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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리야와 만유의 회복 그리고 재림
막 9:1-13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저희 앞에서 변형 되사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심히 희어졌더라. 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저희에게 나타나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거늘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이는 저희가 심히 무서워하므로 저가 무슨 말을 할는지 알지 못함이더라. 마침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뿐이었더라. 저희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경계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저희가 이 말씀을 마음에 두며 서로 문의하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 하고 이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가라사대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거니와 어찌 인자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하리라 하였느냐?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가 왔으되 기록된 바와 같이 사람들이 임의로 대우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여러분은 성경의 인물 중 제일 마음이 끌리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저는 엘리야였습니다.
고교시절 저에게는 절친한 친구가 한 명 있었습니다. 우리는 둘 다 주의 종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는 모세를 선호했고 저는 엘리야를 선호했습니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제 마음이 그토록 엘리야에게 끌린 것은 우연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 자체가 예언적인 것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엘리야보다 모세가 더 큰 종일 것입니다.
신 34:10-12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여호와께서 그를 애굽 땅에 보내사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그 온 땅에 모든 이적과 기사와 모든 큰 권능과 위엄을 행하게 하시매 온 이스라엘 목전에서 그것을 행한 자더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마지막 때에 모세를 다시 보낸다는 말은 없습니다. 하지만 엘리야를 보낸다는 말은 있습니다.
말 4:5-6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그러면 왜 하나님은 마지막 때 모세가 아닌 엘리야를 보내시는 것일까요? 모세는 애굽에 노예 된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율법으로 양육하고 가나안 땅으로 이끈 사람입니다. 즉 그는 영혼을 구원하고 양육한 사람입니다.
반면에 엘리야는 가나안에 들어가 나라를 형성한 이스라엘 백성이 바알 숭배로 타락했을 때 그들에게 보내졌습니다. 즉 회복이 필요한 때에 보내졌습니다. 하나님은 마지막 시대의 교회들을 회복되어야 할 대상으로 보십니다. 그 일에는 엘리야가 적격입니다. 그래서 엘리야를 다시 보내시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는 엘리야의 사역이 필요한 때입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하나님께서는 최근 수차례에 걸쳐 엘리야에 관하여 저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중, 가장 특별한 계시가 2004년 3월 16일 저녁기도회 시간에 저에게 임했습니다. 그래서 그 계시들을 종합해서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엘리야가 이미 왔습니다. 그리고 오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엘리야가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말 4:5-6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요엘 선지자의 성령 강림에 관한 예언(욜2:28-29), 그리고 예수님이 친히 예언한 예루살렘 멸망에 관한 예언(마 24장)의 경우처럼 말라기 선지자의 이 예언 역시 이중적인 예언입니다. 이것은 동시에 두 가지를 예언하고 있고, 따라서 두 번에 걸쳐 성취되게 될 것입니다. 말라기 선지자의 예언은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직전에 각각 성취되게 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두 번 오시기 때문에 선지자 엘리야의 출현도 두 번에 걸쳐서 있게 됩니다.
먼저, 예수님의 초림 때 선지자 엘리야가 이 땅에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초림 때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하나님이 보낸 사자 즉 엘리야는 누구입니까? 진짜로 엘리야입니까? 아닙니다. 세례요한이었습니다(마17:10-13). 그러면 요한은 요한이지 어떻게 요한이 엘리야일 수 있습니까? 그것은 세례요한이 "엘리야의 심령과 엘리야의 능력으로" 왔기 때문입니다(눅1:17). 이것이 세례요한이 오리라 한 엘리야인 이유입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의 재림 직전에 선지자 엘리야가 이 세상에 다시 출현합니다.
예수님의 초림 때 엘리야를 보냈듯이 하나님은 예수님의 재림 직전에 다시금 엘리야를 보낼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시킬 것입니다. 여러 해 전 하나님은 저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기도하는데 성령께서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초림 때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고, 엘리야의 사명은 단지 유대민족을 준비시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세례요한 한 명으로 족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재림 직전 복음은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될 것이고, 엘리야의 사명은 모든 민족을 준비시키는 것으로 확장된다. 그러므로 마지막 때 하나님은 모든 민족을 준비시키기 위하여 수백 수천의 엘리야들을 세상에 보내실 것이다.'
