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어머니 도중 이업순님과 (도중은 원불교에서 지어준 법호) 우리 아버지 오서호님이 살아생전에 가장좋아했던 사람들 입니다
1. 오승용 : (큰손자) : 장손인데 아주 점잔하고 잘생겼다고 좋아하셨음 우리 어머니는 언제나 우리 승용이가 질로 (제일로)장손잉게 (인게) 후제 (나중에) 할미하나씨 (할머니 할아버지) 죽고나면 제사를 지내줄놈 이여이 하시면서 두분께서는 항상좋아 하셨습니다 2. 오정근 : (차남의 큰아들) : 처음으로본 남아 손주였기에 아주좋아 하셨습니다 3. 유재영 : (외손자 큰딸네둘째) :4-7살까지 외가에서 자랐음 아주 튼튼하고 착한 우리집의 UN군 이었음 외갓집의 온가족이 다귀여워하고 좋아했음 부부싸움을 아주 잘하시던 우리 부모님들도 재영이가 있을때는 언제나 웃으면서 좋아하셨으며 싸움도 안하셨기에 UN군 이었답니다 4. 유동열 : (큰사위) : 조선천지에는 우리 유서방같은 사람은 없을것 이라고하며 좋아했음 5. 이종옥 : (친정동생) : 3째 어머니소생의 동생 이었지만 자기들의 아들처럼 서로가 좋아하였음 6. 홍순임 : (동생 이종옥의처) : 남동생 못지안게 평생을 서로 좋아하면서 다정하게 잘지냈음 7. 이민순 : (처제) : 바느질 솜씨가 일품이어서 명절때마다 외할머니와 우리집의 새옷을 다해주셨음 특히 큰누나는 이모님과 외숙모님덕에 소성초등학교에서 옷을제일로 잘입고 다녔음 8. 오초자 : (작은딸) : 38세에 홀로된 작은딸을 돌아가실 때까지 안쓰러 하시고 못잊어했음 혼자서 어린5남매를 기르고 가르치느라 참으로 고생을한 대단히 장한 엄마였습니다 9. 이종규 : (사촌동생) : 5년제 정읍 농중을나온 자랑스러운 인테리 사촌동생을 우리부모님은 아주존경 하였고 좋아하셨음 어머니와 동갑이지만 정초에는 큰어머니인 외할머님께 세배후 사촌매형께도 꼭세배를 하셨기에 우리아버지는 그것이 큰자부심과 자랑거리 였다고 했습니다 10. 오금선 : (큰아들의 큰딸) : 제일 첫손주여서 아주 좋아하였고 볼때마다 두분다 웃으면서 행복해 하였음 아버지 께서는 돐지난손녀 금선이가 마당에서 아장아장 걸어다니면 얼굴가득히 웃음을띠고 뒤를졸졸따라 다니시면서 행복해 하셨답니다 11. 오봉숙 : ( 큰아들의 세째딸) : 초등1학년 때부터 소풍때는 언제나 할머니 할아버지께 꼭빵을 사다준 고마운 손녀였음 어머니께서는 아버지에게 지애미애비가 (엄마아빠가) 시키지도 안힛는디 (안했는데) 참으로 별것이어이 나중에 누가 복있는 집에서 데려갈것 이그만 이라고 하셨습니다 12. 오경덕 : (막내 여동생 만타원) : 친정 피붇이들을 언제나 다정하게 챙기시던 분이셨음 남매들중 우리 아버지와는 아주각별 하였으며 15살더먹은 친정 둘째오빠를 비롯한 오빠들을 볼때마다 큰절로 인사를 하였으며 1년에 2-3번은 꼭닭을잡아서 대접하셨다고 했으며 특히매제가 (박태중님) 더잘한다고 칭찬하시면서 좋아하셨 습니다 (외동딸이 원불교 교무님을 하였음)
제가 가장 존경하는 여자들 (우리 친척들) 1. 김순례 (이종형수님 1935.11.11. 정읍 소성면 등계리) 부: 김인환님 모: 정갑순님 소성초등학교를 졸업한 형수님은 홍익대학교를나온 남편과 (이상문 1931.9.18.-2022.8.24. 소성 면장역임) 결혼을한후 시부모님과 7남매등 대가족의 모든 뒷치닥 거리와 결혼을 시키면서 자기가낳은 6남매까지 잘기르신 큰며느리 였답니다 19세에 시집와서 104 세까지 살으셨던 시어머니 (이순남님) 와 75년간 함께살면서 한번도 말대꾸를 하지안은 효부였답니다 75살때 53살먹은 큰아들 (이태형) 을 하늘나라로 보내는 아픔도 겪었습니다 부산대학교 의대를 졸업한 작은아들은 충남 예산에서 개인병원을 운영하고 있답니다
2. 오삼순 (사촌누나 1936.6.3.정읍 소성면 오동촌 ) 부 : 오남호님 모: 정분심님 23세때 고창 흥덕면 오골 김재경 ( 1934.7.2.-2015.1.12) 매형과 결혼을하여 5남매를 낳아서 길렀습니다 서을 종로구 충신동에살던 누나네집에 가보면 언제나 흥덕에서온 손님들이 거의1-2명은 있었습니다 누나말로는 흥덕에서 오시는 손님들 때문에 한달에 쌀2가마니를 먹는때도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나도 할머니인데 시어머니가 참으로 좋으시면서도 늙어가면서 우리친정 이야기를 들먹이면서 가끔내속을 한번씩 뒤집어도 원래부터 나한티 잘하셨고 젊어서부터 잘지냈는데 죽을때까지 시어머님과 싸움을 절대로 한번도 안헐려고 작정을 하였기에 내가꾹참어 버리고 산다이 하셨습니다 82년도에 동대문 창신동에 파견나가 있을때 누나네 집에가니 밥통에 밥이충분이 있는데도 흥덕서오는 먼친척들 한테도 따뜻헌밥을 해주는데 친정동생이 왔는디 식은밥을 맥인다냐 하였습니다
3. 오초자 (작은누나 1941.12.26. - 2023.10 20 정읍 소성면 부안촌 ) 부: 오서호님 모:이업순님 23세때 큰형님과 소성초등학교 동창인 소성면 용산 산속 외딴집의 송전섭 (1936 .3.3.-1976.3.3.) 매형과 결혼을 하였습니다 시어머니와 셋이서 1200여평의 과수원 (복숭아) 을 가꾸면서 논과밭의 농사를 지었습니다 셋이서 아주 열심히 죽어라하고 일을한덕에 자기들 돈으로 논도사고 밭도 사면서 잘살고 있었답니다 76년 가뭄에 양수기로 물을품어 모내기를 해야하는데 동내사람이 전선이 부족하다고하니 자기집의 전선을 잘라서 갖다주려다가 전기가 통하는 전선의 코드를 빼지안고 전기선을 자르다가 감전되어 사망하여 버렸습니다 38살의 작은누나는 그때부터 수많은 고생과 시련속에서 시어머님과 서로위로하고 아끼면서 아들둘 딸셋을 힘들고 어렵게 기르면서 학교를 보냈드랍니다 큰아들과 작은딸은 자기들이 대학교를 안가겠다니까 놔두고 작은아들은 전북대 칫과대학을 딸둘은 충남대학교를 보내서 충남대학교병원의 간호사로 근무하고 있답니다 시어머니와는 46년을 살면서 서로가 얼굴한번도 안붉힌 고마운 며느리였고 정말로장한 어머니 였답니다
