설의 첫 장면은 뜻밖에도 평화롭고 풍요롭다.
“까치들이 울타리 안 감나무에 와서 아침 인사를 하기도 전에, 무색 옷에 댕기꼬리를 늘인 아이들은 송편을 입에 물고 마을길을 쏘다니며 기뻐서 날뛴다. …고개가 무거운 벼이삭이 황금빛 물결을 이루는 들판에서는, 마음 놓은 새떼들이 모여들어 풍성한 향연을 벌인다.”
그렇기로서니 수상한 세월 힘없는 나라에서 맞이하는 박복한 백성들의 명절이 어찌 평화와 풍요의 겉보기에만 그칠 것인가. 과연 작가는 곧 이어서 “팔월 한가위는 투명하고 삽삽한 한산 세모시 같은 비애는 아닐는지.”라며 시의 경지를 방불케 하는 문장을 내밀고 있다. 더구나 그 비애의 속내인즉, 산문적 사실성과 치열성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하고 많은 이별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흉년에 초근목피를 감당 못하고 죽어간 늙은 부모를, 돌림병에 약 한 첩을 써보지 못하고 죽인 자식을 거적에 말아서 묻은 동산을, 민란 때 관가에 끌려가서 원통하게 맞아죽은 남편을, 지금은 흙 속에서 잠이 들어버린 그 숱한 이웃들을, 바람은 서러운 추억의 현을 가만가만 흔들어 준다.”
“토지”는 만석꾼 대지주 최참판 댁의 마지막 당주인 최치수와 그의 고명딸 서희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토지의 상실과 회복을 둘러싼 대하 드라마를 전개한다. 치수의 어머니 윤씨 부인이 동학 접주 김개주에게 겁탈당해 낳은 자식 김환이 의붓형수인 별당아씨와 밤도망을 치는 사건은 장강처럼 흘러갈 소설의 초입에 물살 급한 여울목을 마련해 놓는다. 상피 붙은 남녀를 쫓는 긴박한 추격전이 벌어지는 한편에서는 치수의 고임을 받아 그의 만석지기 농토를 차지하고자 하는 하녀 귀녀의 음모, 치수가 비명횡사한 뒤 최참판 댁 재산과 토지를 노리는 그의 재종형 조준구의 행보, 마을 남정네 용이와 무당 딸 월선이의 비련 등 인간사의 오욕칠정이 쉬임없이 피었다 진다. 거기에 동학군 출신인 대목수 윤보, 의병에 가담하는 김훈장,
독립군으로 변신하는 길상과 그 아들, 조준구가 대표하는 상업영농과 서희의 곡물무역의 자리바꿈에서 볼 수 있는 경제의 단계적 발전 등 사회․역사적 변모가 포개진다.
<참고> “토지”의 두 인물
“토지”의 인물들은 그들이 처한 현실 속에서, 그들이 품은 지향과 목표에 입각해서, 그들이 어쩔 수 없이 당하게 되는 쓰라린 좌절을 통해, 그리고 애정과 믿음, 혹은 탐욕과 배신과 복수의 드라마를 통해 자신들의 삶을 일궈나가면서 이를 통해 일제하 현실의 전체상을 그려 낸다. 이들이 각기 몸담고 있는 현실의 여러 층위의 얽힘에 의해 <토지>는 이념에서 풍속에 이르기까지 삶의 전체를 망라해낸다. 그 무수한 인물들의 다양한 운명을 통해 개화기에서 해방에 이르기까지 한국인의 삶을 총체적으로 비추는 거대한 파노라마가 완성되는 것이다. 여기서는 그 파노라마의 중심에 서 있는 두 인물, 최서희와 김길상에 대하여 간략히 살펴본다.
