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쪽은 군위현(軍威縣)의 경계까지 70리, 남쪽은 인동현(仁同縣)의 경계까지 45리, 서쪽은 개령현(開寧縣)의 경계까지 17리, 북쪽은 상주(尙州)까지 39리, 동주(同州)까지 29리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5백 36리다. 【건치연혁】 본래 신라의 일선군(一善郡)인데, 진평왕(眞平王) 때에 승격하여 주(州)가 되고, 군주(軍主)를 두었다가 신문왕(神文王) 때 주를 폐지하고, 경덕왕(景德王) 때 숭선군(嵩善郡)으로 고쳤다. 고려 성종(成宗) 14년에 선주자사(善州刺史)로 개칭하고, 현종(顯宗) 9년에 상주(尙州)에 소속되었다가, 인종(仁宗) 21년에 일선현령(一善縣令)으로 고쳤으며, 뒤에 다시 지선주사(知善州事)로 승격했다. 본조[朝鮮] 태종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어 군으로 하였다가, 뒤에 규례에 따라 도호부로 승격시켰다. 【속현】 해평현(海平縣) 파징(波澄)이라고도 하며, 선산도호부의 동쪽 33리에 있다. 본래 신라의 병병현(竝幷縣)이었는데, 고려 초에 해평군으로 고치어 복주(福州)에 소속되고, 현종 때에는 상주(尙州)에 소속되었으며 인종 21년에 본부에 소속되었다. 그 남면(南面)은 공산(公山)에 연접한다. 【관원】 부사(府使)ㆍ교수 각 1인. 【군명】 일선(一善)ㆍ숭선(嵩善)ㆍ선주(善州)ㆍ화의(和義) 【성씨】본부(선산도호부) 김(金)ㆍ곽(郭)ㆍ문(文)ㆍ임(林)ㆍ심(沈)ㆍ진(秦)ㆍ백(白), 최(崔)ㆍ조(趙) 모두 내성(來姓)이다.해평(海平) 김(金)ㆍ윤(尹)ㆍ전(全)ㆍ길(吉)ㆍ손(孫), 유(柳) 사(賜)이다. 섭(葉) 내성(來姓)이다.비산(緋山) 김(金)ㆍ박(朴) 모두 속성(續姓)이다.도개(道開) 김(金) 속성(續姓)이다.가덕(加德) 진(秦) 속성(續姓)이다.고아(高牙) 곽(郭)ㆍ박(朴) 모두 속성(續姓)이다. 【풍속】 풍속이 문학을 숭상한다 관풍안(觀風案)에 있다. 백성들의 풍습이 순박하다 고득종(高得宗)의 시에 있다. 【형승】 한 도(道)의 큰 거리이다 권채(權採)의 기문에 있다. 땅이 사방 백리이다 이지명(李知命)의 시에, “땅은 사방 백리요 천년 고을인데, 이를 불러 삼한(三韓)의 일선성(一善城)이라 한다.” 하였다. 낙동강[洛江]이 띠를 이루고, 봉악(鳳岳)이 성이 된다 이인전(李仁全)의 시에, “낙동강은 아득히 남쪽에서 띠가 되고, 우뚝 솟은 한 봉악은 북녘에서 성이 되네.” 하였다. 【산천】 비봉산(飛鳳山) 선산도호부의 북쪽 10보(步)에 있는 진산이다. 복우산(伏牛山) 본부의 서쪽 25리에 있다. 금오산(金烏山) 고려 때에, 남숭산(南嵩山)으로 불리어 해주(海州)의 북숭산과 짝을 짓는다고 했다. 선산도호부의 남쪽 43리에 있는데, 서쪽은 개령(開寧), 동쪽은 인동(仁同), 북쪽은 본부와 경계를 이루었으며, 고려의 길재(吉再)가 이 산 밑에서 살았다. 연악산(淵岳山) 선산도호부의 서쪽 32리에 있는데, 이 산의 북쪽 지맥(支脈)은 곧 상주의 갑장산(甲長山)이다. 태조산(太祖山) 본부의 동쪽 13리에 있는데, 고려 태조가 백제를 칠 때에 여기에 머물렀으므로 그렇게 불리었다. 냉산(冷山) 선산도호부의 동쪽 15리에 있다. 죽현(竹峴) 선산도호부의 북쪽 28리 상주와 접경에 있다. 갈현(加乙峴) 선산도호부의 동쪽 25리에 있다. 여을현(余乙峴) 선산도호부의 동북쪽 24리에 있다. 옥산(玉山) 보천탄(寶泉灘)의 서쪽 기슭 감천(甘川)과 교류하는 곳에 있다. 대황당산(大皇堂山) 선산도호부의 남쪽 10리에 있다. 부래산(浮來山) 선산도호부의 남쪽 5리에 있다. 백마산(白馬山) 선산도호부의 동쪽 25리에 있다. 남산(藍山) 선산도호부의 동쪽 9리에 있으며, 산 밑에 양치는 목장이 있다. 동지숲[冬至藪] 감천(甘川) 북쪽 언덕에 있으며 길이가 10리다. 숲 가운데 작은 산이 있는데 동지(冬至)로 불린다. 여차니나루[餘次尼津] 곧 이매연(鯉埋淵)의 하류인데, 본부의 동쪽 11리에 있다. 감천(甘川) 지례현(知禮縣)에서 발원하여 금산(金山)과 개령(開寧)을 거쳐 선산도호부의 남쪽 4리를 지나서 동남쪽으로 보천탄(寶泉灘)으로 들어간다. 보천탄(寶泉灘) 본부의 동남쪽 21리에 있다. 곧 여차니나루의 하류인데, 남쪽으로 흘러 인동현의 경계로 들어가 칠나루[漆津]가 된다. 이매연(鯉埋淵) 선산도호부의 동쪽 12리에 있으며, 곧 견탄(犬灘)의 하류다. 동쪽 기슭에 기이한 바위가 있고, 바위 밑에 용의 굴이 있는데, 날이 가물 때에 우선 냉산(冷山) 꼭대기에서 불을 피우고 하늘에 제사하고 이어 범의 머리를 여기에 잠그거나 용에게 빌면서 제사를 지내면 곧 감응이 있다고 한다. 노자석(鸕鶿石) 원흥사(元興寺) 앞 물 가운데, 선산도호부에서 북쪽 18리에 있다. ○ 이규보(李奎報)의 시에, “가벼운 배 출렁출렁 잔 물결 따라 내려가고, 물 가운데 기이한 돌이 있으니 그 이름 노자석. 나는 생각하노니, 가마우지[鸕鶿]가 고기와 게를 찾아 떠들면서 깊은 물가에 모였다가 뒤쳐날 제, 풍이(馮夷 물의 신)의 집을 잘못 건드려서 풍이가 성을 내어 소리치면, 우레와 번개가 일어나서 바람에 부딪고 물결에 맞아 두 날개 꺾이어 나니, 반쯤 물결 사이에 나왔으나 날지는 못하지. 살은 찢어지고 뼛속은 말라 동쪽으로 흐르는 물 따라가고, 여윈 뼈만 중주(中洲)에 공연히 머물러서, 이끼 끼고 모래가 엉기어 굳은 돌로 되었지, 꼬리는 진흙 속에 도사리고 머리만 반쯤 떠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않다면 어찌 연기 낀 물결 속에서 기세가 죽지 않고 머리 들고 일어나겠는가. 기이함을 구하거나 이상함을 따지는 것도 모두 꿈일 뿐이요, 캐고 파서 시를 짓는 것 한낱 장난이니, 술을 사다 금항아리 채워놓고, 너를 빌려 구기 삼아 앵무배에 부어서, 날마다 마시며 내 시름 씻으리. 한바탕 웃으니 만사가 떠도는 티끌 같구나.” 하였다. 견탄(犬灘) 본부의 북쪽 34리이니 삼국 낙동강의 하류다. ○ 이규보의 시에, “개인 새벽 용포(龍浦)에 배를 저어, 황혼(黃昏)에 견탄에 머무르니, 간사한 구름은 떨어지는 해를 속이고, 사나운 돌은 미친 물결 막는다. 수국(水國)에는 가을이 먼저 쌀쌀하고, 배 위의 정자(亭子)는 밤이 새삼 차구나. 강산이 참으로 그림보다 나으니, 병풍에 그림으로 만들어 보지 말자.” 하였다. 울주천(蔚州川) 도호부의 남쪽 28리에 있다. 금오산(金烏山)에서 나와서 동쪽으로 흘러 낙동강으로 들어간다. 