4. 김화순 (조카며느리 1950.1.10. 고창군 공음면 보천) 부: 김덕연님 모: 김영희님 23세때 초등학교 선생님인 오광덕과 결혼하여 아들만 셋을낳아서 잘기르고 잘가르친 엄마입니다 큰아들과 3째아들은 중고등학교 부부교사이며 둘째아들은 대기업의 간부로 길렀답니다 6.25.때 22세에 홀로된 시어머니와 47년을 함께살면서 시어머니께 한번도 서운하게 한일이 없었던 착한 효부며느리 였습니다 그러기에 시어머님도 (왕복순님) 자기 며느리를 금쪽같이 좋아 하셨답니다
5.김미자 (외사촌제수 1959.3.31. 정읍 칠보면 삼리) 부::김윤지님 모: 온정섭님 22세에 초등학교 선생님인 이두영과 결혼하여서 남매를 낳아서 훌륭하게기른 엄마입니다 아들과 며느리는 둘다 노동부 사무관으로 근무하고 있으며 딸은 아시아나항공 스튜디어스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관세청의 공무원을 하면서 시어머니와 22년을 함께살면서 한번도 시어머니 말씀을 거역하지안은 효자며느리 였습니다 자기 시어머니와 절친한 80세의고모 (이업순님) 이 5 - 6 일씩 손님으로 가있을때는 늙으신 고모님과 날마다 싸우다싶이 샤워를 시켜드리고 속옷을 벗겨서 빨아주신 고마운분 이었습니다 신창동 외숙모님한테 몇일계시다오신 우리 어머니는 신세계 백화점옆 우리집에 오셔서 우리집사람과 나에게 " 늬외숙모가 만난것을 많이 히주어서 (해주어서) 몽땅먹고 밴소를 (화장실) 가다가 똥이 몇토막이 떨어졌는디 늬외숙모가 치울라고 하니까 늬외숙모는 손도못대게하고 승주애미가 종이로 다치우고 딱었다이 참별것이여이 " 저는 몇년전에 제수님의 오빠 (김진관님) 에게 그이야기를 하면서 김미자 제수님을 존경하다고 했습니다
우리 아버지께서는 다른사람에 비해서 걸음을 아주 빠르게 잘도걸으 셨 습니다 어머니는 마꼴앞논에서 작답과 동내앞 너마지기 춘수리앞 논까지 돌아볼려면 한나절은 걸릴것인데 아버지 께서는 날마다 새벽에 일어나셔서 삽을메고 나가셔서 18마지기 논을전부 둘러보고 오셨드랍니다 그리고 2-3일에 한번씩은 석장등 제공앞 뒷넘어 꽁방의 밭까지도 둘러보고 오는날도 있었다고 했습니다 아침에 그렇게 3-4Km 를 걷고왔으니 아침밥맛도 좋았을것 입니다 그때는 아침밥을 언제나 소복히 한그릇을 다잡수셨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어머니나 아버지께서는 80세가 넘으셨을 때까지도 아침밥부터 밥을 한그릇씩 아주 잘잡수 셨습니다 특히 가루음식을 좋아하시던 아버지께서는 팥죽이나 칼국수 수제비는 언제나 가반을 (더먹는것) 하셨습니다 술을 못잡수시는 우리 아버지는 춘수리앞이나 동내앞논 또는 마골앞논에서 혼자서 피를뽑던가 풀을멜때는 새참으로 쑥이나 모싯잎 으로만든 개떡을 4-5개를 갖고가면 아주 맛있게 잘도잡수 셨습니다 술대신으로 사카리를탄 (설탕대신의 감미료) 달착지근한물도 아주 잘잡수 셨습니다 나는 집에서 작은누나나 어머니가 타주는 사카리물을 한사발을 먹었으면서도 논에가면서 막걸리 두되짜리의 주전자에 거의 가득담은 사카리탄 물을들고 가면서 수시로 한모금씩 먹으면서 가지고 갔습니다 어린 마음에도 아버지는 해질무렵까지 논에서일을 하시기에 내가 사카리물을 먹어버리면 안된다는것을 느끼면서도 그단물의 유혹때문에 들고가면서 수시로 한모금씩 먹어버렸던게 그때나 지금이나 아버지께 참으로 미안하답니다 내가 그렇게 사카리물을 먹으면서 온줄도 모르시고 아버지께서는 나에게 " 개떡항게 (한개) 먹어라이 사카리물도 함모곰허고 (한모금먹어) " 하셨습니다 작답에서 일을하실때는 개떡을들고 항골앞으로 가셔서 논에서 풀을메시는 항골사돈에게 (큰누나의 시아버지) 새참을 드리곤 하셨습니다 두분은 사돈간 이지만 평생을 형제간 보다도 다정하게 잘지내 셨답니다 해가지고난뒤 어두어질 무렵에 집에오시는 아버지는 개떡담은 빈대바구니와 사카리물이 들었던 주전자를 들고오셨습니다 주전자속에는 언제나처럼 아주큰 우렁이 근10마리는 들어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주전자속에 우렁을 넣어놓으니 도망도 안가고 좋드라고 하시면서 우렁을 줏어서 고무신속에 넣어놓고 고무신으로 덮어놓고 일을하고 나중에 집에올때보면 절반은 도망가 버리고 없다고 하셨습니다
어머니의 6.25전쟁때 이야기는 어릴때부터 밤을새우면서 들어도 지루하지가안고 재미가 있기만 했습니다 " 인민공화국잉가 좌익잉가 (인가) 빨치산 썩은놈들은 사람을 뚜드러잡든가 (두들겨 패든가) 말로 헐것이제 (말로하지) 사람목심만은 (목숨) 살려주어야 헐일이제 (할일) 왜총으로다쏴 죽였는가 모르것드라 금인가 은인가를판 깊은굴에다 사람을 굴비엮듯이 새끼줄로 묶어서 밀어서 쳐박아 버리고 큰돌을 집어던져서 죽인다냐 그리고 멀정한 사람을 유치장에 가돠놓고 (가두어두고) 휴발유 뿌리고 불을질러 참말로 썩을놈들 이제이 " " 아이고 하품나온다 인제 잘랑게 (잘려니) 너도인자 공부를 허등가 (하던가) 자등가 (자든가) 히라이 (하거라) " 하시는 어머니를 작은누나와 함께살살 추겨세우면서 졸라댈때가 많았습니다 그러자 한번은 어머니 께서는 등계물 사돈네 김씨들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 등계물 김가들은 왜그렇게 딸만들낳는가 몰라야 새내 늬성수네도 딸만여섯인가 일곱인가 모르것다이 그집일가 (친척) 김누구네 아들도 딸만둘인디 (인데) 좌익 오살놈들이 눈둘로 