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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방학 문화답사
“충남 내포에 가다”
미소 -최두석
쓸쓸한 이에게는 밝고 따스하게
울적한 이에게는 맑고 평온하게 웃는다는
서산 마애불을 보며 새삼 생각한다
속 깊이 아름다운 웃음은 그냥 절로 생성되지 않는다고
생애를 걸고 암벽을 쪼아 미소를 새긴
백제 석공의 지극한 정성과 공력을 보며
되짚어 생각한다
속깊이 아름다운 웃음은 생애를 두고 가꾸어가는 것이라고
아름다운 미소가 세상을 구하리라 믿은
천사백 년 전 웃음의 신도여
그대의 신앙이 내 마음의 진창에 연꽃 한 송이 피우누나
2009년 여름 모임 때 울릉도에서 최두석 시인의 ‘미소’를 낭송했는데, 그때 바로 겨울모임은 서산 마애불을 보러 가자고 결정이 되어서, 겨울여행은 이곳 서산으로 정해졌다.
[마애삼존불상을 친견하다]
아침 9시쯤 순천을 출발하여 고창 고인돌 휴게소에서 일행을 만나, 다시 서산에 12시쯤 도착하다. 인천에서, 광주에서 다들 변함없는 친우들이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모인다. 이제는 한 가족 같다.
국수와 쌀이 들어간 개성적인 맛의 어죽을 점심으로 먹는다. 식사가 끝나자 곧바로 서산마애불을 향해 등산을 한다. 오르기 쉽도록 가파른 산등성이에 계단이 놓여있다. 6~7분 정도 오르니 마애불을 설명해 놓은 안내판이 놓여있고, 쪽문을 지나 왼쪽 아래로 내려갔다 다시 오르니 그곳에 ‘마애삼존불상’이 새겨져 있다. 거대한 바위에 돋을새김으로 새겨진 과거의 관세음보살, 현재의 석가모니, 미래의 미륵불상이 나란히 계신다. ‘백제의 미소’‘가장 아름다운 불상’등 익히 소문을 많이들은 터라 이곳에 오기 전까진 전에 오지 않았나 하는 착각을 하였다.
문화해설사 님의 설명에 의하면 빛이 비추는 방향에 따라서 웃음의 빛깔이 달라진다고 한다. 아침날빛이 비출 때 담에 기대어 본 부처님 미소는‘평화로운 미소’, 중앙에서 바라보는 한낮의 해가 비출 때 바라보는 모습은 ‘넉넉한 미소’, 저녁 무렵 산밑 오른쪽에서 바라보는 모습은 ‘근엄한 미소’로 보인다고 한다. 설명에 의한 기분 탓일까? 한낮에 넉넉한 미소로 보이는 것은 내 마음의 착각일까? 이 미소는 서산 시장에 가면 어느 때나 만나볼 수 있는 시장 아지매들의 선량하고 따뜻한 미소를 본따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 미소는 서산 사람들의 넉넉한 인정과 마음 씀씀이를 그대로 잘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를 상징한다는 가운데 부처님은 U자 모양의 승복 위에 장삼을 걸치시고 오른손바닥으로 무엇을 막으려는 듯, 선서한 듯 올리시고, 왼손은 엄지와 검지, 중지만 펴서 아래로 향하고 계신다. 이것을 수인이라 하는데, 마귀를 막고, 중생에게 소원을 들어주겠다는 표시란다. 오른쪽에 서 계신 관세음보살은 여성처럼 가냘픈 몸매이나 사실은 전생에 왕자로서 보살이 되어 중생을 제도하는 부처님이시다. 전생의 석가모니께서 수행자였을 때 이 관세음보살이 진흙길을 걸으시는 것이 안타까워 자신의 머리카락을 고이 밟고 지나가시라고 진흙길 위에 깔아드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왼쪽의 미륵불은 현생의 석가모니 부처께서 못다 구한 중생들을 후생에 모두 구하겠다 서약하신 부처님이신데, 좌대 위에 한 쪽 다리를 올리고 앉은 모습이며 한 손으로 볼을 만지는 모습 등이 귀엽고 천진난만한 동자 같다.
[보원사지의 훵한 바람결을 느끼다]
차로 7분쯤 내려오니 절터가 나온다. 엊그제 내린 눈이 녹아서 땅이 질척거린다. 하늘은 투명하나 그래도 겨울이라 바람결이 차갑다. 틈바구니로 새어드는 바람을 문풍지로 막듯 모자와 장갑, 목도리로 몸의 끝부분마다 꼭꼭 감싼다.
