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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년 새해입니다.
새삼, 2000년도, 밀레니엄엘 들어서면서 온 자동 시스템에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까 하는 긴장과 불안함 속에서, 한편으로는 지구촌 전 인류가 21세기라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며 흥분 속에서 막연하게 유토피아적인 행복에 대한 희망의 삶을 기대해 보았던 기억이 전설처럼 떠오릅니다. 그 이후 매 새해원단에서, 이 지구촌, 이 사회의 삶에 대하여 항상 절망을 느끼기가 올 새해로 아홉 해를 넘겼습니다. 세상과 사회에 대하여 그러할진대 개인적인 살에서도 어찌 예외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시간도, 공간도 모두 실체가 없음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관념적으로 시간과 공간에 의지하지 않고 삶을 살아가는 것은 생각도 해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상정해 놓은 시간과 공간의 의미가 이미 실체로서 우리의 삶에 깊숙이 기능하고 있기에 새해가 되면 항시 새로운 한 해에 기대를 걸어보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그렇지만 그 해의 끝에 설 때마다 마음 저변에 흐르는 자책과 자괴감, 공허감 그리고 때로는 두려운 마음까지 속내를 타고 표면으로 올라오는 것을 늘 경험하였을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들은 표면을 올라오는 그 자신의 문제점들에 대해서 고개를 획하니 돌리거나 슬그머니 발뺌을 하며 딴 곳으로 마음을 움직이는 것 역시 늘 경험하였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한 해를 보내며 자신의 문제점과 약점에 대한 성실하고 냉철한 반성과 분석, 나아가서는 자기 탐구하기를 생략한 채 새해를 맞이하여 무엇을 기원하는 것은 어떤 것이 우연히 실현되도록 기다리는 꼴이니 당연히 실현 가능성은 거의 희박합니다. 따라서 한 해 끝에 설 때면 또 다시 같은 화살을 맞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오늘날 전 세계의 사람들이 겪고 있는 세계적 경제 불황은 그 원인을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지만, 특히 이른바 ‘세계화’와 ‘경쟁’ 그리고 필요를 충족하면 그것이 곧 행복이라는 행복관과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또한 경제활동의 무대가 세계화되었으니, 탈이 나면 세계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치열한 경쟁이 날로 가속화되고, 그 경쟁에 지지 않을세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다보니 경쟁의 순리와 도덕성은 약자의 진부한 말처럼 돼버린 지 오래입니다.
경쟁은 이기기 위해서 하는 것이고, 이기는 것은 자기의 욕망을 실현시키는 수단이며, 욕망은 곧 ‘나’를 내세우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자나 깨나 실체도 없는 ‘나’에 홀려 모든 일에 ‘나’를 내세우고. 바로 그 ‘나’를 중심에 두고 모든 일을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나, 내 몸, 내 가족, 내 사업, 내 나라 등과 같이, 모든 일에 ‘나’를 세우다 보니 나에게 조금이라고 해롭거나 이롭지 못하면 화를 내고 반발하며, 나에게 이로운 일이면 사람으로서의 기본적인 양심, 윤리 등을 과감하게 외면해 버리며 남을 깔아뭉개고라도 실현하려 버둥댑니다.
모든 ‘나’들, 각자 각자가 앞뒤를 가릴 것 없이 다투면서 조금이라도 더 큰 욕심을 채우려다보니 결국 순리는 뒤로한 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속임수 정치, 속임수 경제도 마다하지 않게 될 수밖에 없는 노릇이 되어버렸습니다. 현 대통령이 국민 대다수의 의견을 ‘소귀에 경읽기’ 마냥 묵살하고, 4대강 사업을 벌리며 국토의 심장을 파괴하려는 것 또한 같은 맥락에서의 작태일 뿐이라 생각됩니다.
세상이 경쟁에 광분되어 너무나 배타적이고, 돈벌이의 성취만을 가치로 여기는 풍조이므로 모두가 상대적 빈곤에 빠져서 너나할 것 없이 아등바등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200년대 초반의 우리사회는, 쫓겨난 노동자, 정규직을 달라고 아우성치는 노동자들의 투쟁, 그들보다 더 슬픈 이주 노동자들, 농촌에 남겨진 늙은 농민들, 진정한 삶의 교육은 받지 못하고 입시 교육 속에만 내동갱이 쳐진 아이들, 교실에 엎드려 자는 아이들, 어떻게 하든지 아이들의 학원비를 맞벌이로 해결해야 하는 알바 어머니들, 벌기는 어려워도 소비로 행복을 느끼려는 신세대의 젊은이들, 국민 중산층의 보편적 행복 보다는 소수의 기득권자들의 부의 축적에 맞추어진 경제 구조 그리고 그것을 위한 정책 입안자들과 집행자들, 그리고 포크레인과 신작로 도로에 잘리우는 산천과 들판, 농토, 어마어마하게 메워지는 온갖 자원과 바닷물 정화기인 갯벌, 이러한 이그러진 탁류가 폭류를 이루며 흐르고 있는 광경입니다.