끌고가서 그사람들한티 자그들이 (자기들) 들어가서죽을 구덩이를 파라고해서 파놓고난게는 구덩이속에 앉쳐놓고는 총으로쏘고 대창으로 찔러서 열몇명을 다죽여 버렸단다 " 신점 한가들이랑 좌익들이 다가고난뒤에 죽은시체를 수습하는데 딸만 둘을낳은 등계물 2대독자 김누구네 아들은 자기의 다리나 팔뚝은 없어져도 괞찬은데 자기의대를 이어야할 남자의 거시기는 다치면 안되니까 죽어가면서도 자기의 저고리를 벗어서 자기의 거시기를 다치지 안토록 아주 튼튼하게 꽁꽁 동여메어 놨드랍니다 자기의 몸둥이는 병신이 되어도 자기의 거시기만 성하면 대를이을 수있게 아들을 낳을수 있을것 이다하는 간절한 희망을 안고서 죽어갔던 이었습니다 그이야기를듣고 등계물 사람들과 부안촌 사람들은 안쓰러워하고 눈물을 흘린사람들이 여럿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아버지가 두암낭갓 (두암 이씨네산) 으로 피난갔다가 큰송아지를 뺏긴이야기와 어머니가 춘수리 대서물 아짐네 집으로 큰소를 가지고 피난갔다가 소를 빼앗아가는 빨치산들에게 우리집 전재산 이라고 간절하게 사정을 하였답니다 그러니까 잔소리를 말라면서 우리어머니의 젖가슴팍을 총으로 두번이나 사정없이 찔러대 버려서 숨을 못쉬겠기에 죽는줄 알았드랍니다 그이야기는 몇번을 들어도 안쓰럽고 슬프고 그놈의 빨치산 놈의새끼들을 내가 월남전에서 들고다녔던 M-16으로 전부다 쏴서 죽여버리고 싶도록원망 스러웠답니다 우리북한 김일성주석과 김정일위원장이 이루어놓은 犬X을 찾아대는 더럽고 치사한 민주당대표 이재명같은 무리들은 자기들이 좋아하는 그좋은곳 북으로 갈일이지 지금 이좋은 나라를 혼란스럽게 하는가 모르겠습니다
1950년 초가을 전방에서는 북괴군과 치열한 전투를 할때였고 지리산 덕유산 소백산등 에서는 빨치산들의 토벌작전이 한창이 었을때 우리동내에서 있었던 이야기 입니다 우리동내는 변산에서 내장산을 거쳐서 빨치산 전북도당이 위치한 순창회문산에 이르는 통로였기에 후방치안 질서를 담당하는 정읍군 청년방위대원 (대장 김세길 후에 정읍 읍장역임 국회의원도 출마) 30-40명이 빨치산들의 보급투쟁으로 (빨치산들이 산속에서먹을 식량확보) 많은 피해를입고 시달렸던 빨치산들의 이동 통로에있던 등계물과 부안촌과 춘수리에 대해서 선무활동겸 지방부역자 들에게 심리적으로 압박을 가해서 더이상 빨치산들을 도와주는 행위를 못하게 하기위한 위력시위를 하기위해서 모두들 총을메고 무장을한체 동내입구에서 총을몇발을 쏘고난후에 우리동내에 들어왔드 랍니다 그런대 우리집 이웃에살던 풍채도좋고 잘생긴 친척 고모부인 L씨는 무장한 빨치산들이 지나가다가 쉴려고 온줄로 착각하고 절친하게 지내던 친구이고 우리동내 좌익인 L씨한테 얻어서 숨겨두고 있었던 빨간깃발을 대나무창에 (竹槍) 묶어가지고 모정으로 달려나와서 무장병력들이 빨치산들 인줄알고 아주 큰소리로 " 인민공화국 마안세 " 를 외치면서 빨치산들을 환영한다고 만세를 불러버렸 드랍니다 그래서 우리 동내모정 마당에있던 정읍에서온 청년방위대원 들한테 거의 반죽음이 될정도로 뚜들겨맞고 양손의 엄지손가락을 철사줄로 묶인체로 매를맞으면서 춘수리로 끌려갔다고 했습니다 춘수리 에서도 매를많이맞고 조롱꺼리가 되면서 소성지서로 갔드랍니다 그날 오후에 대낮에 대나무 창을들고 인민공화국 만세를 불렀다는 죄목으로 얼마전에 배영중학교 3학년이던 우리동내 강상수형이 총을맞고 죽었던 소성초등학교 언덕아래에서 청년방위대원들의 총을맞고 죽어버렸 드랍니다 L씨의 큰형님은 14살과 17세먹은 어머니가 다른동생 둘과함게 가마니로 당가를 (들것) 만들어서 L씨의 시체를 떠메고 부안촌으로 왔다고 하였습니다 동내에서 L씨고모부네 아버지를 별로좋아하지 안았고 좌익에 관련된 사건으로 죽었기에 누가쉽게 나설수도 없었드랍니다 결혼한지 1년도덜된 신혼이 었기에 자녀도없고 참으로 안타까운 슬픈죽음 이었답니다 동내 사람들은 모두들 가만히 있었으면 중이나 갈것인데 (무사했을 것임의뜻) 무슨 죽을놈의운이 쓰여서 그렇게 잘생기고 멀정한 사람을 염라대왕이 불러댔는가 모르겠다고들 하였답니다 그잘생겻다는 마음씨좋은 L씨 고모부는 좌익과우익 그리고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의 그무서운 수레바퀴에 깔려버려서 하늘나라로 가버린것 같습니다
우리 어머니의 새째동생인 이모님 (이기만님 1912년생) 은 남편이 경찰관 (옹경원님 1910년생 6.25.전에 김제 정읍 익산 경찰서장을 (1974.10.17. 제결혼때 주례를 서주셨음) 역임 하였다는 죄명으로 임신 8개월인 무거운 몸으로 (음 1950.10.12.밤) 소성지서 바로옆에서 인근의 좌익들과 빨치산들한테 붙잡혀서 순창군 복흥면 깊은산골 계곡으로 끌려가서 아주 비참하고 무참하게살해 되셨답니다 이모님은 1950.10.12. 소성면 춘수리 친정 동내에서 추수일이 늦게끝나서 정읍 자기집으로 가시지 못하고 소성면 소재지인 삼거리 소성지서 바로옆 남동생네 방에서 주무셨답니다 당시에 소성면 부면장을 하시던 작은외삼촌이 (이종무 1916년생) 빨치산들의 보급투쟁 (주민들한테 식량탈취) 등으로 시국이 뒤숭숭하고 빨치산들에게 길을안내 해주고 그마을 사람들의 모든성향을 제보해주는 인근지역의 좌익들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서 비교적 안전한 지서바로옆에 방을하나 얻어두고 근처에있는 면사무소로 출퇴근하면서 살고있었답니다 그런데 그날밤에 인근마을의 좌익들과 무장을한 빨치산들이 총을쏘면서 소성지서를 점령하여 버렸드랍니다 그리고는 당시에 소성면 부면장을하던 이종무 외삼촌이 지서옆에 방을얻어놓고 살고있다는것을 인근좌익들은 알고있기에 이종무 외삼촌을 체포하러가니 외삼촌은 잡히면 죽는다는걸 알기에 논뚝으로 죽어라하고 도망을 가버렸으나 임신8개월의 무거운 몸으로 사람들이 많이다니는 큰길로 도망가던 이모님은 좌익들한테 붙잡혀 버렸드랍니다 이모네 집이나 모든 친척들은 안타까운 마음뿐이지 밤중에 빨치산들이 잡아가 버렸기에 어디로 갔는지조차 알수가 없으니 애타게 발만동동 구를뿐 이었답니다 이모부 옹경원님은 8.15.