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고전(古典) <삼국연의(三國演義)>. 그동안 이 책의 완역판이 국내에 없었다는 것이 놀라웠고, 이 책의 최초 완역을 출판사 대표가 해냈다는 것에 더 놀라웠다. 비봉출판사의 박기봉(朴琪鳳ㆍ69) 대표는 최근 우리에게 <삼국지(三國志)>로 알려진 <삼국연의>를 최초로 완역, 출간했다.
우리가 읽고 있는 수많은 소설 <삼국지>들은 청나라 문인 모종강(毛宗崗)이 펴낸 <삼국연의>에 기초하고 있다. 그런데 이번에 박기봉 대표가 <삼국연의>의 첫 완역본을 펴낸 것이다. 서울 금천구 가산동에 있는 비봉출판사 사무실에서 박기봉 대표를 만났다.
박 대표는 “<삼국지>는 진수(陳壽ㆍ233~297)가 쓴 정식 역사서를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흔히 <삼국지>라고 부르는 역사 소설은 <삼국연의>로 불러야 한다”고 말했다. 14세기에 원 말(元末)ㆍ명 초(明初)의 소설가인 나관중(羅貫中)이 진수가 쓴 <삼국지>에 다양한 이야기를 추가하여 <삼국지통속연의(三國志通俗演義)>라는 이름의 역사소설을 내놓았다. 이후 중국에서는 정사(正史) <삼국지>와 역사소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혹은 <삼국연의>를 엄격하게 구분해서 부르고 있다는 것이 박 대표의 설명이다.
“나관중의 <삼국지통속연의>는 분량이 방대하고, 문장이 느슨하며, 이야기가 중복되는 등 문학적 완성도가 높지 않았습니다. 이에 모종강이 그의 부친과 함께 나관중의 <삼국지통속연의>를 240회에서 120회로 압축하여 문학적 완성도를 높인 판본을 내놓았습니다. 이를 그의 이름을 따서 <모본(毛本)> 또는 <모종강본>이라고 하는데, 그 후 지난 300년간 <삼국지연의>는 모본으로 통일되어 널리 읽혔습니다. 모종강 본이 현재 통용되고 있는 모든 <삼국연의> 번역본의 원전(原典)입니다.”
비봉출판사의 <삼국연의>.
박 대표는 “모종강 본의 특징은 毛씨가 매회 자신의 감상평인 서시평(序始評)을 추가했고, 본문 속에서도 일종의 각주 같은 짧은 평, 즉 협평(夾平)과 장문의 <삼국지 읽는 법>, 즉 <독삼국지법(讀三國志法)>을 넣었다는 것”이라며 “그동안 국내에 번역된 <삼국지> 또는 <삼국연의>에는 서시평, 협평, 삼국지 읽는 법(독삼국지법) 등이 모두 빠져 있는데, 이번에 최초로 이 모든 것을 포함, 완역을 했다”고 밝혔다.
박 대표는 <삼국연의>를 번역하는 데 꼬박 3년간 매달렸다고 했다. 그는 번역 작업에 착수하면서 먼저 <삼국연의>의 원문(原文) 입력 작업을 하고, 그 후 중국 유명출판사에서 발간한 <삼국연의>의 여러 판본들과 대조해 가면서 오자(誤字) 없는 원문을 확정짓고, 그다음에 원문에 주석을 다는 순으로 작업했다고 한다.
“고전은 정확한 원문의 정확한 번역이 생명입니다. 중국에서는 출판사마다 <삼국연의> 판본 하나씩을 갖고 있을 정도이기 때문에 정확한 번역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정확한 원문을 확정짓는 게 우선이었습니다. 북경대학과 중화서국, 인민문학출판사, 상해고적출판사 등 중국의 유명 출판사가 펴낸 6가지 정도의 판본과 입력한 원문의 문장과 한자(漢字) 하나하나를 철저히 대조했습니다.
