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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의 서
- 라이너 마리아 릴케
당신에게 나의 기도가 모독이 되지는 않겠지요,
내가 당신과 말할 수 없이 친한 사이임을
오래된 책에서 찾아보듯이 기도해도 말입니다.
나는 당신에게 사랑을 주렵니다, 주고 또 주렵니다......
우리는 대체 아버지를 사랑하나요? 예전에 당신이
내게서 떠났듯이, 굳은 얼굴로 우리도
도리 없이 텅 빈 그의 손에서 떠나지 않나요?
우리는 아버지의 마른 말을 슬며시
읽지 않는 책장 속에다 끼워 넣지 않나요?
분수계(分水界)에서 흘러내리듯 우리는
저마다의 가슴에서 기쁨과 고통으로 나뉘어 흐르지 않나요?
우리에게 아버지란 과거의 존재가 아닌가요?
이제 낯설기만 한 흘러가버린 세월,
늙은 몸짓, 다 해진 의복,
시든 속, 그리고 하얗게 바랜 머리가 아닌가요?
아버지는 그의 시대 동안 영웅이었다 해도
우리가 자라나면 떨어질 수밖에 없는 낙엽입니다.
그리고 그의 꼼꼼함은 우리에게 몽마(夢魔)와 같습니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는 우리에게 돌과 같습니다,
우리는 그의 말에 따르고 싶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말을 건성으로 듣습니다.
그와 우리 사이의 위대한 드라마는
너무나 시끄럽기 때문에 서로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의 입모양만을 볼 뿐입니다,
거기서 음절들이 떨어지면, 그것들은 곧 사라집니다,
사랑이 그와 우리 사이를 멀게나마 아직 얽어놓고 있지만,
우리는 그로부터 먼 것 이상으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가 이 별에서 죽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는 그가 이별에 살았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아버지입니다, 그런데 내가--내가
당신을 아버지라고 불러야 하나요?
그것은 당신과 나를 한없이 떼어놓는 것입니다.
당신은 나의 아들입니다. 나는 당신을 알아보렵니다,
아들이 어른이 되고, 늙은이가 되어도
사랑하는 자기 아이를 부모가 알아보듯이.
내 눈의 빛을 끄십시오, 그래도 당신을 볼 수 있습니다.
내 귀를 막으 십시오, 그래도 당신을 들을 수 있습니다.
다리 없이도 나는 당신에게 갈 수 있습니다.
입이 없어도 당신을 불러낼 수 있습니다.
나의 팔을 꺾어 보십시오, 손으로 하듯
나는 나의 심장으로 당신을 끌어 안습니다.
나의 심장을 멎게 하십시오, 나의 뇌가 맥박칠 것입니다.
당신이 나의 뇌에 불을 지피면,
나는 흐르는 피에 당신을 띄워 갈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영혼은 당신 앞에 서 있는 여인입니다.
나오미의 며느리 룻과 같습니다.
그녀는 낮에는 마음 깊이 봉사하는 시녀가 되어
당신의 볏단 사이에서 이삭을 줍숩니다.
그러나 저녁이면 강으로 나가,
몸을 씻고 좋은 옷으로 갈아입은 다음,
당신 주위의 모든 것이 쉴 때면 당신에게로 갑니다,
가서, 당신의 발치에 이불을 들고 눕습니다.
그러면 한밤중에 당신은 그녀에게 묻습니다, 그녀는
대답합니다, 나는 당신의 시녀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으로 시녀를 덮으소서.
당신은 우리 기업(基業)을 상속할 분이십니다.
그리고 나의 영혼은 날이 샐 때까지
당신의 피로 따스히 당신의 발치에서 잡니다.
그리고 당신 앞의 여인입니다, 룻과 같습니다.
당신은 상속자입니다,
아들들은 상속자입니다,
아버지들은 죽으니까요.
아들들은 일어나서 꽃 피웁니다.