의수지(衣繡池) 도호부의 성 남문 밖에 있다. 호지(狐池) 도호부의 남쪽 24리에 있는데, 둘레가 3천 6백 79척이다. 고도택(高道澤) 도호부의 동쪽 7리에 있다. 【토산】 잣[海松子]ㆍ밤[栗] 동지 숲에서 난다. 왕골ㆍ옻[漆]ㆍ감ㆍ붕어[鯽魚]ㆍ잉어[鯉魚]ㆍ산무애뱀[白花蛇]ㆍ백복령(白茯苓). 【성곽】 읍성(邑城) 흙으로 쌓았다. 고려 말에 지군(知郡) 이득진(李得辰)이 쌓았는데, 둘레가 2천 7백 40척이요, 안에 9개의 샘과 3개의 못이 있었으나 없어진 지 이미 오래고, 지금은 다만 남문과 서문의 두 문이 남아 있을 뿐이다. 【봉수】 석현(石峴)봉수 해평현 남쪽 10리에 있다. 남쪽은 인동현의 건대산(件代山)에 응하고, 북쪽은 남산(藍山)에 응한다. 남산 봉수 서쪽은 개령현의 감문산(甘文山)에 응하고, 남쪽은 석현에 응한다. 【궁실】 북관(北館) 『신증』 홍귀달(洪貴達)의 기문에, “대개 산이 높고 험하며 물이 깊고 넓으면 그 사이에 있는 고을에는 반드시 훌륭한 누대(樓臺)와 널따란 관우(館宇)가 있어야 어울리는 것이며, 땅이 광대하며 사람과 물화(物貨)가 번화하면, 그 고을에 관리된 사람에게는 반드시 민중을 기르는 아량과 백성을 너그러이 용납하는 어짊이 있어야 알맞다고 할 것이다. 내가 전에 낙동강에 배를 띄우고 흐름을 따라 내려가, 이른바 일선(一善)의 뛰어난 경치를 보았다. 물에는 여차니나루[餘次尼津]가 있는데, 곧 이매연(鯉埋淵)의 하류다. 거기에 월파정(月波亭)이 있는데, 양촌(陽村) 선생이 그 기문을 지어서, 그 글씨가 지금까지도 벽에 남아 있다. 산에는 금오산(金烏山)이 있으니, 고려의 절개있는 선비 길재(吉再)가 산 곳이요, 또한 태조산은 고려가 후백제를 칠 때에 주필(駐蹕 제왕의 수레 멈추는 것)한 곳이다. 어찌 평범한 산수가 그저 높고 깊기만 한 것에 비길 수 있겠는가. 마땅히 넓고 웅장하며, 크고 아름다운 건물이 있어 사방의 손님을 받아들이어, 노래와 춤추는 자를 모아놓고 문물을 간직한 뒤에라야, 산수의 훌륭한 구경거리를 저버리지 않았다 할 것이다. 본부에 남관과 북관이 있는데 북관은 좁고 누추하다. 오직 남관이 넓고 시원하므로 그 고장에 가는 이는 모두 남관에 들려 하고 북관에는 가지 않는다. 혹 사신들이 겹쳐서 한꺼번에 왔을 때, 지위가 같고 높은 것이 같다면 접대하기에 참으로 힘든다. 하물며, 바다를 건너온 사신이 끊임없는데 여기가 그 오고가는 요충임에랴. 어찌 새로 짓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일찍이 이를 개탄하지 않을 수 없던 터에, 홍치(弘治) 5년에 송(宋)공이 부사가 되었는데, 군자(君子)가 말하기를, ‘이야말로 적임이다. 공의 어짊은 그 백성들에게 혜택을 내림에 족할 것이요, 그 도량은 민중을 용납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이만하면 이 고을의 어른이 되어 무슨 일인들 해내지 못할 것인가.’ 하였는데, 과연 다스린 지 3년에 정치는 잘 되어 사람들은 화목하고, 병폐는 개혁되고 이(利)는 일어나, 관청에서 일하려고 하지 않아도 백성들에게는 남은 힘이 있게 되었으므로 이에 여러 향(鄕)의 부로(父老) 및 아전들에게 묻기를, ‘북관을 새로 짓는 것이 어떠할까.’ 하니, 모두 ‘좋습니다. 이것은 온 고을사람의 마음입니다.’ 하였다. 이에 그 옛터를 넓히고 그 규모를 늘이고 새롭게 하며, 무릇 집짓는 구조와 위치 등을 모두 마음속에서 계획하여, 재목을 모으고 기와를 굽는 일에 모두 노는 사람들을 썼으며, 술과 음식은 관청의 비용으로 대었으므로 백성에게서 거두어들이지 않고, 백성을 괴롭히지 않고서 한 달이 못 되어 준공하였다. 모두 약간의 방이 있는데, 단청도 이미 끝났으므로 공이 글월을 서울로 보내어 나에게 말하기를, ‘일이 있으면 해[年]를 기록하는 것은 오래된 일이니, 원컨대 공의 붓을 얻어 연월을 기록하고자 합니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일선(一善)은 본래 신라의 군이었는데, 주로 승격되었다가 다시 군으로 되고, 또 다시 현으로 강등되는 등 무릇 4ㆍ5차례 바뀌었는데, 본조에 들어와서 태종 공정대왕(恭定大王)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었다. 그 동안에 연대가 얼마쯤인지, 전후에 온 고을을 맡아 인(印)을 쥐었던 자가 몇 사람이나 되는지는 알 수 없으나, 가장 크게 일으킨 업적은 반드시 공에게 있지, 다른 사람에게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물건의 잘되고[修] 못되는 것[廢]은 운수인가, 아니면 반드시 사람을 기다려야 하는 것인가. 내가 공이 상주 목사로 있을 때 덕이 높은 정치를 한 것을 알고 있다. 상주와 선주는 이웃고을이다. 선주 사람들은 공의 은택을 입고 있는 상주 백성들을 익히 보았는지라 오늘이 있기를 기다린 지 오래다. 아마도 그 사람을 기다려야 되는 모양이다. 남의 장점을 즐겨 말하여 없어지지 않게 하려는 것이 나의 뜻이다. 그래서 이를 기록한다. 송후의 이름은 요년(遙年)이요, 은진(恩津)사람이다.” 하였다. 남관(南館) 권채(權採) 광선헌(廣善軒)의 기문에, “경상도는 영남의 큰 도인데 선산은 경계 위에 있어 실로 한 도의 큰 길거리[道]이다. 황화를 받든 수레와 일산의 사신이 연락부절하여, 가끔 같은 날 함께 와서 머물게 되어 늘 손님이 묵을 방이 모자라니, 손님 대접할 방이 다른 고을에 비하여 더욱 많아야 할 것이다. 전에 별관이 있었으나 좁고 누추하고 세월이 오래됨에 따라 낡았으나, 군수된 사람들이 머뭇거리어 수리를 하지 못하였으므로 고을 사람들이 한탄했었다. 무신년에 부사 이길배(李吉培) 공이 비로소 정사에 임하자 백성을 다스림에 부지런하고, 송사를 듣고 판단을 내림에 과감하였으므로 1년이 못 되어 온갖 폐단이 한꺼번에 새로워졌다. 학문과 덕행이 훌륭한 마을 노인들, 전 부사인 김치(金峙) 공과 전 현감 신희충(申希忠) 군이, 고을 사람들을 거느리고 문서를 부(府)와 감사에게 올려 폐사(廢寺)의 재목과 기와로 새로 짓기를 청원하였고, 감사 홍여방(洪汝方) 공이 임금께 아뢰어 그 허락을 받았다. 그리하여 놀고 있는 사람들을 모으고 남아도는 재물을 이용하여, 백성들을 징발하지도 그들의 시간을 빼앗지도 않고서, 기유년 10월에 역사를 시작하여 경술년 2월에 준공하였는데, 지어놓은 건물이나 방들이 크고 넓고 짜임새가 있다. 그 동헌(東軒) 마루에 다락을 지었는데 시원스럽게 높고 맑게 터졌으며, 회랑(回廊)으로 연결하고 높은 담으로 둘렀다. 