폐사지를 볼 때마다 늘 시간과 공간 변화의 부조화를 실감한다. 시간 변화보다 공간 변화의 흐름이 좀 더 느리다. 당시에 살았던 사람들은 사라졌으나, 3만평이라는 넓은 터에 오층석탑과 당간지주는 서로 떨어진 채 여전히 옛 모습을 간직하고 서 있다. 저들의 몸속 깊은 곳 어디엔가는 당시 사람들의 따스한 손길이 새겨져 있는지 모른다. 저들은 한때 북적이며 오가던 사람들 모습과 목탁소리, 범종소리를 추억으로 기억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사람들 아우성 소리에 뒤섞여 절이 불타느라 하늘 가득 흩날렸던 불티들과 잿가루를 아직도 진저리치며 잊지 못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렇건만 석탑과 당간지주는 말이 없다. 명상에라도 잠긴 듯 조용히 하늘 아래 서 있을 뿐이다. 관광객이 떠들어도 무심하다. 바람이 온몸을 훑고 지나가도, 새들이 지저귀여도 깊은 마음속까지 닿지 않는 것일까? 깊은 삼매에 들었나 보다.
안내 표지판을 보니 ‘보원사지’는 사적 제316호로서,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상황산 북쪽에 있는 절터로 ‘서산마애삼존불’로부터 1.5km 남쪽에 위치에 있다고 한다.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서산마애삼존불’이나 ‘금동여래입상’의 유물 등으로 백제 때 절로 추측하나 정확하지는 않다. 넓게 봐서 신라 말에서 고려초기의 절에 해당될 것 같다.
백제 주류층들, 특히 진씨는 자신들의 세력을 강화하기 위해 해상무역의 길목에 ‘보원사’를 짓고‘무사 안녕’을 빌었다고도 한다. 무엇보다 조형미 뛰어난 서산마애불을 바라보며 ‘왕즉불 사상’을 통해 무사안녕을 빌었다.
[개심사]
또 다시 차는 어디로 달리는가? 산도 아니고 밭도 아닌 잔디밭 사이로 차는 달린다. 산 같은데 나무 한 그루 없고, 밭 같은데 작물 하나 없이 부드러운 잔디로 뒤덮인 저것은 무엇일까? 고분 같은데 넓기도 하려니와 많고, 골프장 같은데 구릉이 졌다. 나중에 알아보니 소 방목장이란다. 그때서야 서산의 소가 유명하다는 것이 생각난다. 남편은 정주영 씨가 서산에서 소를 키워 북한으로 보냈다는 사실을 생각해낸다.
절 입구에 들어서니 “象王山開心寺”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정경호 선생님이 설명하기를, 象은 ‘코끼리’라는 뜻으로 우리말로“가야”라고 하는데 부처님께서 깨달은 곳이 ‘부다가야’이듯이, “부처님의 깨달음이 머문 곳”이란 의미로 쓰인다고 한다.‘가야산’이란 불교 진리의 깨달음과 연관된 산임을 처음 알았다.‘개심사’는 가야산 중턱에 서 있다.
‘개심사’는 여느 절과 달리 특이한 점이 몇 가지 있다. 차를 주차해 놓고 한 10분 동안 등산하듯 가파른 가야산 위로 올라가야 한다. 길이 좁아 이곳에 절이 있으랴 싶은 곳에 갑자기 절이 있다. 산 위에 넓은 평지가 나오는 것이 놀랍다.
안내판 설명을 읽어본다. “‘개심사’는 651년(의자왕11)에 혜감국사가 창건하여 ‘개원사’라고 불렀다가 , 1350년(고려말기) 처능대사가 중창하여 ‘개심사’라 하였다. 1484년(성종15)에 다시 크게 중창하였는데, 이때 대웅전, 심검당 등이 세워졌다.”
‘대웅전’건물은 보통 한옥 건물과 다르다. 정경호 선생님 설명에 의하면, 대웅전은 맞배지붕에 다포식 건물로, 이는 고려 후기의 맞배지붕에 주심포식 건물에서 조선 시대의 팔작지붕에 다포식 건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형태를 가지고 있어서 우리 나라 건축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한다. 그래서 보물 제143호로 지정되어 있다. 다포식에 팔작지붕만 본 터라 뭔가 특이하다는 느낌이 든다.
