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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행복 (Ⅲ)
- 여호와의 인도하심을 받음 - 신명기33:1-5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공통점이 발견됩니다.
첫째, 모든 일에 완벽하고자 합니다. 완벽주의자들은 불행합니다. 모든 걱정을 껴안고 살아갑니다.
둘째, 항상 남과 비교합니다. 마음속에서 끓어오르는 경쟁심은 평안을 앗아 갑니다.
셋째, 자기 자신만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넷째, 사소한 일에도 신경을 씁니다.
다섯째, 매사를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며, 상대방의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 듭니다.
여섯째, 이웃을 위해 사랑과 물질을 베풀지 않습니다.
일곱째, 하나님을 모릅니다.
미국의 저술가 필 박사는 <행복 철학>의 서문에서 행복하려면 ...
첫째, 증오와 고민에서 네 마음을 해방시켜라.
둘째, 단순하게 살아라.
셋째, 기대를 조금만 가져라.
넷째, 남에게 많은 것을 주어라.
다섯째, 네 생활을 사랑으로 가득 채워라.
여섯째, 햇빛처럼 남에게 도움이 되어라.
일곱째, 자아를 망각하라. 고 했습니다.
스위스의 법학자이며 철학자인 힐티는 <행복론>에서 말하기를 인생 최대의 행복은 하나님 곁 가까이 있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힐티는 77세에 죽었는데 그의 책상 위에는 최후의 논문(영원한 평화)과 함께 성경이 놓여 있었다고 합니다.
Ⅰ. 이스라엘은 행복자
우리는 계속해서 <이스라엘의 행복>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상고 중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행복자입니다. 이스라엘이 행복자라면 행복의 이유가 무엇입니까?
신명기 33장 2절에 여호와께서 ... 바란 산에서 비취시고라고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바란 산에서 비취심이 이스라엘의 행복입니다.
이스라엘은 모세의 지휘 아래 애굽을 떠났습니다. 라암셋에서 발행한 이스라엘은 숫곳을 거쳐 광야 끝 에담에 이르러 장막을 침으로 광야 40년의 기나긴 여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애굽을 떠나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향하는 이스라엘의 행로에 바란 산이 있었습니다. 바란 산은 가데스 바네아의 남쪽에 위치한 산악지대로 맹수와 독충들이 우글거리는 곳입니다. 그야말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요, 사나운 짐승들이 출몰하는 거친 광야요, 황무지요, 죽음의 땅입니다. 신명기 1장 19절에는 이 바란 산을 가리켜 <크고 두려운 광야>라고 했습니다. 광야는 혹독한 곳입니다. 도처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입니다. 낮에는 40도가 넘는 살인적인 더위가, 밤에는 살을 에는 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곳입니다. 광야에는 길이 없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모래바람으로 지형이 바뀝니다. 그래서 유능한 안내자도 길을 잃고 헤매는 곳이 광야입니다.
어떻게 하면 안전하게 광야를 통과할 수 있습니까? ->이스라엘의 살 길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벗어나는 것입니다.
바란 산에 거주하던 이스라엘에게 여호와의 인도하심의 손길이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신명기 32장 10-12절에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같이 지키셨도다.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들을 인도하셨다>고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
①사망의 그늘진 땅(애굽)에서 종살이 하고 있던 이스라엘을 찾아 오셔서 만나 주시고, 바로의 속박으로부터 건져 주셨습니다.
②뒤쫓아 오는 바로의 군대를 홍해에서 물리쳐 주시고, 바다를 마른 땅같이 건너게 하셨습니다.
③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이스라엘의 갈 길을 인도하시며 보호해 주셨습니다.
④거친 광야에서는 못된 짐승과 대적의 위협으로부터 눈동자처럼 지켜 보호하여 주셨습니다. 마치 독수리가 날개를 펴서 어린 새끼를 자기 등에 업고 안전한 장소로 날아가듯이 택하신 백성 이스라엘을 대적의 칼에서 안전하게 보호하시고 축복의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Ⅱ. 인도하심을 받아야
광야를 통과함에 있어서 유능한 가이드의 도움은 필수입니다. 물론 가이드의 도움 없이도 광야를 통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익숙한 길이 아니라 이전에 한 번도 가보지 아니한 광야나 밀림이나 사막 같은 오지마을을 여행하고, 통과하려면 가이드의 도움은 필수적입니다. 가이드의 도움을 받지 아니하면 목적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십중팔구 길을 잃을 확률이 높습니다.