당신은 상속자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흘러간 정원의 푸르름과
허물어진 하늘의 잔잔한
파란 빛을 상속받습니다.
수많은 나날의 이슬과
태양을 마하는 많은 여름과
젊은 여인의 쌓이고 쌓인 편지처럼
환희와 비탄을 품은 그 맑은 봄을.
울긋불긋한 나들이옷처럼
시인들의 기억 속에 물들어 있는 가을들을 상속합니다,
그리고 모든 겨울들은 버려진 땅처럼
고요히 당신 곁에 깃드는 듯합니다.
당신은 베테치아와 카잔, 그리고 로마를 상속합니다,
피렌체도 당신의 것입니다, 피사의 사원,
트로이츠카 라브라, 그리고 키예프의 수많은 정원들 가운데
이리저리 어둡데 뒤엉킨 통로들이 즐비한
동굴 수도원을 당신은 상속합니다.
기억처럼 종소리 울리는 모스크바,
그리고 음향은 당신의 것입니다, 바이올린소리, 뿔피리소리, 말소리,
그리고 가슴 깊이 울려퍼지는 모든 노래는
보석처럼 당신에게서 빛날 것입니다.
당신만을 위해 시인들은 문을 걸어 잠근 채
형상들을 모읍니다, 속삭이는 풍부한 형상들을,
그리고 밖으로 나가 비유로 성숙하며
살아 있는 동안 내내 혼자입니다.......
그리고 화가들이 그림을 그리는 것은 다만,
당신이 창조한 덧없는 자연을 당신에게
불멸의 상태로 되돌려주기 위함입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은 영원해집니다. 보세요, 여인은
이미 오래 전에 마돈나 리자에서 포도주처럼 무르익었습니다.
진정한 여인은 더 이상 존재치 않을 것입니다,
그 무엇도 그 그림에 새로운 것을 더하지 못할 테니까요.
무언가 짓는 자들은 당신과 같습니다.
그들은 영원을 원합니다. 그들은, 돌이여
영원하라 말합니다. 당신의 것이 되라고 하는 말이지요.
그리고 또 사랑하는 사람들도 당신을 위해 형상들을 모읍니다.
그들은 짧은 시간이나마 시인이라 할 것입니다.
무표정한 입에 입맞춤을 아로새겨
그 입을 더욱 더 아름답게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즐거움을 가져오고, 사람을 비로소
성숙하게 만드는 고통에 익숙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웃음 속에 고통을 가져오고,
자다가 깨어난 그리움을 가져옵니다,
이 모두 낯선 가슴에 묻혀 실컷 울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수수께끼 같은 것을 쌓아올리고, 짐승들이
죽어가듯, 그렇게 영문도 모른 채 죽어갑니다.
하지만 아마도 손자들을 두어
그들의 새파란 삶은 이들에게서 성숙할 것입니다.
또 이들을 통해 당신은
그들이 꿈결처럼 보이지 않게 주고받았던
사랑을 상속합니다.
분수의 위쪽 물받이의 물이
머리다발에서 풀린 머리카락처럼
아래쪽 물받이를 향해 끊임없이 흐르듯이
그렇게 넘치는 사물들이 당신을 향해 흐릅니다.
사물들과 여러 생각이 넘치면
그 충일은 당신의 계곡으로 떨어집니다.
나는 당신의 아주 보잘것없은 존재들 중의 하나일 뿐,
골방에서 바깥 세상의 삶을 내다보고
사물들보다 사람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생각조차 하지 않는 자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위쪽에 검은 눈이 우뚝 솟아 있는
당신의 얼굴 앞에 나를 두려고 합니다.
그 누구도 제 삶을 살지 못합니다,
그 누구도 제 삶을 살지 못합니다라고
말한다 해도 이를 오만이라 여기지말아주소서.
