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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2일, 6조혜능(六祖慧能 638~713) 스님의 30년 행화도량인 남화선사(南華禪寺)로 들어가는 길목에 낯익은 글씨가 자주 보였다. 바로 ‘조계(曹溪)’라는 두 글자다.
남화선사 앞 냇물 이름도 조계이고, 뒷산도 조계산이며, 남화선사 정문도 조계문이다. 순간 서울 조계사 주변에 서성거리며 서 있는 기분이다.
중국 선종 원류를 찾아 떠나온 답사길에서 우리나라로 흘러온 조계 시원(始原)을 만나는 순간이다.
‘조계’라는 이름은 예로부터 마을에 조(曹)씨들이 많이 살고, 동구에 시내가 흐르고 있다 하여 ‘조씨 집성촌의 시내’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인데 조계마을에 건립된 남화선사에 혜능 스님이 오래 주석함으로써 스님을 상징하는 이름으로 쓰이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의 ‘조계종’이나 ‘조계사’라는 명칭도 여기에서 따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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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 머물며 법을 편 곳, 남화선사
혜능 스님이 가장 오래 머문 절이 남화선사다. 남화선사는 원래 보림사(寶林寺)라 하였고, 당대에는 흥천사(興泉寺)라고도 하였다가 송나라 때부터 남화선사라 불리고 있다.
남화선사는 이번 순방 사찰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승려수도 120여 명으로 가장 많았으며, 선원 대중도 40여 명이나 되어서 가장 감명깊었던 곳이다.
혜능 스님은 당 의봉 2년에 이 절의 주지가 되어 이후 30여 년간 이곳에서 법을 펴 남화선사는 실질적인 육조 도량인 셈이다. 중국역사상 가장 찬란한 문명의 황금기인 당 송 시대의 사상적 지주였던 선불교의 사실상 진원지였고, 동아시아 선불교의 실질적인 중심지였다.
제일 유명한 선종조정(禪宗祖庭)으로 ‘영남제일 선사(禪寺)’라는 칭호가 붙은 남화선사는 한 중 일의 선승들이 평생동안 가장 가보고 싶어 하는 고향같은 곳이다.
이곳에는 혜능 스님의 진신불이 모셔져 있다. 원래는 대웅전 바로 뒤에 자리한 8면 5층의 전탑인 육조탑 1층에 육조 진신상을 모셨는데 지금은 육조전으로 옮겨 봉안돼 있다.
육조탑을 참배하고 육조전에 오르니 앞기둥에 ‘조인운광남천불지(祖印雲光南天佛地)’라는 잘 쓴 편액이 걸려 있다. 경건하고 엄숙한 마음으로 들어서니 사진으로 많이 본 혜능 스님 얼굴이 눈에 꽉 찼다. 진신의 얼굴은 새카맣게 옻칠된 상태였는데 화려한 좌대 위에 올려져 유리관 속에 잘 봉안돼 있었다.
스님의 진신을 대하니 온몸이 긴장하여 굳어지는 듯하더니 땀이 비오듯 하였다. 얼마 후 정색을 하고 예의를 갖추니 스님에 대한 존경스러운 마음이 용솟음쳤다. 스님의 시신을 그대로 불상처럼 모신 육신상을 대하는 짧은 순간, 가난한 나무꾼에서 5조의 법을 잇는 6조가 되고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며 법을 전하다 간 스님의 삶이 뇌리를 스쳐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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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 구절 듣고 발심, 오조사서 홍인 스님 법 이어
혜능 스님은 서기 638년에 광동성(廣東省) 신주(薪州)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노(盧)씨이고 속명이 혜능(惠能)이었다. 스님이 태어난 이튿날 아침, 이름 모를 스님이 찾아와 ‘혜능’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혜(慧)라 함은 모든 중생에게 법을 베풀어 줌이요, 능(能)은 능히 불사 지음을 말함이라”는 말을 남기고 그 스님은 종적을 감추었다.
혜능 스님은 3세 때 부친을 여의고 어머니를 봉양하며 어렵게 자랐다. 천성이 어질고 착한데다 고향 마을에서도 소문난 효자였다. 당시 조혼하던 풍습이 있었지만 대사는 24세가 되도록 장가도 못가고 땔감 나무를 팔아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다.