우리 중에 길을 찾으려고 동서남북을 헤매고 다녔던 경험이 있는 분이 있습니까? 특히 인생의 갈림길에 서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어디로 가서, 누구를 만나야 하는가? 적자를 감수하고 버텨야 하는가? 아니면 포기해야 하는가? 이리로 가야 하는가? 저리로 가야 하는가?>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해 본적이 있습니까? 저는 여러 번 그런 경험이 있었습니다. 분명히 성공의 길이라고 판단하고 걸어갔는데 실패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고, 분명히 아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걸어갔는데 아는 길이 아니어서 낭패를 당한 적도 있었습니다.
칠흑 같은 밤바다를 표류하는 배를 살리는 것은 등대의 불빛입니다. 항구의 수심과 암초의 위치와 그 밖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등대의 불빛입니다. 등대에서 비쳐주는 한 줄기 빛은 표류하는 배를 안전하게 항구에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인생의 광야를 통과할 때에도 가이드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시행착오와 실패와 패배의 쓰라림을 맛보지 아니하려면 좋은 가이드의 인도함을 받아야 하고, 유능한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야 합니다. 유능한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야 소망의 항구에 온전히 도착할 수 있고, 한 번뿐인 인생에서 성공자가 될 수 있고, 승리자가 될 수 있고, 형통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프리카 오지마을에서 복음을 전하던 존스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그가 어느 날 가이드 없이 혼자 정글을 지나다가 길을 잃었습니다. 아무리 정글을 빠져나가려고 해도 빠져나갈 수 없었습니다. 기진맥진한 채 자리에 앉아 있다가 원주민을 만났습니다. 존스 선교사는 길을 잃어버렸으니 마을로 가는 길을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원주민은 자기를 따라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울창한 숲을 헤치고 나갔습니다. 숨을 헐떡이며 따라가던 존스 선교사는 더 이상 따라갈 수 없을 만큼 지쳤습니다.
“도대체 어디로 갑니까? 얼마를 더 가야 길이 나옵니까? 도대체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
“정글에는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길입니다. 나를 믿고 따라오십시오”
존스 선교사는 원주민을 따라 나선 지 한참 후에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정글에만 길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여로에도 길이 없습니다. 우리가 맞이하는 새 날은 동일한 날의 반복처럼 보이지만 이전에 체험하지 못한 새로운 날입니다. 오늘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도 어제 걸었던 길이 아니라 이전에 지나가보지 못한 새로운 길입니다. 그러기에 어제의 정답이 오늘은 오답이 될 수 있고, 오늘의 승리가 내일은 실패로 끝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인생의 길은 도처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위험이 있습니다. 사탄은 덫과 올무를 쳐 놓고 우리가 걸려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생의 모든 길을 다 알고 있고, 예기치 못한 삶의 문제까지도 다 해결할 수 있는 유능한 가이드입니다. 하나님은 죽음이 아니라 생명으로 인도하는 가이드, 실패가 아니라 성공으로 인도하는 가이드, 낙심이 아니라 소망으로 인도하는 가이드, 지옥이 아니라 천국으로 인도하는 가이드입니다. 우리가 복 된 삶의 주인공이 되려면 하나님의 안내를 받아야 합니다. 성공자가 되고, 행복자가 되고, 만족자가 되려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인생의 여로에 길이 없다는 것이, 자주자주 길을 잃어버리는 것이, 도처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할 분명한 이유입니다.
Ⅲ. 인도하시는 하나님
택한 백성 이스라엘을 복 된 길로 인도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중요한 사역 중의 하나입니다.