바로 옆에 “심검당(尋劍堂)”이라 써진 현판 아래 낡은 건물이 보인다. 뭔가 편안한 느낌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관찰해 보니, 기둥과 서까래가 반듯한 직선이 아닌 굽은 곡선이다. 자연스러운 리듬감이 느껴진다. 아마도 바르게 자란 나무가 없어서 이 굽은 나무를 사용했겠지만, 참 좋다. 아마 건축 당시에는 이 나무를 사용했을 때 주저했을 지도 모른다. 누군가 반대했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금은 이 나무의 자연스럽고 개성적인 기둥 때문에 유명해졌고, 이것을 보려고 많은 관광객들이 온다고 한다. 인위적인 직선보다 자연스러운 곡선을 사람들은 언제부터 좋아하게 된 것일까? 물질문명과 첨단과학에 이제는 심신이 지친 것일까? 한때는 직선만 좋아하던 때가 있었다. 그래서 둥그런 초가를 없애고 반듯한 슬레이트지붕, 네모형 아파트로 바꾸어 버렸다. 지게를 지고 오르내리던 구불구불한 길은 없애고 반듯한 신작로를 냈다. 구불구불 돌아가는 야트막한 돌담을 없애고 시멘트 벽돌로 높은 직선의 담을 쌓았다. 그러나 이제‘심검당’에서 소박하고 편안한 위로를 받고 싶어 사람들은 먼 길임에도 기꺼이 찾아오는지 모른다.
그런데, 나는 이곳에 분명 처음 와보는데“심검당(尋劍堂)!”이라는 글자가 낯익다. 어디에서 보았을까? 한참 생각해 보니 시에서 읽은 기억이 난다. 바로 문태준 시인의 <빈집의 약속>이다.
빈집의 약속 (문태준)
마음은 빈집 같아서 어떤 때는 독사가 살고 어떤 때는 청보리밭 너른 들이 살았다
볕이 보고 싶은 날에는 개심사 심검당 볕 내리는 고운 마루가 들어와 살기도 하였다
어느 날에는 늦눈보라가 몰아쳐 마음이 서럽기도 하였다
겨울 방이 방 한 켠에 묵은 메주를 매달아 두듯 마음에 봄가을 없이 풍경들이 들어와 살았다
그러나 하릴없이 전나무 숲이 들어와 머무르는 때가 나에게는 행복하였다
수십 년 혹은 백 년 전부터 살아온 나무들, 천둥처럼 하늘로 솟아오른 나무들
뭉긋이 앉은 그 나무들의 울울창창한 고요를 나는 미륵들의 미소라 불렀다
한 걸음의 말도 내놓지 않고 오롯하게 큰 침묵인 그 미륵들이 잔혹한 말들의 세월을 견디게 하였다
그러나 전나무 숲이 들어앉았다 나가면 그 뿐, 마음은 늘 빈집이어서 마음 안의 그 둥그런 고요가 다른 것으로 메워졌다
대나무가 열매를 맺지 않듯 마음이란 그냥 풍경을 들어앉히는 착한 사진사 같은 것
그것이 빈집의 약속 같은 것이었다
[ 알토란사과 펜션에 도착하다 ]
생막걸리와 동동주를 사들고 운곡리 서당골에 있다는‘알토란사과 펜션’숙소로 향한다. ‘알토란’은 사과보다 작은데, 어감이 좋아서 이름으로 사용한 것 같다. 마을 입구에 있는 마을회관 2층에 펜션을 마련하여 손님을 받고 있다. 참으로 마을회관을 잘 활용하고 있다. 하룻밤 머무는 데 13만원. 마을회비로 사용할 수 있으니 농한기 때 농촌 수입으로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다. 집에 손님이 오면 숙소로 이용할 수도 있고, 마을잔치 때 이용해도 되고, 두루두루 많이 도움이 되겠다. 창문 밖으로 겨울 사과농장이 보인다. 잎과 열매를 버린 나무들은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내보이고 있다. 윗가지가 잘려서 키가 크지 못한 나무들은 심하게 굽어져 있어 보기에 안쓰럽다. 많이 아플 것 같다. 그러나 겨울 찬바람 속에 나무 저희끼리 서로서로 의지하는 듯 위로하는 듯 함께 서 있는 모습이 그나마 다행이다 싶다.
좁쌀로 빚은 노란 막걸리와 포천생막걸리에 김향자 선생님이 즉석에서 만든 익은 김치에 돼지고기 볶음을 두부와 함게 안주로 먹는다. 언제 만나도 반가운 선생님들이 인천, 순천, 광주에서 오셨다. 10여 년간 가족 모임으로 함께 여행을 했었는데, 기저귀 차고 따라다니던 아이들은 벌써 고등학생과 대학생이 되어서 더 이상 우리를 따라다니지 않는다. 다시 신혼으로 돌아간 듯 부부들만 모였다.