중국의 유명 출판사에서 펴낸 책에도 오탈자가 생각보다 많았습니다. 여러 판본의 한자를 하나하나 대조해가면서 이런 오탈자를 전부 바로잡았습니다. 이렇게 원문을 입력하여 완성하는 데 1년, 번역하는 데 1년, 교정과 교열을 보고 책을 펴내는 데 1년, 총 3년의 세월이 걸린 것입니다. 어느 판본보다 제가 번역하고 교정을 본 판본이 가장 정확한 원문이라고 자부합니다.”
"<삼국지>가 아니라 <삼국연의>로 불러야"
-번역문 8권, 원문과 주석본 4권, 모두 12권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의 책을 3년 안에 해냈다는 사실도 잘 믿기지 않는데요.
“지난 3년간 저는 책을 번역하는 동안 시간을 아끼기 위해 점심 약속이나 저녁 모임 같은 곳에도 거의 가지 않았습니다. 길에서 보내는 시간이 아까웠기 때문입니다. 번역작업을 마칠 때까지는 아침에 일단 출근하면 거의 매일 저녁 9시 내지 9시 반까지 번역작업에 매달렸습니다.”
-그동안 국내에서 삼국지는 일본인 작가 요시카와 에이지, 정비석, 황석영, 이문열 등의 유명 작가들이 번역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국내에서 가장 많이 팔린 ‘이문열 삼국지’의 경우 2천만 부가 넘게 판매된 것으로 들었습니다. 황석영ㆍ이문열 삼국지는 작가들의 창작과 각색, 그리고 의역(意譯)으로 재창작된 부분이 많습니다. 그러나 저는 원문의 뜻을 정직하고 충실하게 전달하는 데 가장 큰 역점을 두고 번역을 했습니다. 특히 한문(漢文)은 말의 압축이 심하고, 연결 조사가 많지 않아서 배경지식이 부족하거나 논리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자칫 오역(誤譯)으로 이어지기 쉽습니다. 저의 번역본이 국내 모든 <삼국지>들 중에서 최고의 번역본이자 완성본이라고 자부하는 이유는 이런 부분에서 다른 번역서들과는 많은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개작이나 의역을 배제한 채 오직 원문에 충실한 번역에 역점을 두셨다는 말씀이군요.
“<삼국연의>는 이미 세계적인 고전인데, 이런 고전 작품은 번역자의 뜻에 따라 제각각으로 들쭉날쭉해서는 안 됩니다. 고전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서 이미 세상 사람들의 평가는 물론 시간의 평가까지 거쳐서 살아남은 것이므로, 원문을 충실하게 반영한 정확한 번역본의 수준과 가치를 뛰어넘는 문학작품은 좀처럼 나오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여러 작가가 재창작을 하더라도, 먼저 완역본이 존재한 후 이를 바탕으로 작가 개인의 상상력을 보태서 다양하게 각색을 한 작품이 나오는 게 올바른 순서일 것입니다. 저는 어느 누가 보더라도 최고의 번역본이 되도록 하려고 작심하고 작업을 했습니다.”
박기봉 대표는 <삼국연의>를 본격적으로 번역하기에 앞서 중국 유명 출판사에서 출간된 <삼국연의> 6개의 판본을 구해 원문을 하나하나 대조하며 정확한 원문을 확정짓는 작업을 했다. 사진은 박 대표가 중국에서 출간한 <삼국연의>의 여러 판본을 비교하며 오탈자를 바로잡거나, 다양한 표시를 해 놓은 모습.
-<삼국연의(三國演義)>가 정식 명칭이라면, 우리나라에서는 어째서 <삼국지(三國志)>로 통용되고 있는 건지요.
