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이문구가 1969년 뙤약별이 내리쬐는 목포에 문학 강연을 하러 갔다.
여관방에 짐을 풀고 더위를 식히려는데 쑥대머리를 하고 검은 고무신을 신은 사내가 찾아왔다.
사내가 대뜸 입을 열었다.
"나 여그 사는 송기숙이오. 아따 더운디 뭘라고 따분하게 앉아 있소. 쩌그 가서 入酒나 허게 나오씨쇼."
장흥이 고향인 송기숙은 목포교육대 국문과 강사로 일하며 소설을 썼다.
이문구와 송기숙은 4년 전 현대문학으로 나란히 등단한 사이였지만 그렇게 처음 만나 오랜 우정을 쌓았다.
이문구는 송기숙이 문학과 인생을 놓고 늘어놓는 입담에 혀를 내둘렀다.
"그는 지칠 줄 모르는 파도였고 섬세한 유달산이었다.
범람하는 영산강이었고 한 많은 삼학도였다."
송기숙은 소설가 천승세. 황석영과 더불어 '문단 3대 구라'로 꼽힌다.
송기숙은 "아따 말이시, 고것이 말이시..."라고 추임새를 넣어가며 입심을 뽑냈다.
시인 이시영은 "가르릉거리며 오토바이 시동 거는 그 소리를 두고 우리는 일찍이 광주 방송이라고 불렀다."고 했다.
송기숙은 전남대교수로 있던 1977년 장편 '자랏골의 비가"를 출간해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이듬해엔 동료 교수 열 명과 함께 교육 민주화를 요구하는 성명서를 냈다.
그는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갇혔다가 일 년 만에 형집행 정지로 풀려 났다.
84년 전남대에 복직해 열두 권 대하소설 '노굳장군'을 완성했다.
2000년 정년 퇴임한 뒤엔 전남 화순으로 집을 옮겨 집필실을 새로 꾸미고 글쓰기에만 매달렸다.
문단에 얼마 전부터 "송기숙 선생이 치매를 앓는다"는 소문이 돌았다.
평소 가까이 지내던 후배 문인이 어느 나 전화를 했더니 "누구지?"하며 선뜻 반기지 않았고
끝내 기억하지 못하더라는 얘기였다.
그러나 또 기억이 되돌아오면 일상생활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한다.
일흔여덟 송기숙이 엊그제 광주 법원에 섰다.
재판부는 1978년 교육 민주화 성명서 사건을 재심해 35년 만에 무죄를 선고했다.
성기숙은 판사 질문을 알아듣지 못한 채 대답도 못하고 그저 웃기만 했다.
기자가 판결 소감을 묻자 '난 모르겄소"라고 만 했다.
20년 전 '녹두장군' 후반부를 쓸때 그를 만난 적이 있다.
"아, 글씨. 전봉준은 장터에서 침을 놓으며 먹고 살믄서 풍수에도 능했는디..."라며
술술 이야기 보따리를 풀던 송기숙.
그의 걸쭉하고 흙냄새 풍기는 사투리가 기억 저편에서 새록새록 되살아날수록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의 입담에 다시 귀를 쫑긋 세우고 싶다. 박해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