해방후부터 발족한 반민특위의 친일파를 숙청하는 작업의 여파로 경찰서장을 그만두시고 6.25 무렵에는 1950.10.정읍군 향토방위단장을 하다가 50.11.부터는 정읍군 향토방위대장을 하셨드랍니다 좌익들과 빨치산들이 어디로 데리고가서 어떻게 죽였는지도 모르기에 사방 팔방으로 탐문을하며 애만태웠 드랍니다 그러던중에 정읍지역이나 순창지역의 토벌대가 포로로 붙잡은 좌익들과 빨치산들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가끔씩 이모님의 소식을 들었드랍니다 이모부님은 정읍에서 경찰서장을 할때에도 부하직원 들에게도 온화하게 잘해주셨기에 엣부하 경찰관들이 좌익이나 빨치산들을 검거하면 소성에서 잡혀간 만삭의 이기만 이모님의 행방을 꼭물어 보았드랍니다
그렇게 어렵고 간절하게 탐문하여서 얻은정보로 옹경원 이모부님은 품싹을 주고산 인부4명씩을 데리고 순창군 복흥면과 쌍치면의 산속을 3번이나 찾아가서 빨치산 들에게 학살된 사람들의 시신을확인 하였으나 애타게찾던 이모님의 시신은 찾지못했 드랍니다 그러던중 1950.11.10 (음력) 경에 체포된 빨치산들 로부터 순창군 복흥면 깊은산속 골짜기에 가보면 여러구의 시신과 만삭의 여자시신이 있을것 이라고 비교적 상세하게 알려주드 랍니다 이모부님께서는 그빨치산들을 잘설득하여서 이모님이 살해당한 거의 정확한 위치를 적어가면서 확인 하였답니다 그래서 정읍에서 품싹을주고 인부를 5명을사고 동생인 이종옥 외삼촌이 그들을 데리고 복흥 그곳으로 갔드랍니다 이모님의 시신은 임신8개월 이었기에 배가너무나 많이 부풀어올라 있드랍니다 외삼촌은 얼굴이 많이부패해서 자기누나가 맞는지 아닌지 긴가민가해서 입술을 벌려서보니 어금니에 금니를 한것을 발견하고나니 자기의 넷째누나 라는것을 확인하였 드랍니다 반듯이 누운시신의 치마가 웃득솟아 있기에 치마위로 만져보니 몸에 말뚝이박혀 있었기에 꿈쩍도 안드랍니다 치마를걷어 올리고보니 누나의 음부에 큰나무 말뚝을박아 놨드랍니다 그래서 손으로 잡아당기니 잘안빠지기에 부패해서 썩어가고있는 누나의 몸에박힌 말뚝을 이리저리 두손으로 흔들어서 뽑아내고나니 부패한 시신특유의 아주고약한 냄새와 썩은피가 한나절이나 쏟아져서 나오드랍니다 계속해서 썩은핏물이 계속나오는 자기누나의 시신을 이리저리 돌려눞히면서 가지고간 가마니와 홋이불로 (이불껍데기) 죽어버린 누나를 수습하여서 바작이달린 (지게위에 얻는 싸릿대로 만든도구) 지게에 5명이 힘들게 들어서 올렸드랍니다 가을이지만 시신썩는 냄새와 썩은핏물이 떨어지기에 함께간 인부들은 지게옆에 올려고도 안하드랍니다 이종옥 외삼촌은 훌쩍이면서 죽어버린 무거운 누나를 지게에 짊어지고 험한산길을 조심조심내려 왔드랍니다 소구루마가 (소달구지) 대기하고있는 산임도길까지 내려와서보니 엉덩이부터 바지는 핏물로 전부젖어 있드랍니다 썩은핏물의 그고약한 냄새는 쑥을짓이겨서 날마다 맛사지를 몇번씩 했어도 근한달만에야 없어졌다고 했습니다 소달구지에 누나를싣고 퍽험한 산임도길을 한참동안을 나와서야 자동차가 다니는 큰길에서는 정읍에서부터 대절해서 가지고간 트럭으로 정읍변두리 소정리로 모셨답니다 당시의 풍습은 밖에서 객사한 죽음은 자기집으로 모시지안는 토속신앙적인 불문율에 따라서 옹경원 이모부님의 부모님과 남동생이 살고있는 정읍변두리 소정리에 안치한후 슬프고 억울한 장례식을 치루었다고 했습니다 (아들 옹상길 1940년생 전주고 서울대 의대졸업 정읍 옹산부인과원장 역임)
우리 아버지는 어머니처럼 남을도와 주던가 남에게 베풀어 줄줄은 모르면서도 남의 논이나 밭이나 야산같은것을 판다든가 사는것을 아주잘도 아셨고 흥정도 잘해주셨습니다 지금처럼 복비를 받는것도 아니고 그냥 그집에서 해주는 밥이나 한그릇 얻어먹는것이 전부였드랍니다 우리 아버지보다 여섯살을 덜잡순 이모부님 (이춘호님 1905년생) 께서는 " 나도 모르는 우리 동내일을 자네가 어떻게 그렇게 잘안데여 " " 여그까지 소문낫응게 (낫으니) 내가알제 자네는항상 사랑방에 앉아서 댐뱃대물고 땅것헝게 (딴것하니) 모르제 " " 그것을 (투전 도박 ) 날마다 헌당가 (한다는가) 어쩌다가 함번씩 (한번씩) 허제이 " 하면서 두분은 큰소리로 웃으셨답니다 노름을 아주 좋아하시는 이모부님께서 어느해 겨울에 하룻밤에 쌀두가마니를 잃어버리고 빚진것이 동내 사람들한테 소문이나서 이모님이 알게되어서 욕을얻어먹고 싸우고 쫓겨나서 우리집에 왔었답니다 우리 어머니나 아버지와 외할머님 께서는 틀림없이 노름한것 때문에 집에서 쫓겨나온것을 눈치를채고 있었지만 아뭇소리도 안했드랍니다 우리 어머니나 아버지는 서로좋은 사이가 혹시 금이갈봐서 검다히다를 (검은것 하얀것) 한마디도 안했드랍니다 우리 아버지는 우리 어머니 말씀데로 아이데가 (일본 어느지역 사투리 둘사이의 관계) 아주 잘맞는 우리동내 동쪽에사는 외삼촌과 외숙모를 데리러 갔드랍니다 새내에서 동서가 왔는데 이번에도 손금본것이 들통나서 쫏겨낫는 갑다고 대충설명을 해주고 이기회에 셋이다 떡을아주 좋아하니 우리집에가서 이번에 떡이나 해먹자고 제의를 했드랍니다 아버지는 먼저집에와서 이모부님과 이동내 저동내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있는데 외숙모와 외삼촌이 들어오니 외할머니와 우리어머니는 언제나처럼 무조건 좋아하시면서 반가워 하셨드랍니다 외삼촌이 우리 어머니한테 " 새내 매양도 (매형) 