“우리나라에 <삼국지>가 대중에게 본격적으로 보급된 것은 일본의 유명 대중작가 요시카와 에이지(吉川英治ㆍ1892~1962)라는 사람이 쓴 소설 <삼국지> 때문입니다. 현재 중ㆍ장년층이 읽었던 삼국지는 대부분 요시카와의 <삼국지>입니다. 이것은 고우영 화백의 <만화 삼국지>의 원전이 된 작품이기도 합니다. 요시카와는 <삼국연의>를 번역했다기보다 완전히 자기 스타일로 창작한 새로운 소설을 쓰고는 그 이름을 <삼국지>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 작품은 1939년부터 우리나라 <경성일보>(일본어 신문)에 연재가 되었고, 그것이 굉장한 인기를 얻어서, 그 후 우리나라에는 <삼국연의>가 아닌 <삼국지>로 굳어지게 된 것입니다.”
-독자들은 대부분 한글세대일 텐데 번역을 하는데 어떤 애로사항이 있었습니까.
“사실 그 부분이 가장 힘들고 어려운 점이었습니다. 어느 정도 수준의 단어로 번역해야 독자들이 쉽게 읽을 수 있을지를 고민하며 번역을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한자어 단어를 그대로 살려야 문장의 맛이 살아나는 부분도 단어가 어렵기 때문에 풀어서 설명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럴 때는 아쉬운 마음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한글세대와 연구자들이 읽기 쉽도록 중요한 단어에는 한자를 병기하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삼국연의>에는 논어, 맹자 등 경서와 손자병법 등 동양 고전에서 인용된 명언(名言)들이 많이 나오는데, 그런 인용문들에 대해서는 일일이 원전을 찾아서 주를 달아 놓아 어느 정도 한문을 읽을 수 있는 독자들이면 참고할 수 있도록 해놓았습니다.”
"내가 직접 한문 고전을 번역하는 이유는…"
박기봉 대표의 비봉출판사(比峰出版社)는 원래 경제학과 경영학 대학교재를 전문으로 발행하던 출판사였다. 박 대표는 “1980년대 이후 우리나라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사람치고 우리 출판사 책을 한 권이라도 읽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라며 “지난 여러 정권에 걸쳐 우리나라 경제부처 장ㆍ차관, 청와대 수석을 지낸 분들 가운데는 우리 출판사의 저자들도 많았다”고 했다.
1980년 출판사 설립 이후 최고의 대학교재를 만든다고 자부해왔지만, 박 대표는 2000년 들어서 20년 동안 비봉출판사에서 발간해오던 모든 대학교재의 절판을 선언했다.
“대학교재를 발행하면서 두 가지 면에서 실망이 컸습니다. 첫째는 우리나라 대학의 풍토였습니다. 저는 좋은 책을 만들어 학생들이 공부하는 데 도움을 주겠다는 일념 하나로 출판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풍토가 아무리 좋은 책을 내놔도 교수들에게 로비를 하지 않으면 교재로 채택되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출판사가 좋은 책을 만들면 교수들이 ‘고맙다’고 하면서 책을 교재로 채택해야 하는 것이 정상인데,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제가 이런 대학교재 출판 풍토에서 20년을 고군분투(孤軍奮鬪)했던 겁니다. 교재를 절판한 또 하나의 이유는 IMF 외환위기 이후 책의 복사 행위가 공공연히 이루어져 교재를 팔아서는 출판사를 유지해나가기 어려웠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후 비봉출판사는 역사학이나 인문학 등 기존과는 전혀 다른 분야의 책을 내기 시작했다. 박 대표는 “대학의 경제ㆍ경영학 교재를 절판했지만 <자본론>, <국부론>, <도덕감정론>, <일반이론> 등 경제학 분야의 고전들은 아직도 계속해서 펴내고 있다”며 “이런 고전들은 경제학을 깊이 공부하려는 사람들의 필독서일 뿐만 아니라 대학 교재로서가 아니라 서점에서 자발적으로 찾는 사람들이 사는 책들이기 때문에 절판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삼국연의>를 번역하기 전인 2006~2007년 무렵 이미 신채호(申采浩)의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및 <조선상고문화사>와 <충무공 이순신 전서>(전 4권)를 직접 번역하고 펴내셨는데, 왜 전문가에게 번역 일을 맡기지 않고 직접 번역작업을 하고 계신지요.
