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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산박씨 32세손 박윤호여사 1889년생~1958졸
정려각은 구체적인 건축물의 형상을 일컫습니다. 정확한 명칭은 정려(旌閭)
정려란 효자나 열녀, 충신 등의 행적을 높이 기르기 위해
그들이 살던 집 앞에 문(門)을 세우거나 마을 입구에 작은 정각(旌閣)을 세워
기념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정려라는 용어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이라는 조선시대 고문헌에
'정문(旌門)'. '정표(旌表)'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문'을 세웠다는 것은 정려를 나라에서 인정받아 문을 세웠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건물이 아닌 문을 세우게 되면 정려문이고,
건물을 세우게 되면 정려각이 되죠.
또 건립된 기준이 효녀나 정절을 지킨 정절녀인 경우 열녀문, 열녀각이 되고,
일반적으로는 그냥 정려문, 정려각 이렇게 칭합니다.
한편, 이러한 정려는 간략히 사는 집의 문간채 대문 위에
이러한 효행이나 충절과 관련된 인물의 이름과 고향,
이들이 행한 일에 대한 기록을 간략히 적어 놓은 나무판을 걸어두기도 하고,
별도의 문을 건립하기도 하며,
비석이나 나무판에 내용을 적고 이를 보호하기 위해 건물을 짓는 것을 정려각이라고 합니다.
정려를 받는 과정은 그 고을의 관청이나 조선시대의 유학자들,
혹은 정려를 받으려는 사람의 후손이 신청하는데,
중앙의 예조라는 행정기관에 신청을 하게 되고 이게 인정을 받아
임금의 명으로 허락이 되면 '명정(命旌)'을 받습니다.
즉 임금이 명하는 정려란 뜻이죠.
따라서 정려를 받는 건 그 사람의 집안 뿐만 아니라 그 마을의 경사입니다.
또한 국가에서 세금의 면제나 군역(군대 복무)의 면제,
경우에 따라서는 관직도 수여가 됩니다.
종합하면 조선시대에 유교를 통치수단으로 정한 정치가들이
유교의 여러 지켜야할 항목, 효(孝), 충(忠) 등을 장려하고
이를 시각적으로 사람들에게 보임으로써 본받게 하여,
이상적인 유교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목적이 담긴 것이랍니다.
추가로 덧붙이자면, 1983년에 국가에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전국에 모두 4362개의 정려가 있고,
비석으로 된 것이 전체의 45%인 1968개입니다.
비석을 세우고 건물을 지은 것이 962개, 건물만 지은 것이 595개, 문으로 된 것이 563개,
나무판에 기록만 있는 것이 268개, 나머지 기타 32개가 있습니다.
건물은 대개가 단 칸짜리 이지만, 경북 달성에 있는 현풍곽씨 정려각은 12칸이나 됩니다.
한편 고려시대 것이 34개(즉, 고려시대 부터 생겼었단 이야기죠.
유교는 조선시대 기본 사회 이념이지만 들어온 건 고려시대 였으니까요),
조선시대가 1871개, 일제시대가 859개, 해방 이후에 세운 것이 1588개 입니다
제목 | 박진창 (朴鎭昶)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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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명 | 관리자 | 등록일 | 2009-01-30 | 조회 | 14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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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친 병을 고치기 위해 뱀과 같이 3일동안 살았고, 시묘살이 3년, 효자로서 정려가 고덕면 사리 2구에 서 있다. |
