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은 나를 사랑하시어]제1장 끝없는 구도-의예과 시절:부처님과의 첫 만남
대학은 나에게 참으로 많은 가르침을 가져다 주었다. 번뇌도 많았고 기쁜 일도 많았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나는 애당초 의대 적성이 아니었다.
흔히들 말한다, 적성이 어디 있냐고. 하지만 적성은 분명히 존재한다. 나는 처음부터 자연계통이 어울리지 않았으니, 도대체 실험이라든가 도형 같은 것은 이해를 하지 못한다. 해부학 시간에도 남들은 뻔히 찾는 신체 여러 부위를 눈앞에 보고도 찾지 못하는 수가 흔했다.
그 대신 나는 문학을 좋아하고 철학적 논쟁을 즐긴다. 내가 굳이 외과 계통을 택하지 않고 내과계통을 택한 까닭은 피냄새를 싫어하는 이유도 있지만 아무리 수술책을 봐도 인체구조가 이해가 안되었던 것도 한 이유이다.
지금 생각하면 내과계통 중에도 정신과가 내겐 가장 적격인데, 그랬으면 불교공부가 더욱 내 현실이 되었을 텐데(부처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마음병을 고치는 의사 선생님이 아니신가), 나는 이미 소아과 전문의니 이제 와서 그런 생각은 아무 소용 없는 후회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재수 끝에 들어간 서울대-모든 이들이 꿈꾸던 곳이고, 또한 내가 꿈을 이룰 수 있는 곳. 대학에의 기대는 참 컸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대학은 내가 생각하던 것과 괴리가 있었으니, 무엇보다 고등학교 때 나눴던 인생에 대한 진지한 대화를 같이 나눌 상대가 없었던 것. 나는 그동안 미뤄왔던 인생에 대한 고민을 다시 하고 싶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고교 시절까진 삶에 대해 무척 고민하는 친구들이 많았는데 대학에 오니 전혀 그게 아닌 것이다.
미팅이니 스포츠니 이런 표면적인 일들에 관심이 많을 뿐, 우리가 왜 사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이 나라를 어떤 나라로 만들어야 하는지에 대해(운동권 빼고) 대체 고민하는 친구들을 볼 수 없었던 것. 심지어 고교 때 그런 얘기를 나눴던 친구들을 만나도 그런 얘기를 꺼낼 수 없었으니, 그런 얘기를 꺼내기만 하면 다들 귀찮고 가당찮다는 표정으로 말을 끊기 일쑤였다.
자연히 나는 그런 말을 꺼리기 시작했다. 그 대신 우스갯소리로 가볍게 지내니, 어쩐지 내게는 어색하고 어울리지 않았지만 친구들과 함께 지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마음을 속이고 지내던 시절이다.
어느 강의 끝난 봄날, 캠퍼스에서 우연히 불교학생회 수련회 안내문을 보게 된다. 토요일에 가서 일요일에 오는 1박2일의 수련회로 장소는 동작동 국립묘지 안에 있는 화장사(華藏寺)-참, 이름도 묘하지...
나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아무리 국가 유공자들이 계신 곳이지만 그래도 무덤은 무덤이고, 그 묘지 있는 곳에 절 이름이 화장이라...물론 火葬이 아니고 華藏이긴 하지만, 한글로 하면 그게 그것 아닌가. 기분이 좀 묘했다.
그런데 그때 생각엔, 절이란 곳이 다들 경치 좋은 곳에 있고, 이렇게 좋은 봄날 경치 좋은 곳에서 술이나 한 잔 하고 노래 부르면 그것도 참 괜찮지 않겠는가. 그때만 해도 절이란 한 바퀴 구경하고 술이나 먹고 노는 곳인 줄 알았다. 그래, 요즘 친구 만나기도 시원찮은데 에라 거기 가서 밤에 막걸리나 한 잔 하지 뭐! 그래서 마침내 수련회를 가기로 결심한다. 뭐 하는지도 모르면서, 오직 봄바람 속에 술 한 잔 먹기 위해...
수련회 날, 나는 사당동 뒷산을 물어물어 올라갔다. 달동네 가득한 산등성을 넘으니, 뜻밖에도 소나무 우거진 산림이라, 날은 저물어 가는데 절은 보이지 않는다.
한참을 헤매고 가는데 어디선가 들리는 목탁 소리. 그때의 희열감이란...지금 생각하면 전생 인연인 것도 같은데, 어쨌든 숲속 어딘가에서 울려 나오는 목탁 소리가 참 좋았다. 목탁 소리를 따라 찾아가니 절이 보인다. 어느새 화장사에 왔던 것이다. 마치 노래 가사 한구절처럼...
내가 좀 늦게 온 편이라, 다른 친구들은 대부분 와 있었다. 저녁 밥을 먹는데, 공양(供養)이란다. 아니, 공양이라니? 내가 밥 먹는데 왜 공양인가(불교에 대해선 아는 게 없었지만 그래도 공양이란 부처님께 무언가 바치는 것이므로 밥하고는 전혀 상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속으로 이상하게 생각하며 밥 나오길 기다리는데, 어렵쇼, 다들 밥그릇을 들고 방 안에 앉네? 이른바 발우공양이었던 것이다!