왔는디 나도먹고 싶응게 (싶은게) 인절미나좀 히먹으면 (해먹으면) 좋것네이 " 그러자 외할머니 께서는 " 그려 성제간에 (형제간에) 머리맞데고 맛난것을 자꼬 (자꾸) 먹어야 정이드는 것이여 콩고물도 있응게 새내도 보내게 폿도 (팥) 좀쌂고 찹쌀을 한댓되를 얼렁 (얼른) 널벅지에다 ( 큰나무통 다라이) 담가라이 그리야 두집이 다먹제이 " 신새대 외숙모와 손이빠르신 외할머니덕에 찹쌀이 금방 쪄졌드랍니다 아버지와 줄포외삼촌이 절구통에든 찐찹쌀을 둘이서 떡메로 쳐대니까 금방 맛있는 찰떡이 만들어 졌답니다 우리아버지와 이모부님 두분은 술을안먹기에 떡먹기 시합이 있다면 1등2등을 할정도로 떡을 잘잡수셨 답니다 우리 어머니 께서는 " 찰떡을 닷되나 했는디 장장 (장정) 셋이서 먹으니 절반은먹어 버렸네이 앗따 겁나네이 " 우리 아버지와 이모부님은 평생을 살면서 입다툼을 한번도 안하고 아주 다정하게 잘지내셨 답니다
우리동내 부안촌이나 춘수리나 새내에서는 시집이나 장가를갈 딸이나 아들이있는 집에서는 우리 아버지한테 중매를 꼭부탁을 하였답니다 누가 그런 부탁을하면 아버지께서는 무슨띠고 무슨시에 태어난것을 물어보고는 그청탁을 100% 들어주셨답니다 간혹 태어난시를 모를때에는 그것도 모르고 왔냐고 나무라기도 했드랍니다 우리 어머니는 어렸을때 천자문 공부할때는 미련하다고 할아버지한테 이틀거리로 매를많이 맞았드라는 우리아버지는 누구네 아들이 무슨띠고 무슨시에 태어낫고 누집딸은 먼띠고 무슨시에 태어난것을 아주 귀신같이 잘외우고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어머니께서는 우리집 일이나허제 (하지) 씨잘디없이 (쓸데없이) 자그돈쓰고 (자기돈) 차타고 여그저그 댕김서 먼짓인가 (무슨짓인가) 몰라이 (모르겠어) 하셨드랍니다 " 저영감이 조리있게 말도잘못험서도 (하면서도) 중신허는 (중매) 기술 한가지는 참말로 용혀이 (신통해) " 그런활동 무대는 주로 우리동내와 춘수리와 새내를 비롯하여 톤날 (성내면) 용리(북면) 강고리(고부면) 월홍리 (내장면) 등계물 항골 상기동 등이었습니다 우리 어머니 말로는 우리 아버지가 중매를하면 거으가 성사가 되었고 아들딸 잘낳고 잘살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당시에 중매는 주로 가을에 많이해서 결혼은 거의가 겨울에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 가을일을 놔두고 중신 (중매) 한다고 돌아댕길때는 눈치를 했는디 결혼했다고 이받이를 갖고올때는 아조 (아주) 좋드라이 떡이랑 맛난전이랑 괴기랑 (고기) 간것을 (생선) 얻어먹을때는 맛나드랑게 (맛있드라) " 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중매한 사람들은 1. 이경용님 : 부안촌 2. 임종수님 : 부안촌 3. 김성구님 : 상기동 4. 한일석님 : 새내 5. 유동근님 : 항골 6. 이말제님 : 등계물 7. 오순자님 : 내장 월홍리 8. 박홍렬님 : 북면 용리 형님들이나 누나들이 모두가 돌아가시고 안계셔서 더이상은 알수가 없답니다
어느해 음력으로 7.5. 어머님 제사를 모시고 이튿날 큰형님 작은형님 큰형수님 작은누나를 모시고 주천삼거리 고부 백산 부안 격포를 거쳐서 내소사에 갔습니다 격포쪽으로 가는도중에 찻속에서 변산의 푸른바다를본 작은누나가 " 나는 이렇게 넓은바다는 처음보네이 국민학교 2학년때 큰오빠와 작은오빠 따라서 흥덕뒷깨로 기잡으로 (게) 갔을때 봉게는 (보니까) 별로안넓고 도랑같은것만 여러개가 보였는데 저렇게 푸르고넓고 겁나게 생겻네이 저그한번 (저기) 빠지먼 큰일나것네이 " 하면서 작은누나는 그날기를 (게) 잡으러 간다고 어머니가 대나무 도시락에 밥을싸 주시는걸 보았는데 3명이 먹고도 남을만큼 밥을아주많이 싸주는것을 부엌에서 보았드랍니다 그래서 오빠들을 따라서 흥덕뒷게로 (후포) 게를잡으러 가는곳에 따라갈련다고 따라나서니 작은오빠가 욕을하면서 " 이밥통아 (이바보야) 20리나 되는디 네깐것이 어떻게 따라와 " 하면서 큰소리로 못따라오게 하드랍니다 그러자 밥도시락 을들고 앞에가던 큰오빠가 " 놔두어라임마 자도 (저애도) 따라가고 싶어서 그렁게 (그러니까) 델고가 보자이 " 하드랍니다 그래서 신이나서 다리아픈 줄도모르고 따라가서 흥덕 뒷게바닷가 뻘밭에서 오빠들이 잡아주는게를 주전자를들고 다니면서 받아담았 드랍니다 어머니가 게를씻어서 간장으로 양념해서 반찬으로 졸여주었는데 기막히게 맛이있었 드라고 했습니다 내소사에 가다가 격포에서 해수욕장과 채석강을 잠시둘러보고 사진만몇장 찍고는 내소사에 갔습니다 우리 다섯은 내소사 전나무그늘 숲길을 걸으면서 우리는 다정하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내소사에 갔습니다 우리는 큰형님과 큰형수님이 큰수술을 하였으니 얼른 쾌유하게 해주시길 기원드리면서 부처님께 간절하고 간절하게 정성를 다해서 부처님께 절을했습니다 큰형수님과 작은누나는 내소사 앞에서 산채비빔밤이 맛있다고 먹자고 했으나 형님들은 오래간만에 몸보신도하고 선운사로가서 장어를 먹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선운사 입구에서 작은누나는 아직은 배가안고프니 자기는 선운사를 여지껏 한번도 못가봤으니 말로만 들었던 선운사가 어떻게 생겼는가 구경해보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형님들과 형수님은 날도더웁고 차에서 내려서 오리는 (2km) 걸어가야 한다고 내년봄에 동백꽃이 필때나 가보던지 가을에나 가보라고 말렸습니다 나는 일주문 입구까지만 갔다가 사진한장만 찍고온다고 하면서 작은누나를 태우고 갔습니다 큰형님께서는 " 야 우리가 다먹어 버리기전에 얼렁 (빨리) 와라이 " 하셨습니다