어느 날 나무를 한 짐 지고 신주의 거리를 지나가고 있었다. 누군가 <금강경(金剛經)>을 읽는데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는 구절을 듣고 마음에 곧 깨달음을 얻었다.
혜능은 겉으로는 나무 장사나 하던 무식한 사람이었지만 대단한 선근(善根)이 있었다. 그 선근은 오조사를 찾아 홍인 스님을 만남으로써 뿌리깊은 거목이 되었고 뭇 중생을 먹이고도 남을 열매로 화했다.
오조사는 호북성 황매현에 있는 절로서 홍인 대사가 오랜 동안 주석하시면서 동산법문(東山法門)을 펴기도 하고 열반에 든 곳이다. 뿐만 아니라 ‘사람에게는 비록 남북이 있겠지만 불성(佛性)에야 어찌 남북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라는 선기 넘치는 말로 스승의 내밀한 인정을 받았던 혜능이 5조스님의 의발을 전수받아 6조가 된 도량이기도 하다.
‘불성에야 어찌 남북이 있으랴’하는 이 말은 <열반경(涅槃經)>에서 말씀하신, 일체중생이 다 불성이 있다는 불교의 기본 사상인 불성평등론(佛性平等論)을 드러낸 말이다.
혜능은 후일 이와 같은 불성론을 우리 자신이 본래부터 갖추고 있는 원만구족한 자성(自性)으로 구체화시켜, 자성을 철견하면 곧 바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돈오견성선(頓悟見性禪)을 꽃피우게 된다.
오조사에는 신수 스님과 혜능 스님의 게송이 붙었던 복도 벽이 조당(祖堂) 옆 요사채에 있다. 그 벽에 서니 혜능 스님의 게송이 눈앞에 있는 듯 선연히 떠오른다.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으며(菩提本無樹)
밝은 거울도 그 받침이 없는 것(明鏡亦非臺)
본래 한 물건도 없거늘(本來無一物)
어디에 티끌이 있으랴(何處有塵埃)
혜능의 이 게송은 선종사에 큰 의미를 지닌다. 돈오돈수(頓悟頓修)를 주장하는 남종선(南宗禪)이 태어나는 계기가 되었으며, 신수 선사의 북종선(北宗禪)과 자연스럽게 대비되어 오늘날까지도 계속되는 돈오돈수(頓悟頓修)냐, 돈오점수(頓悟漸修)냐 하는 논쟁의 시작이 되었다.
또한 조사의 지위에도 새로운 혁명을 일으켜 선종사에 하나의 분수령이 되었다.
오조사 육조전에는 혜능 스님이 방아를 찧었던 방앗고가 지금도 남아있다. 등에 돌을 지고 방아를 찧고 있는 제자를 향해 홍인 스님은 “도를 구하는 사람은 법을 위하여 몸을 잊는 것이 마땅히 이와 같이 해야 한다”는 말로 스승의 숨은 정을 드러낸다. 대중들의 시기로 자칫 목숨을 잃을까 염려하며 가장 고되고 후미진 방앗간에 제자를 밀쳐낸 스승의 마음이야 오죽했으랴!
그러나 스승과 제자의 마음은 이미 하나였기에 방앗간은 법을 성숙시킬 최고의 장소였다.
5조의 법을 이어 6조가 되었지만 혜능 스님은 곧바로 법을 펴지 못한다. 혜능 스님에게 전해진 의발을 뺏기 위해 뒤를 쫒는 무리들을 피해 산으로 숨어들어 사냥꾼 무리 속에서 살았다.
그물을 지키게 하면 살아있는 것들을 모두 놓아주었고, 밥 지을 때는 채소를 고기 삶는 냄비에 넣어서 익혀 먹으며 법을 펼 수 있는 인연이 무르익길 기다렸다.
이로부터 15년 후, 676년에 마침내 몸을 나타낸 곳이 광동성 광주에 있는, 현 광효사(光孝寺)인 법성사(法性寺)다. 법성사는 혜능 스님이 오조사에 이어 두 번째로 인연을 맺은 도량으로 전설로는 달마 대사가 중국에 건너와 가장 먼저 찾은 곳이라고 한다.
혜능 스님이 법성사에 도착하니 마침 바람이 불어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그러자 젊은 학인들이 논쟁을 시작했다.