부모님 따라 스님들 안내 받으며 갔던 절 생각만 하고, 방 안에 편히 앉아 차린 밥상 들던 생각만 하고 있던 나에게 발우공양은 세상에 할 짓이 아니었다. 더구나 그릇을 물로 씻어야 한다니 이게 대체 웬 날벼락인가. 눈치를 보니, 나처럼 헤매는 친구가 반 정도, 능숙하게 발우를 씻는 친구가 반 정도 되었다. 그렇게 내 생애 처음 발우공양이 끝났다.
공양이 끝난 뒤 주지스님의 법문이 있어 법당으로 가는데, 아 이거 참, 법당 중앙으론 들어가지 말란다. 옆의 조그만 문으로 들어가라는데, 아니, 큰 문 놔 두고 왜 좁은 문으로 가나 하고 내심 불만이었지만 하라는 대로 할 수밖에. 이윽고 주지스님이 오셨는데, 놀라운 것은 주지스님 역시 그 옆 문으로 들어오시는 것이었다.
화장사 주지스님께 들은 법문이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아마 처음으로 들은 법문일 것이다. 몇해 전 열반하신 청담스님의 상좌였던 주지스님께서 그 당시는 흔치 않던 금테 안경을 하신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때는 신심은 커녕 불교가 뭔지도 전혀 모르는 때라, 스님에 대한 존경심은 전혀 있지도 않고 반면 시건방지게 외모로 스님의 법력을 평가하는 데는 일가견(?)이 있었다.
스님께서는 옆 문으로 들어오신 이유를, 나 같은 작은 중은 중앙 문으로 들어올 자격이 없기 때문이라 말씀하셨다. 나 같은 작은 중에게 설법 들을 필요 없고, 다만 내일 절을 내려갈 때 국립묘지의 모습이나 잘 보라고 하셨다. 그 모습이 바로 만고의 설법이라 내 시덥잖은 말보다 그게 휠씬 나을 것이라시며 이어 반야심경을 말씀하셨다.
스님은 이 심경의 깊은 뜻을 나에게 알려 주는 사람이 있으면 나는 당장 그 사람을 나의 스승으로 삼겠다시며, 우리 중에 누구 없느냐고 물으셨다.
나는 속으로 그 참,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오온이 모두 공한 것을 보고 일체의 괴로움을 벗어났다는 것인데, 이걸 뭐 알고 모르고 할 것이 있는가, 참 딱하기도 하다고 생각했다. 그 당시는 그렇게 철부지였으니 지금에 봐도 한심한 생각이 든다.
주지스님의 법문이 끝난 뒤, 또 한 분의 스님의 법문이 있으니 잠시 기다리라는 안내가 있어 입정에 들어갔다. 그렇게 한 5분 지났을까? 갑자기 법당 중앙 문이 활짝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가 났다. 아니, 누구길래 주지스님도 옆 문으로 들어오시는데 감히 중앙 문을 열고 들어오시나? 중앙 문으론 법력 높은 분만 출입하신다는데. 그렇다면 지금 이 분은 부처님을 맞대면하실 정도로 법력 있으신 분인가 본데 대체 어떻게 생기셨는가?
살짝 고개를 돌려 보니 얼굴이 환하고 광채가 나시는 분이 법당 문을 힘차게 열고 들어서시는 것이었다. 아! 사람 얼굴이 저렇게 맑을 수도 있구나!
나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지금껏 그렇게 많은 스님을 뵌 적이 없는 탓이겠지만 모습이 나를 감동시킨 분은 없었는데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분은 그렇지가 않았다. 중년의 연세에 적당한 키, 그리고 맑고 환한 얼굴...
바로 그 분이 광덕스님이었다. 스님과의 만남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내가 듣기로 스님은 20여 년 산에서 정진하시다가 승려들 교육은 어느 정도 되었으니 이제는 속세 중생들을 구제해야겠다고 원을 세우시고 하산하신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 당시 스님의 법문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맑고 자신에 찬 모습은 그 자체가 하나의 법문이었다. 그렇게 짧게 뵈온 스님은 그 해 초겨울, 종로 대각사에서 다시 뵙게 된다.
-보현선생님의 ‘님은 나를 사랑하시어’에서, 불광출판사 刊
첫댓글 마하반야바라밀 감사합니다._()()()_
고맙습니다.다시 글을 읽으니 새롭습니다.나무마하반야바라밀...()()_
^^ 허........가피입니다....큰 인연이고요.....법당을 알게되어 다시 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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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식이 옆에 계셔도 눈이 어두워 알아보지 못한 지난 날을 아쉬워하면서 우리 도반님들께서도 이런 후회를 않으시기를 축원 올립니다. 마하반야바라밀......._()_
연꽃이십니다.^^ 마하반야바라밀_()()()_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척 재미있게 보고 있어요 ^_^!
금방 읽혀지네여....책을 구해봐야지!...마하반야바라밀..._()_
로맨틱한 영화장면 같으이다 다음회가 기다려집니다...기도시간 구애 받지않으면 책 다시 읽겠구만
선생님의 불연이 동화책 읽는 듯 재미있습니다. 내생명 부처님 무량공덕 생명 마하반야바라밀....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