CI의 설립자인 빌 해몬 박사는 『선지자와 개인적 예언』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유태인들은 메시아가 오시는 길을 예비하기 위해 엘리야가 온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글자 그대로 믿고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례요한이 말라기의 예언을 성취하셨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례요한이 선지자였다고 언급하셨습니다.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 기록된 바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네 앞에 예비하리라.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마11:9, 10, 14) 세례요한이 선지자 엘리야의 능력과 영으로 왔습니다. 선지자인 세례요한이 그리스도의 초림의 길을 예비하였으나, 이제는 선지자들의 무리가 그리스도의 재림의 길을 예비할 것입니다. ... 이러한 선지자들의 무리는 엘리야의 능력과 영으로 나오게 될 것입니다. 말라기의 예언 즉 세례요한이 그리스도의 초림에 관련된 예언을 성취시킨 것처럼 오늘날의 선지자들은 예수님의 재림의 예언을 성취할 것입니다."
"선지자 중의 선지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릭 조이너가 쓴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책에도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책에서 그는 주님께서 자신에게 말씀하신 다음과 같은 내용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나는 마지막 날에 사도들을 보내려 한다. 그들은 바울, 요한, 베드로와 같은 사람들일 것이다. 나는 그들을 세우기 위하여 세례요한 같은 자들을 많이 보내서 내게 헌신하도록 그들에게 가르치게 할 것이며, 회개가 그들의 삶의 기초가 되게 할 것이다. 그 사도들도 역시 세례요한 같을 것이다. 세례요한의 가장 큰 기쁨이 신랑의 음성을 듣는 것이었던 것처럼, 이들은 나의 신부가 나를 위해 준비되도록 하는 그 한 가지에 헌신하게 될 것이다."
제가 최근 심취해서 읽고 있는 저자 중의 한 사람인 프랜시스 프랜지팬 역시 같은 주장을 펼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7장 11절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에 대하여 프랜시스 프랜지팬은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이천 년 전에, 예수님은 엘리야의 사역이 끝나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엘리야가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 '(마17:11)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처럼 그는 엘리야의 사역이 세례요한을 통해 시작되었으나 완성되지 않은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11절 말씀을 한 부분은 성취되었지만 다른 부분은 성취되지 않은 미래에 대한 예언으로 보았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엘리야에 대해 예수님은 "그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리라."고 말슴하셨습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이 와서 모든 것을 회복했습니까? 아닙니다.
행 3:20-21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여 말씀하신 바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두리라."
세례요한은 당대에 많은 것들을 회복시켰습니다. 그러나 회복은 모든 시대에 필요한 일이고, 특히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직전에 온전한 회복이 있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직전까지는 온전한 회복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세례요한이 회복시키는 일을 시작하기는 했지만 모든 것을 회복한 것은 아닙니다. 더더구나 모든 시대의 것을 회복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 반드시 만유의 회복이 일어나야만 합니다. 그런데 누가 예수님의 재림을 위해 회복시키는 일을 합니까? 바로 엘리야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엘리야의 주된 역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 시대마다 엘리야가 있었고, 그리고 마지막 시대에는 더 많은 수의 엘리야가 보냄을 받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말라기서에서 선지자 말라기는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 그가 ... 돌이키게 하리라."라고 예언했습니다(말4:5-7). 그런데 이 구절에 관하여 프랜시스 프랜지팬은 "엘리야는 싸우고 회복하기 위해서 지금 오고 있습니다! 그는 여호와의 '큰 날'이 이르기 전에 왔었고, 여호와의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다시 옵니다!"라고 썼습니다.
예수님이 초림하신 날! 그날은 큰 날이긴 하나 두려운 날은 분명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재림하실 날은 큰 날일 뿐 아니라 두려운 날입니다. 그런데 말라기는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선지 엘리야를 보내리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러므로 선지 엘리야의 출현은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두 번에 걸쳐 일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지금은 예수님의 재림이 지극히 임박한 때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엘리야들이 많이 와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2. 엘리야의 사명은 만유를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엘리야의 사역의 성격을 이해해야 합니다. 엘리야의 사역은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마지막 때 엘리야들을 보내시는 이유는 교회에 회복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현재 많은 교회들이 자만에 빠져 회복이 필요하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교회의 회복이 필요하다고 느끼십니까? 우리는 교회의 회복의 필요성을 절감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엘리야들은 이 시대의 교회를 회복시키기 위해 세 가지의 일을 합니다.
