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 호국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인 해인사의 말사다.
고려 시대에 창건된 절로, 원래 이름은 내성사였으며 임진왜란 때는 승군의 근거지가 되었다. 제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순국한 승병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숙종 때 호국사란 이름으로 재건되었다. 현재의 호국사는 진주성을 복원하면서 일주문 자리가 발견되어 새로 건립된 것이며, 사찰의 건물들은 모두 근년에 새로 지어졌다.
진주성(晋州城)은 삼국시대에는 거열성, 통일신라시대에는 만흥산성, 고려시대에는 촉석성, 조선시대 이래로는 진주성 또는 진양성(晋陽城)으로도 불렸다. 현재 성내에는 국립진주박물관 · 진주성 임진대첩 계사 순의단 · 의기사 · 창렬사 · 호국사 등의 시설과 유적이 있다.
고려시대 말기인 1377년 빈번한 왜구의 침범에 대비하여 진주성을 토성으로 쌓았는데, 2년 뒤인 1379년(고려 우왕 5)에 진주목사 김중광이 돌로 쌓는 도중 왜구의 침입이 있었고, 왜구가 퇴각한 후에야 성곽 축조를 마무리했다.
1591년 7월 경상도관찰사 김수가 일본의 침공에 대비하여 진주성을 수축하고 취약한 동쪽 부분을 확장하여 쌓았으나 그 지역은 지반이 약하여 결과적으로 임진왜란 중에 방어에 지장을 초래했다. 1593년 진주성을 함락시킨 일본군은 성을 무너뜨려 평지를 만듦으로써 진주성의 흔적을 지웠다.
북장대
진주성의 북쪽 지휘소격인 북장대는 임진왜란 때 격전이 벌어진 곳이며, 1618년(광해군 10)에 병사 남이흥이 중건했다. 그 후 여러 번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북장대는 내성 북쪽 끝 제일 높은 곳에 있어 낭떠러지 밑의 성 밖은 물론 성내와 외성에 포진한 병력까지도 지휘할 수 있다. 그래서 편액을 진남루(鎭南樓)라 했다. 북장대는 1983년 7월 20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호로 지정되었다.
논개가 모셔진 의기사
촉석루
진주성 안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물이 2층 높이의 촉석루이다. 촉석루는 전시에는 군사를 지휘하던 장수의 공간이었고, 평시에는 풍류를 즐기던 선비의 공간이었다. ‘촉석루’라는 명칭은 강 가운데 돌이 우뚝 솟아 있다 하여 붙인 이름이며, ‘남장대’ 또는 ‘장원루’라고 부르기도 한다.
1241년에 세워진 촉석루는 여러 차례에 걸쳐 중건과 중수를 거듭했으며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소실되었다. 1618년에 예전의 것보다 웅장한 건물로 중건했으며, 1983년 7월 20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8호로 지정되었다.
1950년 6·25전쟁 때 다시 불탔으며, 지금의 건물은 1960년 진주고적보존회가 시민의 성금을 거두어 중건한 것이다.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누대이다.
임진대첩 계사순의단
계사순의단(癸巳殉義檀)은 제1차 진주성 전투(1592)와 계사년인 1593년의 제2차 진주성 전투 때 순국한 7만 군관민의 호국영령을 기리기 위해 진주시민의 소망을 담아 문화공보부와 진주시가 1986년 12월에 착공하여 1987년에 12월에 준공한 제단이다.
국난 극복의 표상인 계사순의단은 촉석루 옆에 있으며, 제단의 크기는 가로 18미터, 세로 24미터, 높이 3.6미터이다. 3단으로 이루어진 네모난 단 위에 높이 3.5미터, 가로 9.7미터의 대첩비를 세웠다.
제1차 진주성 전투: 1592. 10. 05~1592. 10. 10
임진왜란 초기에 일본군의 기습적 공격에 미처 전열을 정비하지 못한 조선군은 한동안 육상 전투에서 곤경에 처했다. 그러나 조선 군대와 의병군이 흐트러진 대오를 가다듬고 일본군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먼저 진주성을 확보한 후 호남지역을 공략하고자 했다.
1592년 10월 5일 김시민 장군은 군사 3,800여 명으로 호소카와 등이 이끄는 일본군 2만여 명의 공격을 받아 10월 10일까지 6일간 싸워 이를 물리쳤다.각주 호소카와 다다오키(細川忠興), 하세가와 히데카즈(長谷川秀一), 가토 미쓰야스(加藤光泰)가 선봉에 선 일본군은 수적 우세와 조총 등 신식 장비를 앞세워 공격했으나 진주목사 김시민의 지휘를 받은 조선군의 방어벽을 뚫지 못하고 막대한 피해를 입고 패하여 물러갔다. 이것이 제1차 진주성전투이다.
육상전투에서 연이어 패배하던 조선군은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 크게 승리했고, 결과적으로 곡창지대 호남지방을 지킬 수 있었다. 한편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남해에서 일본 수군을 격퇴하고 있었고, 충청도 금산 지역에서는 조헌이 분발하고 있었다.
