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정: 앞서 인용한 「특집 광주 15년 - 총, 누가 먼저 쏘았나」는 한국논단 1996년 1월호가 아니라 1995년 제69호로 확인되었습니다. 전남대 5ㆍ18 연구소 측의 자료표기가 잘못된 것 같습니다.
아울러 앞서 글에 인용된 한국논단 측 실제자료를 올립니다.
② 총기 관련 - 시위대의 총기무장 시점과 발포시점
‘폭동설’ 은 시위대가 먼저 총을 쐈다고 주장한다. 1995년 한국논단의 기사(「특집 광주 15년 - 총, 누가 먼저 쏘았나」, 제69호)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총기로 무장한 시위대가 군·경 저지선을 돌파하기 위해 무차별 난사했다면 그들은 그야말로 폭도나 다름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설명의 근거가 되는 것은 무엇일까? 이에 『계엄사』라는 자료가 다시 등장하게 된다.
… 민주주의는 '공평'(Fairness)이 그 근저에 깔려야 가능해진다고 믿는 <한국논단>은 그동안 특정세에 밀려 형성된 여론의 불공정성을 바로잡기 위해, 왜곡되지 않은 역사의 정착을 위해 그동안 가리워졌던 나머지 1백80도의 진실을 캐내어 만천하에 알리려 한다. 그런 의미에서 1982년 3월 육군 본부가 펴냈던 계엄사(戒嚴史) 가운데 '광주사태' 부분을 여기 공개하는 것은 귀중한 역사적 의미가 있다 하겠다.
다음은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10일간 광주에서 일어난 사태를 육군계엄사령부 당국이 기록한 일지이다. …
- 「특집 광주 15년 총, 누가 먼저 쏘았나」, 한국논단, 1995년, 제69호
한국논단의 취지와 용기에 경의를 표하지만 과연 그 자료를 있는 그대로 믿을 수 있을까? 왜냐하면 전혀 다른 「광주진압 계엄군 작전일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1988년 「말」지 26호를 통해서 공개된 ‘계엄일지’에서는 5월 20일의 주요사태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에는 시위대에 의한 무차별 총기난사 등의 정황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진실’을 담고 있는 다른 계엄일지가 존재하는 것일까? 그 비서(秘書)가 공개되기 전까지는 어쨌든 공개된 계엄일지를 참고할 수밖에 없다. 또한 다른 증언이나 자료에서도 20일 밤에 시위대가 총기를 난사했다는 식의 주장은 반증된다.
20일의 계엄일지 중 '23시 20분, 시위군중 지역에서 총3~4발의 총성이 들렸다'는 민간인의 신고는 주목할 만하다. 누가 어느 장소에서 총성을 듣고 어느 곳으로 신고했는지는 의문의 영역이지만 그 기록을 토대로 한다면 시위대에서 먼저 총을 발사했다고 가정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에 앞서 시위대가 최초로 총으로 무장한 시기는 언제일까? 또한 총은 어디서 난 것일까?
계엄일지에 따르면 5월 18일 새벽 3시에 군사령부에서 '예비군 무기고 안전대책 강구 조치'가 내려지게 된다. 그리고 그에 따라 광주시내 전역과 직장예비군의 무기는 군부대로 옮겨지게 되고 무기고 접근자에 대한 발포 승인까지 내려지게 된다.
이러한 조치는 20일에도 계속되며 미회수 총기와 탄약에 대한 특별조치(사용불능 상태로 만드는)까지 취해지게 되며 총기피탈은 엄중문책 할 것이라는 지시까지 내려지게 된다.
이상의 장황한 설명을 더한 이유는 민간인에 의한 총기탈취가 결코 쉽게 이루어질만한 일이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자 함이다. 즉 한국논단의 기사에서 말하는 총기난사와 같은 행위는 21일 이전까지는 없었을 것이라고 결론 내려야 할 것이다.
물론 군의 총기확보가 완벽했던 것은 아니다. 계엄일지에 따르면 19일에 M-16총기 1정이 분실된다.