저녁에 산책을 나간다. ‘예당조각공원’으로 박혜숙 선생님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나간다. 조용한 밤, 사람들 자취가 없어 조각공원은 조용하다. 하늘에는 반달이 떠있고, 잔디 위는 서리가 내려 달빛에 반짝이고 있다. 어둠과 빛이 혼재된 밤, 조각 작품들 하나하나 들여다보며 감상한다. 작품 이름을 읽기 전에 작품만 보고 이름을 알아맞히기도 하고, 작품이 상징하는 의미를 곰곰이 생각해 보기도 하면서 감상한다. 몇 분 아는 분들의 작품이 보여 반갑다. 강관욱 님의 <높이 더 높이>라는 작품은 인간의 열정과 의지를 드러내는 듯 주먹진 팔뚝에 힘줄이 선 채 높이 하늘로 향하는 모습이다. 민형기 님의 <예산 역사>는 신석기 시대인 듯한 모습이 화강암에 새겨져 있고, 이행균 님의 <두 개의 나>는 현실과 이상, 깊이 있는 내면과 현실 사이에서 철학하기가 가치있는 일이라고 작품 설명이 되어 있다. 조각 작품들을 보면서 만약 이런 주제를 시로 표현한다면 어떻게 형상화시켜야 할까를 잠시 생각해 본다. 시는 말로 그리는 그림인데, 어떻게 그릴 것인가? 시적으로 바라보는 눈을 갖고 싶다.
서리 내려 반짝이는 밤
관객 없어 스스로 숨쉬는
조각 작품 바라본다
남 앞에 겉모습만 보이는 내 모습이
바로 조각 작품
아무도 울타리에 가두지 않을 때
비로소 자유를 얻는 조각 작품들
낮에 바라본
빈 논에 모여앉은 기러기떼
지금쯤 겨울 하늘 가르며 날아가겠다
겨울 하늘길 하나
따뜻한 숨길 열려 가겠다
[덕산온천에 몸을 담그고]
새벽 6시, 어둠속에 잠긴 시골은 조용하다. ‘덕산온천’에 새벽부터 갔건만, 벌써 많은 사람들이 들어와 주차하기가 힘들다. 온천에 몸을 담그고 물이 주는 따뜻함과 편안함에 맘껏 취한다.
겨울나무처럼 벗은 몸에 대해 서로가 서로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나이는 언제쯤일까? 남보다 더 예쁘게 보이고 싶다는 자의식과, 정형화되고 강조된 육체미에 대한 왜곡된 사회 인식 때문에 좀처럼 내 몸에 대해 사랑스러움을 느끼기 힘들다. 불교에서는 근본적으로 아름다움과 추함, 올바름과 그름, 선함과 악함에 대한 구분은 없다고 하였다. 깨어있는 눈으로 보면 다 아름답고, 다 선하다고 한다. 상대적이고 일시적이고 한정된 시야로 바라보기 때문에 이런 왜곡된 모습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추사 고택]
숙소에서 간단히 아침을 먹고 허철호 선생님 내외만 바쁜 일이 있어 먼저 떠나고, 나머지 선생님들은 다시 ‘추사 고택’으로 간다. 정문 앞에 안내판이 세워져 있고, 그 옆에 유형 문화재 45호인 ‘화순 옹주 정려문’이 세워져 있다.
화순옹주는 조선 영조대왕의 둘째딸로서 추사의 증조부인 김한신에게 시집을 왔는데, 총명했던 김한신이 39세 젊은 나이로 죽자, 화순 옹주는 식음을 전폐하고 남편을 따라 죽었다. 이에 정조는 열녀정문을 내려 그 아름다운 뜻을 기렸다.
김정희는 1786년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서 영조의 사위인 월성위 김한신의 증손이며, 병조참판인 김노경의 아들로 태어나 백부 김노영에게 입양되었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 고증학의 신봉자였던 박제가의 인정을 받아 그의 문하생으로서 학문의 기초를 닦았다. 1809년 아버지 김노경이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갈 때 수행하여 연경에 체류하면서 청나라 학자 옹방강(翁方綱)과 교유하여 그의 경학(經學)․금석학(金石學)․서화(書畵)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1856년 추사 김정희가 71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묘소는 집 바로 옆 언덕에 모셔졌다.
사랑채 기둥마다 시가 걸려 있다. 오랜 세월 견뎌온 나무 기둥은 벌레 먹어 구멍이 뚫리고 바람과 햇빛에 갈라진 곳이 많으나 추사의 시들이 걸려 있어 삼가 조심스럽게 읽어본다. 세월의 깊이만큼 크고 깊은 추사 선생님의 정신 세계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어서 기쁘다. 선생님의 시들은 읽을수록 맛깔스러운 멋이 우러날 뿐만 아니라, 선생님의 인품이 느껴져서 좋다.