(1) 진리를 회복시킵니다.
엘리야들은 교리적이고 전통적인 메시지를 잘 요리하여 설교하는 자가 아니고 잃어버린 진리를 회복시키는 자입니다. 엘리야들은 이 일을 빌 해몬 박사가 '현존하는 진리'라고 부르는 그런 진리들을 설교하고 가르침으로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현존하는 진리란 무엇일까요? 2002년 2월 28일 빌 해몬 박사님이 장충체육관에 오셨을 때 저는 11시간을 기다린 끝에 극적으로 그분에게 기도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장충체육관 VIP실에서 그분은 제게 이렇게 기도해 주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당신이 영을 불어넣습니다. 그리고 사도의 기름부음과 선지자의 기름부음을 배가로 지금 불어넣습니다. 그리고 현실의 진리에 온전히 서도록 축복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되 아들아. 내가 네가 어렸을 때부터 이미 너를 불렀노라. 악한 영들의 계획에서 내가 너를 구원했노라. 네 삶 속에 내 뜻을 이루도록 내가 그렇게 너를 불렀노라. 이제부터 네가 네 삶 속에서 기적을 보리라.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에게 초자연적인 능력을 내가 너에게 불어넣노라. 그리고 내가 너에게 사도적인 그리고 예언자의 기름부음을 너에게 불어넣노라. 너는 이제 말씀의 지식으로 아주 정확한 예언을 선포하게 되리라. 이제 치유와 기적이 나타나는 것을 네가 보이게 되리라. 네가 우는 것과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것을 내가 다 들었노라. 내가 너에게 새로운 특별한 것을 마련해 두었노라. 이제 더 강력하게 나가라. 내가 너와 함께 하고 있노라. 네가 하고자 하는 네가 받기에 합당한 그것을 내가 배가로 너에게 부어 주리라."
기도를 받으면서 저는 '현실의 진리'가 무엇인지 굉장히 궁금했습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말씀의 은사를 주셨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진리의 기초가 부족한가? 아니면 현실감각이 뒤떨어진다는 얘기인가? 별생각을 다 해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후에 빌 해몬 박사님이 쓴 『사도들 선지자들과 앞으로 올 하나님의 운동들』이라는 책을 읽다가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교회는 오순절에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아이의 성장이 빠르듯 초대 교회 때부터 콘스탄틴 대제가 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를 공인하기까지 핍박 속에서도 무서운 속도로 성장했습니다. 그러다가 교회가 카톨릭화 되면서 병들고 퇴보하기 시작했습니다. 소위 중세 암흑 시대를 거치면서 교회는 많은 진리와 은혜를 잃어버렸고 의식과 형식만 남았습니다.
그런다가 1500년경 루터의 종교개혁을 시점으로 교회는 회복기에 접어들었습니다. 루터의 신교 운동 외에 그 뒤를 이어 웨슬리의 성결 운동, 오순절 운동, 카리스마적 운동, 늦은 비 운동, 예언적 운동, 사도 운동 등 많은 운동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들 운동들은 저마다 성경적인 교리의 회복을 가져왔습니다. 이렇게 각 운동들을 통해 재조명되고 되살아난 진리, 그것이 바로 빌 해몬 박사가 말하는 '현존하는 진리'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이 현존하는 진리들을 붙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그런데 '현존하는 진리'는 생소한 만큼 잘못된 가르침으로 오해되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이 1세기에 이미 완성되었기 때문에 1세기 이후 교회는 항상 필요한 완전한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가정합니다. 그래서 선뜻 현존하는 진리를 수용하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각 운동들을 통해서 현존하게 된 진리나 더구나 지금 이 시대에 회복되고 있는 진리들을 말하면, 전에 없던 새로운 것을 첨가하려는 것으로 느낍니다. 그리고 이들 진리를 성경에 없는 무엇인가를 더하려는 것으로 오해하여 불안감을 느낍니다.
그러나 이미 회복된 현존하는 진리와 앞으로 회복될 현존하는 진리는 성경에 무엇인가를 첨가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빌 해몬 박사는 다음과 같은 말로 잘 설명했습니다.