허나 이 M-16이 누구에게 입수되었으며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왜냐하면 증언에 의해 확인된 시민군의 최초무장 총기는 M-16이 아니라 칼빈소총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실탄이 없는 칼빈소총이었다. 그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21일 - 인용자) 오전 8시가 지나면서 2구의 시체를 앞세운 시위군중은 가톨릭센터 앞에서 50m 간격을 두고 공수부대와 대치했다. 처음 1만여명이었던 군중은 계속 늘어나 10시 쯤에는 5만여명으로 불어났다. 이들은 금남로를 꽉 메웠다. 이 시위 군중들 중 맨 앞줄에 있던 3,4 명이 카빈소총을 들고 있었다. 나머지는 대부분 쇠파이프나 몽둥이로 무장하고 있었다.
시위군중이 가지고 있던 이 카빈소총의 출처를 놓고 몇가지 논란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이 카빈소총은 전날밤 광주세무서 예비군 무기고에서 갖고 온 17정 중 회수되지 않은 일부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나는 전남 경찰국 주상섭(朱相燮) 통신과장을 만나 그때의 상황을 들어보았다.
"20일 밤 시위대원의 무기탈취 사건은 없었습니다. 특히 나주에서 있었다는 것은 그때 통신을 맡고 있었던 나로서는 전연 알지 못하는 사실입니다. 당시 나주경찰서장도 광주에 와 있었는데 서장이 모를리 있겠습니까? 만약 있었다면 나주경찰서뿐 아니라 경찰국 전체가 비상이 걸릴 만큼 큰 사건이었지요. 어찌됐건 내가 휴대하고 있던 무전기에는 전연 그런 사실이 잡히지 않았으니까 없었던 게 분명합니다. 시위대원의 무기탈취는 다음날 오후 공수부대의 발포 이후로 알고 있습니다. 이날밤 광주세무서 무기고에 있던 17정의 카빈이 시위대원들의 손으로 넘어갔으나 광주경찰서 간부의 설득으로 순순히 내놔 모두 광주경찰서에 반납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혹시 2, 3정이 빠져나갔는지도 모르죠. 이 카빈에는 실탄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에 대해 뒤에 학생시민투쟁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은 정상용(鄭祥容)도 1988년 1월 27일 국회청문회에서 광주세무서 예비군 무기의 일부일 가능성이 많다고 증언했다. …
- 김영택, 『5ㆍ18 광주민중항쟁』, 동아일보사, 1990, p118~120.
이상의 논의에서 시위대의 총기무장시점은 21일 이후로 잡아야할 것이라고 결론내릴 수 있겠다. 2만여명 이상의 시위대가 행방이 불분명한 M-16 한 정, 실탄이 없는 칼빈 3정을 소지한 것이 총기무장이라고 할 수 없다면 말이다. 시위대의 발포 역시 21일 이전에는 확인되지 않는다. 시위대를 폭도로 만들 필요가 있는 군의 자료에서 21일 이전 시위대의 총기무장이나 총격은 확인되지 않는다. 최소한 21일 이전 시위대의 총격에 의한 군의 사망자는 없다.
여태까지 시위대의 총격에 초점을 두었다면 초점을 이동시켜 진압군이 최초로 발포한 시점을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폭동설’의 주요 논리 중 하나가 시위대의 선제 총격 탓에 군이 자위권 발동 차원에서 대응사격을 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시위대의 총격 시점은 21일 이후로 미뤄지지만 군의 총격시점은 그보다 훨씬 앞당겨진다. 물론 계엄일지에는 군의 총격에 대한 언급은 없다. 따라서 5ㆍ18을 다룬 한 외신보도의 기사를 재인용해보겠다.