제2차 진주성 전투: 1593. 06. 22~06. 29
일본군은 1592년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1593년에 7만 대군을 동원하여 진주성을 공격해 왔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3년 2월 진주성 공격을 명령했고, 3월 10일과 4월 22일에도 연이어 진주성을 공격하고 전라도와 경상도를 장악하라고 지시했다.각주
1593년 5월 20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진주성 공격을 위해 장수 및 부대 배치를 확정했다. 나베시마 나오시게 · 구로다 나가마사 · 가토 기요마사 · 시마즈 요시히로 휘하 병력 25,624명과, 고니시 유키나가 · 소 요시토시 휘하 병력 26,182명을 제1군, 우키타 히데이에 휘하 병력 18,882명을 제2군, 모리 테루모토각주 ·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휘하의 병력 22,344명을 제3군으로 하여 모두 92,972명에 대해 진주성 공격에 직접 참여할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경상남도 김해에서부터 진주성까지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는 성을 연결하여 배치하고 부산에는 모리 테루모토의 병력, 동래읍성에는 마에노 나가야스, 김해에는 모리 시게마사(毛利重政), 부산 기장성에는 가메이 코레노리(龜井慈矩) 등 병력을 각각 배치했다. 이밖에 거제도에는 하치스카 이에마사(蜂須賀家政), 가덕도에는 구키 요시타카(九魁嘉隆) 등의 선단을 배치했다.
일본군은 1593년 6월 18일 의령으로 들어갔고, 다음날 군사를 돌려 진주로 향했다. 그리고 6월 19일부터 6월 21일까지 일본군은 진주 동북쪽 마현봉(馬峴峰)에 진을 치고 진주성을 에워쌌다.
그리고 제1, 제2, 제3군 약 7만의 병력으로 조선군과 백성들이 있는 진주성을 포위했다.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모리 히데모토, 깃카와 히로이에 등이 이끄는 또 다른 일본군 부대인 제4군과 제5군이 진주성을 구원하러 올 조선군에 대비하여 진주성 외곽에 진을 쳤다.
진주성 방어는 창의사 김천일의 지휘 하에 경상우병사 최경회, 충청병사 황진, 진주목사 서예원, 거제현령 김준민, 의병장 고종후, 김해부사 이종인이 각각 담당구역을 정해 일본군과 맞섰다.
외부의 조선군 지원부대가 올 것에 대비하여 2중으로 포위망을 구축한 일본군은 6월 22일 성에 접근해 공격을 시작했다. 6월 22일부터 6월 29일까지 8일간 진주성에서 3천여 명의 조선군과 6만여 명의 민간인 그리고 약 7만 명의 일본군 간에 벌어진 전투를 제2차 진주성 전투라고 부른다.
당시 교전 중에 황진이 죽자 서예원이 그를 대신하여 구역 지휘를 맡았는데, 그는 겁에 질린 나머지 갓을 벗은 채 말을 타고 울면서 돌아다녔다고 한다. 군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렸다고 하여 최경회가 그를 참하려고 하다가 그만두고는 장윤에게 대신 맡겼다. 그런데 장윤도 곧 조총에 맞아 전사했기에 이종인 혼자서 동서로 뛰어다니며 적에게 응수했다. 6월 29일 일본군이 진주성으로 진입하자, 서예원은 성을 버리고 도망가 숨어 있다가 잡혀 살해당했다. 그의 처 이씨와 맏며느리 노씨, 시집가지 않은 딸 모두 남강에서 투신했다.
귀갑거와 양민 학살
전투 사흘째 되던 날 일본군은 튼튼한 나무궤짝을 바퀴가 네 개 달린 수레 위에 올려놓고 궤짝 속에 군사들이 들어가 손으로 수레를 앞으로 굴려 전진하고 후퇴할 때에는 밧줄을 뒤에서 당기는 무기를 사용했다. 이 무기는 궤짝의 윗부분이 거북의 등같이 생겼다 하여 ‘귀갑거’라고 불렀다.
조선군이 섶에 기름을 묻힌 뒤 불을 붙여 귀갑거 위로 던져 불태우자 일본군은 일단 퇴각했다. 그리고는 귀갑거 위에 물기가 도는 쇠가죽을 씌워 화공에 대비한 다음 돌격대를 선발하여 동문 성 밑으로 투입했다. 6월 29일 성벽의 기초석 몇 개를 뽑아내자 성벽은 힘없이 무너지고 일본군 몇 명이 성벽 위로 올라섰다. 뒤이어 일본군이 몰려왔고 곧이어 서문과 북문 방어도 무너졌다. 함성을 지르며 돌격해오는 일본군에게 쫓긴 나머지 조선군은 촉석루 밑 남강가 바위에 모였다. 장수들은 임금이 계신 북쪽을 향해 두 번 절하고 무기를 강물에 던졌다. 그리고 김천일, 최경회, 고종후, 양산숙이 차례로 강물에 뛰어들었다. 김천일은 아들 김상건의 손을 잡고 투신했고, 이종인은 적군과 격투하다가 양쪽 팔에 적군을 하나씩 끼고 강물에 뛰어들었다.
진주성이 함락될 무렵 일본군은 이리 쫒기고 저리 몰려다니며 우왕좌왕하는 백성들에게 창고로 들어가면 죽이지 않겠다고 소리쳤고 이에 살아남아 있던 군졸과 백성들이 창고로 들어가자 그대로 불을 질러 불태워 죽였다.
이렇게 6월 22일부터 8일간에 걸친 치열한 공방전 끝에 진주성은 6월 29일 함락되었다.
이번 전투에서 이종인 · 이잠 · 강희진 · 오유 등이 전사했고 성이 함락되자 김천일 · 고종후 · 양산수 등 대부분의 지휘부가 남강에 투신, 자결했다. 일본군에게 밀려 촉석루로 온 조선군은 맞아죽거나 남강에 투신했다.
성 안에 있는 시체는 촉석루에서부터 남강 북안에 이르기까지 서로 겹쳐 있었고, 청천강으로부터 옥봉의 강가에도 시체가 가득했다.
성이 함락된 후 도망가 숨어 있던 서예원은 붙잡혀 참수되었으며 그의 목은 소금에 절여져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보내졌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서예원의 목을 김시민의 수급인 줄 알았다.
처절한 역사의 기억을 간직한 진주성은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18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