안으로 부엌과 바깥으로 외양간 등 갖추지 않은 것이 없다. 지금의 감사 심도원(沈道源) 공이 돈과 물자를 넉넉히 대어 모자라는 것을 보충하였으므로 단청까지도 모두 다 할 수 있었다. 아울러 버드나무 제방과 대숲, 국화 화단과 연못까지 좌우에 마련되어 그윽한 흥취를 한껏 돋구었으니 손님을 즐겁게 할 좋은 장소가 되었다. 대개, 관우(館宇)를 갖추고 수선하여 왕명을 받드는 것은 충이요, 때에 맞추어 역사를 거행하되 백성을 괴롭히지 않는 것은 슬기요, 사람들이 힘써서 일하기를 즐기는 것은 인(仁)이다. 집에 자도록 공을 쌓은 것[委積]은 《주례(周禮)》에 기록되어 있고, 궁실을 반반하게 흙질하는 것은 좌씨(左氏)에 쓰여 있다. 이번에 이공이 급히 서둘러 한꺼번에 몇 가지의 선(善)을 해낸 것이니, 어찌 다만 한 고을이 임금을 도운 것에 그치랴. 혜택을 백성들이 입게 된 것이다. 공조 참의 박서생(朴瑞生) 선생은 대대로 이 고장에 살아 온 분으로 전말을 자세히 이야기하고 누각의 이름을 청하였다. 내가 거듭 선생의 명을 사양하다가 부득이하여, 고을 이름으로 뜻을 부연해서 이름을 ‘광선(廣善)’이라 하여, 이공의 치적을 표하고 그 사실을 적어 기문으로 삼는다.” 하였다. 【누정】 청형루(淸逈樓) 북관 남쪽에 있다. 월파정(月波亭) 여차니(餘次尼)나루 동쪽 기슭에 있다. ○ 권근(權近)의 기문에, “선주(善州)의 동쪽 5리쯤 되는 곳에 여차(餘次)란 나루가 있다는데, 상산(商山 상주의 옛 이름)으로부터 낙동강 물이 남쪽으로 흐르는 곳이다. 상주를 거쳐 남쪽 고을로 가는 길손들도 여기에서 길이 갈라지는 요충지이다. 나루 동쪽 언덕에 작은 산이 있는데, 옛날 전의(全義) 사람 이문정(李文挺) 군이 이 고을 원으로 있을 때에 정자를 짓고 ‘월파(月波)’라 이름했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허물어졌다. 건문(建文) 원년 기묘년 봄에 지금의 국구(國舅 왕비의 아버지) 여흥백(驪興伯) 민공(閔公)이 사신으로 이곳을 지나다가 보고 허물어진 지 오래되었는데 새로 짓는 이가 없음을 아깝게 여겼다. 대령(大寧) 최관(崔關)이 마침 이 고을 원이 되었으므로 민공이 새로 지을 것을 명하였다. 최군은 기꺼이 명을 따랐다. 부임한 지 수개월 만에 정사는 잘 다스려지고 사람들은 화목하였다. 그는 땅을 골라 옛터 북쪽 벼랑 석벽 위에 자리를 정하였다. 높다랗고 시원하며 기이하고 빼어나 그 경치가 더욱 좋았다. 백성들을 괴롭히지 않으려고 중들을 모집했다. 공사는 8월에 시작하여 10월에 끝났다. 도목수는 한성궁(漢城宮)을 지은 도편수였다. 그러므로 그 제도가 매우 교묘하고 아름다웠다. 또 따뜻한 방을 만들어 길손의 숙소도 되게 하였다. 3년이 지난 가을에 최군은 사수감(司水監)으로 조정에 소환되었다. 여흥공(驪興公)은 또 어태(御胎)를 모시고 성산(星山)으로 가서 봉안(封安)하고 다시 이곳을 지나는 길에, 나에게서 기문을 받아 가지고 돌아가서 붙이려고 하였다. 내가 최군에게 그 사적을 물으니 그의 말은 이러했다. ‘정자의 아래위에는 어린 소나무들이 우거지고, 돌벼랑은 깎은 듯하며, 그 앞에 긴 강이 허리띠처럼 흘러가고, 그 밖에 큰 들이 둘려있다. 마을 집들이 땅에 가득하고, 연기와 불을 서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은 선주의 고을이요, 밭갈이 하고 짐승 치고, 고기잡고, 나무하는 노래 소리가 서로 화답하며, 구부리어 손잡고 들로 오가는 것은 선주의 백성들이다. 서쪽과 남쪽은 크게 트이어 내와 뭍이 아득히 벌려 있고, 구름과 연기는 변화무쌍하여 기상(氣象)이 천태만상이다. 강물은 맑고 달빛은 밝아 그림자가 서로 비치면 고요하기가 옥을 잠근 듯하고, 움직이면 금빛이 뛰노는 듯, 가로지르면 흰 깁 같고, 솟아오르면 누운 탑 같다. 모이고 쌓이고 밝고 명랑하여 밝은 하늘과 물이 한 빛이 되니, 이것이 월파(月波)의 이름을 얻게 된 까닭이며, 더욱이 이 정자의 한 기관(奇觀)이다. 북쪽을 바라보면 울울창창한 산이 있으니, 이것은 옛날 왕씨의 태조가 신라를 칠 때에 머물렀던 곳이다. 큰 바람 장한 기운은 지금도 늠름하여 높은 산 흐르는 물과 더불어 다함이 없다. 이 정자에 오르는 이 또한 원대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에 저 여흥공이 임금님의 장인으로서, 존경과 총애를 받는 정승의 귀한 몸으로, 두 번 여기에 와서 이 정자에 올라 보고 고상한 정취로 읊조렸으니, 이 정자의 영광이 그 어떠하겠는가!’ 내가 이 말을 듣고 써서 기문으로 삼는다.” 하였다. ○ 전대유(田大有)의 시에, “돌 머리의 소나무가 늙어서 세월[秋]을 모르는데, 북[梭]같이 오가는 것은 나룻배로구나. 은을 녹인 듯한 천 이랑[千頃] 달빛을 사랑하여, 황혼에 돌아가려다 다시금 강가로 가노라.” 하였다. ○ 김복항(金復恒)의 시에, “산천의 좋은 경개 몇천 년이런가. 바윗가엔 사람 없고 작은 배만 놓여 있네. 기둥에 의지하여 한가로이 읊조리니 번뇌가 사라지고, 싸늘한 달 강물에 솟구침을 앉아서 보고 있다.” 하였다. ○ 강회백(姜淮伯)의 시에, “필마(匹馬)로 찾아온 천지 또 한 번 가을인데, 난간에 의지하여 돌아오는 배를 다시 바라보노라. 평생에 이룩한 일 거울 속의 흰머리를 자주 보는 일. 강물은 밤낮으로 조용히 흐르네.” 하였다. 『신증』 양소루(養素樓) 북관 북쪽에 있다. ○ 조위(曺偉)의 기문에, “시진(市津 은진(恩津))의 송요년(宋遙年) 공이 선주를 다스리기 4년에, 정치는 잘 되고 시절은 풍년이라 공사(公私)간에 모두 넉넉해졌다. 이리하여 구관을 철거하고 새로 지었으며, 또 동북쪽 모퉁이에 터를 닦아 누 네 칸을 지어 사신들의 쉬는 곳으로 삼았다. 벽 바름이나 단청이 곱지만 사치하지 않고, 질박하지만 투박하지 아니하다. 낙성하자 나에게 이름짓기를 청하여 왔으므로 내가 회답하기를, ‘무릇 누대라는 것은 사신을 위하여 짓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공사가 산천의 경치만을 위하는 것은 군자가 취할 바가 아니다. 영남의 누대 중에서 가장 이름있는 것으로, 진주(晉州)ㆍ밀양(密陽)ㆍ울산(蔚山)ㆍ영천(永川)에 있는 것들은 기이하기 그지없고, 널따랗고 훤히 트인 곳은 한둘로 셀 수 없으며, 그 외에 이름있는 정자와 화려한 관우(館宇)는 이루 다 말할 수 없어서, 동서로부터 모여드는 손님들은 모두 너무 많이 보아서 보기에 지쳤으니 누가 여기에 눈길을 주겠는가. 