“열푸른 새옹기에 옥명차(좋은 차)를 달이고
짙누런 경환지 좋은 서청에 은구(초서)를 쓴다.”
“옛것을 좋아해 때때로 깨어진 비석을 찾고
경전 연구로 며칠은 시를 못 읊는구나.”
“글씨 쓰는 법은 외로운 소나무 한 가지와 같고
그림 그리는 법은 장강 만리와 같은 유장함이 있다.”
“세상에 두 가지 큰 일이 있으니
밭 갈고 독서하는 일이다.”
우리 나라 서예가들은 詩, 書, 畵에 능통한 추사 선생님 때문에 힘들다고 한다. 그만큼 글씨가 뛰어나서 넘어서기는 커녕 모방하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선생님이 완성한‘추사체’는 淸經高雅(맑고 굳세며 고상하고 아담함)하고 森嚴拙樸(무섭도록 엄숙하며 치졸하고 순박함)이 특징이라고 한다. 선생님은 실사구시 학문을 주장하고, 금석학을 깊이 연구하여 신라 진흥왕 순수비를 밝혀내기도 하셨다.
추사 선생님의 노력을 강조하는 말씀들이 보인다.“가슴에 만 권의 책이 있어야 글이 나온다.”,“가슴속에 오천 권의 문자가 있어야만 비로소 붓을 들 수 있다.”, “팔뚝 밑에 309개의 옛 비문 글씨가 들어 있지 않으면 또한 하루아침 사이에 아주 쉽게 나오기가 어려운 것이다.” ,“내 글씨는 비록 말할 것도 못되지만, 나는 70 평생에 벼루 열 개를 밑창 냈고, 붓 일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비록 9999분에 이르렀다 하여도 그 나머지 1분을 원만하게 성취하기가 가장 어렵다. 9999분은 거의 다 가능하겠지만, 이 1분은 사람의 힘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며, 또 사람의 힘 밖에 있는 것도 아니다.”이것으로 봐서 선생님의 시, 글씨, 그림의 뛰어난 능력은 타고 났다기보다는 그만큼 노력으로 가꾼 능력임을 알겠다. 또한 인간의 한계를 이해하여 최선을 다하되 하늘의 뜻을 수용하려는 겸손함도 엿볼 수 있다. ‘盡人事待天命’이라고 했던가!
선생님은 말년에 제주도와 북청으로 두 번이나 귀양을 갔지만 그때마다 학도들에게 경학과 시문과 서도를 가르치면서 스스로 끊임없이 공부를 하여 자신의 학문과 예술을 완성시켰다.
안채 뒤안으로 돌아가니 베이징이 원산지인 백골송이라고 불리우는 흰 소나무가 서 있다. 추사 선생님이 북경에 갔을 때 백송 묘목을 구해와 고조부 묘소 앞에 심은 것이라는데,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예산 백송이다. 이 소나무는 나이를 먹을수록 줄기껍질이 희고 맨질맨질해진다. 1910년 일제강점기 때는 한때 생장이 멈추었다가 해방 후에 다시 자랐다고 하니, 참 신기하다. 역사적 상황 속에서 자신이 자랄 때인지, 멈추고 잠시 기다려야 할 때인지 나무가 알고 있으니 말이다.
선생님이나 소나무나 겨울의 힘든 시기에는 새봄을 기다리며 조용히 낮게 엎드려 스스로를 다지며 기다린다는 점이 비슷하다. 새봄에 활짝 꽃피우는 것도 좋지만, 진정 자신의 빛을 발휘할 때는 어려운 시기를 어떻게 보내느냐로 결정된다. 추사 선생님이 제주도에 유배가지 않았다면 ‘세한도’가 생겨 났을까? 실학과 불경과 금석학을 공부할 수 있었을까? ‘추사체’를 완성할 수 있었을까? 화려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것도 좋지만, 힘든 상황일수록 뿌리 깊이 자신의 내실을 다지는 것은 꼭 필요한 삶의 자세라는 생각이 든다.
[남연군묘]
남연군’은 흥선 대원군의 아버지로 그의 묘자리가 이곳 충청도 가야산 자락에 있다. ‘남연군묘’를 찾아가기 위해 덕산면 상가리로 향한다.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찾아가니 ‘가야사’폐사지라는 푯말이 세워져 있다. ‘금탑’이 서 있었다는 언덕 높은 곳으로 올라가니 무덤 하나가 동그랗게 앉아있다. 무덤 앞에는 제사상, 비석, 석등, 망주석 등이 세워져 있다.