그리하여 겉으로는 민주 사회에서 자유와 평등이 당연히 존재하는 것 같으나 실제적으로는 상위 소수 집단과 나머지 집단 간의 빈부 격차는 인격의 격차로까지, 마치 계급 같이 점점 더 굳어져, 뒤쳐진 사람들은 아등바등 거리며 살아봐야 별 뾰쪽한 수가 없을 것을 느끼며 절망하고 있습니다.
사회의 분위기가 이러함으로 가지지 못한 자들은 절망 속에서 화병 환자, 우울증 환자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근간에 부쩍 아토피 환자와 우울증 환자가 증가 일로에 있습니다. 그런데 경쟁의 정상에 있는 사람들의 삶도 공허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선진국일수록 우울증 환자가 많고 자살자도 많은 것이 그것을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완전한 소유의식은 구조적으로 대립과 갈등으로 인한 소외의식과 고독감을 돈보다 먼저 몰고 오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소유 상실감과 소유의식 그리고 경쟁의식은 현대문명의 고질병인 우울, 중독, 막연한 공격성향을 보편화 시킵니다. 이들 우울, 중독, 막연한 공격성향 등은 같은 원인에서 나옵니다. 그것은 삶에서 별 기대할 게 없다는 절망감입니다.
나 혼자 마음의 평화를 찾고 고요한 일상을 보내고 싶어도 탁류에 휩싸여 떠내려가듯, 나 홀로의 삶의 본연의 자리를 지켜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세상의 흐름에 떠밀려서 본의 아니게 혼돈의 삶을 살면서 남의 탓만으로 돌리면 나의 삶이 너무나 보잘 것 없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여기서 우리는 설사 사회적 탁류에 떠밀려서 흘러가더라도 자기 자신의 마음의 고요와 절대적인 평정을 지켜내는 데서 삶의 의미와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새삼 다짐해야 합니다.
니이체는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어떤 상황도 견길 수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삶의 의미를 찾아줌으로써 건강함을 되돌리려는 ‘로고테라피(logotherapy)’의 창시자이기도 한 빅터 프랭클은 아우슈비츠에서 보낸 3년간의 체험에서 쓴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에서, “아우슈비츠에 도착한 순간, ‘죄수’들의 인생은 깨끗이 사라져 버린다. 번호 매겨진 예비 주검으로서 살아 갈 뿐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혹독한 시련을 겪으며,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 뺏길 수 없는 인류 최후의 자유를 깨닫는다. 닥친 고난을 자신을 강하게 하고 가치를 만드는 계기라고 확신한다면, 시련은 오히려 축복이 된다. 아무리 잔혹한 독재자라 하더라도, 이 자유만은 빼앗을 수가 없다.”고 반전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수용소 안에서 치료한 젊은 여성은 죽음을 앞두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운명이 이렇게 엄청난 충격을 준 데 대해 감사하고 있어요. 그전까지 저는 제멋대로였고 정신의 만족 같은 것에 대해 진지해 본 적이 없었거든요.”
시대가 혼란스럽지 않다면 영웅도 태어날 수 없습니다. 만약 시련이 닥치지 않았다면 그녀는 결코 세상에 대한 깊은 성찰에 도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렇듯, “시련의 이유를 알면 고통은 멈춥니다.”
우리는 수행의 필요성을 절감한다는 측면에서, 자기 자신의 내면의 문제점, 결점, 약점을 ‘알아차림’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삶의 방식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자기 이해의 통찰은 삶에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지니게 해줄 것입니다.
프랭클은 삶의 의미 찾기를 포기한 사람은 며칠 못가서 죽음에 이르렀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반면, 삶의 의미를 끊임없이 되묻는 사람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삶의 의욕을 잃지 않았다고 술회하고 있습니다.
도스트예프스키 또한 “나는 나의 고통이 의미 없어질 때가 가장 두렵다.”라고 말했습니다. 자기 인생의 의미를 놓아버리는 순간, 자신의 모든 시련은 감내해야 할 그 어떤 이유도 찾을 수 없는 절대 고통으로 변해 버리는 것입니다.
삶에서 부정적인 상황으로 고통을 받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로지 그 부정적인 상황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데만 온갖 신경을 집중하며 안간힘을 씁니다. 그러나 벗어나려 하면 할수록 마음은 더욱 괴로움 쪽으로 조여집니다. 비슷한 예로 콤프렉스는 피하려 하면 할 수록 오히려 더 강하게 조여듭니다. 오히려 콤플렉스를 받아들이고 당당하게 내세울 수 있을 때, 마음의 짐은 조용히 사라져 버립니다. “신경질환자가 자신에 대해 웃을 줄 알게 되면 그가 자신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음을 의미한다.”고 심리상담학에서는 주장하고 있습니다.