예산근대 건축물 보존 “내일이면 늦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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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역사와 그 기념물에 대한 무관심은 지방으로 내려올 수록 더욱 심각한 실정이다. 우리지역만 해도 1922년에 지어진 호서은행 본점이 도기념물로 지정된 것 외에는 이렇다할 논의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는 사이에 수많은 근대문화유산들이 사라져 이대로 간다면 향토사 연구에 한 시점이 그대로 단절될 위기감 마저 느껴진다. 새로운 시간을 맞으면서 외면해 왔던 우리 역사의 일단을 들여다보는 작업은 그 나름의 의미를 지닌다. 그동안 보존인식 부족과 개발논리에도 꿋꿋이 남아있는 예산의 대표 근대건축물 3곳을 살펴본다. <편집자> 대동병원 예산사람들이 예산초등학교 정문 맞은편에 형성된 주택가의 위치를 설명할 때 가장 쉽게 기준점으로 잡는 건물이 있다. 대동병원. 지금도 간판은 그대로지만 이 곳이 병원운영을 하지 않은지는 오래. 그래도 유치원 꼬마부터 팔십 노인까지 대동병원을 기준으로 설명하면 모두 알아듣는다. 그만큼 오랫동안 주민들의 삶과 밀접하게 닿아있었고 많은 이들이 드나들었다는 얘기다. 누가봐도 “일본식 건물”이라는 느낌이 정확히 전달되는 이 건물은 1920년대에 일본인 의사에 의해 지어진 병원이고, 해방이후에도 예산에 몇 안되는 병원으로 수많은 이들의 병을 고치고 애환을 함께 한 근대의료시설물이다. 최익열 원장이 2000년에 별세한 뒤 부인 안동명(86)여사가 살고 있으나 5년째 새 주인을 찾고 있다. 병원 내부는 필요에 따라 개조됐지만 원장 내외가 산 본채는 거의 그대로 보존돼 있다. 이 집을 유난히 아꼈던 고 최원장의 뜻이었기 때문. 겹집으로 지어진 건물의 기본뼈대는 물론 현관등, 문위 장식등이 1920년대로 돌아온 착각마저 들게 한다. 벌써 56년째 이집에 살고 있다는 안 여사는 “집이 워낙 잘 지어져서 수십년이 흘렀어도 뒤틀어진 구석 하나없이 그렇게 튼튼할 수 가 없다. 바깥양반의 뜻도 그랬고, 또 기왕이면 이집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있는데 쉽지 않다”고 한다. 콜타르를 입힌 나무담과 문, 정원까지도 당시 시대상을 그대로 느끼게 해 분례기 등 영화와 드라마 쵤영장소로도 자주 등장하는 대동병원. 개인재산이기에 이집을 매입하게되는 사람의 뜻에 따라 그 보존여부가 결정될 운명에 처해있다. 예산제일감리교회 예산읍내상가 중심에 2층 석조건물하나가 자리잡고 있다. ‘금싸라기’땅에 지어진 이 건물은 1959년에 지어져 40년이 넘게 기독교인들의 안식처로 사랑받는 예산제일감리교회다. 1955년 기공예배를 후 1959년 헌당예배가 있었고, 184평 건물을 짓는데 그 당시 돈으로 1312만5천환이 들어갔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전라도에서 나오는 황등석으로 축조하고, 절충형 고딕양식의 형태로 지어진 이 교회건물은 2층 계단과 현관일부를 제외하고는 원형이 잘 보존돼 있다. 그 역사는 비록 반세기도 되지 않았지만 전쟁직후 폐허위에 세워져 고단한 삶을 살았던 지역교인들의 안식처가 됐다는데 상징적 건물로 평가된다. 아쉽게도 이 교회는 지난해 매각돼 상업건물이 들어설 것으로 보인다. 애초 매각을 결정하기까지 교회관계자와 교인들의 많은 고민과 갈등이 있었다고 한다. 화장실과 주차장등 현대식 시설이 마련돼 있지 않아 큰 불편을 겪어온 터라 이전 논의가 계속돼 왔지만 오랜 교인들을 중심으로 교회 역사가 보존돼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결국 매각이 이뤄졌다. 이 교회는 문예회관 옆에 부지를 마련하고 새건물을 지을 계획이며, 내년 4월에는 교회건물을 비워줘야 하는 상황이다. 이기철 담임목사는 “건물을 교회역사를 담고 있고, 교인들은 물론 나 역시도 애정이 깊어 매각하지 않을 방법을 찾았으나 여의치 않았다”면서 “현재 교회의 외벽 화강석 일부는 역사상징물로 교회에서 쓰기로 했다”면서 아쉬움을 달랬다. 예산천주교회 흔히 오리동성당이라고 불리는 예산천주교회 본당과 사제관은 1935년에 지어졌다. 벽돌을 직접 구워 지었다는 이 건물은 당시 지어진 다른지역의 천주교회건물 양식과 마찬가지로 수직적 종교양식을 대표하는 고딕 복합양식 건물이다. 일제와 해방, 한국전쟁 같은 치열했던 한국의 근·현대사를 지나온 흔적으로 벽에는 총탄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고, 태풍때 지붕에 장식인 돌멩이가 날아가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인근 공주 중동성당(1936년), 부여금사리 성당(1901년), 아산공세리성당(1922년), 당진 합덕성당(1929년)등이 도지정 문화재나 기념물로 일찌감치 지정됐던 것과는 달리 아직 어떤 제도적인 보호도 받지 못하고 있다. 