“1822년 남연군이 죽자, 흥선군은 당대 최고의 지관인 정만인에게 명당 자리를 부탁합니다. 지관은 충남 가야산 동쪽에 2대에 걸쳐 천자가 나오는 자리(二代天子之地)와, 광천 오서산에 만대에 영화를 누리는 자리(萬代榮華之地)가 있다고 말합니다. 자기가 죽은 뒤의 자손대대 영화보다는 왕권에 관심이 있었던 흥선군은 가야산을 택했습니다. 그리하여 정지관을 앞세우고 3백리 길을 떠났는데, 이때는 남연군이 죽은 지 9년, 흥선군의 나이 25세 되는 해였습니다. 그런데 정작 가야산에 이르고 보니 거기에는 이미 가야사라는 절이 있었습니다. 지은 지 1,400년 정도나 되는 고찰이었습니다. 게다가 절 뒤 봉우리에는 웅장하고 아름다운 5층 석탑(금탑)이 서 있었는데, 지관이 명당 자리로 꼽은 곳은 바로 그 금탑이 서 있는 자리였습니다.”
25세의 흥선군이 왕권을 얻기 위해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주변 사람들을 하나하나 설득하는 과정을 들으면서, 한 사람의 집념과 열정이 어떻게 역사를 만들어 가는지를 이해할 것 같았다. 흥선군은 대단히 치밀하고 이성적인 사람일 것이다. 목적 달성을 위해 모든 것을 여기에 집중시킬 줄 아는 그는 카리스마가 강하고 자기 중심적이어서 모든 것을 자기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지만, 이런 일처리는 자칫 잘못되면 독선으로 흐르기 쉽다는 것을 인식시켜 준다.
무덤 아래 길가에는 투명 유리로 속이 보이는 보호각을 지어 남연군의 상여를 전시해 놓고 있다. 안내 표지판 설명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이제 500리 길 이장이 시작되었다. 왕족의 일인지라 지나는 길마다 고을 사람들이 부역을 나서야 했다. 상여는 맨 마지막으로 덕산면 광천리 마을 주민들이 맡았다. 나분들 주민들은 정성으로 작업에 참여했다. 흥선군은 그 고마움에 대한 보답으로 운구에 쓰인 상여를 마을에 기증하고 마을 이름을 나분들(또는 남은들)로 불렀다. 대원군이 기증한 상여는 현재 중요 민속자료 제31호로 지정되어 있다.
흥선군은 윤씨네 땅에 남연군의 유해를 이장한 다음, 집안의 가보인 중국산 단계석 벼루를 충청도 관찰사에게 선물로 보내며, 가야사에 승려가 살지 못하도록 압력을 가하라고 청탁하였다. 그런 다음 마곡사 승려들에게 가야사에 불을 질러달라고 부탁하여, 결국 가야사는 재로 사라졌다. 승려는 돌아가는 길에 쓰러져 숨지고 말았다고 한다.
안타까운 일이다. 천 년의 고찰이 한 사람의 권력에 대한 집념에 의하여 하룻밤 사이에 재로 사라지고 말다니…….
사람의 죽고 사는 일은 서로 얽혀 있는 것 같다. 삶이 죽음을 좌우하기도 하지만, 죽음이 삶을 변화시키기도 하니 말이다. 또한 ‘남연군의 묘’를 보면서 자연과 사람의 일 또한 밀접한 관계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무덤이나 집터에 따라 자연의 기운이 사람의 기운과 섞어들어 좋은 영향을 미치기도 하고, 나쁜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고 한다. 중요한 것은 내가 바른 마음과 행동으로 자연과 조화되어 사는 것. 흥선군도 가야사를 불태우고 금탑사 자리에 자신의 아버지 묘를 이장하여 아들을 왕으로 만들었지만, 바른 행동이 아니었기에 조선은 2대 왕으로 끝나버리고, 흥선군 자신도 민비와 관련되어 나중에 아관파천이니 뭐니 해서 억류되고, 쇄국정책과 경복궁 복원공사로 백성들로부터 원망을 들었으니 결코 행복한 삶만을 살지는 못했다. 문득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만약 흥선군이 광천 오서산에 있다는 ‘만대에 영화를 누리는 자리’에 무덤을 썼다면 흥선군의 인생은 달라졌을까? 우리 나라 역사도 달라졌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한 번 일어나버린 일은 되돌릴 수 없는 것, 다만 교훈만은 잊지 말고 현재 내 마음과 상황을 살피고 삶의 방향을 제대로 선택하여 살 때 역사의 가치는 헛되지 않을 것이다.