"무장 공수부대가 발포를 계속 했지만 이미 타오른 시위는 그칠 줄 몰랐다. 20일 밤 충돌로 3명의 시위자와 4명의 경관을 포함하여 적어도 7명이 죽고 1백명 이상이 부상했다. 광주 현지의 기자는 21일 아침 도로변에 10구 정도의 시체가 버려져 있었으며 2만여 시위대가 시위를 계속했다고 전했다. 20일 밤 11시경 시위군중이 광주역을 점거하려 하자 약 20분 동안 무장군대는 M16을 난사하였다. 발포로 인해 어느 정도의 사상자가 발생했는지는 정확히 알려지고 있지 않다. 이날 아침 가두에서 시위군중과 군대의 충돌이 계속되었다. 이 충돌로 인해 상당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오전 9시경 시위대는 3만여명으로 늘어났으며 몇몇 기자들은 곧 광주가 군경에 의해 봉쇄될 것이라고 전했다. 저명한 반정부 정치인인 김대중의 고향 근처에 위치한 광주의 시민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무장군대와 전면적으로 충돌한 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20일 아침 시위군중들은 전날 밤 가두전투에서 획득한 군용지프차를 몰고 다녔다. 주유소는 시위차량에 무료로 급유해줬다. 다수의 시위자들은 몽둥이, 쇠파이프, 식칼, 낫 등으로 무장했다. 그들은 20일 오후 방송국을 불태우고 시내 몇곳을 점거했다."
이상은 21일 UPI가 보도한 20일의 상황이었지만 광주시민은 물론 국내에 있는 국민 아무도 이 기사를 볼 수가 없었다.
- 김영택, 같은 책, p.114~115.
이 기사를 신뢰한다면 20일 총기를 난사한 쪽은 시위대가 아니라 진압군 쪽이 되는 셈이다. 21일 시위에 대열 맨 앞에 태극기로 덮인 채 리어카에 실려있던 2구의 시신은 전날의 발포에 맞아 숨진 사람들이었다. 전날 광주역 일대에서 숨진 사람은 3명으로 밝혀졌다. 김재화(26세), 김만두(45세), 이북일(28세)이었다.
김재화는 21일 0시부터 맨 선두에서 시위를 벌어던 중 가슴 한복판에 공수부대원의 총탄을 맞고 곧바로 노광철 의원(醫院)으로 옮겼졌으나 숨졌다. 김만두는 조카를 찾아 나섰다가 역시 비슷한 시간에 총격을 당했고 이북일도 시위도중 귀밑에 적중한 총탄을 맞고 희생되었다. 김재화는 곧바로 병원으로 옮겨졌기 때문에 이날 아침 일찍 리어커에 실려 금남로에 나온 2구의 시신은 아마 김만두·이북일이 아니었나 여겨진다.
- 김영택, 같은 책, p.117.
이는 후에 다룰 ‘선동설’의 근거 일부를 무너뜨리기도 한다. ‘선동설’은 시체를 위장해서 태극기로 감싸고 리어카에 실어서 군에 대한 적개심을 유발했다고 주장하지만, 그 시체들은 실제로 군에 의한 희생자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다른 자료에서도 20일 군의 총격을 찾아 볼 수 있다.
5월 20일
22시 55분
*광주 역 쪽에서 군인들이 수백 발 발포하고 있음. 취재접근 어려움. 중요서류, 직원들이 도청으로 옮김. 총 쏘고 시민 함성소리...... 무법천지 공포의 도시. 유난피해 우려. 도청에서 서 기자 탈출. 사진기자 이영배씨 지사 쪽에 있는 듯. 발포피해 상황 아직 모름. (#조선일보 취재일지)
*본사에 기사를 송고하고 있을 때 광주 역 쪽에서 이날 처음으로 총성이 울리기 시작했다. 수백 발의 총성이 계속 났다. 밖에 뛰쳐나가 보니 그것은 공포탄이 분명했다. 빨간 불덩이가 쉴새없이 서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불길한 징조였다. (#조선일보 취재일지)
23시
*M16 100여 발의 총성. 927명이 연행됨. 금남로에서 50여 대의 차량이 파괴 또는 전소됨. 시청이 일부 파괴됨. 이날 밤, 10,000여 명이 공용터미널에서 철야.
*중심지(금남로)에서 데모주력 시민들이 강제진압(군인들이 페퍼포그 쏘아)으로 흩어짐. 중심지 옥상에서 사진기자 이영배씨와 같이 있음. 광주시청 앞에서 11시에 사격개시. 1백여발 유탄 50여발은 공중으로 날아가고 나머지는 안보여. 공포위협 사격인 듯. (#조선일보 취재일지)
- 「광주민중항쟁일지」, 한국현대사사료연구소, p.87.