1)창세기 24장을 보면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이 이삭의 아내가 될 리브가를 가나안 땅으로 데려오는 기사가 나옵니다. 아브라함은 엘리에셀에게 명하여 나홀 성으로 가서 이삭의 아내가 될 처녀를 찾아오라고 합니다. 이에 엘리에셀은 나홀 성을 향해 떠납니다. 창세기 22장 20-24절을 보면 리브가의 출생 기사가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의 아내로 생각하는 처녀는 자기 친족인 리브가입니다. 그러나 엘리에셀에게는 특정인을 지목하지 않고 그 땅에 있는 처녀 중에서 적당한 처녀를 찾아오라고 했습니다. 나홀 성에 도착한 엘리에셀은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이삭의 아내 될 처녀를 만나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리브가를 만났고, 리브가와 그 부모의 동의를 얻어 가나안 땅으로 데려올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을 위하여 엘리에셀을 나홀 성으로 인도하시고, 우물가에서 리브가를 만날 수 있도록 인도하신 분이 누굽니까?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2)빌레몬서를 보면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이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용서해주고, 사랑으로 환영해 줄 것을 부탁하는 기사가 나옵니다. 바울이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용서해주라고 정중하게 부탁했던 것은 오네시모가 복음을 듣고 새 사람으로 거듭났기 때문입니다.
주인을 배반하고 도망쳤던 오네시모가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도록 역사하신 분이 누굽니까?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도망자 오네시모를 바울이 있는 곳으로 인도하셨고, 바울의 입을 통해 복음을 듣게 하셨습니다.
빌레몬에게 편지를 써서 오네시모의 죄를 용서해 주도록 바울의 마음을 주장하신 분이 누구십니까?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3)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죽이려고 했을 때 물 없는 웅덩이를 준비하신 분이 누구십니까? 어린 요셉을 그 웅덩이로 인도하신 분이 누구십니까? 이스마엘 자손들을 통해 요셉을 애굽으로 팔려가게 하신 분이 누구십니까?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4)하나님의 인도하심의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을 우리 새 영광교회로 인도하신 분이 누구십니까? 여러분을 유명 목사님들이 시무하는 큰 교회가 아닌 이곳 연산동 골짜기에 위치한 새 영광교회로 인도하시고, 박 목사가 전하는 말씀을 듣게 하신 이가 누구십니까?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부모, 형제, 친구, 지인을 통해 여러분을 여기까지 오게 하셨고, 이 시간도 박 목사가 전하는 말씀을 듣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범사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하나님의 뜻에 따른다고 말하는 어떤 권사님이 계셨습니다. 그 권사님이 산책할 때의 일입니다. 숲속으로 들어가니 두 갈래 길이 나타났습니다. 오른쪽으로 난 길로 갈 것인가? 왼쪽으로 난 길로 갈 것인가? 권사님은 오른쪽으로 가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겠다고 생각한 권사님은 지팡이를 길 중간에 세웠습니다. 그리고 지팡이가 넘어지면 방향이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팡이를 잡은 손을 놓으니 왼쪽으로 넘어졌습니다. 권사님은 다시 지팡이를 세우고 손을 놓았습니다. 지팡이는 또 왼쪽으로 넘어졌습니다. 권사님은 다시 지팡이를 세우고 손을 놓았습니다. 지팡이는 또 왼쪽으로 넘어졌습니다. 권사님은 몇 번이고 그 일을 반복했습니다. 드디어 오른쪽으로 넘어졌습니다. 그때서야 권사님은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을 따라 산책을 계속했다고 합니다.
->권사님의 선택과 결단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맡겨야 합니다.
Ⅳ. 인도하심의 결과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결과가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다윗만큼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의 은총을 많이 받았던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다윗의 생애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점철되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입니다. 매 순간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았던 다윗의 고백이 무엇입니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집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은 이스라엘은 광야 40년을 지내는 동안 단 한 번도 길을 잃고 헤맨 적이 없었습니다. 단 한 번도 의복이 헤어지지 아니하였고, 발이 불어터지지 아니하였으며, 굶주린 적이 없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광야 40년 동안 이스라엘을 푸른 초장으로,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목이 마르다고 하면 생수가 흘러넘치는 곳으로 인도해 주셨으며, 피곤하다고 하면 열 두 샘과 칠십 그루의 종려수가 있는 곳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결과는 육신의 만족이었고, 영혼의 만족이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행복한 이유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해야 하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다는 것이 이스라엘이 행복할 수밖에 없는 분명한 이유입니다.