“거기에는 사연이 있습니다. 사실 제가 한문 고전만큼은 직접 번역하겠다고 마음먹은 게 25년 전쯤 됩니다. 저는 출판업을 시작한 1980년대에 우리나라 최초로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와 <삼국지>를 완역하기로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번역을 맡길 관련 전문가를 물색하던 중 어느 중문학과 교수를 찾아서 그들과 계약을 맺고, 집필을 맡겼습니다. 그런데 그 중 한 분이 번역해서 가져온 <삼국지> 원고를 보니 오역(誤譯) 투성이었습니다.”
박 대표는 이 상태로는 도저히 책을 낼 수 없었다고 했다.
“오역이 너무 많아서 제가 앞부분 일부를 교정 본 후 필자에게 한번 검토해 보라며 돌려보냈습니다. 그러면서 ‘아직은 이 책을 번역하기에는 역부족인 것 같으니 3년 정도 공부를 더 한 후에 완벽한 번역서를 내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양반이 돌아가서 내용증명 편지를 보내왔는데, 그 내용인즉 ‘일개 출판사 사장 따위가 대학교수인 자기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일개 장사꾼 따위가 뭘 안다고 감히 중문학 교수인 자신이 번역한 것에 대해 토를 다느냐는 것이었죠.
그러면서 계약을 파기할 것이며, 계약 파기의 원인은 제가 제공했으므로 계약금은 돌려주지 못하겠다고 하더군요. 그 편지를 받고 너무도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 내용증명 편지는 아직도 보관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오역투성이인 그 원고가 다른 출판사에서 출간되어 나오더군요. 솔직히 말해서, 우리나라 출판사에서 교수들이 해온 중국 고전 번역이 오역인지 아닌지 검증할 수 있는 출판사가 비봉출판사 말고 달리 몇 곳이나 있겠습니까.”
-그 후로 직접 번역작업에 매달리신 건가요.
“제가 우리나라에서 제일 먼저 <사기>와 <삼국지>의 번역본을 내려고 계획했었는데 이런 일을 겪었던 것입니다. 좀 거만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그 후 마음 놓고 번역을 맡길만한 사람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책이라는 것은 필자나 역자의 작품도 되지만, 출판사의 얼굴이자 재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역 없이 원문의 뜻을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도록 정성을 다해 번역한 원고를 출판하려고 했던 것이 저의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런 정성으로 번역에 임하는 사람을 잘 찾지 못하겠더군요. 그래서 한문 관련 책은 외부에 원고청탁을 하지 않기로 결심했던 것입니다.”
박 대표는 “고전 번역의 생명은 정확성”이라며 “재미는 덜하더라도 일단은 정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나라 대학교수 중에는 원문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면서 관련 논문을 쓰거나 책을 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원문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 그걸 바탕으로 쓴 논문이 무슨 큰 가치가 있겠습니까. 우리 출판사가 펴내는 모든 번역서는 제가 직접 원문과 번역문을 일일이 대조하고 교정을 본 후 출판을 합니다. 어느 대학의 교과서나 대학시험에서 지문으로 인용되더라도 ‘이거 누가 이따위로 번역했냐?’는 말은 듣지 않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우리 출판사에서 출간한 번역서들은 거의 다 원문의 내용을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다고 자신합니다.”
고전의 완벽한 이해 위해 갑골문자와 금문(金文) 공부
비봉출판사는 그간 경제학과 경영학 관련 번역서들을 출판했을 뿐만 아니라, 박 대표 자신이 직접 <맹자>와 <논어>의 번역서를 냈고, <한자정해> <비봉 한자학습법>이란 책도 썼다. 그리고 2000년대에 들어와서는 신채호 선생의 <조선상고사> 및 <조선상고문화사>를 직접 번역하기도 했다. <조선상고사>를 번역한 계기가 무엇인지 물어보았다.
