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깊을 수록 고요가 더많은 것을 드러내 보이듯이 정말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거나 한발자국씩 물러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정작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끝내 알지 못하게 될것입니다. 알게되면 세상을 편히 살아갈 수 없다는 걸 너무나 잘 알기때문입니다.
사실 인간은 인식의 틀, 그 한계때문에 진실이랄까 본질이랄까 그런 것을 알 수가 없을 겁니다. 오히려 그 한계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사람으로서 잘 살 수 있을지 모르지요. 만일 신처럼 모든 것을 꿰뚫어 알고 이룬다면 구태어 인간이 될 필요가 있을까요. 신의 품속에서 신의 일부나 전부가 되어서 완벽하거늘 구태어 물질로 화하여 한계 속에 갇혀 살아야하는 이유는 없을 것 아닌가요.
사는 것은 사는 것에 익숙해지도록 설계되어있다, 길들여져 있다고 누가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삶이란 언제나 선택의 편에서 포기를 합리화하는 일인 뿐일까요.
구슬을 얻어 큰 부자가 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방물장수 할머니로 변장해 구슬을 바꿔치기한 나쁜 할머니 옛이야기를 알 것입니다. 착한 할머니집 개와 고양이가 강건너편 나쁜 할머니집으로 찾아가 그 곳 쥐를 위협해 구슬을 찾아옵니다. 이야기의 초점은 여기부터입니다. 구슬을 입에 문 고양이를 태우고 개는 강을 건넙니다. 헤엄을 치면서 개는 구슬이 안전한지 궁금합니다. 그래서 고양이에게 구슬을 잘 물고 있는지 자꾸 묻습니다. 참다참다 견디지 못해 그래 여기 있다 라고 입을 벌려 야옹하는 순간 고양이는 구슬을 강에 빠트립니다. 구슬을 잃어버립니다. 구슬이 여기 있다고 대답을 하고 듣는 순간 구슬은 사라지는 것입니다.
개는 궁금합니다. 이 놈의 고양이가 구슬을 잘 물고 있는지, 내가 구슬을 잘 찾아가고 있는 것인지 말입니다. 그런데 개가 물어서 고양이가 대답한다면 지금까지의 모든 것은 허사가 됩니다. 묻지 않는다면 개는 과연 자기가 구슬을 갖고 강을 건너고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구슬이 없다면 이렇게 힘들게 강을 건널 필요가 없는게 아니겠습니까.
구슬의 존재를 묻는게 애당초 잘못일까요. 구슬의 존재를 확인하지 않고도 강을 건너는 게 평범하면서도 현명한 일일까요. 건너편 강둑에 닫기 전까지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냥 고양이를 목에 태우고 강을 헤엄쳐가는 게 당연한 일일까요. 왜 들을 수 없는 물음과 의심이 생기는 걸까요. 도대체 왜 묻고 답하면 중요한 것은 잃어버린다고 느껴질까요. 잃어버린 후 강물의 물고기가 구슬을 다시 갖고 올지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요.
누구는 징검다리를 딛고 건너라고 쉽게 이야기 합니다. 하나 하나 그런 돌을 밟고 따라간다면 어느덧 물을 다 건널 수 있다고 합니다. 그 건너편에 무엇이 있는지 가르쳐주지 않고서도 말이지요. 물어도 들을 수 없으므로 아예 궁금증도 없어집니다. 이제 그저 징검돌을 헛디디면 격랑의 물살에 휩쓸릴까봐 두려워합니다. 어느덧 앞의 징검돌 하나를 무사히 건너뛰는 게 목표가 될뿐입니다. 그런데 징검돌이 놓여 있는 곳이라면 그저 작은 실개천 아닌가요. 깊은 인생의 강물에는 징검돌이 없는 게 아닌가요. 그러면 우리는 어디를 건너고 있다는 것인가요.
세상에 있는 어떤 것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에 따라 전개되는 과정이라고 합니다. 다만 존재하는 느린 과정과 빠른 과정이 흘러가고 있을 뿐이라는 거죠. 근사적이고 임시적으로 또 잠정적으로 나는 잠깐 존재한 것일뿐입니다. 수석앞에 서서 나는 빨리 갈테니 너는 천천히 오너라 라고 말하지만 사물이 있어서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관계가 사물의 개념을 만듭니다. 대상들의 세계가 아니라 사건들의 세계이지요.
관계란 시간을 통한 사건입니다. 사건의 집합이 우주입니다. 세상은 이런저런 사물의 존재의 세계가 아니라 사건들의 네트워크입니다. 인간이란 색수상행식이 복잡하게 얽힌 오취온이라 불교에서 이야기합니다. 삶과 죽음도 사건의 흐름입니다. 나라고 하는 것은 동일성을 말할 수 있는 실체는 없지만 인과로 연결된 연속성이 있을 뿐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넖게 살펴보면 구슬이든 징검돌이든 우주와 나는 서로 연속성이 갖는 관계일 뿐입니다. 세상은 허망하기도 하지만 생생한 현실입니다. 환상이라고 하지만 사랑과 열정, 도덕과 책임감이라는 이름으로 분식회계처리하며 내게 주어진 세상에 몰입하다보면 이 모든 것은 그저 시시한 한담입니다. 쓴 생각 시린 감정으로 읊은 이런 이야기는 참으로 유치합니다. 거짓도 하나의 법칙이라고 암묵적으로 알아들어야 할 나이에 이 나이에 아직도 감을 못잡고 헛소리나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정리하고 통합하여 결론을 내어야 마땅한 나이이거늘 헛되히 식은 잿속을 헤집어 꺼진 불씨에 후후 바람만 부는가 말이지요. 잿가루는 오히려 날아올라 구태여 되도 않는 짓거리로 저지레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