“바람이 움직인다”는 주장과 “깃발이 움직인다”는 주장이 설왕설래했다.
이때 혜능 스님이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오직 당신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 뿐이오” 라고 하여 대중들이 감탄하였다. 이 풍번문답(風幡問答)을 한 곳이 바로 현재의 방장실 앞이라고 한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풍번당이라는 정자까지 있었다고 한다.
이 풍번문답을 지켜본 인종 법사는 혜능 스님을 상석으로 맞아 깊은 뜻을 물은 뒤 오조의 법을 이었음을 알게되자, 삭발하고 스승으로 섬기는 예를 갖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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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오견성론’ 주장 조사선 확립시켜
정문에 들어서면 혜능 스님이 삭발한 머리카락을 보관중인 삭발탑이 단연 시선을 끈다. 8면 7층의 전탑으로 높이는 5.5m의 탑이다. 당 의풍 원년(677년)에 건립하고, 송나라 때 중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 이 탑 옆에는 수령이 1,500년인 보리수가 한 주 있다.
502년에 인도승(印度僧) 지약 삼장이 심은 것인데, 인도 스님이 중국에 심은 최초의 보리수다. 혜능 스님은 이 나무 밑에서 수계를 했다.
보리수 아래서 수계 의식을 마친 혜능 스님은 비로소 세상을 향해 법의 문을 활짝 열었다. 오(悟)와 수(修), 정(定)과 혜(慧), 번뇌와 보리 등이 모두 자성(自性)일 뿐이라는 혁명적 사고를 일으키며 새로운 선종사의 흐름을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혜능 스님을 기점으로 하여 그 이전에는 중생심(衆生心)의 관점에서 선(禪)을 바라보고 있는데 반해, 혜능 스님에 의하여 그 관점은 성심(聖心)으로 옮아가고 있다.
남종(南宗) 조사선(祖師禪)에 이르러서 전적으로 성심(聖心)의 입장에서 선(禪)을 바라보게 되는 첫 단추를 낀 셈이다.
혜능 스님 이전에는 진성(眞性)이 망상(妄想)에 덮혀 있다는 이원적(二元的) 중생심(衆生心)의 입장에서 사망귀진(捨妄歸眞)의 방법에 관심을 두고 있는 반면, 혜능 스님 이후 조사선 수행자들은 일심(一心)에 나타나는 일체개진(一切皆眞)이라는 불이일원적(不二一元的) 성심(聖心)의 입장에서 불오염(不汚染)에 관심을 두었다.
또한 혜능 스님 이전에는 좌선수행을 통하여 사망귀진(捨妄歸眞)하여 견성을 추구하라고 가르치고 있는 반면, 혜능 스님 이후에는 언하(言下)에 돈오(頓悟)하여 견성하고 바른 지견을 갖추어 어긋나지 말 것을 강조하게 된 것이다.
혜능 스님은 광효사에 1년가량 머물며 학인들에게 심법(心法)을 설하고 있는데 위 자사가 그의 설법이 뛰어나다는 이야기를 듣고 대감사로 모셔 관료들과 승려, 신도가 함께 법문을 들었다. <육조단경>은 대감사의 설법을 중심으로 편찬되었다. 대감사의 설법을 계기로 혜능 스님의 본격적인 행화가 36년간 펼쳐진 것이다.
대감사의 설법은 육조 대사의 법력을 대내외적으로 확인받는 중요한 법석(法席)이었다.
그 후 스님은 조계 남화선사로 돌아가 황폐해진 절을 중건하고 돈오의 선리(禪理)를 널리 펼치게 된다.
육조 대사는 712년, 30여 년 간의 남화사 시대를 마감한다. 광동성 신흥현 집성진 용산에 있는 생가 터에 건립한 국은사(國恩寺)로 돌아가기로 한 것이다.
국은사는 스님의 출생 도량이면서 동시에 원적 사찰이 되었다.
중국의 모든 선종사찰 6조상 봉안
국은사 입구에 도착하니 폐방에는 선종 성지(禪宗聖地)라는 네 글자가 유난히 크게 보였다. 국은사는 임제종 소속이고 상주 승려가 30명가량 생활하고 있었다.