군의 계엄일지를 보면 20일 23시 20분 군 작전지침 추가지시를 통해 ‘발포 금지 및 실탄 통제' 지시를 내리고 있다. 이 당연한 조치가 새삼 추가로 지시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 역시 20일 군의 총격을 뒷받침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허나 밝혀진 바에 따르면 진짜 최초의 총격은 19일에 있었다. 그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오후 4시 30분 계림동 파출소와 광주고등학교 중간쯤에서 장갑차 1대를 시위대원들이 포위했다. 시민들이 사람의 벽을 쌓아 장갑차의 전진을 막아버린 것이다. 시내에서 광주고등학교 쪽으로 이동하던 이 장갑차는 보도위에 군중들이 운집해 있자 두려움을 느낀 나머지 속도를 줄이다가 그만 보도 위로 뛰어 올랐다가 시동이 꺼져버렸었다. 이 장갑차는 가로수 한 그루를 들이받으면서 앞바퀴 구동축이 보도난간에 부딪쳐 버렸다. 군중들은 장갑차의 양쪽에 달린 감시경을 돌로 깨어버렸다. 장갑차의 눈을 빼앗은 것이다. 장갑차는 꼼짝 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안에는 장교 등 9명이 타고 있었다. 그들은 밖으로 나오려다가 모여있는 군중들이 ‘저놈들 죽여라’고 외치자 그 중 2명은 도망가고 7명은 다시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성난 군중들이 근처 페인트상회에서 석유통을 구해다가 장갑차 밑에 불을 질렀으나 발화되지 않았다. 다시 짚더미를 가져다 불을 질렀으나 타지 않았다. 군중들은 불이 붙은 짚더미를 들고 올라가 뚜껑을 열고 그 안에 집어 넣으려 했다.
그러자 갑자기 뚜껑이 열리면서 총탄이 발사되었다. 공수부대원들이 처음에 하늘을 향해 발포했으나 군중들이 해산의 기미를 보이지 않자 군중을 향해 발포했다. 이 발포로 조선대 부속고등학교 3년생인 김영찬(19세)이 손과 대퇴부에 3발을 맞고 쓰러졌다. 김영찬은 급히 조대부속병원으로 옮겨졌고 장갑차는 군중들이 웅성거리는 틈을 타 쏜살같이 달아나버렸다. 공수부대원이 투입된 후 최초의 발포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총을 맞고 피를 흘린 김군은 시민들의 도움을 받아 전남대의대 부속병원에서 8개월 동안 치료를 받고 그해 12월 퇴원했다.
- 김영택, 같은 책, p76-77.
한국논단의 기사「특집 광주 15년 총, 누가 먼저 쏘았나」는 그 거창한 제목에도 불구하고 시위대의 선제 총격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그러한 주장의 근거가 되는 자료의 출처 역시 불분명하기 이를 데 없다. 자신들만의 사실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며, 자신들만의 5ㆍ18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이상에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최초의 총격은 진압군에 의한 것이었고, 최초의 총격 부상자와 사망자는 시위대에서 나왔다. ‘누가 먼저 총을 쏘았나’에 대한 대답은 군인이고, ‘누가 먼저 총에 맞았나’에 대한 대답은 시위대이다. 총격과 관련한 사실관계가 ‘폭동설’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결론에 직접적인 도덕적 함축이 담겨있지 않음은 언급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어쩌면 ‘누가 먼저’ 하는 문제는 크게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2002년 한국논단에 실린 지만원씨(나는 이사람이 어떤 인물인지 잘 모른다)의 글을 인용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 후기
다음 글은 ‘선과격시위설’에 대해서 다룰 예정입니다. 그리고 나서 차례로 5ㆍ18 기간 내의 범죄(방화 등), 구호, 유언비어, 선동세력 등에 대해서 다룰 예정이며 순서가 변경될 수도 있습니다.