“<조선상고사>는 70년대 초반 제가 군(軍)복무 시절에 읽었는데 국한문(國漢文) 혼용체이지만 매우 어려웠습니다. 당시 저는 스스로 한문을 좀 안다고 자부했는데, 제가 읽기에도 어렵다면 일반인들 중에는 이 책을 읽어낼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000년 초 대학교재 출판 포기를 선언하면서 이 책을 가장 먼저 내야겠다고 생각하고 직접 번역 작업을 시작한 것입니다. <조선상고사>는 단순한 한문 실력으로 번역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고어체도 알아야 하며, 사서(史書)의 원문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지난 수십년 간 혼자서 한문공부를 계속해온 것이 결국 <조선상고사>를 번역하는 준비 작업이 된 셈입니다.”
박 대표는 “<조선상고사>를 번역하기 위해 국내의 번역본 자료를 다 찾아봤지만 제대로 된 것이 없었다”며 “역사 공부해서 책 쓰는 사람들이 많은데, 어째서 이 책 하나 제대로 번역해 놓지 않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는 말로 우리 학계의 풍토를 지적했다.
박기동 대표의 사무실은 작업실로도 사용된다. 그의 사무실에는 '한어(漢語)대사전', '갑골문자주해' 등 중국에서 직접 구입한 다양한 소설, 어학사전, 역사서, 논문 등의 원서가 소장되어 있다. 책꽂이 오른쪽 하단에는 그가 직접 번역한 신채호의 <조선상고사>가 보인다.
-<충무공 이순신 전서>도 편찬하셨는데요.
“당시 민족문화추진회의 회장으로 계시던 저의 은사이신 조순(趙淳) 선생께서 저에게 <이순신 전서>를 다시 번역해 보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저의 한문 실력을 믿고 그런 숙제를 내주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번역을 시작했는데, 정조 임금 때 편찬된 <충무공전서>만 가지고는 이순신이라는 인물을 온전히 이해하기에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이순신 관련 자료 전체와 <명실록(明實錄)>, 류성룡(柳成龍)의 <징비록(懲毖錄)>, 강항(姜沆)의 <간양록(看羊錄)>을 비롯한 각종 서찰, 장계 등 이순신 관련 자료를 한 데 모아 4권으로 새롭게 편찬했습니다. 이 작업도 2년 정도 걸렸는데, 현재 이순신 연구자들의 필독서로 자리를 잡은 것에 큰 보람과 자부심을 느낍니다.”
-이순신을 모함했다고 알려진 원균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제가 <충무공 이순신 전서>를 펴낸 후 가장 큰 보람으로 느낀 것이 바로 원균에 대한 거짓 미화를 막은 것입니다. 당시 일부 교수들에 의해 제기된 소위 ‘원균 용장론(勇將論)’은 <원균행장록>에 근거한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충무공 전서에서 <원균행장록>은 충무공을 모함하던 사람들이 날조한 것이라는 것을 자세하게 밝혔습니다. 충무공의 업적을 원균의 공적인 것처럼 훔쳐서 꾸며놓은 것이 바로 <원균행장록>입니다. 결국 그것을 근거로 충무공의 업적을 깎아내리려는 것은 바로 충무공에게 또 한 번 누명을 씌우는 못된 행위입니다. 제가 <충무공 이순신전서>를 펴낸 후 원균에 대한 재평가 이야기가 쑥 들어갔습니다.”
-영화 <명량>에서 배설(裵楔) 장군을 지나치게 비하했다며 배설의 후손들이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역사적인 관점에서 배설 장군을 깎아내릴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그분이 개인적으로 심약하다 보니까 원균이 패전하고 죽을 때 따라 죽지 않고 도망쳐 나왔습니다. 이는 한 장수로서 볼 때는 비겁하고 지탄받아 마땅한 행동이었지만, 당시 그의 비겁한 행위가 나중에 가서 나라를 지키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에, 개인적인 차원에서 단순하게 평가할 문제는 아닙니다.
