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따르르르르르르릉"
"따르르르르르르릉"
"따르르르르르르릉"
"여보세요"
"주말에 사진은 못찍겠다고 하시더니 뭐하시능교?"
"아! 그래가 지금 왕릉답사중인데 올란교?"
" 어딘데요??"
"아! 그라만 진평왕릉으로 오소"
이 간단한 전화 한 통화에 부랴부랴 옷을 갈아 입고
나설 준비를 했다.
아이들에게 이렇게 저렇게 할 거리들을 일러두고
주섬주섬 준비를 하니 중학생 아들이 질문을 한다.
"근데, 엄마 진평왕이 한 업적이 뭐 있지?"
"어!@@@@ 글씨 뭐 생각이 안나냐???"
"선덕여왕의 아빠지..."
"음, 그렇군 잘 다녀와요"
갑자기 왜 머리가 햐얗게 변해 버렸을까?
부랴부랴 차를 몰고 진평왕릉에 가보니,
막 도착하였다고하며 먼저 답사를 진행하시는 일행분들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고 계신다.
무슨 이야기를 하셨는지?
궁금하기도하고, 오늘 답사의 주제는 무엇인지?
이래 저래 궁금한데 갑자기 끼어들어 미안하기도해서
그냥 경청하는 자세로 사진만 몇 장 찍었다.
진평왕 신라의 26대왕이다.
이름은 백정(白淨)이며, 아버지는 진흥왕의 태자인 동륜(銅輪)이며,
어머니는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의 딸 김씨(萬呼夫人金氏 : 또는 萬內夫人金氏)이다.
선비(先妃)는 복승갈문왕(福勝葛文王)의 딸인 마야부인 김씨(摩耶夫人金氏)이고,
후비(後妃)는 승만부인 손씨(滿夫人孫氏)이다.
태어나면서 부터 얼굴이 기이하고 신체가 장대했으며 의지가 굳고 식견이 명철했다고 한다.
그의 키는 11척이나 되었고, 왕권확립을 위해 행정부서를 설치하기도 햇으며,
중국과의 외교관계를 통해 고구려의 침략도 막았으며, 불교진흥을 위해 힘을 썼으며,
591년에는 남산성을 쌓았으며, 593년에 명활산성을 축조하였다.
그에게는 세명의 딸이 있었다.
덕만, 천명, 선화이다.
드라마에 의하면 천명과 덕만은 쌍둥이로 태어나 덕만은 어미의 품을 떠나 살아야 했으며,
많은 시간을 어머니의 몸종을 어머니로 알고 자라다가, 쌍둥이 동생을 죽이려는
사람들을 피해 어려운 고비를 넘긴 후 다시 경주로 돌아와 자신이 공주였다는 사실을 알게되고
나라의 주인공이 된다.
그리고 천명공주는 동생을 위해 죽게된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 드라마이며 이야기일 뿐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은
천명공주는 사촌인 용춘과 결혼을 하여, 김춘추를 낳았으며, 김춘추는 김유신 장군과 더불어
삼국통일을 하는 위대한 왕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덕만공주는 선덕여왕이되어 김춘추가 왕이되기 전 김유신 장군과 더불어
삼국통일의 기반을 다져 놓는 위대한 여왕인 것이다.
마지막 선화공주는 어떠한가?
백제의 무왕인 서동을 만나 신라를 버리고 백제로 가서 삶을 살게 된다.
역사적 사실은 무왕의 아내로 살아가지만 아직 완벽하게 고증된것은 없는듯하고
또 많은 재해석들이 나오고 있다.
진평왕의 딸이 아닐수도있다는 해석도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이는 고증된 사실이 아니니...함부러 말할 수 있는건 아니다.
어찌 되었건,
그의 세 딸들은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그런 인물들이며,
왕의 자손들답게 삶을 살았다.
세상은 그를 어떻게 평가할까?
위대한 아버지일까?
불행한 아버지일까?
이 릉은 원형봉토분으로 아무런 장식이 없는 릉이다.