캄캄한 밤에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의 길 되시고
나에게 밝은 빛이 되시니 길 잃어버릴 염려 없네
하늘의 영광 하늘의 영광 나의 맘속에 차고도 넘쳐
할렐루야를 힘차게 불러 영원히 주를 찬양하리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인도하십니다. 천국으로 인도하시고, 마땅히 가야 할 길로 인도하시고, 승리와 성공과 형통과 만족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사람이 보기에 바르지 못해도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은 30배 60배 100배의 축복에 이르게 하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장래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란 광야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요, 영적 암흑의 세상입니다. 영적 암흑의 세상이라고 함은 곧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단절은 고통입니다. 단절은 영적 무지입니다. 단절은 암흑입니다. 하늘 보좌로부터 은혜가 단절되었기에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노예로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하늘 보좌로부터 진리의 빛이 단절되었기에 이스라엘은 영적 무지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사람은 불행자입니다. 세상적인 조건을 다 갖추어도 만약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다고 한다면 그 영혼은 어두움에 속한 자요, 살아 있어도 죽은 영혼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바란 산에 비친 여호와의 빛은 구원의 빛인 동시에 인도의 빛이었습니다. 진리의 빛이요, 성령의 빛이었습니다.
태초에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은 수면 위에 있을 때 <빛이 있으라>는 말씀으로 흑암을 깨뜨리고 찬란한 아침을 여신 여호와는 오늘도 구원과 인도의 빛으로 우리 영혼을 환하게 밝혀 주십니다.
여호와의 빛은 택한 백성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교제를 돈독하게 연결시켜 줄 뿐 아니라 진리의 말씀을 깨닫게 합니다. 진리의 말씀은 인간적인 열심이나 노력으로 깨달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의 말씀은 성령의 조명을 받지 못하면 박식한 학자라도 말씀의 깊은 의미를 깨닫지 못합니다. 성경을 백독하고 천 독을 해도 그 속에 담긴 보물을 찾아내지 못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기독신자들은 행복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마다 성령의 조명을 받아 말씀의 의미를 깨닫기 때문입니다. 말씀 한 구절을 붙잡고 깊이 묵상할 때마다 성령의 빛을 통해 말씀의 오묘한 뜻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예배 중에 선포 되어지는 설교를 통해 구속경륜의 위대하신 뜻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기도와 찬송을 통해서 하나님 자기 사랑의 위대하심도 깨닫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신령한 비밀을 깨닫을 수 있게 된 것은 여호와의 빛이 우리 영혼을 환하게 밝혀 주시기 때문입니다.
불안과 분열로 질식할 것 같은 우리 가슴이 평화와 희락에 젖어 종달새처럼 경쾌한 찬양을 드릴 수 있게 된 것도 여호와의 빛이 우리 영혼을 밝혀 주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구원의 빛을 비추고 있는 한 이 세상이 죄악으로 부패했다 할지라도 아직 소망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랑의 빛을 비추고 있는 한 이 세상이 원망과 다툼과 미움과 불화가 가득찼다 할지라도 여전히 소망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성령의 빛을 비추고 있는 한 이 세상이 영적 무지와 암흑으로 물든 캄캄하다고 할지라도 아직 소망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범사에 우리가 가야할 길을 인도해 주시는 한 우리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는 여호와의 성령의 빛을 받은 성령의 사람입니다. 진리의 영을 받은 진리의 사람입니다. 영안이 열린 영안의 사람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과 생명과 소망과 성령과 진리의 빛은 저와 여러분의 머리 위에서 빛나고, 우리 가야 할 길을 인도해 주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인도허심을 받는 우리 기독교인들이야말로 진실로 세상에서 행복자가 아닌가? 축복자가 아닌가? 믿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