일주문 앞에서 한쪽에다가 차를세우고 통제소에가서 공손하게 절을하면서 신분증을 보여주면서 우리 누나가 허리를 다쳐서 걸음을 잘못걷다고 사정을 하였더니 쾌히 승락을 해주셔서 아주 고마웠습니다 그래서 차를타고 선운사 천왕문앞 한쪽구석에 차를세워두고 만세루와 대웅전 앞에서 사진을 한장씩찍고 대웅전뒤의 500년 - 600년이 넘었다는 뒷산의 동백꽃 나무들만 쳐다보고 왔습니다 나오면서 통제소에 들려서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면서 찻속에있던 켄트담배 두갑을 드렸더니 아주좋아 하셨습니다 싸리제 외숙모님의 친구가 한다는 동백장에 들어가니 그때서야 불판에 장어를 올리는중 이었습니다 큰형님께서는 왜그렇게 늦게오냐고 하시기에 선운사 대웅전까지 들어갔다 왔다고 했더니 " 참말로야 입구에서 통제하는 문지기란 놈들이 못들어가게 안허디 " " 걸어가서 공손하게 절을하고 신분증을 보여주면서 우리누나가 허리를다친 환자라고 사정했더니 들어가라고 하데요 " " 그려야이 (그래야) 내장사 문지기허는 놈들은 절대로 안보내 준단다 그리서 (그래서) 수시로 싸움도 헌단다 (한단다) 신도증인가 때문에 가끔멱살잡고 싸움도 헌데여 그런게 내장사 절입구에는 파출소가 안있냐 너갈때 그신분증좀 나한테 빌려주고 가거라이 나도한번 써먹어보게 " 그러자 작은형님은 큰형님에게 " 갈덜도 (그사람들도) 보면알제 형님같이 쭈글쭈글헌 영감탱이가 경찰관 이라고하면 누가믿것어 틀통나면 신문에나고 테레비에 나와서 야만 (이애만) 바보되고 징계먹제이 " " ㅎㅎㅎ 그러것다이 그러면 놔두어 버려라 " 모두들 풍천장어를 깻잎과 상추에싸서 아주 맛있게 잘먹었습니다 장어를 처음먹어 본다는 작은누나는 장어가 이렇게 맛있는줄을 처음으로 알았다면서 좋아했습니다 나는 작은누나에게 " 가을에 단풍들면 내장사와 백양사를 거쳐서 선운사 도솔암까지 구경잘시켜 드리고 또 장어도 사줄께이 " 하였더니 작은누나는 " 가을에는 고추도팔고 참께도팔고 돈을만징게 (돈을만지니) 내가돈을 다낼랑게 너는차만 태워줘이 " 하였으나 그약속은 서로가 시간이 안맞아서 차일파일 미루다가 작년10월에 작은누나가 하늘나라로 가셔버렸습니다 큰형님 께서는 " 말로만 풍천장어 풍천장어허지 고창군수나 경찰서장도 일년내가야 1-2마리맛만 본다드라 굵고 큰놈은 잡는사람들이 약이된다고 저그들이 그날로 다고와먹어 버린데여 단골한테만 준다고 하면서 손가락 만한것을 큰인심릏 쓰면서 판단다 일반양식장에서 사온놈도 3-4일간만 사료를 안주고 굶기면 풍천장어같이 뱃가죽이 누런해진다드라 그래서 뱃가죽을 보라고 하면면서 풍천장어라고 사기를 친단다 " 하셨습니다
고창으로 오면서 우리 어머니가 태어난 어머니의 고향마을 사창에 가봤습니다 그곳 사창은 언제나 그리운곳이고 내마음속의 고햠같기만 한곳입니다 사창 마을앞의 400년이 되었다는 느티나무들을 둘러보면서 사진도 여러장을 찍었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6살때까지 사창에서 살다가 소성면 두암으로 이사를 했다고 하셨습니다 이사한 이유는 금산군수를 하시던 외할아버지가 소성면 면장으로 발령이나서 춘수리로 이사를 오셔서 살고있기에 자식들은 (어머니와 이모님) 자기 아버지 옆에서 길러야 한다고해서 였드랍니다 어머니가 3살때 금산군수로 발령나서 가셨다는 외할아버지께서 금산군수를 17년간을 하셨다는데 어머니가 6살인 3년만에 금산군수가 소성면 면장으로 발령을받고 오셨다는것도 대략난감하고 이해가 안갔습니다 그문제로 형님들과 400년된 느티나무 아래에서 한참동안이나 갑론을박을 하였으나 근사치에 가까운답도 못찾았습니다 어머니가살아 계셨드라면 나는오늘도 디지게 욕을먹었을것 입니다 " 이썩은놈아 사창 부안촌 춘수리 새내 등계물 사람들이 다군수를 힛다는디 (했다는데) 왜늬놈만 우리 아버지가 군수를 안힛다고혀 (안했다고해) 완주군수도 3년이나 힛단다 이놈의 새끼야 " 간간이 벼이삭이 올라오는 정다운 들판과 싱싱한 고추밭과 고구마밭을 지나서 고창읍내에 왔습니다 큰형수님은 오늘이 무슨계모임 날인데 오늘저녁에 돈계산도 해야한다고 터미널에 내려달라고 하셨습니다 석정온천에가서 형님들의 등도밀어 드리면서 아주 즐겁고 좋은온천을 하였습니다 온천을 마치고 휴게실에 나오니 작은누나가 갈아만든배 음료수 한개를 들고와서 나를 주었습니다 우리는 안에서 다먹었다고 하면서 켄을따서 작은 누나에게 주었더니 작은누나는 목욕탕에서 전혀모르는 사람이 음료수를 사주기에 누구냐고 물어봤더니 그여자는 누나네동내 용산에사는 누구네 여동생 이라고 하면서 자기는 누나를 여러번 보아서 금방알아 보았다고 하드랍니다 그젊은 여자는 장성사는데 고개만 넘으면되니 석정온천이 유명하고 물이좋아서 가끔씩 온다고 하드랍니다 큰형님을 셋째딸인 봉숙이네 동물병원앞에 내려드리고 우리는 용산으로 왔습니다 선운사에서 장어로 점심을 잘먹고 용산에와서 수박과 참외를 먹었기에 저녁밥은 생각이 전혀없었는데 작은누나는 우리에게 저녁밥을 안먹고가면 서운해서 안된다고 저녁밥을 먹고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작은형님과나는 밥생각이 없으니까 밥을 반그릇씩만 담도록 부탁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밥상을받고 돼지고깃국을 떠먹어보고는 그기막힌 환상적인 옛날맛에 감탄을 하였습니다 어렸을때 어머니가 끓여주시던 그맛이 그데로 낫습니다 우리는 밥을한그릇을 더달라고해서 작은형님과 둘이서 반그릇씩을 더먹었습니다 묵은지에 미원이나 다시다등 조미료가 하나도 들어가지 안았기에 에날에 어머니가 끓여주시든 그맛이 낫습니다 " 야 용산에서 저녁을 안먹고 왔드라면 큰손해가날번 봤다이 어디가서 그런맛을 보것냐이 " 하시면서 웃음을 띠면서 흐뭇해 하시던 작은형님의 모습이 지금도 선하게 떠올랐습니다