그러나, 빈 들[野]을 달리는 짐승도 곤하면 푸짐한 풀을 생각하고, 공중을 나는 새도 지치면 깊은 수풀로 들어가나니, 움직이면 정지하고 싶은 것은 만물의 본성이다. 누(樓)가 객관 가까운 곳에 있어 매우 맑고 그윽하며 조용하고 한산한 운치가 있다. 쇠를 녹일 듯이 뜨거운 날 좀도둑[雀鼠] 처결에 골몰한 나머지 정신이 혼미하고 기운이 지쳤을 제, 옷깃을 열고 이 누대에 한번 오르면 정신을 달래고 충소(沖素 안정된 마음)를 길러, 삽시간에 정신이 깨끗하여져서 마음과 바깥 경계 두 가지를 모두 잊게 되니, 스스로 무궁무진한 지극한 맛이 있을 것이다. 어찌 다만 답답한 마음을 풀어 줄 뿐이겠는가. 심정을 안정시키고 마음을 편안한 경지로 인도해서, 온갖 변화에 대응하고 모든 곡절에 널리 응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기를 기약하지 않아도 저절로 그렇게 될 것이다. 비록 뛰어나게 기이한 풍경은 없다 하더라도, 누대가 있다는 것은 정치에 큰 도움이 되는 것이다. 진실로 소용되기에 절실하지 아니하면 비록 제운(齊雲)ㆍ낙성(落星)과 정간(井幹)ㆍ여초(麗譙)일지라도, 다만 높이 올라서 먼 데를 바라보기만 하는 데 그친다면 사람에게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청하건대 이름을 양소(養素)라 하라. 훗날 이 누에 오르는 자가 과연 위에서 말한 바와 같다면, 공의 사신[王人]을 대접하는 뜻이 그 어찌 얕다 하겠는가. 그러니, 내가 지은 이름이 들어맞지 않겠는가.’ 하니 공이 말하기를, ‘소(素) 자의 뜻을 좀더 자세하게 들을 수 있겠는가.’ 하기에 ‘소(素)는 질(質)이요, 검(儉)이다. 문(文)과 질(質)은 한쪽도 버릴 수 없다. 질이 아니면 문을 베풀 곳이 없으므로, 공자는 그림을 그리는 일은 흰 것[素]보다 뒤라고 자하(子夏)의 물음에 대답하였으니 검(儉)은 덕의 기본이다. 요(堯)의 띠지붕[茅茨]과 흙계단이며, 우(禹)의 낮은 궁전과 초라한 옷도 그것일 뿐이니, 군자의 학문은 질을 높이 여기면서 근본을 도탑게 하고, 검소하면서 실질적이기를 힘써, 일에 이것을 베풀고 정치에 이것을 통달케 하며, 이렇게 함에 지나치지 않으면 그만이다. 이렇게 하여 양소(養素)의 공을 다하면 성현의 경지에 거의 가까워질 것이니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니, 공이 말하기를, ‘좋다.’ 하였다.” 했다. 【학교】 향교 부(府)의 북쪽 2리에 있다. ○ 어변갑(魚變甲)의 남루시(南樓詩)에, “패왕의 천 년 발자취는 이미 묶었지만, 공부자(孔夫子)께서 남긴 빛은 오랠수록 새롭도다. 주(周)를 일으키겠다는 뜻 헛되었음을 탄식하셨지만, 지금의 행사를 왕춘(王春)에 보는구나.” 하였다. 해평현 향교 현의 북쪽 1리에 있다. ○ 정인지(鄭麟趾)의 기문에, “옛날, 집에는 글방[塾]이 있고 마을에는 학교[庠]가 있어, 가르치지 않는 곳이 없었으며 배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망해가는 시대에는 학교(學校 국학과 향교)에 관한 행정이 쇠퇴하고, 상서(庠序 초급학교)의 제도가 무너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 조정의 문치(文治)가 빛나고 성하여 주(州)와 부(府), 군(郡)과 현(縣)에 학교 없는 곳이 없다. 해평은 선산에 딸린 현이므로 규례에 따라 향교를 설치하지 아니하였는데, 부에 있는 학교까지는 큰 내를 건너 20리나 되므로 학도들이 다니기에 고통스러웠다. 지금의 부사 이길배(李吉培)공이 정치에 임한 지 1년에, 폐단은 없어지고 이로운 일이 일어났으며, 온갖 제도는 일신되었다. 부의 관우(館宇)와 누대와 못을 다스리되, 부역을 백성에 맡기지도 않고, 재목을 산에서 베지도 않았으므로 부의 백성들이 이상히 여기었다. 어느날, 또 향선생(鄕先生) 장빈(張贇) 등 1백여 명이 부사를 찾아보고 폐사(廢寺)의 재목과 기와로 현에 향교를 지을 것을 청하였고, 부사는 기꺼이 곧 감사 이승직(李繩直) 공에게 보고하여 마침내 임금께 아뢰어 하락을 얻었다. 통첩이 마을에 내리자 부로들이 모두 기뻐하여 집집마다 일꾼을 내어, 얼마 안 되는 인원이 공사에 나아가 몇 달이 안 되어 준공되었다. 그 규모는 성전(聖殿)이 3칸인데 석전(釋奠)을 지내는 곳이요, 동서(東序)가 3칸인데 강청(講廳)이요, 서서(西序)가 3칸인데 겨울에 따뜻하게 지내는 방이다. 남루(南樓)가 5칸인데 여름에 서늘하게 지내는 곳이요, 부엌ㆍ광 등 갖추지 않은 것이 없으며, 둘레에는 담을 둘렀다. 또 이듬해에 위에 다시 보고하여 허락을 받아 그 남쪽 둑 아래에 못을 팠는데, 관개(灌漑)의 이익이 백성들에게 미치는 바가 또한 적지 않다. 전 교도(敎導) 김영발(金英發), 생원 길구(吉久)로 하여금 학장이 되게 하고, 학도 40여 명이 머물면서 수업을 받았는데, 시서(詩書)의 가르침이 크게 일게 되었다. 옛날에 문옹(文翁)의 다스림이 촉군(蜀郡)을 역사에 빛내었다. 인륜(人倫)을 두텁게 하고 풍속을 아름답게 하는 길이 학교를 버리고 어디서 구할 것인가. 부의 백성들이 그것을 청하고, 원이 그것을 이룩하였으니, 촉군과 함께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라 하겠다. 공조 참의 박서생(朴瑞生) 군의 고향이어서 그가 자세히 이야기해 주었으므로 그것을 적어 기문으로 삼는다.” 하였다. 【역원】 구며역(仇㫆驛) 부의 동쪽 1리에 있다. 안곡역(安谷驛) 부의 서쪽 35리에 있다. 영향역(迎香驛) 부의 동쪽 21리에 있다. 상림역(上林驛) 해평현에 있으며, 부와의 거리는 54리다. 죽현원(竹峴院) 죽현 밑에 있다. 전마원(箭磨院) 부의 북쪽 15리에 있다. 안곡원(安谷院) 안곡역 곁에 있다. 다정원(茶亭院) 부의 서쪽 13리에 있다. 소법곡원(所法谷院) 부의 서쪽 8리에 있다. 오을고개원(吾乙古介院) 부의 남쪽 8리에 있다. 관풍원(觀風院) 부의 남쪽 28리에 있다. 관심원(觀心院) 부의 남쪽 10리에 있다. 남상원(南上院) 부의 남쪽 19리에 있다. 미라원(彌羅院) 여차니나루 동쪽에 있다. 초적원(草積院) 부의 북쪽 32리에 있다. 동원(東院) 부의 동쪽 2리에 있다. 상림원(上林院) 상림역 곁에 있다. 병비원(竝飛院)ㆍ유원(柳院)ㆍ허충원(許忠院)ㆍ삼한원(三韓院) 모두 해평원에 있다. 속리원(俗離院) 부의 남쪽 42리에 있다. 【불우】 도리사(桃李寺) 냉산(冷山)에 있다. ○ 신라의 중 아도(阿道)가 있던 곳이다. 