그래서 그러한지 커다란것을 제외하고는 왕릉이라고 하기엔 참 수수하기만하다.
신랑의 릉은 박씨가문과 김씨가문이 가문의 고증된 사실과 기타 자료에 의해서 정해진 경우가 많다.
갖가지 설이 난무한 가운데, 이 릉이 신문왕릉일 수도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진평왕의 릉은 어디에 있는것일까?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하면 54년 봄 정월에 왕이 별세하여 시호를 진평이라 하였고,
한지(閑地)에 장사를 지냈다. 라고 적혀있다
경주김씨는 한지(閑地)라는 이름을 들어 이와 유사한 한지(韓只)라고 불리는 곳을 발음이 비슷하다고 하여
이곳을 진평왕릉으로 지정하였다고 한다.
비슷한 이름으로 같은곳으로 지정을 한다면,
유사한 사실도 많을 것이다. 어느 자료에서 보니, 경주김씨와 박씨는 같을 수도 있다는 주장도 있다.
누워계신 분은 천년을 누워 말이 없다.
그렇지만 후세는 이자리가 누구의 자리냐고 따지고 있다.
역사적 고증자료를 위해서 찾는다기보다 조상을 찾아야 한다는 이유로....
낯선이가 들어와서 이즈음에서 인사를 했다.
고답인님은 이미 알고 있었고, 전선생님은 얼마전 소개를 받았었다.
그리고, 낯선분들에게 인사를 주고 받았다.
포항의 역사를 알리는 분들이다.
자신들의 일을 하면서 자원봉사로 포항의 문화재를 사람들에게 바르게 설명하고
또한 미처 손닿지 못한 곳에 대한 이런저런 일들을 하신다.
봉사활동이라는 것이 마음만 있다고 되는것도 아닌데
몸소 실천하는 분들이라 얼굴도 평온하고 행복해 보인다.
한쪽 귀퉁이 망초꽃이 휘청거리는 시대의 왕이여...
누운이가 누구이든 간에..
신라의 왕이였음은 사실일것이고
무덤의 구조나 형태가 어떠했던 간에 역사는 흘러 ...
이렇게 시대를 변화해 왔는데,
숱한 이야기속에 숱한 전설 속에..
또한 숱한 책속의 이야기가 진실을 말하진 않는다.
다만 누운이는 아는것이 왕의 무덤이지 않은가?
발걸음은 신문왕릉으로 옮겨간다.
신문왕릉으로 가는 길목은 보문으로 돌아 나오려고 했었는데,
막바지 여름을 보내려고 하는 숱한 관광객으로 인하여 도로는 만원이었다.
하는 수 없이 들길을 따라 왕릉으로 가려고 마음을 잡고,
낭산앞으로 난 농로로 방향을 바꾸어 내리 달렸다.
낭산 앞에서 배반 앞으로 가야하거늘 그만 길을 잘못 들어 버렸나.
너무나 오랫만에 온탓이기도 하건만,
새로 알게 된 전선생님과 너무나 열심히 이야기에 몰입하던 중 놓친게 사실인 것인다.
나이가 동갑인 전선생님과 나는 무슨 이야기에 이렇게 하하 호호 이야기를 하면서 갔었는지
그날이 두번째의 만남이었지만 오랫동안 만나던 사이이다 요사이 못만난 난 옆집 아줌마처럼
그렇게 터놓고 이야기를 했으니 몇해 만에 오는 농로 길을 놓치는 것은 당연지사다.
그렇지만 뒤따라오던 우리 님들은 그걸 이해해주시고 얌전히 따라와 주신다.
이제 우리나라 꽃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들녘에 허드러진 개망초꽃이 이곳에서 만개를 하였다.
하얗게 하늘 거리는 모습이 나쁘지 않지만,
왕릉을 정비하는 사람들에게는 어쩌면 한낯 잡초꽃이거나 뽑아야하는 꽃은 아닐런지..