이 성당 신자들은 지난해 문화재청에서 시·도 문화재 지정권유가 있었다는 소식에 기대를 걸고 있다. 이 밖에도 근대민가양식을 알 수 있는 건물이 드물게나마 아직까지 남아있고, 이를 보존하겠다는 의지를 갖고 있는 경우도 있다. 대흥면 동서리에 살고 있는 이수(77)여사는 현재 살고 있는 옛 대흥병원 건물을 유물관으로 보존관리하겠다는 계획이다. 일제시대에 지어져 안채와 입원실 건물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이 집에 보관하고 있는 당시 의료기구들과 향토사료들을 함께 전시하고 싶다는 얘기다. 그러나 유서깊은 학교나 관공서 같은 곳들도 옛 자취를 찾아보기 힘든 지경인데, 불편함과 비용부담을 감수하면서까지 역사유산을 지키겠다고 나설만한 사람이 얼마나 더 나올지는 미지수다. 주민들의 관심과 관의 적극 개입과 노력이 요구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불모지인 한국근대건축사의 영역을 구축한 목원대 김정동(53) 교수는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근대건축에서 독자적인 한국성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서 의미가 퇴색되는 것이 아니라 어차피 이 땅에 세워졌다면 서민들의 삶이 녹아있는 사회사적 견지에서 건축사를 봐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즉 근대건축물이 외세의 상징이었더라도 건물을 짓기위해 서양과 일본의 기술이 필요했지만 우리땅에 역사의 얼굴로서 계속 존재해 왔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시대사의 아픈 흔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라는 것이라는 얘기다. 오고 싶고, 살고싶고, 품격있는 고장만들기는 새로운 개발보다도 살아온 흔적들에 가치를 부여하고 그 속에서 삶의 지혜와 역사의식을 배워나가는 것이 아닐까. 근대문화유산 등록제도 마련 문화재청은 근대건축물이나 기념물이 아무런 보호없이 헐리거나 원형이 변경되는 현실에 따라 근대문화유산을 등록하는 제도를 지난 7월 도입했다. 문화재청이 근대역사기념물 및 건축물 보존관리 대상으로 삼는 기준은 ■개화기로부터 해방전후 시기에 건립되어 현존하는 건축물로서 ▲건축양식사 자료로서의 가치를 지닌 것 ▲근대의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과 관련하여 기념할 만한 가치를 지닌 것 ▲교육·문화·예술·종교 등 생활문화와 관련하여 대중의 향수와 애착의 대상이 될만한 것과 ■건립된 지 50년에 미달된 건축물이라 할지라도 전통적, 예술적, 역사적, 지방적 특색이 있으며 노후화가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거나 토지이용의 변경과 도시 재개발 등으로 소멸될 위기에 처해 있는 건조물로 정하고 있다. 유형은 관청, 외국공관, 교육기관, 도시 한옥촌, 종교시설, 문화예술시설, 체육시설, 교통시설, 의료복지시설, 금융·산업시설, 공원, 주택 등이며 장기적으로 그 범위를 근대 산업기기, 기구, 신문, 잡지, 사진, 영화필름, 회화, 생활도구 등 동산문화재 부분까지 확대할 계획이다. |
첫댓글 귀한자료입니다~~그런데 관리가 안되고 있는것 같습니다,,, 부끄럽기도 하구요
상성 아저씨 먼저 아저씨 형님 분들이 족보 작업하시면서 꼭 이문제도 해결하시려다 방대한 족보작업에 시간들을 못내시고
병철 아저씨 돌아가시면서 손을 놓은것같아 제가 끝을 보려합니다.
예산군 자료에는 조금있는데 내용이 전무한 상태고 다행이 신문기사에 조금 있고 나머지는 답사가 풍문으로 찾아야 될것 같읍니다.
일제시대이고 왕씨 가문이 힘이 든지 저렇게 잘해놓고 관리 부실이 되었고 지금은 항공사진 분석했지만 주변 군청주변 개발이 코앞에 있어
하루라도 소실이 되기전에 빨리 가봐야할것 같읍니다.
왕씨 집안도 우리 집안도 왜 이리 후손들이 힘이든건지 부끄럽기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