논쟁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다만 우려하는 것은 자료에 대한 문제입니다. 나 역시 전문가가 아닌 아마추어이기 때문에 자료 접근과 해석에 부족함이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나와는 다른 해석을 보여줄 것이라면 그 해석의 근거에 대해서도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제시한 자료의 신빙성을 문제 삼을 것이라면 그 신빙성을 의심할 수 있게 하는 다른 자료를 보여주셔야 논쟁이 수월하게 이루어질 것이며 경우에 따라선 내가 수용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첫댓글5.18 폭도들은 5월 18일부터 총기를 소지하고 있었습니다. 폭동주동자 윤상원의 동지였던 노동시인 박노해의 <윤상원 평전>(인터넷에서 쉽게 검색할 수 있는 전남대 5.18연구소 사이트 자료)에 의하면 윤상원이 518광주폭동을 선동하기 열흘 전에 이미 김대중의 조직(미등록 정당이었던 국민회의)이 무기탈취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습니다. 김대중 조직이 광주사태 열흘 전에 이미 유혈사태를 준비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2년전 말지에 의해 재확인된 바 있습니다. 5.18옹혼 언론이었던 말지에 의해서 말입니다.
20일 밤 광주역 앞 시위에서 공수부대의 발포로 한 사람이 가슴에 총상을 입고 바로 인근 병원으로 후송을 해서 죽는다고 합니다. 시위가 끝난후 누군가에 의해 비어있는 광주역 대합실에서 2구의 시신이 발견된다고 합니다. 그 시신이 바로 21일 아침에 리어카에 실려서 시위대 앞장에 세워지는 희생자들 입니다. 이렇게 20일 3명의 시민과 4명의 경찰이 죽는다고 수사기록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시위가 끝난후 광주역 대합실에서 발견된 시신이 칼빈에 의해 살상된 시신이라고 수사기록에 기재가 되어있습니다. 이 점은 아주 중대하고 심각한 문제가 됩니다. 시위 현장에서 엠16을 가슴에 맞아서 살상된 분은 시위 군중에 의해 바로 인근 병원에 후송되어 죽는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칼빈에 의해 희생된 것으로 확인된 분은 아무도 없는 광주역 대합실에서 실명의 확인된 어느분에 의해 발견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2 희생자는 목격자는 없고 시신과 수사기록만 남은 것이 됩니다.
첫댓글 5.18 폭도들은 5월 18일부터 총기를 소지하고 있었습니다. 폭동주동자 윤상원의 동지였던 노동시인 박노해의 <윤상원 평전>(인터넷에서 쉽게 검색할 수 있는 전남대 5.18연구소 사이트 자료)에 의하면 윤상원이 518광주폭동을 선동하기 열흘 전에 이미 김대중의 조직(미등록 정당이었던 국민회의)이 무기탈취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습니다. 김대중 조직이 광주사태 열흘 전에 이미 유혈사태를 준비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2년전 말지에 의해 재확인된 바 있습니다. 5.18옹혼 언론이었던 말지에 의해서 말입니다.
20일 밤 광주역 앞 시위에서 공수부대의 발포로 한 사람이 가슴에 총상을 입고 바로 인근 병원으로 후송을 해서 죽는다고 합니다. 시위가 끝난후 누군가에 의해 비어있는 광주역 대합실에서 2구의 시신이 발견된다고 합니다. 그 시신이 바로 21일 아침에 리어카에 실려서 시위대 앞장에 세워지는 희생자들 입니다. 이렇게 20일 3명의 시민과 4명의 경찰이 죽는다고 수사기록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시위가 끝난후 광주역 대합실에서 발견된 시신이 칼빈에 의해 살상된 시신이라고 수사기록에 기재가 되어있습니다. 이 점은 아주 중대하고 심각한 문제가 됩니다. 시위 현장에서 엠16을 가슴에 맞아서 살상된 분은 시위 군중에 의해 바로 인근 병원에 후송되어 죽는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칼빈에 의해 희생된 것으로 확인된 분은 아무도 없는 광주역 대합실에서 실명의 확인된 어느분에 의해 발견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2 희생자는 목격자는 없고 시신과 수사기록만 남은 것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