가을에 떨어진 낙엽이 우리에게는 우수이고 추억이지만
청소부 아저씨에게는 쓸어서 버려야하는 쓰레기이듯..
개망초는 그래서 허드러지도록 핀것이 아름답지만 안타깝기도 해 보인다.
신문왕!
신라 31대 왕으로서 휘(;왕의 이름)는 정명(政明) ·명지(明之)이며 자는 일초(日)이다.
문무왕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자의왕후(慈儀王后)이고 비는 소판(蘇判) 김흠돌(金欽突)의 딸이다
장인인 김흠돌이 반란을 일으키자 신문왕은 왕비도 또한 폐위를 시켰다.
683년 2월에 일길찬 김흠운(金欽運)의 작은 딸을 맞아들여 부인으로 삼았다.
687년 2월에 왕의 맏아들[元子]이 태어났다.
691년 3월 1일에 왕자 이홍(理洪;뒤에 효소왕)을 태자로 봉하였다
신문왕은 돌아가신 아버지를 위해서 감은사(感恩寺)를 세웠다.
신문왕의 아버지는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시는 문무왕이시다.
또한, 신라의 귀족세력을 누르고 왕권세력을 강화시켯으며,
귀족세력의 반란에는 첫째부인의 아버지가 가담한 모반이었다.
그로 인하여 신문왕은 조강지처를 폐위하는 사태를 맞이하였다.
운명이여...!!
이 사건이 있은 후 신문왕은 만파식적(萬波息笛)을 얻게 되었다.
만파식적으로 인하여 신문왕은 숱한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인지 모르는 전설인지 몰라도..
진평왕릉이 신문왕릉일 수도 있다는 설이 사실이라면, 이 왕릉은 누구의 것인가?
삼국사기에 신문왕이 죽은 뒤에 경주 낭산 동쪽에 장사를 지냈다고 기록이 되어 있다.
이 기록에 의해서 이 릉은 신문왕릉으로 지정되었다.
하지만, 릉은 동쪽이 아니라 남쪽이며 또한 효소왕이 죽은 후 망덕사 동쪽에 장사를 지냈다고하니
현재 이릉은 경주 울산간 도로를 가로질러 망덕사의 옆에 위치한다.
진평왕릉의 위치는 낭산의 동쪽이다. 현재는 그곳까지의 들녘이 논으로 개간이 되었지만
어찌알랴...
앞서 설명한 진평왕릉이 신문왕릉이라면 어쩌면 더 이야기가 맞을지도 모른다.
낭산을 기준으로 동으로 신문왕을 놓고 남으로 효소왕의 무덤이 있게 되는 격이다.
그 사이에 자리한 황복사는 성덕왕이 아들 효소왕과 신문왕의 부부를 위해
부모의 명복을 위해 마련한 절이었다.
황복사의 양쪽으로 신문왕과 효소왕이 누워있다면 그것이 더 어울리는 것이아닐런지??이렇게 주장하는 것은 단지 더 어울리다고 이야기 할 수는 없지만
그저 역사와 우리의 옛것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그저 추정해 볼 뿐인것이다.
현 신문왕릉은 봉토분이지만 밑둘레에 벽돌모양으로 잘 다듬어 5단으로 단을 쌓았으며,
갑석을 올려 무덤 보호석을 해두었다.
이곳의 정남쪽에는 잘 알아보기 힘들지만 문(門)이라는 글자가 새겨져있다.
이것은 현실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연도를 표시하는 것임을 설명해주셨다.
망자가 현실을 드나들다?
아마도 봉분 앞으로 드나드는 문인듯 하다.
흥덕왕릉이 합장릉이듯 이 릉도 합장을 하기 위해 마련한 문일듯하다
자세히 보이지 않아 문자를 보기위해서 주위에 풀을 뜯어 조금씩 칠을 해보니
글자가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다들 아이들같이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며, 각자의 카메라에 문자를 담았다.
누구의 릉인지 알 수 있는것은 없다.