이종형 이상균 형님은 (1941년생) 참으로 인정도많고 좋은분 이셨습니다 상균형님이 결혼하고 분가한곳이 우리 큰형님네 정미소옆 등계물 이었습니다 이종간 이지만 우리 큰형님네와는 친형제보다 더가갑게 지냈답니다 우리 큰형님네 논이나 밭일을 거의 상균형님이 전부다 간수를 해주셨 드랍니다 정미소에서 일을하는 故김창용 동생이나 지금 부안촌에서 살고있는 박종옥 동생도 상균형님의 말이라면 우리 큰형님의 말처럼 잘따라주며 항상 논일밭일을 함께하였 드랍니다 상균이 형님은 일년365일 자기집 에서는 밥을5번이나 먹을정도 였드랍니다 정미소 에서는 한식구 였기에 매끼니 상균형님의 밥이나 떡 과일등을 항상 챙겨두었 드랍니다 정미소에 찾아온 친척이나 손님들 중에서 누가 고스톱을 하자고하면 큰형님 큰형수님과 어울려서 날이환하게 샐때까지 고스톱을 했드랍니다 부모님 제삿날은 우리 부부와도 여러번 날을세면서 고스톱을 했었습니다 언제나 1등과 2등은 우리 큰형님과 우리집사람이 돌아가면서 했드랍니다 상균형님은 1등을 한번도 못하기에 우리 큰형님이 언제나 거절하는 상균형님의 본전에 약간을 더챙겨 주었드랍니다 그렇게 정답게 잘지내던 상균형님이 볼일이 있어서 정읍에간다고 깨끗한 옷을입고 버스를 기다리는데 1.5톤 화물차가 졸음운전을 했는지 상균형님을 치어버렸는데 머리를 다쳐서 현장에서 사망해 버렸드랍니다 정읍 아산병원 장례식장에서 이모님 께서는 " 입관식을 하는데 늬성이 (네형이) 안경을벗고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우는것을본게 (보니) 참말로 짠허고 고맙드라이 " 이종간 이지만 그렇게 정답게 지낸것이 고마웠다는 말씀인가 싶었습니다 우리 큰형님은 " 우리 해팔이가 (바로 아랫동생) 죽었으면 내가 이렇게 안울었을 것이여이 " 하셨는데 그말이 소문이나서 그소리를들은 우리 작은형은 큰형님에게 " 살다본게 별놈의 소리를 다듣네이 나도형님 죽으면 안울것인게 그런걱정은 말소이 " 하였으나 작은형님은 큰형님보다 6년이나먼져 하늘나라로 가셔버렸습니다
근40년 전쯤에 상균형님이 안틀JS님의 속임수에 빠져서 윷을놀아서 첫날쌀 2가마니 그튿날 쌀5가마니를 잃었드랍니다 닷세후에 진외갓집 조카인 SH한테 그말을들은 우리 큰형님은 상균형님을 기분좋게 달래면서 자초지종을 잘듣고 작은형님에게 전화를해서 카메라를 갖고와서 사진을 몇장만 찍어주라고 부탁을 하드랍니다 작은형님 차를타고 큰형님과 상균형님이 안틀에가니 윷놀이한집 주인할머니가 못들어오게 화를내면서 큰소리를 지르시기에 할머니가 정이러시면 노인이라 형무소 까지는 안가도 벌금이 쌀10가마니도 더나올 것이다 라고해도 할머니의 뱃장과 말대꾸가 보통이 아니고 말로는 못해보겠 드랍니다 그래서 큰형님이 안틀의 이장인 S를 부르니 형님이 무슨일로 안틀까지 오셨냐고 하면서 반가워 하드랍니다 상균형님과도 잘아는 S에게 사건화를 안하고 사기친것의 본전만 찾자는것 이라고 하면서 할머니를 잘설득 해달라고하니 이장인S는 난감하다고 하면서도 할머니에게 얼마나 겁을주었는지 몰라서 그랬다고하며 꼬리를 쭉내리드 랍니다 그래서 안방의 스위치 에서부터 부억과 마당으로 연결된 전기선을 전부촬영하고 상균형님이 괭이로 마당을파니 구리선이 6줄로 둥그렇게 감겨있어서 사진을찍고 그집에서 비닐봉지를 얻어서 스위치부터 전선을전부 담아갖고 왔드랍니다 상균형님은 어릴때부터 자기동내인 새내에서는 또래들 중에서는 짓고땅과 쪼이와 윷놀이를 제일로 잘했드랍니다 이번에도 곧노가 날판인데 자기가 던지면 개나(2) 도만(1) 만 나오드랍니다 정읍에서온 별볼일이 없이생긴 삐쩍마른 영감탱이가 언제나 소리지르면서 높게던질때 보면은 모나 (5) 나걸 (4)이 잘도 나오기에 이상하고 꼭 아슬 아슬하게 지는게 기가막혔 드랍니다 " 야 생각해봐라 너나 항골U와 반월리P가 던질때는 그냥 놔두니까 개나도만 나오고 정읍서온 영감탱이가 던지면 자석이 땅겨주니까 모나걸이 나오제 이먹통같은 먹구야 늬형수한테도 말을안할 것인게 걱정말고 다른디가서 노름이나 윷을절대로 안논다고 나허고 약속헌것 꼭지켜야 헌다이 (한다) 너한티 딸린식구가 맺이냐 (몇이냐) 다섯아니냐 다섯 한번만 더약속을 어기면 숙희엄마한테 너노름해서 없앤것 전부다 이야기 해버릴것이니 정신체리고 알어서 허그라이 너나한티 들킨게 몇번이냐 " " 인자 절대로 형님몰래 그런짓 안헐랑께 걱정허지 마시요이 (마세요) 절대로맹세 헐께요이 (할께요) " 항상 그러듯 상균형님이랑 일꾼들이랑 방앗간에서 저녁을 먹고있는데 안틀JS가 정읍이라고 하면서 전화가 왔드랍니다 우리 큰형님은 아랫방에가서 받을테니 5분후에 다시전화를 하라고한후 상균형님을 데리고 아랫방으로 갔드랍니다 안틀 JS가 나이는 우리 큰형님보다 두살이 많지만 소성초등학교는 1년후배여서 초등학교때부터 절친했드 랍니다 " 여러소리말고 살두짝 보관증과 쌀5가마니 차용증만 나한테로 갖고오면 되네이 상균이는 내가입단속을 잘시켜 놀것인게 걱정말고 셋이서 내일 신시장에서 점심이나 함께허세이 " 그랬는데 그날저녁에 형님과 아주 절친한 중학교동창인 북면사는 라이온스크럽 G사장을 데리고 방앗간으로 왔드랍니다 " JS형 그런다고 우아랫 동내에서 내눈탱이를 그렇게쳐대 버릴수가 어디가 있어응 " " 자네성 (형) 말데로 다뱃어내는 마당에 그런소리는 허지말세이 윷판을 붙여달라고 쫓아댕긴 사람이 동생아닌가 자네를 잡을려고 한것이 아니지 안는가 판을 키운사람이 자네가 아닌가 내가 먼염치로 변명허것는가 (하겠는가) 그만두세이 " JS님은 상균형님 때문에 안틀에서는 별로재미를 못보고 입암면 가는들에 가서는 따뜻했다고 하였드랍니다