당시 조선은 추가로 배 한 척 만들 형편이 되지 않았던 매우 위급한 상황이었고, 그 중요한 시점에 배설의 행위는 12척의 전선(戰船)을 온전하게 살려낸 결과가 된 것입니다. 장수가 가망 없는 전투에 부하와 물자를 몰아넣어 전멸시키는 것은 바보 같은 짓입니다. 이순신은 그 자체로 빛을 발하는 사람입니다. 그를 빛나게 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깎아내릴 필요가 전혀 없는 인물입니다.”
-지금까지 해 오신 일들을 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한문 실력이 뒷받침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하는데, 경제학도인 박 대표께서 한문공부는 언제 하셨는지요? 한문을 따로 공부하셨나요.
“대학시절 때 고문진보(古文眞寶), 논어(論語), 맹자(孟子), 대학(大學), 중용(中庸) 등 고전을 읽으면서 왜 이렇게 번역했는지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문맥이나 문장의 논리가 맞지 않는 번역들이 난무했습니다. 그래서 혼자 한문공부를 계속해 왔습니다. 중국 고전과 중국 문학의 대가(大家)들의 작품을 읽으면서 현대 중국어도 따로 공부했습니다.
저의 목표는 중국어로 대화하는 게 아니라 중국어로 된 책을 읽는 것이기 때문에 일반 어학 공부하고는 달리 문자학(文字學)과 한문 고문법(古文法)에 큰 비중을 두고 공부했습니다. 고전을 더욱 완벽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갑골문자와 금문(金文)도 혼자 공부했습니다. 한자와 문자의 기원에 대해서는 저도 웬만큼 깊이 파고들어간 사람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한자는 남의 글 아냐… 한자 써야 우리 말글이 풍성해져"
박기봉 대표는 <비봉 한자학습법>이라는 한자 학습서도 직접 펴냈을 정도로 어린이 한자 교육에 관심이 많다. 그는 초등학생들에게 쉽게 한자를 가르칠 수 있도록 제대로 된 교재를 만드는 것이 출판인으로서 자신이 해야 할 일 중의 하나라고 강조했다.
“저는 개인적으로 한글전용 정책이 끼치고 있는 해악은 조선말 나라를 팔아먹었다고 욕을 먹고 있는 이완용의 행위에 못지않다고 봅니다. 우리 국어에서 개념어 대부분은 한자어입니다. 이 많은 개념어는 겨우 2천 개 정도의 한자로 조합된 것들입니다. 결코 많은 숫자가 아닙니다. 영어단어 3천개를 외워서는 영어 신문을 읽을 수 없지만, 한자는 2천500자만 알면 중국 신문의 97% 이상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한자는 한 글자 한 글자가 단어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수없이 많은 조합으로 새로운 개념어를 만들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한자(漢字)도 우리글의 하나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우리 것 남의 것이 영원히 구분되는 게 아닙니다. 남의 것이라도 빌려와서 계속해서 사용하면 자기 것이 됩니다. 맹자도 말했습니다. ‘빌려와서 오랫동안 돌려주지 않으면 자기 것이 된다’고. 원래 문화와 문명은 남의 좋은 것을 빌려와서 자기 것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발달합니다. 2천년 이상을 우리가 써왔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 것입니다. 한자의 기원은 은(殷)나라인데, 당시 은나라의 중심인 은허 지방에는 우리 동이족(東夷族)과 중국 하족(夏族)이 섞여 살았고, 은나라 자체도 한족과 동이족의 연합정권의 성격이 있습니다. 따라서 한자가 만들어지고 발달하는데 우리 동이족의 역할이 없었다고는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중국에서는 간체자(簡體字)를 쓰기 때문에 우리가 정체(正體), 곧 번체자(繁體字)를 배우는 것은 시간 낭비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얼토당토않은 무식한 말입니다. 정체, 즉 번체자를 알고 나면 간체자를 배우는 건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라 할 수 있습니다. 저는 2~3시간의 강의로 번체자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간체자 대부분을 알 수 있도록 해줄 자신이 있습니다. 저는 오래전부터 한글을 창제하신 세종대왕을 우리 민족 최고의 성군(聖君)이라고 이야기해 왔고, 25년 전부터 ‘한글’을 국보(國寶) 1호로 바꾸어 지정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입니다.