왕릉답사를 하며 고작 2개의 릉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동안
이런 저런 자료를 보니 모든 왕릉이 최초에 지정된 것과 다르다는 새로운 주장들이 나오고 있다.
우리는 이런것들을 후대에 어떻게 설명을 해야하며 어떻게 물려주어야 할 것인가?
흐드러진 개망초만 바람에 흩날린다.
그렇게 발걸음은 효소왕릉과 성덕왕릉으로 가고자 한다.
효소왕!
신라 32대 왕으로서 성은 김씨(金氏)이며 휘(諱;왕의 이름)는 이홍(理洪) ·이공(理恭)이다.
신문왕의 큰아들이며, 어머니는 일길찬(一吉飡) 흠운(欽運)의 딸인 신목왕후(神穆王后) 김씨(金氏)이다.
효소왕은 재위기간이 11년밖에 되지 않는다.
왕의 부인은 누구인지 알수가 없다.
왕의 아들에 관한 기록도 없다.
효소왕은 자식이 없었던 것으로 문헌은 이야기한다.
비운의 왕이었던것 같다.
신라에도 장자세습제도가 정말로 있었던가?
왕권을 두고 싸우긴 했었어도 장자세습에 대한 내용은 어디에도 없지 않은가?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도 많은 시대를 지나와 과거의 기록이나 문헌을 가지고
조선시대적인 사고방식으로 쓰지 않았던가?
미실은 아주 나쁜여인으로 나타나면서, 몇명의 왕을 거느린 이 여인은 누구인가?
가족간에 결혼하는 고려시대와 신라시대의 결혼제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아니한다.
장자세습제도는 조선시대에도 제대로 지켜진 경우는 없는듯 한데
그리고 그 숱한 골육상전의 피흘림들이 왕권을 두고 일어났음에도
그들은 장자세습제도를 이야기했어야 하는가?
우리 역사가 선생님들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 장자세습제도에 대해서
다시한번 생각해줘야 하는 것은 아닌가?
어떤 주장에 따르면,
효소왕은 왕후가 있었으며, 아들도 있었다.
그의 아들이 유복자였으며, 동생인 성덕왕의 비가 된 후 아들을 낳게 된다.
또한, 성덕왕의 비가 된 후 성정왕후는 왕궁에서 쫓겨나게 된다.
하지만, 폐위되는 왕비에게 성덕왕은 많은 지원금을 주고 많은 예물을 주며, 집까지 마련하여 보낸다.
지아비가 죽음을 당한 후 그의 왕후는 동생인 성덕왕의 비로 책봉되지는 않았는지?
이 또한 역사적인 많은 고증이 필요한 사항이지만, 가설은 내려볼 수 있지 않은가?
그의 주장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신라왕족의 혼인제도에 의해 짐작해 본다.
곁에 누워있지만, 동생인 성덕왕과 형인 효소왕의 무덤은 너무나도 차이를 가지고 있으며,
왠지 쓸쓸게 보이는 것은 아직은 역사적으로 완벽하게 고증되지도 않은
이야기에 나 혼자 애뜻함을 느끼는 것이지 않을런지...
쓸쓸한....
달밤에 홀로 이곳을 걸으면,
무덤속 망자가 일어나 지난 사연을 이야기 하지나 않을런지?
쓸쓸한 달빛이 비추이는 맑은 가을날에
서성이고 싶은 곳이다.
화려하지 않은 봉분의 주인은 누구인지?
그 세월속의 이야기가 진실인지 거짓인지 말을 해다오!!!!!!!
성덕왕
신문왕의 둘째아들이며 효소왕의 친동생이다.
효소왕이 죽자 왕으로 추대되었다. 초명(初名)은 천중(天中).
휘(諱)는 융기(隆基)였으나 당(唐)으로부터 현종(玄宗) 황제와 휘가 같다는 항의를 받고 흥광(興光)으로 고쳤다.