"매 회복 기간마다 가르쳤고 나타났던 모든 것들은 성경적 진리의 회복이던가 아니면 초대 교회의 퇴폐 기간 동안에 발전된 거짓 교리의 교정임을 우리는 명심해야만 한다."
"모든 회복된 진리는 성령이 의도하였던 바대로 성경 말씀의 원래의 의미를 드러내 주는 것이다."
"모든 새로운 진리의 회복으로 옛 진리들에 관한 더 큰 조명이 현실화되었다. 그러나 ... 새로운 진리가 인간의 전통을 무효로 만들 수는 있을지라도 그것은 기본 진리는 변경시킬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도록 하라."
예를 들어, 신교 운동을 통해 회복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진리는 성경 본래의 진리입니다. 이것을 누가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또 오순절 운동을 통해 회복된 방언과 성령 세례에 관한 교리도 분명히 성경에 있는 것입니다. 다만 그전까지는 사람들은 이에 대해서 깨닫지 못했을 뿐입니다. 예언적 운동이나 사도 운동을 통해서 회복된 진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운동이 일어나기 전까지 교회는 여기에 관한 진리에 대해 무지하였고 터부시했습니다. 이와 같이 과거나 현재뿐 아니라 미래에도 하나님이 일으키는 운동들을 통해서 회복되어 '현존하게 될 진리들'은 성경에서 나오고 성경에 의해서 확증될 수 있는 것들뿐입니다. 그러므로 절대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그런데 엘리야들은 일반 목회자들과 달리 이들 현존하는 진리들을 담대히 전합니다. 그래서 교회에 진리의 회복을 가져오는 일을 합니다.
(2) 은사를 회복시킵니다.
엘리야는 일반적으로 방언하고 예언하고 병 고치는 성령 운동을 하는 자들이 아니요 영적 은사를 회복시키는 일을 합니다. 즉 그들은 기름부음을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리며 교회에 새 술을 붓는 사역을 합니다. 엘리야들은 이전 시대들이 보지 못했던 보다 강력한 성령의 기름부음과 성령의 각종 은사와 새로운 종류의 이적들을 행함으로써 이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3) 영혼을 회복시킵니다.
진리가 회복되고 은사가 회복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영혼의 회복입니다. 아무리 진리가 회복되고 은사가 회복되어도 영혼이 회복되지 못하면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엘리야들의 궁극적인 사명은 영혼을 회복시키는 것인데, 엘리야들은 이 일을 회개를 촉구함으로 이루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 중 세 번째가 가장 중요합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이것이 현재 가장 무시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여러분은 선지자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선지자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선지자의 사명은 단순히 예언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세례요한이 몇 명에게나 개인 예언을 해 주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는 선지자요 선지자보다도 큰 자이지만 개인 예언을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왜 선지자의 사명이 단순히 예언하는 것이 아닙니까? 엘리야의 사명을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개인 예언을 해 준다고 사람들이 회복되지는 않습니다.
나아가서 회복은 말씀을 알아도, 방언을 해도, 영안이 열려도, 능력을 받아도, 기적이 일어나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회복은 회개할 때 이루어집니다. 즉 회개할 때 죄 때문에 파괴된 주님의 형상이 우리 속에서 회복됩니다. 회개할 때 마치 병든 사람의 건강이 회복되듯 죄의 병에서 회복됩니다. 그러므로 엘리야는 회개를 촉구하는 자입니다. 사람들을 회개시킴으로써 영적으로 회복시키는 자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초림에 보내심을 받았던 엘리야인 세례요한의 사역에 잘 나타납니다.
마 3:1-2 "그 때에 세례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가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였으니"
그 뒤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 3:7-10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사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여기서 "속으로 자신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명목상의 기독교인들을 가리킵니다. 엘리야가 오면 그는 단순해 강해 설교를 하거나 성경 공부를 인도하거나 예언하거나 기적을 행하지 않습니다. 물론 이런 것들도 하겠지만 단지 이런 것만 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회개를 촉구합니다. 세상을 향해서뿐만 아니라 교회를 행해서 회개를 촉구합니다. 그래서 교회를 깨우고 명목상의 기독교인들을 알곡으로 만드는 일을 합니다. 이것이 바로 엘리야의 주된 사명입니다. 바꾸어 말해서 엘리야들은 진정한 회개, 진정한 믿음, 진정한 거듭남 그리고 진정한 거룩을 강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