인내하는 존재인 인간은 가치 있는 목표를 향해 꾸준히 상승하는 과정에 있을 때 비로소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자기 삶의 의미를 찾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학력, 경력, 재산 등에 대해 우리 사회에서 암묵적으로 통용되는 ‘연령대별 출세 기준표’가 너무도 견고한 탓입니다. “이 나이 때는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자기 의미를 찾기 전에 남이 부여한 의미에 치여 삶이 상처나서 찢기기 십상입니다.
‘들어닥친 부정적인 상황에서 자신의 내면의 문제를 단지 그냥 알아차림할 수 있는 자유’는 경쟁에 치인 우리의 숨을 틔워줍니다. 뿐만 아니라 문제에 대한 근원적인 해결책의 실마리를 제공해 줄 것입니다. 적어도 우리는 아우슈비츠에서보다는 행복하게 살고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우리의 절망은 보다 근원적인 것은 확실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스스로를 속이는 ‘거짓 희망’에 중독돼 버렸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과 많은 책들은 너무나 당연하게 희망을 지녀야 한다고 녹음기 마냥 지껄여 왔습니다. 하도 지껄여 대어 이제는 그것이 가슴에 와 닿지도 못합니다.
절망적 현실을 절망으로 인식하기는커녕 희망이라 착각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래서 다시 절망적 현실에 눈감고 손쉬운 거짓 희망에 위안을 삼으려 한다는 점에서, 우리의 절망은 깊고 단단하기만 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절망을 극복할 길은 없단 말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길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최소한 쉽게 그 길을 제시할 수 없는 것만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손쉬운 해결책이란 또 다른 거짓 희망에 불과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노신은 <고향>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희망이란 본래 존재한다고도 할 수 없고,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할 수 없다. 희망은 땅 위에 난 길과 같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걷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노신은 ‘희망’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노신이 말하는 희망은, 쉽게 발해지는 장밋빛 희망의 수사가 결코 아닙니다. 위에 인용된 구절 그대로 노신에게 희망은 “본래 존재한다고도 할 수 없고,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할 수 없”는 그런 것입니다.
값싼 희망을 외치는 것보다는 현실의 어두움과 암흑을 있는 그대로 보는 눈이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현실의 절망을 정직하게 대면한 이후에야 희망을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희망이 있기 때문에 걸어가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걸어가는 이상, 희망이 없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희망’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정작 중요한 것은 희망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실천적 생동이며 저항입니다. 그런데 실천적 행동이나 저항일지라도 그것이 손쉬운 희망을 전제한 것이라면 이 역시 거짓 실천이고 거짓 저항이기 쉽습니다. 사실, 희망은 쉽게 미리 말해져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땅 위에 난 길”처럼 실천적 행동의 결과물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희망이 있을 수 없다는 점을 확신하면서도 그것을 말살시킬 수 없는 것이고, 전혀 희망적이지 않으면서도 자기 길을 묵묵히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절망적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아니 최소한 지금의 절망적 현실을 더 절망적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는, 그래서 그 절망 위에서 ‘미래의 희망’을 키워내기 위해서는, 그 절망을 온전히 대면해야 합니다. 그런데 묵묵하게 그 절망의 내면을 대면하며 단지 그냥 지켜보는 것, 그 자체로 엄청난 긍정적인, 희망의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반드시 생각해야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희망은 아주 더디고 오랜 시간 동안 스스로의 힘으로 그 형태를 갖추어가는 ‘길’과 같은 것이지, 공장에서 한 순간에 찍어내는 물건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것이 작고 하찮은 것들이면 더욱더 ‘희망’이라는 딱지를 붙여 성급하게 광장에 드러내는 일은 당장에는 그것이 더 빨리 성장하는 듯 보일지라도 결국 그 성장의 효과에 비례해 그 쇠멸의 속도 역시 빨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면 그 작은 씨앗들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씨앗들이 당면한 우리의 문제를 즉설적으로 해결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절망이 더 깊어진다 해도 가슴 아파하거나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럴 때만이 보다 정직하게 절망을 대면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제스처뿐인 절망으로는 어떤 희망도 길어낼 수 없습니다. 우리의 절망에 눈감는다면 당장의 희망은커녕 미래에 혹 있을지도 모를 희망의 싹마저 사장시켜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기 쉽습니다. 역설적이지만 지금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① 그 절망 또한 삶의 중요한 주제로 받아들이며 인정해야 한다는 의식의 전환이고,
② 받아들이는 그 절망의 내면의 마음을 더욱 더 허심탄회하게 들여다 보아 통찰하는 것입니다.
이렇게만 할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놀랍게도 다음과 같은 혁명적인 전환을 맞을 가능성이 열릴 것입니다.
첫째, 소박하게 살기
둘째, 조화롭게 살기
셋째, 깨어 있으며 살기
넷째, 즉하며 살기
여기에서 수행하는 수행자 모두는 이와 같이 살기를 새해의 서원으로 세우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이러한 서원을 가능케 하기 위해서 마땅히 수행의 한가운데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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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싸두 싸두 싸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