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월 13일, 덕유산 산행에 나섰다. 몇 해전에 다녀온 길이었지만 그 때는 눈이 적었다. 오늘처럼 차가운 날씨여야 서리꽃은 더욱 만발하리라.
산행 버스에 오르니 이미 만원이다. 겨우 빈자리 하나를 얻어 차고앉았다. 미리 자리 예약을 하면 좋으련만 그렇게 남겨진 빈자리가 나는 좋다.
안성매표소에 이르러 쇠설피와 스패츠를 찼다. 가느다란 쇠사슬로 엮어 만든 아이젠이다. 며칠 전, 등산용품점에 가서 체인젠을 달라고 하였더니 주인이 못 알아들었다. 체인젠이라는 말을 나에게 처음 듣는다고 했다. 쇠설피를 달라고 하였으면 선뜻 알아들었을까?
칠연계곡을 따라 2시간을 오르면 동엽령이다. 얼음 밑으로 흐르는 계곡의 물이 깊고 맑다. 7개의 연못 담이 있어 칠연 계곡으로 불리는 모양이다.
백두대간의 줄기인 동엽령에 이르는 산길에는 수백 년 된 소나무가 들어차 있었다. 하늘로 쭉 뻗은 소나무는 모두 베어 재목으로 쓰고 못생긴 소나무가 선산을 지키고 있다. 두 갈래, 네 갈래로 벌어져 재목으로 쓸 수 없는 소나무가 산길에 남아 이곳이 오래된 송림이었음을 알린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소나무는 강원도의 산간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적송이다. 나무 껍질이 붉어 적송(赤松), 내륙 지방에서 자란다하여 육송(陸松), 해안 지방에서 자란다고 하여 해송(海松)이다. 그러나 우리 선조들은 소나무를 적송이나 육송으로 부르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가 적송이라고 부르는 이름은 일본식의 이름이다. 일제강점기에 일제는 우리말을 없애려는 의도에서 나무이름도 일본식으로 강요하였다.
문헌에는 나무 중에 재질이 좋은 소나무를 ‘황장목(黃腸木)’이라 했다. 소나무의 목질이 단단하고 속이 황금빛이어서 황장목이다. 황장목은 죽은 자의 영면을 위한 목관을 만드는데 주로 쓰였다. 또한 궁궐의 신축과 왜구 침략에 대처하기 위한 배를 만드는 중요한 목재로 도 많이 사용되었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소나무 보호 정책을 강력하게 펼쳤다. 송목금벌(松木禁伐)로 나무 벌채를 규제하였고 우량의 소나무 분포지역은 금산(禁山)지역으로 정했다. 그것이 황장봉계표석(黃腸封界標石)이다. 황장봉표가 세워진 조선시대에 이미 우리나라의 금강송은 그 씨를 말리고 있었다. 못생긴 소나무만 산야에 남아 못생긴 씨를 퍼뜨리게 되었다. 덕유산 칠연계곡에 자라는 소나무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백두대간 줄기를 타고 금강산에서 경북 울진, 봉화와 영덕, 청송에 걸쳐 자라는 소나무는 줄기가 곧고 마디가 길며 껍질이 위로 갈수록 붉은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금강산의 이름을 따서 금강송, 또는 춘양목이라 불렸다. 춘양목이라 불려진 연유는 영주, 봉화, 태백으로 잇는 산업철도 중앙선의 '춘양역‘에서 온 소나무라 불려지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최근 항간에는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꺼내는 사람이 그 날 회식비를 내야한다고 한다. 그런데 국무회의를 주재하는 대통령 뒷자리에 걸린 금강송이 아무래도 눈에 거슬린다. 어느 유명한 화가가 그린 금강송일터이지만 그 자태는 분명 등 굽은 형상이다. 사찰의 대들보나 대궐의 배흘림 기둥으로 결코 쓰일 수 없는 구부러진 소나무이다. 동구 밖 언덕 위의 정자나무 옆에나 서있어야 할 소나무이다. 그런 그림일 바에야 차라리 소나무 숲을 걸어 두는 것이 옳다. 대통령의 옥좌를 장식하는 소나무 그림이라면 일견 속리산의 정이품송正二品松이어야 옳다.
해발 1,000미터 높이의 동엽령에 오르자 눈부신 설경이 펼쳐진다. 힘들게 올라온 등산객들의 환호성이 터져 나온다. 하늘은 파랗고 산야는 하얗다. 세상은 단지 쪽빛 하늘과 흰빛 산야로 구분된다. 졸참나무 가지에 얼어붙은 서리꽃이 장관이다. 그 모습은 마치 파란 하늘에 걸린 사슴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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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슴뿔! 사슴뿔! 하얀 사슴뿔! 삼신산 백록담에 살았다는 백록의 사슴뿔이 저랬을까? 서리꽃이 튼실하게 내려앉은 나뭇가지를 보고 있자니 문득 백록白鹿이 생각난다.