왕비는 전비(前妃)로 704년에 승부령(乘府令)이던 소판(蘇判) 김원태(金元太)의 딸인
성정왕후(成貞王后, 혹은 嚴貞王后)를 맞아들였으나
성덕왕 15년에 왕궁에서 내보내고,
이찬(伊飡) 김순원(金順元)의 딸 소덕왕후(炤德王后)를 계비로 맞이하였다
형님곁에 누운 성덕왕은 우리가 잘 아는 성덕대왕신종(봉덕사종)의 주인공이다.
대왕이라는 칭호를 받았으니 숱한 업적이 있으며,
숱한 사연이 있으며, 또한 나라도 잘 다스렸으리라.
성덕왕이 왕권을 유지하는 동안 숱한 일들이 있었으리라,
형님이시든 효소왕의 부인 성정왕후를 왕비로 맞이 한 것도 왕권을 가지기 위한 명분의 일환으로,
형님 효소왕이 죽었으니, 왕후의 남편으로 등극을 하지는 않았는지?
모든 역사서에는 효소왕이 죽어 왕권을 이를 사람이 없었다는 이야기로 기록을 바꾸지는 않았는지?
형님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왕이라고 기록에 남길수는 없는 일이었지는 않은지?
숱한 의문들이 나돈다.
성정왕후는 결혼 후 자신이 낳은 아들을 효소왕의 대를 위해 왕으로 추대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성덕왕의 왕후가 되기도하고 역사의 기록이 뒤바뀌어 숱한 세월을 참으며 살았지는 않은지?
점점 성정왕후가 그의 아들 김수충을 세자에 책봉하려는 의지가 보여지니
성덕왕은 김수충을 당으로 보내고, 더이상 왕권을 위한 가치가 떨어진 성정왕후는 폐위 아닌 폐위를하면서
왕후가 살 수 있도록 많은 재물과 살 집까지 장만하여 궁에서 내보내게 된다.
성덕왕 15년 그는 다시 소덕왕후를 계비로 맞이하고 그의 어린아들을 세자로 책봉하는 일을 맞이한다.
이야기가 이렇게 되어진다면 드라마의 줄거리 같기도하고
소설의 한 이야기 같기도 하겠지만 역사적인 사실을 이래 재해석해보니
그도 그럴듯 하다.
왕권을 둘러싼 숱한 정치세력들간의 모반과 음모는 신라에서도 있었다는 것이다.
왕이 무엇이건데 성골, 진골 품계를 따지며 세상을 잡아야 했는지?
아직은 많은 자료들이 부족하고, 시대적인 명확한 기록이 없어 많은 역사가들이 연구중에
있는 것이다.
릉은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신라 최초로 완비된 왕릉제도를 갖추고 있다.
신문왕릉보다 더 발전된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주위는 십이지신상을 둘러 호위를 하듯 배치를 해두었다.
그 앞으로 문인석과 무인석을 세워 두었으며, 릉의 주변으로 사자상을 세워두었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문인의 뒷모습에 복장은 무인의 복장인듯 하다.
아무리봐도....
하지만, 이 또한 그때의 문인복장이 그러했는지도 모르는 일인듯 하다.
신라시대에도 문인과 무인의 구분이 확연하였는지? 잘 모르겠다.
그때는 나라가 안정이 되었다고는 하나 삼국이 통일될때까지 숱한 전쟁속에서
문인과 무인이 따로 존재했다는 것이 사실은 조선의 사고방식대로 해석하는것은 아닌지
우리가 우리문화를 해석함에도 고정관념은 버려야하지 않는가?
어찌되었건 누운이는 말이 없고
굽은 소나무가 릉을 지킨다고
이곳에도 가로로 누운 소나무가 손님들을 접견하듯 릉을 지킨다.
릉 앞쪽에는 능비(陵碑)가 있다.
제법 큰 귀부는 혼자 어쩌지를 못하고 멈추어 있는 꼴이다.
능비(陵碑) 주위의 조사에서 약간의 비석 조각이 발견되었으나
판독된 명문은 '무(武)'와 '적(跡)' 두자가 판독되었다고 한다.