한글이 없는 우리나라의 문화든 문명이든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한글은 우리 민족의 자긍심의 원천입니다. 그만큼 한글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깊은 애정과 자부심이 강한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한국어와 한글 사랑이 곧 한자 배척으로 연결되어서는 결코 안 됩니다. 한자를 배척하는 것은 결국 우리 국어를 죽이는 길이 되고 만다는 것을 위정자들과 국민 모두 하루빨리 깨달아야 합니다.”
박 대표는 “소리글인 우리 한글과 뜻글자인 한자를 병행해서 쓰면 우리말의 장점을 최대한으로 살릴 수 있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소리글은 시간이 지나면서 그 뜻이 변하거나 불분명해진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한글로 쓰여진 100년 전의 책을 읽기 어려운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나 한자는 시간이 지나면서 발음은 달라질 수 있어도 뜻은 변하지 않습니다. 2천 년 전에 쓰여진 한문책을 지금 읽어도 그 뜻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한자의 성격이 이러므로, 한자어는 우리말에서 소리글이 가진 단점을 보완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또한 우리말은 말과 말을 연결하는 연결고리와 조사가 아주 발달했습니다. 시각, 미각, 청각, 촉각 등 느낌을 전하거나 감각적인 표현도 풍부합니다. 이에 반해 중국어는 연결조사가 별로 발달하지 않았지만, 복잡한 사유와 철학을 표현할 수 있는 개념어가 풍부합니다. 이는 한자의 조합능력이 무궁무진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한자와 우리의 말과 글이 합쳐지면 굉장히 풍부한 언어생활이 가능해지고, 우리 말글의 위대함도 더욱 살아납니다.”
음수사원(飮水思源), 물을 마실 때는 그 물의 근원을 생각하라
-<삼국연의> 번역 작업에 관해서 시작한 얘기가 우리말의 국한문 혼용 문제까지 언급하게 되었습니다. 최근에 비봉출판사에서는 이승만(李承晩) 전 대통령의 업적을 소개하는 책이나,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확립하려는 우파적 시각의 책도 많이 출판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실은 저도 젊었을 때에는 좌파적인 역사 인식에 물들어 있었던 사람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제가 반(反)대한민국 사상으로 흐르거나 친북적인 사상을 가져본 적은 없습니다. 서울대 상대(商大) 경제학과에 재학 중 서클(동아리) 활동에서 마르크스 경제학을 많이 공부했는데,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반정부 쪽으로 많이 기울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특히 제가 대학교에 다닐 무렵인 1960년대 후반에는, 대한민국의 경제학자들 중에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추진하는 경제정책의 방향에 대해 동의하거나 그가 내세운 목표 달성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결국 박정희 대통령은 자신의 독재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국민들을 속이고, 되지도 않을 목표치를 가지고 국민들을 옥죄고 닦달하고 있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럼 언제부터 박정희 대통령을 이해하기 시작한 것인지요.
“60년대 당시 우리나라는 농업국가인 후진국에 속했기 때문에 경제개발 정책은 농업을 바탕으로 하여 노동집약적인 수공업과 경공업, 수입대체형 산업의 육성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 대부분 경제학자들의 주장이었습니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농업 위주가 아닌 공업화, 그것도 수출주도형 공업화를 추진함으로써 대부분 경제학자들의 주장과는 반대되는 정책을 펼쳤습니다.