최서희 - 최치수가 별당아씨의 소생이자 최씨 집안의 마지막 핏줄. 어린 나이에 육친을 잃고 고아가 된 후, 조준구에게 모든 재산을 빼앗기고 길상 등과 함께 용정으로 이주한다. 윤씨부인이 비밀리에 남긴 금괴를 처분한 돈을 밑천으로 하고, 용정 대화재와 전쟁을 계기로 막대한 부를 이룩한다. 대상인으로 용정에 자리를 잡아가면서도 몰락한 가문의 부흥과 귀향을 유일한 삶의 목표로 삼는다. 조준구에게 복수하고 고향으로 돌아갈 날을 준비하기 위해 이동진의 독립 운동 자금 요청을 거절하고, 일본인이 지은 절에 시주하기도 하는 등 일본과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다. 이상현과의 은밀한 사랑을 냉정히 정리하고 하인 출신의 길상과 결혼하여 환국, 윤국 두 아들을 낳는다. 공노인과 임역관의 중개로 빼앗긴 토지의 대부분을 회수한 뒤, 길상과 헤어져 귀국을 감행하고 진주에 자리잡는다. 몰락한 조준구에게서 집문서를 넘겨받음으로써 가문의 재건과 복수를 마무리한다. 양현이를 윤국과 짝을 맺어 며느리로 맞이하고자 하는 집착이 양현의 거부로 좌절되고 길상의 재수감과 윤국의 학병 지원으로 서희의 한(恨)에는 또 다른 그늘이 생긴다. 그러나 이러한 고통과 좌절은 그 동안 방어적이고 폐쇄적이던 서희의 가슴을 열어 놓는 계기가 되어 강한 성격의 여인상에서 부드럽고 정감 있는 어머니 상으로 변모하게 된다.
김길상 - 고아 출신으로 연곡사 우관 스님에게 거두어져 자라다가 최씨 집안의 심부름꾼으로 들어가게 된다. 침모의 딸 봉순의 은근한 사모를 받지만 서희에 대한 동정과 연모의 정으로, 최씨 집안의 몰락 과정 속에서 끝까지 서희를 지키고 보호한다. 서희와 함께 용정으로 이주해서 역할을 수행하며 서희와 결혼한다. 서희의 귀국에 동행하지 않고 간도에 남아 독립 운동에 투신하며, 이를 통해 신분적인 질곡에 대한 심리적 압박감을 견뎌내고 마음의 자유를 얻는다. 계명회 사건에 연루되어 피검, 서울에서 옥살이를 한다. 이 년의 옥살이 끝에 석방된 뒤 진주에 은둔한다. 그러면서 친일 자산가의 집을 습격하는 독립 운동 자금 강탈 사건을 배후에서 지휘하며 동학당 조직의 재건을 꾀하지만, 이 사건은 오히려 이후의 조직 활동에 족쇄로 작용하는 결과를 낳고 만다. 활동의 침체와 점점 더 각박해지는 정세 속에서 동학당 모임을 해체하기에 이른 길상은 원력(願力)을 모아 관음탱화를 완성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정리한다. 그러나 일제의 폭압은 예비 검속이라는 형식으로 길상을 다시 구금(拘禁), 길상은 기약 없는 영어(囹圄)의 삶과 마주한다.
08년 5월 5일 세상을 떠난 박경리 선생은 한국 문단의 큰 별이었다. 한국 문학은 그의 소설 『토지』로 한 정점을 이루었다. 1897년 경남 하동 평사리의 명절날 놀이 소리에서 시작해 1945년 광복의 만세소리로 끝나는 이 소설은 50여 년의 민족수난기를 생생하게 담은 웅대한 서사다. 작가는 역사책이 주목하지 않은 민초들의 역사를, 그 시대의 사회·경제적 변동의 역사와 함께 생생하게 살려냈다. 질곡의 현대사를 온몸으로 받아낸 여주인공 서희를 비롯한 700여 명의 인물은 소설뿐 아니라 TV 드라마 ‘토지’를 통해 국민 전체의 마음속에 살아 있다. 출판인이 뽑은 우리나라 대표 소설가, 네티즌이 선정한 ‘20세기를 빛낸 여성’인 선생만큼 국민들의 폭넓은 사랑을 받은 이는 없었다. 누구보다 이땅의 사람과 자연을 사랑했던 그는 자신이 사는 원주에 토지문화관을 지어 후배 문인들에게 창작 공간을 제공해 문단의 ‘어른’ 역할에도 충실했다. 서울 청계천을 문화와 생태가 숨쉬는 곳으로 되살려야 한다는 주장을 처음 제기한 것도 선생이었다. 선생의 치열한 창작혼, 생명과 땅에 대한 사랑은 이땅에 계속 이어질 것이다. 세상에 남긴 작품과 토지문화관을 통해, 국민들의 마음에 가득한 아쉬움과 그리움을 통해, 문학 사랑을 통해 평생을 바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