[ 해미읍성 앞에서 ‘소머리국밥’을 먹다 ]
과거로 긴 역사 여행을 다녀오니 배가 고프다. 머릿속으로 아무리 상상 여행을 해도 내 몸은 늘 현재의 시간 속에 흐르는 모양이다. 예산은 소가 유명하다고 했으니 다들 ‘소머리국밥’을 먹자고 한다. 특히 ‘엄마손 소머리국밥’이 유명하다며 해미읍성 앞 마을을 한 바퀴 돌다가 못 찾고 바로 앞에 있는 식당으로 들어간다.
조갯살 젓갈이 맛있어 두세 번 더 달라고 해서 먹는다. 엊저녁에 못 먹고 남겨둔 포천 생막걸리로 목을 축이며 국밥 한 그릇으로 배를 채우니, 아딸딸한 기분에 배는 만족하다며 한없이 너그러워진다.
[ 海美邑城 : 사적 제116호 ]
밖에서 바라본 해미읍성은 엄숙하고 장엄하게 보인다. 군대의 깃발 대여섯 기가 줄줄이 걸려 있어 특히 군대의 엄격함이 느껴진다. 읍성 입구에서부터 돌담으로 높이 둘려 있는데, 안에 들어가서 보면 흙으로 쌓여있고 바닥이 돋아있어 그다지 높지 않게 보인다. 설명에 의하면 밖의 담은 돌로 쌓고 안은 계단식으로 자갈과 잡석 및 흙으로 채워 담이 튼튼하게 오래 보관된다고 한다.
안내판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해미는 1414년(태종 14년) 덕산에서 충청병마절도사영이 이곳으로 이설된 뒤 1651년(효종 2년)에 청주로 옮겨질 때까지 충청 서해안의 군사 중심지였다. 해미읍성은 이 시기에 충청도의 병마절도사가 있던 곳으로 1491년(성종 22년)에 축성이 이루어져 영장(營長)이 배치되면서 서해안 방어를 전담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과 보존상태가 양호하여 해미읍성은 현재 사적 제 116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해미읍성은 동북쪽에 표고 130m의 야산을 에워싸고 있는 평산성으로 평면은 타원형을 이루고 있다. 성벽은 평지와 구릉을 적절히 이용하면서 축성되었는데, 성벽의 둘레는 약 1.8㎞이다.
“충청도병마절도사는 서산, 태안, 아산 등 내포 지역에 대해 사법과 행정일을 관장하였습니다. 주로 병영시설로서 군부대 역할을 하였는데, 1914년 옮긴 뒤로는 민가를 성 안으로 받아들이고 해미현감이 내포지역을 다스렸지요. 해미읍성은 조선 후기에 군사적 역할이 약화되고 범죄자들을 가두고 처형하는 감옥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였는데, 1799년부터 내포지방의 천주교인들은 모두 여기로 끌려와 처형당하였습니다. 특히 19세기 후반 병인박해 때는 천주교도 감옥 및 처형장으로 이용된 천주교 성지로 유명합니다.”
김영숙 서산문화해설사가 회화나무 앞에서 설명해 준다.
회화나무를 여기에서는 ‘호야나무’라고 부르는데, ‘호롱불처럼 자기 몸을 태워 세상을 진리의 빛으로 비춘다’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이 회화나무 연령은 300년 이상으로 추정하는데, ‘병인박해’때인 1868년 천주교 신자들을 대량으로 처형하였다. 이 호야 나무 동쪽가지에 천주교신자들의 머리채를 철사줄로 묶어 매달았다고 한다. 1940년 태풍에 그 가지가 부러지고 없지만 지금도 자세히 나무를 보면 철사줄로 감긴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있다.
그 외에도 천주교 신자들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탄압하였는데, 서문밖에 있는 하천 돌다리인 자리갯돌에 ‘자리개질’이라 해서 사람을 쳐서 죽이기도 하고, 지금 ‘해미성당’자리인 여숫골이라는 곳에 약 천여 명을 생매장하여 죽이기도 하였다. 또 ‘진둠벙’이라 해서 물 속에 빠뜨려 죽이기도 하였다. 대부분은 칼에 참수되어 죽었다고 한다. 우리 나라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도 여기에서 옥사하셨다고 한다.