사람들, 목소리들, 잡다한 것들,
일상적인 것, 여러 가지 불안, 보잘것없는 자잘한 행복,
이 모든 것이 우연한 것입니다,
이미 어려서 제 모습을 감춘 복장으로 자라나
성인이 되면 가면을 쓰고, 얼굴뿐인 벙어리가 됩니다.
지금까지 진실된 자 그 누구도 탄 적이 없는
철갑 전차나 가마나 요람 같고,
혼자서는 버틸수 없어
볼록한 돌로 만들어진 단단한 벽에
흘러내리며 달라붙는 의복같이,
이러한 잡다한 삶들이 들어 있을
창고가 있으리라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
나를 지치게 하는 정원을 벗어나
밤마다 밖으로 나간다 해도
모든 길이 결국엔 제 삶을 살지 못한 사물들의
병기창으로 나 있음을 나는 압니다.
그곳에는 땅이 누워버린 듯 나무 한 그루 없습니다.
형무소의 높다란 담처럼 일곱 겹의
유리창 하나 없는 벽들이 빙 둘러 있습니다.
그리고 벽의 문들은 고리쇠로 굳게 닫혀 있어
들어가려 하는 사람들을 막고,
창살은 인간들의 손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모두를 저희를 미워해서 잡아두는 감옥인양
스스로부터 벗어나려고 애쓰는 이 순간에도
세상에는 위대한 기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다름 아닌 온전한 삶이 살아지고 있다는 것이죠.
그 누가 그러한 삶을 사나요? 그것은
연주되지 않은 선율이 하프 속에 깃들어 있듯
저녁 이내 속에 잠겨 있는 사물들인가요?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인가요?
손짓을 주고받는 나뭇가지들인가요?
향기를 옷감처럼 짜 올리는 꽃들인가요?
이울어가는 기나긴 가로수 길인가요?
걸음마를 막 시작한 온기 어린 짐승들인가요?
이상하게 날아 오르는 새들인가요?
그 누가 그 삶을 사는가요? 신이여. 당신이 그러한 삶을 사는지요?
당신은 검댕에 새카맣게 그을린
머리카락의 노인입니다.
당신은 망치를 손에 든
눈에 띄지 않는 위대한 존재입니다.
당신은 모루 옆을 떠나지 않던
대장장이, 세월의 노래입니다.
당신은 일요일을 맞는 날이 없는
일 속에 파묻힌 자입니다,
아직 윤이 나지도 매끄럽지도 않은
칼을 만들다가 죽을지도 모를 자입니다.
우리에게 물레방아와 톱이 있다 해도
모두들 취해서 게으름에 빠져 있을 때
우리는 도시의 모든 종을 치는
당신의 망치질소리를 들을 것입니다.
당신은 어른, 장인(匠人)입니다,
그 누구도 당신이 배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당신은 미지의 존재, 여행에서 돌아온 자,
당신에 대한 이야기와 소문들이
때론 속삭이듯 때론 거침없이 떠돕니다.
당신을 추측하는 소문들이 떠돌고
당신을 지워버리려는 의혹들이 춤춥니다.
게으른 자들과 꿈에 취한 자들은
자기 자신들의 불빛을 믿지 아니하고
산들이 피 흘리는 것을 보려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그들은 당신을 믿지 않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고개를 떨구십니다.
당신은 위대한 심판의 징표로서
산맥의 핏줄들을 절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에겐
이교도 따위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당신은 온갖 간계와 싸우려 하지 않으며
빛의 사랑도 구하지 않습니다.
기독교들 역시 당신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으니까요.
묻는 자는 당신에게 중요치 않습니다.
부드러운 눈길로 당신은
당신을 가슴에 품은 자를 바라봅니다.
당신을 찾는 이들은 저마다 당신을 시험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당신을 찾은 사람들은 당신을
그림과 몸짓에다 묶어놓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대지가 당신을 이해하듯
그렇게 당신을 이해하렵니다.
나의 성숙과 더불어
당신의 왕국도
성숙합니다.