초등학교 다닐때 작은누나가 밀가루에 사카리 물을타서 모싯잎 개떡을 쪄주면 뜨거운 개떡을 불어가면서 두개를 먹으면 배가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손잡이가달린 대바구니에 개떡을 4-5개 를담고 두됫짜리 주전자에 사카를물을 찰랑하게 타주면 언제나처럼 제공앞이나 석장뜽 밭에서 김을메시는 어머니한테 그것을 가지고 갔습니다 석장뜽 밭으로 개떡과 사카리물이든 주전자를 가지고 석장뜽밭에 가다가 뒷넘어 작은집 콩밭위 산에서 춘수리 애들이 숨박꼭질을 재미있게 하는게 보였습니다 한기석 유종철 장문호가 무슨일로 부안촌옆 산에까지와서 숨박꼭질을 하였습니다 유종철에게 왜여기까지 왔냐고 물어봤더니 " 문호가 여기산에 억새풀이 많이있다고해서 지게지고 억새풀을 베러왔어 말려가지고 땔라고 " 자기 이종간인 일가끼리 왔다고 하면서 " 샛거리로 멋을갖고가냐 먹을것있으면 쪼게만 (조금만) 주고가그라 " 하기에 큰인심을 쓰면서 개떡을한개 주었더니 사람이 셋인게 한개만 더달라고 했습니다 " 안되야임마 우리어머니가 해가떨어 질때까지 일을히야헝게 (해야하니) 배고픈게 안돼야 " 하면서 종철이와 이야기를 하는데 빨래하고 김치담근다던 작은누나가 왔습니다 " 막둥아 너여태까지 여그서 멋허고 있었냐 어머니가 배고프고 목마른디 여그서 먼지랄 허고있었어 이밥통같은 놈의새끼야 " 하면서 군밤을 서너차례 먹여댔습니다 누나는 무거운 주전자를들고 나는개떡 바구니를들고 여기저기 원추리꽃이 만발한 석장뜽밭에 갔습니다 놀다가 늦게온것을 어머니한테 이야기하면 또혼날까봐 걱정을 하면서 갔는데 그말은 안하기에 아주 좋았습니다 어머니는 사카리물을 꿀떡꿀떡 마시더니 우리밭 아래서 풀을메는 유종철이네 어머니를 불렀습니다 " 어이 지동네 지동네 " 하고 부르니 유종철이네 어머니 (지동댁) 가 도랑물에 손을씼으시고 오셨습니다 유종철 이네밭은 제공앞에서도 바로옆이고 석장뜽 에서도 바로언덕 아래에 있었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유종철이네 어머니와 개떡을 잡수면서 석장등에는 저놈의 쑥국새들이 참많이 있어이 하시면서 " 저놈의 쑥국새는 쑥국쑥국 지집죽고 자식주고 쑥국쑥국 험서울어싸이 " 하였습니다 지금도 7월이오면 원추리 꽃이피고 봄부터 울어대는 그쑥꾹새 소리를 들으면 석장뜽밭과 그때의 그리운 어머니 생각이 난답니다
우리 아버지는 자기말을 잘들어주고 호응해주는 황새고개 겸호당숙 춘수리터안 정판형님 부안촌 동내에서는 자기와 동갑인 구상양반과 안상님과 줄포외삼촌 그리고 어쩌다가 한번씩 오시는 남포리 할아버지 등께는 나름데로 대접도 잘해주셨습니다 대접이라고 해봐야 강주꿀 이모네 집에가서 외상으로 두부를 사다가 국을끓이고 막걸리 한되를 사오는게 전부였습니다 그런날은 어제나 백산외삼촌 에대한 고마운 이야기나 6.25때 정읍경찰서 유치장에서 죄익과 빨치산 모가지를 띨놈들이 휴발류를 뿌려대고 불을질렀는데 마침똥싸는 똥통옆에 앉아있다가 똥통속으로 들어가서 살아났다는 줄포 외삼촌의 이야기 그리고 만삭의 몸으로 빨치산들한테 붙잡혀서 처참하게 돌아가신 기만이 이모님 에대한 이야기들 이었습니다 그런 풍부했던 이야기들은 몇차례나 풀어서 여러번을 써먹었기에 들어주는 호응도가 시원하지 안하던차에 작년부터는 새로운 소제가 생겨났습니다 우리 아버지 형제간 4형제중 가장막내인 내장면 월홍리 작은아버지의 큰아들인 해인이 형님이 결혼을 한것입니다 해인형님은 소성초등학교만 졸업을하고 혼자서 객지인 익산의 원불교재단인 보화당약방에 무보수로 취직하여서 자기가 노력하여서 원광대학교를 졸업하고 원불교 교무님이 되었답니다 그래서 원광대학교 인근에서 큰과수원을하는 부잣집딸한테 장가를 갔답니다 그당시의 전라도 풍습은 커다란 교자상을 여러개를 이어놓고 신랑측과 신부측이 양편으로 앉아서 서로가 술도권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음식도 먹었드랍니다 신랑측은 한복을입은 옷도초라하고 사람들도 아주작고 자잘하였기에 볼품도 없었드랍니다 단한사람 조카인 해권이 형님이 양복을 입었고 키나풍채에서 사돈네한테 안밀렸 드랍니다 그런데 신부측은 혼주외에는 모두가 좋은양복을 쭉쭉빼서 입고있었으며 키도들크고 배도많이들 나왔드랍니다 거의가다 모가지가 돼야지 모가지처럼 굵드랍니다 우리 아버지는 그렇게 양복도 잘입고 겁나게생긴 사람들을 " 오동촌 우리동생이 (오남호님 1905년생) 그많은 사람들을 딸싹도 못허게 휘어잡어 버렸당게 영조와 정조에대한 이야기와 명심보감과 맹자와 공자에 대해서 물으니 아무도 대답을못혀 그사람들은 순전히 먹통들 이드랑게 ㅎㅎㅎ " 우리 아버지는 혼자서 북도치고 장구도 치면서 신이나서 이야기를 몇번씩 하셨습니다 가끔씩 줄포외삼촌이 언중유골 식으로 " 오동촌 그사돈이 매양을 (매형) 별로좋아 하지도 안허는디 매양은 그사돈을 그렇게추겨 세우는가 몰라이 " 하면서 염장을 질러데도 입맛만 다시면서 자기동생 자랑을 계속했습니다 " 해인이가 원광대학에 들어갈때 잘사는 큰집들한티 쌀다섯짝만 해달라고 사정했을때는 쳐다도 안보다가 대학졸업하고 장가간다니 우루루 몰려가서 잘얻어먹고 왔그만이 " " 자네는 왜또 씨잘때기없는 소리를 히쌌는가 (하는가) 우리는 그때 가마니반 히주었어 (해주었어) " " 매양이 (매형) 멋을히주어 (무엇을 해주어) 누님이 입석양반한티 빚얻어서 히주었제 " 아버지와 줄포 외삼촌은 사이가 아주 좋으면서도 언쟁이나 토론때는 언제나 외삼촌한테 KO패를 당하셨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