신라에는 불교가 없었는데, 눌지왕(訥祗王) 때에 묵호자(墨胡子)라는 중이 고구려로부터 와서, 이 부의 도개부곡(道開部曲) 모례(毛禮)의 집에 머물렀는데, 모례가 움집을 만들어 거처하게 하였다. 그가 물러간 뒤에 아도(阿道)라는 이가 시종(侍從)과 더불어 3명이 또한 모례의 집에 왔다. 그 모습이 묵호자와 비슷하였으며, 수년 동안 살았는데, 그 동안에는 질병이 없었다. 나중에 시종이 머물러 있으면서 경률(經律)을 강술하였는데 더러 믿는 사람이 있었다. 이것이 신라 불교의 시초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아도가 신라 서울로 갔다가 돌아와 이 산 밑에 와서 보니, 때는 겨울인데 산허리에 복숭아꽃ㆍ오얏꽃이 만발해 있으므로 드디어 절을 세우고 도리사라고 불렀다고 한다. 대혈사(大穴寺) 금오산 북쪽에 있다. ○ 고려 길재(吉再)의 시에, “푸른 대는 봄이나 가을이나 절의(節義)가 굳고, 시냇물은 밤낮으로 흐르면서 욕심을 씻는다. 마음 자리 밝고 맑아 때묻지 않으니, 이로부터 도(道)의 맛이 달다는 것을 깊이 알리라.” 하였다. 도선굴(道詵窟) 금오산 북쪽에 있는 바위 굴이다. 넓이가 16자, 깊이가 24자, 높이가 15자인데 방 두 칸을 지었다. ○ 송을개(宋乙開)의 시에, “나무가 고목이니 산 모습이 늙어보이고, 구름이 돌아가니 동굴이 깊어 보이네. 난간에 의지하니 한없는 생각 있지만, 그것은 결코 명리심(名利心)은 아니라네.” 하였다. 주륵사(朱勒寺) 냉산 서쪽에 있다. 고려 안진(安震)이 지은 중 혜각(慧覺)의 비명(碑銘)이 있다. 수다사(水多寺) 연악산(淵嶽山)에 있다. 득익사(得益寺) 복우산(伏牛山)에 있다. 고려 때에 역대 실록을 합천 해인사(海印寺)에 간직하였던 것을, 왜구(倭寇)가 미치자 이 절에 옮겼다가 뒤에 충주의 개천사(開天寺)로 옮기었다. 접성사(接聖寺) 대황당산(大皇堂山) 남쪽에 있다. 미봉사(彌峯寺) 비봉산(飛鳳山) 동쪽에 있다. 금당암(金堂菴) 도리사 북쪽에 있다. 용수암(龍水菴)ㆍ정지암(井池菴) 모두 도리사 남쪽에 있다. 문수사(文殊寺) 해평현 동쪽에 있다. 석천사(石泉寺) 부의 남쪽 10리에 있다. 죽림사(竹林寺)ㆍ죽장사(竹杖寺) 모두 비봉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부의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부의 서쪽 3리에 있다. 길재사(吉再祠) 금오산 아래 구며리(仇㫆里)에 있다. 부(府)에서 20리 거리인데, 관찰사 남재(南在)가 세운 것이다. 여단(厲壇) 부의 북쪽에 있다. 【고적】 옛일선[古一善] 냉산 서쪽, 여차니나루 동쪽 1리에 있다. 어성정(御城亭) 태조산 북쪽 5리쯤 되는 작은 산 위에 있는데, 고려 태조가 머물렀던 곳이다. 보루(堡壘)의 터가 아직 있는데, 혼자 서 있는 나무의 왕성한 기운이 바라보면 마치 수레 위의 일산 같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어성정이라고 부른다. 금오산성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7천 6백 44자, 높이가 7자이며, 절벽을 따라서 성이 된 것이 거의 절반이나 되는데 매우 높고 험하다. 안에 못이 셋, 시내가 하나 있다. 고려 말에 선산부와 인동(仁洞)ㆍ개령(開寧)ㆍ성주(星州)의 백성들이 왜구를 피하여 여기에 들어와 산 사람이 매우 많았는데, 군사를 징발[簽兵]해서 지키었다. 조선 초에도 군사 창고가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제성단(祭星壇) 부의 서쪽 5리, 죽장사 옆에 있다. 고려 때에 남극노인성(南極老人星)이 여기에서 보였으므로 매년 봄ㆍ가을 중기일(中氣日 춘분과 추분날)에 향을 하사하여 제사지냈는데, 본조에 와서 폐지되었다. 그때 제사하던 돌단[石壇]이 지금 남아 있다. ○ 정이오(鄭以吾)의 시에, “관아에서 나와 한가롭게 성서(城西)로 나오니, 중은 여위고 절은 낡고 길은 울퉁불퉁. 제성단(祭星壇) 언저리에 아직 봄바람이 이른데, 붉은 살구꽃은 반만 피어 있고 산새는 지저귄다.” 하였다. 원흥사(元興寺) 옛터가 가덕부곡(加德部曲)에 있다. ○ 이규보(李奎報)의 시에, “만리나 높은 하늘 기러기 소리도 끊어진 가을, 한가로이 옛 절을 푸른 물가로 찾아가네. 문 밖에는 시끌벅적 많은 배들이 모였는데, 적막한 바위 벼루엔 승방이 조용하다. 가득한 솔과 대는 중들의 부귀(富貴)요, 강에 가득한 연월(煙月)은 이 절의 풍류로다. 수풀 아래에서 무엇을 보았느냐 말하지 말라. 뜬 이름 던져 버리고 물러와 쉬고싶네.” 하였다. 견도폐역(牽途廢驛) 해평현 동쪽 10리에 있었는데 지금은 선산부의 안곡역(安谷驛)에 합하였다. 비산부곡(緋山部曲) 부의 남쪽 30리에 있다. 가덕부곡(加德部曲) 부의 북쪽 20리에 있다. 위에 적은 두 부곡에는 지금도 토족(土族 원주민)이 있다. 칠창부곡(漆倉部曲) 부의 동쪽 15리에 있다. 예능부곡(藝能部曲) 부의 남쪽 15리에 있다. 도개부곡(道開部曲) 부의 동쪽 20리에 있다. 보며부곡(寶㫆部曲) 부의 남쪽 25리에 있다. 고아부곡(高牙部曲) 부의 남쪽 15리에 있다. 웅곡부곡(熊谷部曲)ㆍ안곡부곡(安谷部曲)ㆍ질곡부곡(秩谷部曲) 모두 해평현에 있다. 【명환】신라 일부(日夫) 진평왕 36년에 군주(軍主)가 되었다.【고려】 이득진(李得辰) 홍무(洪武) 계해년 5월에 왜구가 고을 경내에 침입하여 고을의 관청 건물을 불사르자, 득진이 관심평(觀心坪)을 보전하고 있다가 왜구가 물러간 뒤에 읍성(邑城)을 쌓고 지키어 왜구가 다시 오지 않았다. 고을 백성들이 고맙게 여겨 초상을 걸어놓고 제사지냈다.본조 정이오(鄭以吾) 고을의 일을 맡아 보았는데 청렴하고 간결하여 문치(文治)에 여유가 있었다. 최관(崔關)ㆍ우균(禹均)ㆍ김이음(金爾音) 모두 부사였다. 이희문(李希文) 병진년 기근 때에 희문이 간장과 죽을 지고 다니면서 나누어 주었다. 새벽에 나가 밤에야 들어오곤 하여 백성 중에 굶어 죽은 사람이 없었다. 이길배(李吉培) 정사는 청렴하고 송사는 간결하였으며, 학문을 권장하는 데 부지런하였으므로 향교 학생 중에서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많았다. 조정에서 특별히 이품(二品)에 가자(加資)하였다. 김자갱(金子鏗) 학교를 수리하였다. 권득경(權得經) 부사였다. 『신증』 김종직(金宗直)ㆍ유희철(柳希轍) 관리로 있는 동안 청렴하고 근엄하였다. 