우리 나라는 '천주교사'에서 ‘자주적 포교’로 의미가 깊다. 처음 천주교를 받아들일 때 책을 읽고 나서 ‘주문모’청나라 신부를 초빙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천주교신자들을 박해하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옛날부터 우리 나라는 유교의 영향으로 제사를 지내왔다. 그런데 ‘진산사건’이라 해서 초상집에서 상 조문을 안 받고, 위패를 불사르는 사건이 있었다. 무엇보다 직접적인 원인은‘오페르트 남연군묘 도굴사건’이라 할 수 있다.
역사적 사건을 들여다 보면 참 역동적이다. 한 사건은 다음 사건의 필연적인 원인이 되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연결되어 사건을 불러 일으킨다. 어떤 일을 할 때 선택의 중요성을 실감나게 한다. 대원군이 가야산에 남연군묘를 이장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오페르트가 도굴하지 않았다면 천주교인들은 탄압을 덜 받았을까? 이미 일어나버린 과거의 사건이지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단지 천주교를 믿었다는 이유만으로 죽어야만 했기에 안타깝고 슬퍼서 헛된 가정을 해본다.
[ 해미 순교 성지를 순례하다 ]
해미읍성에서 서문 밖으로 나와 ‘대건해미성당’을 지나면 해미순교 성지가 있다. 입구에 들어서니 ‘한티고개돌’이 세워져 있다. “죽음의 행렬을 묵묵히 지켜본 돌을 생매장으로 순교한 현장으로 옮긴다”고 써져 있다. 해미지역 첫 순교자인 인언민 마르티노의 말이 새겨진 바위가 인상적이다. “그렇구 말구, 기쁜 마음으로 내 목숨을 천주님께 바치는 거야.”이 글을 읽는 순간 목이 콱 막히고 눈물이 핑 돈다. 죄없이 죽어가는 마음이 어떠했을까? 원망했을까? 후회했을까? 두려웠을까? 천주님을 뵙는다는 믿음으로 기쁨을 느꼈을까? 한 사람 한 사람이 나와 똑같은 사람인데, 죽음 앞에 선 마음이 얼마나 참담했을까? 이 죽음만 피할 수 있다면 어떤 일도 견딜 수 있으리라. 예수님께서도 마지막 죽음의 잔은 거두어 주시기를 기도하지 않으셨던가! 죽음은 생명있는 존재라면 누구라도 피하고 싶은 가장 두려운 상황이다. 그런데 이 죽음의 상황을 묵묵히 받아들인 훌륭한 사람들이 지금 이곳에 수천 명 잠들어 계신다.
해미읍성 서문밖 수구 위에 놓인 돌다리인 자리개돌을 이곳에 옮겨 놓았는데, 한 사람 누울 정도의 넓고 평평한 돌이다. 이 돌다리에서 병인박해 때 신자들을 자리개질로 처형하였다고 한다. 만져보면 그냥 차가운 바위이지만, 지금 이 바위 속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비명과 핏물이 스며있을 것이다. 지금도 한 밤중이면 이 바위 속에서 신음소리와 비명이 새어나오고 있는지 모른다.
사람들을 생매장했다는 ‘여숫골’은 신자들이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기도하는 소리를 “여수 머리”로 잘못 알아듣고, 그들이 생매장된 곳을 “여숫골”이라 부른다고 한다.
천주교 신자들이 고문을 받고 죽어가는 모습을 조각으로, 그림으로 표현해 놓은 것을 보면서,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는다. 때로는 두려움과 전율을 느끼면서, 때로는 슬픔과 안타까움을 느끼면서, 그리고 때로는 아름다움과 성스러움을 느끼면서 성지를 둘러본다. 특히 수난 당하는 모습을 황토색 부조로 조각해놓은 벽은 생동감이 넘쳐 더욱 긴장감과 비장감을 느끼게 한다. 순교자들에 대한 사진과 그림을 보면서 잊혀지지 않는 것은, 장티푸스에 걸린 환자가 성채를 못 삼키자 입속에 있던 성채를 대신 삼키고 장티푸스에 걸려 돌아가신 프랑스인 신부님도 계셨는데, 이름을 미처 못 외운 것이 아쉽다.
해미성지를 둘러보고 나니 세상이 조금 어두운 색깔로 색칠된 듯싶다. 그러고 보면 우리네 삶터 곳곳에는 지나간 삶의 흔적들이 그림자처럼 스며 있는 듯싶다. 과거의 땅 위에서 우리는 또 하나의 삶을 덧칠하며 살고 있는 거다. 평소에 자주 의식하지는 못하지만 우리 또한 또 하나의 발자국을 덧보태면 잠시 한 세상 살고 있는지 모른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또 다시 해묵은 화두를 되뇌이며 밖으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