대웅전에는 20 나한을 모시고 있었는데 중국 선종 사찰은 통상의 나한수를 바꾸고, 조사나 선사들의 상을 모시는 조사전이 대웅전보다 높은 곳에 있는 등 한국 사찰의 분위기와는 상당히 다른 파격을 느낄 수 있었다.
대웅전 뒤 육조전 기둥의 ‘전불심인(傳佛心印)’이라는 편액이 마음을 끌었다. 좌대에는 청대에 조성된 육조상이 봉안되어 있고, 좌우로는 혜능 대사의 핵심 선사상인 무념(無念), 무상(無相), 무주(無住)와 불생(不生), 불멸(不滅), 불천(不遷)을 큰 글씨로 붙여놓았다.
또 좌우 면벽에는 <육조단경>을 붓글씨로 써서 액자에 걸어 놓았다. 유물로는 스님이 사용했다는 옹기 발우와 물그릇, 당 측천무후의 성지(聖旨) 등을 진열해 놓았다. 국은사는 마치 혜능 스님의 기념관이나 박물관같은 느낌을 주었다.
혜능 스님은 713년 8월 3일, 75세로 열반에 든다. 스님은 원적에 앞서 자성이 곧 진불(眞佛)이며, 법신(法身)과 보신(報身), 화신(化身)은 본래가 한 몸이라는 삼위일체론(三位一體論)을 골자로 임종게를 남기고 문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마지막 법문을 한다.
“오직 자신의 본심을 알고 자신의 본성을 잘 보면 움직임도 고요함도 없으며, 생도 사도 없으며, 가고 옴도 없으며 옳고 그름도 없으며, 머무름도 가는 것도 없느니라.”
이 말씀을 유언으로 남기고 저녁 산책을 나서 뒷산 큰 바위 위에 휴식하는 것처럼 앉았다가 그대로 입적한다.
‘단경’ 일본에서 세계 움직인 100대 명저에 뽑혀
지난 2000년 1월 1일, 새로운 한 세기를 열면서 일본의 유명 언론사는 인류 역사상 세계를 움직인 100대 명저를 뽑았다. 불교계에서는 <불경(佛經)>과 <육조단경(六祖壇經)>이 선발되었다.
경(經)이란 부처님의 말씀을 정리한 책을 말하는데, 석가모니부처님 이후 고승 대덕들이 쓴 어록(語錄)이나 저술이 무수히 많지만 ‘경’이라고 표현한 것은 <단경>뿐이다.
이 <단경>을 쓰고, 사실상 중국선불교의 종조(宗祖)이며, 돈오견성론(頓悟見性論)을 주장하여 조사선(祖師禪)을 확립한 분이 바로 6조 혜능 스님이다.
이러한 스님의 명성과 업적을 반증하듯 원적에 드신 지가 1,300년이 되었지만 선종 사찰 조사전에는 혜능 스님 조상이 빠짐없이 모셔져 있다. 스님이 아무리 큰 인물일지라도 아직까지도 그렇게 존경을 받고 모셔지고 있다니 참으로 놀라웠다.
다만 스님의 사상이 선양되어 오늘을 살아가는 중국 국민에게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
스님의 발자취를 따라 중국의 선종사찰을 순례하는 동안 남화사에서 마주한 혜능 스님의 육신상이 길잡이가 되었다. 신비감과 함께 경탄과 공경의 마음을 절로 일어나게 했던 육신상은 발심을 이끌어내는 원동력과도 같았다.
혜능 스님이 생전에 누누이 강조했던 ‘육신 보살, 인간 부처, 즉 중생이 곧 부처’라는 가르침이 마치 살아 있는 목소리로 들리는 듯 하였다. 도를 닦는 사람에게 있어 불성론과 돈오견성설은 금과옥조같은 성언(聖言)이다.
‘나도 불성이 있다’, ‘나도 본래는 부처이다’, ‘자기의 성품을 보아 몰록 깨달으면 바로 부처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는 말씀은 특정 종교의 경지를 떠나 만고의 진리이고 시공을 초월한 대단한 법어인 것이다.
6조혜능 스님을 뵙고 떠나오는 길, 스님의 가르침이 조계의 물줄기를 따라 시방세계에 두루 퍼져가길 다시금 발원했다. 그 깊고 도도한 흐름에 모든 사람들이 흠뻑 젖어 흘러가게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