【인물】고려 김선궁(金宣弓) 태조가 후백제를 칠 때 숭선(嵩善)에 이르러 종군할 사람을 모집하였는데, 선궁이 아전으로 응모하였으므로 태조가 기뻐서, 자기가 쓰던 활을 내려주면서 선궁이라는 이름도 함께 하사하였다. 뒤에 공(功)으로써 대광문하시중(大匡門下侍中)이 되었다. 정종(定宗)이 대승(大丞)에 추증하였으며, 시호를 순충(順忠)이라 하였다. 맏아들 문봉(文奉)은 삼사우윤(三司右尹)으로 고향에 돌아와 아전이 되었으며, 둘째아들 봉술(奉術)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시중이 되었다. 부의 사족(士族) 및 이족(吏族)은 다 선궁의 후손들이다. 김훤술(金萱述) 해평 사람인데 태조를 도와 공이 있었으므로 지위가 시중에 이르렀고, 시호는 장렬(蔣烈)이라 하였다. 윤군정(尹君正) 해평 사람이며, 고종 때에 벼슬이 수사공 상서좌복야판공부사(守司空尙書左僕射判工部事)에 이르렀다. 윤만비(尹萬庇) 군정(君正)의 아들인데 충렬왕 때에 벼슬이 부지밀직사(副知密直事)에 이르렀다. 김수(金洙) 훤술(萱述)의 후손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집현전 직제학(直提學)을 역임하였고, 여러 차례 승진하여 개성윤(開城尹)에 이르렀다.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과 벗이 되어 잘 사귀었다. 호는 송정(松亭)이다. 길재(吉再) 해평 사람이며, 고려에 벼슬하여 거짓 임금 신씨(辛氏) 조정에 문하주서(門下注書)가 되었지만, 어머니가 늙었다는 구실로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 부의 남쪽 구며리(仇㫆里)에 살면서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본조의 태종이 동궁으로 있을 때에 불러들여 공정 대왕(恭靖大王)에게 아뢰어 태상박사(太常 博士)를 주었으나, 대궐로 들어가서 사은하지 아니하고 태종에게 글을 올려, “지난날 전하(殿下)와 더불어 반궁(泮宮)에서 시를 읽은 적이 있었으므로, 이제 신을 부르신 것은 옛 정을 잊지 않으심입니다. 그러나, 신씨 조정에서 과거에 올라 벼슬하고 왕씨가 복위하자 곧 고향으로 돌아와 일생을 마치려 하였는데, 이번에 옛 일을 기억하고 부르시오니 올라와서 뵙고 곧 돌아가고자 하오며, 벼슬하는 것은 나의 뜻이 아닙니다.” 하였다. 태종이 말하기를, “공의 한 말은 실로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말한 것이어서 그 뜻을 뺏기 어려우나, 부른 것은 나이지마는 벼슬을 준 것은 상감이니, 상감께 아뢰는 것이 옳을 것이오.” 하였다. 이에 임금께 글을 올렸는데 그 대략은, “신이 듣기에 여자에게는 두 남편이 없고, 신하에게는 두 임금이 없다 하였으니, 늙은 어미를 봉양하도록 고향으로 돌려보내 주시어, 신이 두 임금을 섬기지 않으려는 뜻을 이룩하게 하옵소서.” 하였다. 공정 대왕이 가상히 여겨 유숭한 예로써 본주에 명하여 그 집을 복호(復戶)하게 하였다. 세종 때에 그 아들 사순(師舜)에게 벼슬을 주고 길재에게는 특별히 좌사간대부(左司諫大夫)를 주고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 충신도(忠臣圖) 찬(贊)에 이르기를, “송산(松山 송악산)의 왕기(王氣)는 이미 재가 되었고, 참 임금 일어나 큰 운수가 열렸는데, 오히려 옛 임금 그리며 절개를 보전하고, 표연히 돌아와 자릉대(子陵臺)에 누웠도다.” 하였다. ○ 정이오(鄭以吾)의 시에, “헌상(軒裳 높은 벼슬)이 어찌 내 생애를 즐김에 족하리오. 풍절(風節 높은 절개)이야말로 만년토록 영화로운 것, 오조(五朝)의 장락로(長樂老)를 보라. 길고 빛나는 불꽃에 성내 우레 소리라네.” 하였다. 윤가관(尹可觀) 만비(萬庇)의 후손이다. 무략(武略)이 있어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였다. 공민왕이 만년에 한안(韓安)ㆍ홍륜(洪倫)을 시켜 여러 비빈(妃嬪)을 강제로 욕보일 적에 가관도 좌우에 가까이 모시고 있었다. 왕이 익비(益妃)와 통하게 하려 했으나 가관이 죽음으로써 굳이 거절하였다. 왕이 크게 노하여 몽둥이로 때리고 벼슬을 빼앗아 서인으로 만들었다. 뒤에 경상도 도순문사(都巡問使)로서 합포(合浦)를 지켰으며 왜적을 함양(咸陽)에서 쳐부수었다. 처음에 적이 모두 축산도(丑山島)를 거쳐서 침입하므로, 가관이 조정에 아뢰어, 선졸(船卒 수군)을 두도록 했는데 그로부터는 왜구가 조금 잠잠해졌다. 낡아서 내버릴 병기로 농구를 만들어 둔전(屯田)을 개간하여 군량에 보태었다. 뒤에 판밀직사(判密直事)로 있다가 죽었다. 윤진(尹珍) 과거에 올라 벼슬이 중대광(重大匡)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평(文平)이다. 본조 김치(金峙) 과거하여 벼슬이 김해 부사(金海府使)에 이르렀다. 물러나 성 서쪽의 영봉리(迎鳳里)에 살면서 자제들을 가르치고, 먼저 가묘(家廟)를 지어 제사를 받들어 마을 사람들을 교화하였다. 김효정(金孝貞) 선궁(宣弓)의 후손이다. 과거에 올라 세종 때에 본도 관찰사가 되었다. 김지경(金之慶) 선궁의 후손이다. 세종 때에 과거하고 여러 벼슬을 거쳐 대간이 되었다. 일을 논함에 있어 굽히지 아니하였으며, 네 차례 감사가 되었고 가는 곳마다 명성과 업적이 있었다. 뒤에 개성 유수(留守)로 있다가 죽었다. 시호는 경질(敬質)이다. 김윤수(金允壽) 세종 때에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사람됨이 얽매이지 아니하고 산업(産業)을 일삼지 않았다. 북쪽 국경을 지키기 거의 20년에 야인이 무서워하여 복종하였다. 처음 회령(會寧)에 부임할 때, 아들 만정(萬鼎)을 낳았다. 만정이 나이 18세에 아버지를 찾기 위해 북쪽 국경으로 가서 비로소 만났다. 김종리(金從理) 과거하고 여러 벼슬을 거쳐 예문관 직제학에 이르렀다. 양촌(陽村) 권근(權近)의 천서(薦書)가 있다. 김교(金嶠) 무과에 급제하였다. 세조 때에 적개공신(敵愾功臣)으로 선산군(善山君)에 봉해졌으며, 벼슬이 공조판서에 이르렀다.『신증』 김종직(金宗直) 자는 계온(季昷)이다. 과거하여 벼슬이 형조판서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성품이 바르고 곧으며, 품행이 단정 근엄하고, 학문이 정심(精深)하며, 문장이 고상하고 고아(古雅)하여 당대 선비의 으뜸이 되었다. 