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2년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고려의 잔재가 가득찬 개경을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어서 새 도읍지를 재촉한 끝에 처음에는 계룡산 신도안에 궁궐 공사를 시작했지만, 신도안은 강과 멀리 떨어져서 물자운송에 부적합하다는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히자 새 도읍지로 정한 곳이 한양이다.
1394년 한양에 종묘, 성곽, 4대문, 궁궐 등을 짓기 시작한 뒤 이듬해인 1395년에 경복궁(景福宮; 사적 제117호)이 완성되었는데, 큰 복을 누리라는 의미의 경복이라는 궁궐이름은 북악산을 주산으로 하고 낙타산과 인왕산을 좌청룡과 우백호로 삼은 정도전의 작품이었다.
경복궁과 종묘가 완공되자 태조는 아직 4대문과 궁궐이 채 준공되지도 않은 1395년 한양 천도를 단행했지만,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세자 방석과 정도전 등을 잃자 둘째아들 정종에 넘겨주고 함흥으로 낙향해버렸다. 임금으로 즉위한 정종도 이듬해인 1399년 왕권다툼으로 피를 많이 흘린 한양을 버리고 개경으로 천도했지만, 이듬해인 1400년 정월 다시 2차 왕자의 난을 겪자 그 해 2월 조준의 상소를 받아들여서 방원을 왕세제로 삼았다가 11월에는 왕위를 넘겨주고 말았다.
태종 방원은 즉위하자마자 한양으로 재천도를 시도했지만, 풍수지리상 불길하다는 경복궁을 피해서 별궁인 창덕궁을 지은 1405년에야 한양으로 재천도 했다. 창덕궁은 정궁인 경복궁의 동쪽에 있다고 하여 동궐(東闕)이라고도 불렀다.
국가의 식을 치르고 신하들의 하례와 사신을 맞이하던 근정전. |
경복궁은 정치상황이 안정된 세종 대에 이르서야 비로소 조선왕조의 중심이 되었지만, 이것도 잠시뿐 1592년 임진왜란 때 경복궁과 창경궁 등이 모두 불타버렸다. 임진왜란 후 갈 곳이 없던 선조는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저택을 행궁으로 삼았고,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이곳에서 즉위하면서 경운궁(慶運宮)이라고 불렀다.
광해군을 축출한 인조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도 이곳에서 즉위식을 가졌지만, 경운궁은 애초부터 개인 저택으로 지은 건물이어서 그 배치와 형식이 전통적인 왕궁과는 크게 달랐다.
경운궁은 고종 4년(1867) 흥선대원군이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경복궁을 재건할 때까지 약250여 년 동안 조선의 정궁 역할을 했는데, 순종은 경운궁을 지금의 이름인 덕수궁(德壽宮)이라고 고쳤다.
조선왕조의 정궁인 경복궁은 조선왕조 500년 동안 1395년 태조가 천도한 이후 1592년 임진왜란 때까지 채 200년에 이르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단종이 숙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강원도 영월로 쫓겨났고, 단종복위를 모의하던 사육신을 심문하였으며 중종 때에는 임금의 총애를 받던 조광조가 사정전 앞에서 임금의 친국을 당한 뒤 처형된 불운의 장소였다.
또, 대원군에 의해서 경복궁이 중건되었지만, 1895년 을미사변으로 건청궁에서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난하니, 경복궁은 단청이 채 마르기도 전에 또다시 빈집이 되었다. 그 후 조선을 강탈한 일제는 광화문과 경복궁을 헐고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어 조선왕조의 상징을 훼손하였으니, 경복궁은 조선 건국을 주도한 성리학자의 주장처럼 명당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고종이 건청궁을 지을때 지은 정자인 향원정. |
본래 당의 제도는 황제나 왕의 가족이 거처하는 장소인 궁(宮), 황제나 임금과 신하들 사이에 상하관계를 나타내는 단상을 의미하던 궐(闕), 그리고 궁이나 궐의 휴식공간인 정원 즉, 후원(後苑) 등 3부분으로 나누지만, 점차 황제나 임금의 공적인 활동공간을 포괄하는 궐과 궁을 합쳐서 궁궐(宮闕)이라고 불렀다.