나는 당신을 증명하려는
어떤 허영도 당신에게 바라지 않으렵니다.
시간이란 당신과는
다른 것임을
나는 알기 때문입니다.
나를 위해 어떤 기적도 행하지마소서.
종족에서 종족으로 이어지며
더 선명해지는
당신의 법칙을 시인하소서.
무언가 나의 창 밖으로 떨어지면
(그것이 아주 작은 물건일지라도)
중력의 법칙이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처럼
공이든 딸기든 이를 향해
힘차게 와락 달려들어
이것들을 세계의 중심으로 끌어들입니다.
모든 사물들은 그 하나하나마다
날아서 다가오는 착한 마음에 의해 지켜지고 있습니다.
모든 돌, 모든 꽃,
한밤중의 작은 아이가 그러하듯이.
다만 우리들만이 주제넘게
얼마 안 되는 연관에서 빠져나와
자유의 텅 빈 공간 속으로 몰려갑니다
현명한 힘에 몸을 맡기고
한 그루 나무처럼 스스로를 일으켜 세우는 대신.
조용히 스스로 나서
가장 광대한 궤도로 들어서는 대신,
사람들은 온갖 방법으로 편을 짭니다.
그리고 모든 동아리에서 내쫓긴 자는
지금 말할 수 없이 고독합니다.
이제 사물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아이처럼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사물들은 신의 마음에 매달려 있어
신에게서 떠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온갖 새들보다 더 잘 날 수 있다고 우쭐대던 자.
그 자는 다시금 한 가지를 더 배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떨어지는 것
참을성 있게 중력 속에 머무는 법을.
(천사들 역시 더 이상 날지 않기 때문입니다.
천사들은 신 곁에 앉아서 생각에 잠겨 있는
몸이 무거운 새들,
불구가 되어버린
새들의 잔해, 펭귄과 같습니다......)
당신은 겸허를 말합니다, 당신을
이해하기 위해 고개를 떨구라고.
저녁이면 그렇게 고개를 떨군 채 젊은 시인들은
인적 없는 가로수 길을 헤맵니다.
어린아이가 죽음 속으로 사라지면
농부들은 그렇게 고개를 떨구고 시신 옆에 서 있습니다,
그때마다 일어나는 것은 똑같은 일,
말할 수 없이 거대한 것입니다.
당신을 처음으로 알아본 사람을
이웃과 시계는 가만두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는 당신의 발자국을 찾기 위해
짐을 진 듯 늙은 듯 등을 구부린 채 다닙니다.
한참 지나서야 그는 자연에 다가가
바람과 먼 곳을 느낍니다,
평원의 속삭임에서 당신을 듣고,
별들의 노래에서 당신을 보며,
그 어디서도 당신을 잊은 일이 없습니다,
모든 것은 당신의 외투일 뿐이니까요.
그에게 당신은 새롭고 가까운 착한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의 눈에 당신은 큰 강을 따라
아늑한 배를 타고 고요히 흘러가는
여행처럼 눈부시게 아름답습니다.
땅은 광활하게 이어져 숱한 바람 속에,
크나큰 하늘의 품속에 안겨 있고
오랜된 숲에 기대어 있습니다.
다가오는 작은 마을들은
종소리처럼
어제와 오늘처럼
우리가 본 모든 것처럼
다시 사라집니다.
그러나 흘러가는 강 언덕으로
끝없이 도시들은 일어나며
날갯짓하듯
우리의 장엄한 여행을 맞이합니다.
그리고 가끔 배가 닿는 곳은
마을과 도시에서 멀리 떨어져
쓸쓸히 물결 너머로 무언가를,
고향 잃은 방랑자를 기다리는 그곳입니다.
그를 위해 작은 마차들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마차마다 세 마리의 말이 달려 있습니다)
그러면 마차들은 사라져버린 길을 따라
저녁을 향해 숨 가쁘게 달려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