사람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아니하여 앞뒤의 명사들이 그의 문하에서 많이 나왔다. 《점필재집(佔畢齋集)》이 있어 세상에 간행되었다. 김응기(金應箕) 과거하여 벼슬이 우의정에 이르렀다. 성품이 단정 근엄하고, 행동에 규율과 법도가 있었다. 시호는 문대(文戴)다. 【우거】본조 오식(吳湜) 태종 때의 사람으로, 벼슬이 경주 부윤에 이르렀다. 유면(兪勉)ㆍ전가식(田可植)ㆍ정지담(鄭之澹) 모두 장원급제하였고, 영봉리(迎鳳里)에 살았다. 가담(可澹) 부장원(副壯元)을 했다. 박서생(朴瑞生) 과거에 셋째로 급제하여 벼슬이 가선 안동대도호부사(嘉善安東大都護府使)에 이르렀다. 강신(康愼) 신천군(信川郡) 편에 자세히 적혀 있다. 서즐(徐騭) 지례현 사람이다. 젊었을 때 윤은보(尹殷保)와 함께 같은 현에서 배웠다. 지의주사(知宜州事) 장지도(張志道)를 아버지처럼 섬기었는데, 장이 죽자 두 사람이 검은 관을 쓰고 삼띠를 허리에 두르고 무덤 곁에 살면서 몸소 메를 지어 바치었다. 은보가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물러가자 즐이 혼자서 3년을 끝마치었다. 일이 위에 들리어 두 사람에게 모두 정문을 세워주고 벼슬을 주었는데, 즐은 사연(司涓)이 되었다. 뒤에 부모가 죽자 전후 6년 동안을 시묘하였다. 혼인 관계로 부(府)에서 고아리(高牙里)로 이사해 살다가 90이 넘어서 죽었다. 이언(李堰) 전주 부윤(全州府尹)으로 있다가 물러나 부의 내곡리(內谷里)에 살았다. 이맹전(李孟專) 성품이 안정되고 나다니기를 싫어하여 전 정언(正言)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 망정리(網正里)에 살았다. 나이가 90에 이르렀다. 『신증』【효자】본조 임재(林載) 명경과(明經科 경서에 능통한 선비를 뽑는 과거)에 급제하였고 벼슬은 황간 감무(黃澗監務)에 머물렀다. 부모가 모두 오래된 병고로 앓고 있을 때 재(載)가 아침저녁으로 간호하였으며, 죽자 몹시 슬퍼하여 예법을 넘어 6년을 시묘하였다. 성종 3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전좌명(田佐明) 젊어서부터 어버이를 효도로 섬기었는데 한 해에 부모가 함께 죽자 6년을 시묘하는 동안에 한 번도 집에 들리지 아니하였다. 성종 3년에 정문을 세워 주었다. 송씨(宋氏) 19세 때에 어머니가 나쁜 병에 걸리자 손가락을 잘라 약에 타서 드렸더니 병이 곧 나았다. 지금 임금 13년에 정문을 세워 주었다. 【열녀】본조 약가(藥哥) 조을생(趙乙生)의 아내다. 을생이 왜구에게 잡혀가서 약가는 그의 생사를 알지 못하였으나 고기와 마늘을 먹지 아니하였고 옷을 벗지 않고 잤다. 부모가 그의 뜻을 뺏으려 했으나 죽기를 맹세하고 듣지 아니하였다. 8년 만에 을생이 살아 돌아와 부부가 되어 처음같이 살았다. ○ 장천서(蔣天瑞)의 시에, “바다 밖의 소식 끊기니, 규중에서 보내는 세월 길기도 하여라. 8년을 깨끗이 지킨 뜻, 열녀비를 봉산 남쪽에 세웠네.” 하였다. 한씨(韓氏) 김효충(金孝忠)의 아내다. 효충이 염병으로 죽자, 한씨는 관을 어루만지며 슬피 울기를 밤낮으로 그치지 아니하였다. 집안 사람들도 모두 밖으로 피하고, 사람들도 감히 가까이하지 아니하였으나, 손수 염하고 그 곁을 지키면서 몹시 슬퍼하는 것이 예법을 넘었다. 3년이 끝나자 그의 아버지가 자식도 없이 일찍 홀몸이 되었음을 탄식하여 다시 시집을 보내려 했으나, 한씨가 머리털을 자르고 자결하려 하였으므로 아버지가 겁이 나서 감히 시집보내지 못하였으니, 마을 사람들이 경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제영】 유궁은영격림고(儒宮隱映隔林高) 채련(蔡璉)의 시에, “관사(官舍)는 어렴풋이 대숲에 가리어 작게 보이고, 유궁은 숨은 듯 보이는 듯 수풀을 격하여 높도다. 서리는 차가워 새벽 마른 풀에 얼어 붙었고, 바람은 세차 얼음을 흘려서 작은 다리에 걸려 있다.” 하였다. 수림함우녹차성(樹林含雨綠遮城) 김구경(金久冏)의 시에, “연꽃은 바람을 받아 향기가 원(院)에 가득하고, 나무숲은 비를 머금어 녹음이 성을 가리었네.” 하였다. 교목참천세기천(喬木參天歲幾千) 하륜(河崙)의 시에, “구역의 산수 풍경이 좋은데, 높은 나무 하늘에 솟아 몇 천년이던가.” 하였다. 홍수역정시만벽(紅樹驛亭詩滿璧) 유방선(柳方善)의 시에, “단풍든 역정에는 시가 벽에 가득하고, 누런 띠 지붕의 촌집에는 술이 항아리에 차 있도다.” 하였다. 시엽초희홍만성(柿葉初稀紅滿城) 강희맹(姜希孟)의 시에, “뽕나무 그늘이 겹치니 푸른 것이 집을 가리고, 감나무 잎 떨어지기 시작하니 붉은 것이 성에 가득하다.” 하였다. 『신증』십절(十絶) 김종직(金宗直)의 시다. 김선궁(金宣弓) 옛집의 높은 나무 지금도 서 있으니, 태수(太守)는 응당 먼저 이문(里門)에 내리리라. 반은 잠영(簪纓 벼슬하는 사람)이요, 반은 도필리(刀筆吏 아전)였으니, 순충공(順忠公)의 후손이 몇 대나 되는고. 태조산 물과 불 같다고 지목하던 것은 견훤[甄王]이었으니, 인의(仁義)가 결국은 사방을 평정하는 것이로다. 산중에 말 매었던 곳 찾아보니, 바위틈의 꽃과 시냇가의 풀이 향기를 풍긴다. 읍성(邑城) 이공의 쌓은 성이 천시(天時)를 얻어 왜구의 떠드는 넋이 감히 엿보지 못한다. 물어 보자 남은 사당 어느 곳에 있는고. 허물어진 성에 가을 풀만 우거졌구나. 도리사(桃李寺) 도리산 앞에 도리꽃이 피었는데, 묵호[墨胡子]는 이미 가고 도사(道師)가 왔네. 빛나는 신라의 업을 뉘 알리오. 마침내는 모례(毛禮)의 움 속의 재뿐이로다. 영봉리(迎鳳里) 마을 사람이 예부터 학교를 중히 여기어 뛰어난 인재[翹楚]를 해마다 조정[舜廊]에 바치었네. 하찮은 성서(城西)의 영봉리를 학도들은 아직껏 장원방(壯元坊)이라 말한다. 제성단(祭星壇) 죽장사(竹杖寺) 바윗가에는 늙은 나무들이 옹기종기한데, 석반(石盤)은 아직도 수성단(壽星壇 수성은 남극성)을 누르고 있네. 성신(聖神)이 오늘도 남극에 빛나니, 바다를 진 사람이 손가락으로 가리켜 가며 보리라. 길재사(吉再祠) 오산(烏山)과 봉수(鳳水)를 마음껏 거니노라니, 야은(冶隱)의 맑은 바람 말하면 다시 길어지네. 밥짓는 계집종도 시를 읊으면서 절구질하니, 정공(鄭公)의 고향에 비긴다. 열녀 약가(藥哥) 푸른 바다 아득한데, 붉은 봉[紫鳳]이 난다. 8년 동안을 외로운 등잔 벗삼아 살았노라. 