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이 얼어붙었다.
아침방송의 여성 기상케스터는 올해 들어 최초의 일이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강남대로의 이른 출근길 풍경을 담은 CCTY 화면이 이어졌다. 자동차들이 거북이걸음으로 진군하고 있었다. 간밤의 적설량은 고작 3cm. 과연 서울은 과잉의 도시다.
이를테면 이런 것들. 단 1초의 실수로 잉태되는 태아, 사방을 가로지르는 구불구불한 버스노선. 무채색반코트 주머니에 양손을 넣고 걸어가는 표정 없는 중년남자, 바람에 펄럭이는 모텔주차장의 녹색 천막, 입술 부르튼 아르바이트생이 바코드를 찍어주는 24시간 편의점, 도된 냉정들과 과당된 친절들. 모든 것이 흘러넘친다. 그리고 문패 없는 콘그리트 건물들도 곳곳에 숨어 있다. 내가 사는 이 집도 그중 하나다.
이 집에는 모두 스물한 개의 방이 있다. 내외적으로 각각의 방은 공평하게 15평. 하지만 복도와 주차장같은 공용면적, 또 얼마간의 과장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실 평수는 채 아홉 평이나 될지 모르겠다. 만약 이 집이 연극 무대 위의 세트라면 어떨까? 어릴 때 가지고 놀던 인형의 집처럼 벽의 한쪽 면이 뻥 뚫려 있다면, 저 멀리 객석에 앉은 관객은 스물한 개의 똑같은 방들을 한꺼번에 볼 수 있겠지? 가로로 일곱 줄, 세로로 세 줄씩 나뉜 칸칸마다에서 지금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훤히 들여다 보이면 참 가관이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게 맡겨진 배역은 '205 여자' 일까.
관객들은 205호의 그녀가 오늘 아침 머리감기를 과감히 생략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하늘색 바탕에 흰 구름이 몽실몽실 떠 있는 파자마를 벗어 착착 개키기는커녕 꾸깃꾸깃 접어 침대 위에 대충 던져놓았다는 것과, 소변을 보면서 양치질을 하는 그 쫄쫄 내 배설물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뜬금없이 웃음이 난다. 스무 개의 다른 방주인들도 다들 똑같이 이 위치에 앉아 변의를 해결하겠지 싶어서다. 아직 한 번도 얼굴을 본 적 없는 옆방 206호의 배우는 매일 아침, 내 변기 물 내리는 소리를 자명종 삼아 눈을 뜰지도 모를 일이다.
아침 댓바람부터 냉장고의 냉동실을 여는 이유는 아이스크림을 꺼내기 위해서가 아니다. 지난 밤 벗겨 먹은 사과껍질을 버리기 위해서다. 큼지막한 성에가 잔뜩 끼어 원래 공간의 절반도 안 되게 줄어들어버린 냉동칸에는 고기나 생선 대신 꽝꽝 언 음식물쓰레기통이 얌전히 들어 있다. 음식물쓰레기를 내다 버리지 않았다는 것 말고 지난 보름여 동안 205호 여자가 쌓아 온 비밀은 또 하나 있다. 세 명의 남성을 동시에 만나고 있다는 것, 달착지근한 한숨이 나오는 동시에 어깨가 으쓱해지는 대목이라 아니할 수 없다.
가장 자주 만난 것은 역시 태오다. 대학로에서 같이 영화를 본 뒤로 세 번 더 만났는데 섹스는 한 번밖에 안 했다. 육체와 영혼을 무조건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시각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어쨌거나, 우리의 육체와 영혼이 균형을 이루어가는 고무적인 현상이라 믿는다. 물론 육체의 진도가 영혼의 진도에 맞추어 하향평준화 되고 있다는 비판적 분석도 가능하겠다.
유준과의 만남은 예고 없이 이루어졌다. 유준과 유희, 두 사촌남매가 한잔 하다가 나를 불러낸 것이다. 네가 나갔을 때는 둘 다 이미 거나하게 취한 상태였다. 유준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한쪽 팔을 들어 "하이! 은수"라고 인사했다. 실망이라 할 수도 없고 모욕이라 할 수도 없는 야릇한 감정이 치솟았다. 노래방이 뮤지컬공연장인 양 현란한 개인기를 선보이던 유희가 별안간 마이크를 던지고 화장실로 뛰어가 버리자, 유준은 그제야 내 옆에 가까이 다가앉았다. "부담 갖지 말고 그냥 너 편할 때 대답하면 돼." 혀가 무척 꼬여 있었지만, 어쨌든 내 귀에는 분명히 그렇게 들렸다.
그리고 오늘, 얼어버린 한강을 건너 세 번째 남자를 만나러 간다. 김영수. 아파트 광고의 배경음악처럼 반듯하고 무난하며 지루한 남자. 이 도시의 어느 모퉁이를 돌아고 쉽게 부딪칠 만한 얼굴로 기억되건만, 단숨에 알아볼 수 있을지 도통 자신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