주위를 둘러보면, 이곳에는 연못이 있었음직 하기도 하다.
떨어져 없어진 머리는 아마 그 어느쪽으로 흘러갔을런지
아니면 일제의 철도공사도중 버려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최근 새로운 주장에 의하면
김수로왕은 인도에서 건너온 세력이라고 한다.
이때만 해도 인도나 중국이나 동남아시아를 통한 무역이 활발하였으니,
그렇게 신빙성이 떨어지는 주장도 아닌듯 하기도 하다.
그래서 그러한지 릉을 지키는 무인이라 문인들의 얼굴은 전통 신라인이라 하기에는
약간 어색함도 묻어 있기도 한다.
릉 주변의 십이지신상의 얼굴은 모두 잘라져 사라지고
이곳의 릉비도 사라지고 없다. 어디 릉비가 이곳에만 없는 것만은 아니지만
일제가 없앴다는 설들이 많기도 하지만,
그곳에서 우리는 위험하지만 이런곳을 찾는 우리에게는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를 해본다.
신라 경주김씨 조상들은
자신들의 조상이 어떻게 해서 왕권을 차지하였으며,
왕비는 몇을 두었으며, 그 왕비는 누구누구이다 형님의 부인이다. 또는 고모의 딸이다 등등의
유교적인 사고방식으로 이해 할 수 없는
또한 시조가 인도사람일수도 있다는 하는 등등의 이야기가 적힌 릉비는 숨겨야 하지는 않았을까?
경주 박물관에 숱하게 많은 불상들의 머리가 없는 이유가 일제가 아니라
우리가 불교를 탄압하기 위해서 행한 행동이라고 하듯이-작은 아름다운 우리의 불상은 일제는 모두 거두어
일본으로 반출을 해가지 목을 치지는 않았을것 같다-그리 생각해보니
사실 우리가 품는 의문이 그렇게 허무맹랑한 이야기도 아니지 않은가?
시간은 말이 없이 흘러갔고
누운이는 말이 없고
숨기고 싶은 조상들의 이야기는 전설로 들을 수 있으며
명당에 누운 왕가의 자손들은 진정 왕족으로 행복하게들 살아가시는지?
역사의 진실을 밝히기에는 아직도 멀기만 한데...
우리의 발걸음은 다음 왕릉으로 가고 있다.
첫댓글 너무 너~무 잘뵜니더... 근데 좀 긴거 아잉교? 왕별로 한 꼭지씩 잘라도 좋은디... 고맙심더...
헥~! 왕별로 한 꼭지씩 쓰믄 더 많이 써질까봐서요...!!
해누리님 안녕하세요? 오랫만에 선생님의 감성이 뭇어나는 글을 대하니 반갑네요. 자주 좋은 글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근데 기술하신 내용 중에 신라김씨 왕가의 조상이 인도가 아니라 흉노가 아닌지요?? 그리고 김수로가 아니라 김알지가 아닌지?????
김씨의 시조가 아니라..김수로가 인도인이라는 설이였습니다. 예를 들었으며, 그날 우리가 그자리에서 이야기했던것이 생각나서... 신라김씨 조상은 흉노족일수도 있다는...
예 해누리님, 제가 문맥을 잘못 읽은 것 같네요.
왕릉답사기를 이렇게 기대 이상으로 깔끔하게 정리해주시니 너무 고맙습니다.
나는 놀랫심더 얼마전 기림사의 창건이가 인도스님 광유라 써 잇는거 봐 가지고 전설은 신화가 되엇고 인도종교의 유입경로도 우리는 의문을 가지게 한다.
해안가는 이사람도 오고고고 저사람도 가고오고 우리 어릴때 공룡은 전설상의 동물이라고 배웟던 기억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요?
그때까지만해도 공룡은 전설상의 동물이었겠죠?? 저는....우리가 알고 있는 용이 공룡일수도 있지 않을까요?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