사슴(노천명)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冠)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쳐다본다.
남색 치마에 흰 저고리를 즐겨 입었던 시인은 사슴을 그렇게 노래하였다. 눈 내린 설경을 좋아했던 시인은 수필「설야」를 쓰면서 남색과 흰색을 그렇게 동경하였나보다.
백암봉에 이르는 산길에는 꽤나 바람이 차가웠다. 털모자를 뒤집어쓰고 걸어도 겨울 바람은 볼따귀를 사정없이 할퀴고 지나간다. 이런 칼바람이 있어야 서리꽃은 나뭇가지에 하얗게 내려 앉는다.
해발 1594미터의 중봉 아래 바람 자는 언덕에서 점심을 먹었다. 김밥 두 줄에 소주 반 컵을 홀짝 마시고 나니 몸이 훈훈하다. 얼떨떨한 기운으로 숲길을 지나 가자니 서리꽃의 숲길이 환상으로 다가온다. 극락인가 현실인가? 찰나이지만 현실과 극락의 구분이 안 된다.
중봉에 이르렀다. 일단의 청소년들이 무리지어 모여 있다. 어인 일인가 알아보니 백두대간을 답사하는 청소년들이다. 그들은 오늘 남덕유산에서 출발하여 백암봉을 지나 중봉에 이르렀다. 산아래로 내려가 하룻밤을 묵고 내일은 다시 백암봉에서 시작되는 백두대간을 가고자 하는 것이다. 혹한에 백두대간을 안내하는 가이드들도 대단하지만 방학을 맞아 대간 산행에 나선 아이들의 용기가 가상하다.
중봉에서 바라보는 주변의 산하가 아름답다. 남쪽으로 장대한 지리산 능선이 바라다 보이고 동쪽으로 가야산 상왕봉이 아득히 보인다.
해발 1614미터의 향적봉을 지나 설천봉에 이르는 구간의 눈꽃이 환상적이다. 여기 저기에 서있는 주목이 하얀 털코트를 입었다. 사람 없는 사진 한 장 찍으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너도나도 눈부신 설경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자하니 빈틈이 나지 않는다. 설경을 찍자하고 산길을 벗어나 숲길로 들어가니 발이 푹 빠진다. 눈이 많이 내려 쌓여 허벅지까지 차 오른다.
설천봉에 이르러 무주리조트의 8인승 곤돌라를 타자니 길게 줄을 서야 했다. 30명 단체는 편도 5천 원이지만 개인은 편도 7천 원을 내야한다. 무주리조트의 주 수입원은 스키나 스노우보드 손님이 아니라 곤돌라를 타고 향적봉에 오르는 손님들이다. 하루 온종일 곤돌라를 타고 오르내리는 손님들로 법석이다. 줄잡아 1천명이면 5천만 원이다.
몇 년 전만 하여도 스키 부대가 대세이더니 이제는 스노우보드 매니아가 스키장을 점령하였다. 생각 같아서는 비워둔 스키를 슬쩍 빌려 타고 설원을 달려 내려가고 싶다. 무명필 필필이 펼쳐놓은 슬로프를 달려가면 5분이면 될 것을 곤돌라를 타자니 10분도 더 걸린다.
주자창에 이르러 둘러보니 대구, 부산 등지에서 올라온 차량들로 가득하다. 전북에 위치한 무주리조트가 경상도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까닭이다. 전라도 사람들은 신나게 벌고 경상도 사람들은 즐겁게 논다.
닭고기를 넣은 수제비를 배불리 먹고 차에 오르니 졸음이 온다. 차가운 몸뚱이가 온풍에 저절로 녹아 흐른다. 무주 리조트는 야간에 슬로프를 개장하지 않는 까닭에 주차장을 빠져나가려는 차량으로 길이 막힌다. 무려 한시간을 기다려서야 겨우 주차장을 벗어날 수 있었다. 2012년 동계올림픽을 유치하기 전에 도로교통부터 정리해야겠다.
첫댓글 덕유산의 겨울꽃을 감상하며 긴 산행기 잘 읽었습니다.
늘 좋은 후기 써 주셔서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덕유산눈속에 폭 빠진 임선생님,녹용 자를 톱도 가지고 가셨는지요^^*
멋있게 촬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