궁궐을 통과하기 위하여 천자는 5개의 문을, 왕이나 제후는 3개의 문을 거치도록 했는데, 경복궁은 정문인 광화문을 지나서 흥례문(興禮門)과 근정문(勤政門) 등 3문을 통과하여 중앙청 역할을 하던 근정전(勤政殿; 국보 제223호)에 이르게 된다.
일제에 의하여 훼손된 광화문은 1968년 복원되었으며, 외국인의 한국관광 제1코스인 경복궁에서는 매일 오전 10시, 오후 2시에 흥례문 앞에서 마치 영국 왕실의 근위병교대식을 흉내 내듯 포교들의 교대식을 벌이고 있으나, 그 진행절차나 포교들의 복장 등이 엉성하고 마치 어릿광대들의 장난 같은 모습이어서 보다 정확한 고증이 필요하다.
임금과 신하들이 조회를 하고 국정을 논하던 근정전 앞에는 신하들이 직급에 따라서 도열하는 정?종 9품계의 품계석이 세워진 마당이 있고, 임금의 권위를 상징하는 2층 높다란 근정전 의 월대 난간에는 주작, 백호, 현무, 청룡이 각 방위에 따라 새겨서 건물을 지키도록 했다.
근정전 왼편에 외국사신이나 국가의 큰 행사에 잔치를 베풀기 위하여 태종 때 경회루(慶會樓; 국보 제224호)를 지었는데, 지금의 건물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대원군이 중건했다.
근정전 뒤에는 임금의 집무실인 사정전(思政殿), 임금의 침실인 강녕전(康寧殿), 왕비가 거처하는 교태전(交泰殿), 대비의 침전 천추전(千秋殿) 등이 있으나, 눈여겨 볼 곳은 교태전 아미산(蛾眉山)과 자경전 장생 굴뚝이다.
아미산은 경회루 연못을 만들기 위하여 퍼낸 흙더미로 구중궁궐 깊숙한 곳에서 사는 여인들을 위하여 만든 동산으로서 이곳에는 굴뚝 본래의 기능 이외에 굴뚝의 벽에 봉황, 귀신, 당초문 등 여러 모양의 벽화를 만든 것이 예술적이다(보물 제811호).
또, 고종이 명성황후를 위하여 궁중에 별도로 지은 건청궁과 그 앞에 인공연못 향원정(香園亭)이 있는데, 건청궁은 을미년 일인들이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사체를 불태울 때 소실되었다가 최근 복원되었다. 건청궁에서 직선으로 놓였던 향원정으로 가는 나무다리는 1953년에 복원하면서 남쪽으로 다리를 만들었다. 건청궁 왼편에는 고종의 서재인 집옥재(集玉齎)가 있고 그 뒤에 경복궁 북문인 신무문(神武門)이 있는데, 신무문을 나서면 바로 청와대 정문이다.
외국사신의 접대나 연회장소로 사용했던 경회루. |
경복궁 안에는 국가의 공무를 처리하는 관청이 아닌 수많은 건물들이 있는데, 임금과 그 가족들이 생활하는 각 건물은 구조와 크기는 물론 건물이름에도 일정한 기준이 있었다. 예를 들면, 임금의 집무공간인 근정전, 사정전과 같이 전(殿)이라는 이름은 원래 중국에서 부처님과 같이 위대한 인물이 거처하는 곳(예: 大雄殿)을 일컫는 말이었으나, 점차 황제와 임금 그리고 왕비 등이 정사를 보거나 생활하는 건물을 일컫는 말로 확대되었고, 세자나 왕자, 공주들이 거주하는 공간은 당(堂)이라 하고, 다른 왕실 가족들이 생활하는 공간에는 재(齋)라고 했다.
또, 궁궐내의 기본건물에 딸린 부속건물의 이름도 일정한 기준이 있어서 전에 속하는 부속건물은 합(閤), 당의 부속건물은 각(閣), 비공식 휴식공간은 헌(軒)이라고 했다. 그밖에도 과거의 전시(殿試)를 치르던 영화당, 왕가가 사대부 집의 모습을 엿보기 위해서 지었다는 99칸의 연경당 등이 있다.
문민정부는 1995년 일제의 상징인 조선총독부 건물을 해체하고 광화문을 제 위치에 옮기는 등 경복궁 복원에 나섰지만, 아직 본래의 많은 건물들이 복원되지 못한 채 동쪽에 경주 불국사를 본뜬 민속박물관이, 광화문 왼편에는 고궁박물관이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