돌아와 거울[菱花] 잡고 비추어 보니, 눈시울 위에 붉은 놀이 반쯤 엉기었네. 월파정(月波亭) 동쪽 나라(扶桑 일본) 사자가 배를 띄울 때마다, 10리까지 술그릇 가지고 송영하는 것이 관례라. 밝으신 임금님에 힘입어 성교(聲敎)가 멀리 미치니, 머리 쳐들고 월파정에 자주 오르노라. 보천탄(寶泉灘) 보천탄 위에 장삿배들 모여들어, 천실(千室)의 사람마다 음식에 소금 있네. 누가 수고한 소득[脂膏]으로 십분의 1만을 꾀하리오. 예로부터 높은 관리는 청렴하기 드물어라.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토산】 대[竹]. 【성지】 해평고현성(海平古縣城)ㆍ구미성(龜尾城). 【누정】 노자정(鸕鶿亭) 노자암(鸕鶿巖) 강변에 있다. 매학정(梅鶴亭) 층암(層岩)이 들 가운데 우뚝 솟아 있고 정자가 그 위에 있으며 강에 임하여 있다. 봉하루(鳳下樓)ㆍ정정루(正正樓)ㆍ제남루. 【역참】혁폐 견도역(牽途驛) 해평(海平)의 동쪽 10리에 있고, 안곡역(安谷驛)에 합하였다. 【방면】 동읍내(東邑內) 끝이 10리다. 서읍내(西邑內) 끝이 10리다. 독용동(禿用洞) 북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다. 주아(注兒) 북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40리다. 상구미(上龜尾) 서쪽으로 10리다. 하구미 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다. 평성(坪城) 남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다. 망장(網章) 남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다. 무래(舞來) 서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다. 신당포(神堂浦) 서북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30리다. 무을동(無乙洞) 서북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40리다. 지북(旨北) 처음이 15리, 끝이 40리다. 해평(海平) 동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5리다. 몽도(夢徒) 동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다. 북웅곡(北熊谷) 본래 웅곡의 부곡으로, 동남쪽으로 처음이 50리, 끝이 70리다. 신곡(新谷) 북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다. 도개(道開) 본래 도개의 부곡으로, 동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다. 산내(山內) 동쪽으로 20리다. 산외(山外) 동쪽으로 35리다. 이상 7면은 낙동강(洛東江)의 동쪽에 있다. ○ 비산군(緋山郡)의 부곡은 남쪽으로 30리에 있다. 인동(仁同) 편을 보라. 가덕(加德)의 부곡은 북쪽으로 20리, 예능(藝能)의 부곡ㆍ고아(高牙)의 부곡은 남쪽으로 15리, 보미(寶彌)의 부곡은 남쪽으로 25리, 칠창(漆倉)의 부곡은 동쪽으로 15리, 국안(國安)의 부곡ㆍ질곡(秩谷)의 부곡은 모두 해평현 땅이다. 【진도】 여차리진(餘次里津) 동쪽으로 11리로 이매연[鯉淵] 하류며, 월파정진(月波亭津)이라 일컫는다. 송학진(松鶴津) 옥산(玉山)의 남쪽이다. 【창고】 읍창 읍내에 있다. 해평창(海平倉) 고현에 있다. 강창(江倉) 여차니진(餘次尼津) 가에 있다. 대혜창(大惠倉) 남쪽으로 42리다. 산성창(山城倉) 금오산성(金烏山城)에 있다. 【사원】 금오서원(金烏書院) 관찰사 남재(南在)가 세우고 선조 을해년에 사액하였다. 야은묘(冶隱廟) 광해주 기유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내렸다. 길재(吉再) 자는 재보(再父), 호는 야은(冶隱)이며 해평(海平)사람이다. 신우(辛禑) 때 벼슬이 문하 주서(門下注書)였고, 본조에서 태상 박사(太常博士)를 주었으나 받지 않았다.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절(忠節)이다. 김종직(金宗直) 밀양 편에 있다. 정붕(鄭鵬) 자는 운정(雲程), 호는 신당(新堂)이며 해주(海州) 사람이다. 벼슬은 사인(舍人)이다. 박영(朴英) 자는 자실(子實), 호는 송당(松堂)이며 밀양 사람이다. 벼슬은 병조 참판 증 이조판서며,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장현광(張顯光) 성주 편에 있다. 월암서원(月巖書院) 인조 무진년에 세우고 숙종 갑술년에 사액하였다. 김주(金澍) 안동 편에 있다. 하위지(河緯地) 과천(果川) 편에 있다. 이맹전(李孟專) 자는 백순(佰純), 호는 경은(耕隱)이며 성산(星山) 사람이다. 벼슬은 정언(正言)이며 단종(端宗)을 위하여 절개를 다하였고,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정목(貞穆)이다. ○ 낙봉서원(洛峰書院) 인조 병술년에 세우고 정조 정미년에 사액하였다. 김숙자(金淑滋) 자는 자배(子培), 호는 강호(江湖)며 선산 사람이다. 벼슬은 사예 증 호조판서(司藝贈戶曹判書)다. 김취성(金就成) 자는 성지(成之), 호는 진락당(眞樂堂)이며 선산 사람이다. 박운(朴雲) 자는 택지(澤之), 호는 용암(龍岩)이며 밀양 사람이다. 김취문(金就文) 자는 문지(文之), 호는 윤암(允庵)이고, 취성의 아우이며 벼슬은 강원 감사(江原監司)다. 고응척(高應陟) 자는 숙명(淑明), 호는 두곡(杜谷)이고, 안동 사람이며 벼슬은 사성(司成)이다. 【고읍】 해평(海平) 동쪽으로 33리며, 본래는 신라 병정(倂井)인데, 경덕왕 16년에 파징(波澄)이라 고쳐 숭선군(嵩善郡) 영현(領縣)이 되었다. 고려 태조 23년에 해평이라 고쳐 뒤에 복주에 소속되었으며, 현종 9년에 상주에 소속되었다가 인종 21년에 본군에 소속되었다. |
첫댓글 감사 홍여방(洪汝方) 공이 임금께 아뢰어 그 허락을 받았다. 그리하여 놀고 있는 사람들을 모으고 남아도는 재물을 이용하여, 백성들을 징발하지도 그들의 시간을 빼앗지도 않고서, 기유년 10월에 역사를 시작하여 경술년 2월에 준공하였는데, 지어놓은 건물이나 방들이 크고 넓고 짜임새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