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39편
시 139:1-4 이 귀절들은, 하나님의 전지의 상세하심을 말한다. 이 시인은, 하나님께서 그의 언행(言行) 심사(心思) 동정(動靜)의 일체를 다 아신다고 한다. 이 점에 대한 이 시의 묘사(2-4절)를 본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사언행의 중대한 것들만을 아시는 것이 아니고, 그 경미(輕微)한 것들까지 익히 아신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나 혼자만 지금 나 자신의 사언행을 의식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스스로 속음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2절) - 이것은, 우리로 스스로 속지 않게 하려는 경계의 말씀이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거리가 멀다고 해서, 그가 우리를 아심에 있어서 각근하지 못하시거나 멀어진 것은 아니다.
시 139:5 주께서 나의 전후를 두르시며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 이 시인은, 여기서 몇 가지로 하나님의 전지하신 사실을 보여 준다. (1) 그가 나를 포위하신고로 나는 그의 감시에서 벗어날 수 없고, (2) 그의 손이 항상 나를 붙드신 고로 ("안수") 나는 그의 관하(管下)에서 이탈할 수도 없다고 한다.
시 139:6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 위에 말한 것과 같은 하나님의 전지에 대하여, 이 시인은 감탄을 발한다. 곧, 하나님의 전지적 활동은, 인간으로서 헤아릴 수 없는 신묘막측(神妙莫測)한 놀라운 사실이란 말이다. 이것은, 이 시인이 그 실생활에 있어서 하나님의 전지적 활동을 경험하고 한 말이다. 체험적 신앙을 가진 성도는 누구나 여기에 동감일 것이다.
시 139:7-10 이 시인은, 여기서 하나님의 전지하신 감시를 피할 수 없다고 말한다. 곧, 그는, 하늘 위에나 땅 아래나 바다나 그 어디서나 그의 간섭을 피할 수 없다고 한다. 인간은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 공간적 격리로 막힌 듯이 생각한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자기와 같은 유한(有限)한 실존(實存)으로 보려는 부패한 신관(新觀)이다.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8절) - 곧, "음부에'가서 누워 숨는다는 뜻이다. "새벽 날개"(9절)는, 아침에 올라오는 광선을 가리킨다. 광선은 참으로 빠른 속력으로 땅위에 임하는데, 그런 속력 있는 것을 타고 해양 밖으로 도망해도 주님의 관리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이 시인은 말한다.
시 139:11,12 흑암이 ···빛은··일반이니이다 - 흑암이 시인의 몸을 덮고 또 빛이 깊은 어두움으로 변하여 그의 몸을 가리워준다 할지라도 주의 꿰뚫는 눈으로부터는 피할 수 없으니 그것은 주께는 흑암이나 빛이나 일반이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사실 하나님은 본질적인 빛이시며(시27:1, 84:11, 요일1:5) 이 세상의 빛을 내는 어떤 피조물보다 월등한 빛을 발하신다. 따라서 그 앞에서는 흑암과 어두움이 설 자리가 없으며 인생이 그 앞에서는 흑암과 어두움이 설 자리가 없으며 인생이 그의 눈을 피하여 숨을 곳은 아무데도 없다.
시 139:13-16 이 부분은 이유 접속사 (키)로 시작하여,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든 것을 전지(全知)하시는 이유를 밝혔으니, 그것은 그가 인간을 지으신 까닭이라는 것이다. 인간을 지으신 이가 어찌 모르실리가 있겠는가! 그가 인간을 지으시되 "신묘 막측하게"(14절) 하셨으므로, 인간으로서는 인간의 구조를 알기 어려우리 만큼 되어 있다. 스펄죤(Spurgeon)은 이 점에 대하여 말하기를, "우리는 신기한 무엇을 구하여 멀리 갈 것이 없다. 그 이유는, 우리의 몸 안에는 그런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 신기한 작품인 인간의 구조가 우리에게는 궁극적으로 이해 되지 못하나, 조물주 하나님의 목전에서는 명백히 드러난다. 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기우기 못하였나이다(15절) -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심오(深奧)한 모태에서 조성(造成)하시는 권능을 말함이다.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16절) - 이것은, 인간의 수명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을 말함이다. 우리의 수명이 얼마나 길겠는지에 대하여는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수명의 장단(長短)에 대하여 열려할 것이 없다.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함은 비유니, 하나님의 영원하신 예정에 들었다는 의미이다.
시 139:17,18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내가 세려고 할 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오히려 주와 함께 있나이다 - 이 귀절들은, 인간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전적 활동에 대한 진술의 결론이다.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이 시인은, 하나님께서 그를 그렇게 전지적으로 주목해 주시는 일을 귀중시 한다. 성도는 하나님이 버려둔 폐물이 아니고 순간이라도 잊지 아니하시는 중보(重寶)이다.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이것은, 그 성도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이 수다하다는 의미이다. 이 사실을 아는 성도는 즐겁기 한이 없다. 내가 깰 때에도 오히려 주와 함께 있나이다 - 이 귀절에 대하여는 두 가지 해석이 있다. 여기 "깰 때'란 말이, (1) 육신으로 별세함을 가리킨다 하고, (2) 또 혹은 이것이 자다가 깨는 때를 의미한다고도 한다. 이 둘째 해석을 취하면, 이 귀절의 의미는, 그가 자다가 깨어 본즉 하나님께서 그를 수호하시고 계심을 발견한다는 의미이다. 곧, 그가, 정상 의식을 가지는 때에는 그에게 대한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역사(役事)를 인식하게 된다는 말이다.
시 139:19,20 위에 길게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은 전지적(全知的)으로 인간을 향하여 활동하시는 참 신(神)이시니, 참으로 두렵다. 그러므로 이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끝까지 대적하는 악도의 행위는, 발뒤꿈치로 송곳을 차는 미련이다. 그런 자는 얼른 멸망하게 된다.
시 139:21-24 악도의 가는 길로 가지 않고 그 악도를 미워하는 다윗은, 영원토록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인도를 받을 줄 알고 기도한다. "영원한 길"이란 말은, 파멸치 않는 하나님의 인도를 말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