저 역시 자본도 기술도 없고 있는 것이라고는 노동력밖에 없는 우리나라가 박정희 대통령의 방식대로 가다가는 나라는 외채의 빚더미 위에 올라앉게 되고, 그렇게 되면 결국 대한민국의 경제는 외국자본에 종속되고, 반민족적 매판자본(買辦資本)만이 살아남을 것이라는 위기감을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자연히 반정부적 생각을 지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버린 적이 없습니다.”
박 대표는 “결국에는 내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았다”며 “당시에는 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인간’이라는 요소, ‘경제 하려는 의지’의 중요성, ‘하면 된다’는 국민들의 정신자세, 이 모든 것을 묶어낼 지도자의 중요성 등을 간과했다”고 말했다.
“1970년대 초 박 대통령은 연두연설에서 ‘1980년대가 되면 수출 100억 달러를 달성하고, 집집마다 자동차, 전화기를 가지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당시 그게 얼마나 허황한 소리로 들렸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나라는 이 양반(박정희)이 제시한 경제발전 목표보다 전부 수년을 앞당겨서 달성했습니다. 결국 저나 당시 경제학자들은 지도자의 리더십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지도자 한 사람으로 인해 나라가 흥할 수도 있고 망할 수도 있다는 이 역사적 진리를 고려하지 않고, 아니 전혀 모르고, 그냥 당시 책에 있는 경제학의 이론으로만 세상을 보았던 것이죠.”
박 대표는 “1987년 6ㆍ29선언 이후 우리나라는 이제 제도적인 면에서는 민주주의가 충분히 달성되었다고 보고, 이후에는 경실련(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활동 등 사회운동에 관심을 가졌다”고 말했다.
“이 무렵만 해도 저는 요즘 문제가 되는 종북(從北) 세력에 대해 그렇게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진보세력이라고 생각하며, 역사 발전에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2010년 천안함 폭침 사건이 발생했을 때 소위 사회적으로 저명한 위치에 있는 저의 오랜 지인들까지 북한의 김정일을 두둔하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았습니다.
누가 봐도 북한의 소행이 명백한 사건에 대해 북한을 두둔하고 나올 뿐만 아니라 음모론을 제기하거나 오히려 우리 대한민국 정부를 공격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비로소 이 사람들이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대학 때 가졌던 허황한 꿈을 포기하지 않고 있으며, 종국에는 대한민국을 북한의 김정일 세력에게 갖다 바치려는 미망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된 것입니다.”
박 대표는 자신이 사회문제에 무관심하게 지낸 사이 우리나라가 근본부터 좌편향으로 바뀌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자신도 그 책임감을 통감했다며, 이후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종북의 실체를 알리기 위해 관련 분야의 책을 출판하게 됐다고 말했다.
“제가 얼마 전 일간지에 <이승만의 대미투쟁>이란 책 광고를 내면서 ‘음수사원(飮水思源)’이라는 문구를 넣었습니다. ‘물을 마실 때는 그 물의 근원을 생각하라’는 의미입니다. 제가 우리 역사에서 가장 높게 평가하는 지도자가 바로 세종대왕과 이순신, 이승만과 박정희 이렇게 네 분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일본인이 아닌 한국인으로 존재할 수 있게 된 근본 이유와, 우리가 누리는 모든 과학문화 생활의 기초,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 그리고 세계 최빈국에서 불과 한 세대만에 세계와 어깨를 나란히 하여 경쟁할 수 있을 정도가 된 경제발전의 토대는 전부 이 네 분의 공적 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박 대표는 “우리가 정치 지도자이건 다른 분야의 지도자이건 지도자를 평가할 때 가장 중요시해야 할 평가항목은 그가 어떤 비전을 제시하였는가 하는 것”이라며 “그가 제시한 비전이 올바르면 비록 그것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다소의 잘못을 범하더라도, 그리고 그의 능력이 다소 부족했다 하더라도, 어쨌든 그 국가나 조직은 올바른 방향을 향해 어느 정도 나아갈 수 있다”고 말했다.
“지도자의 개인적 유능함과 무능함은 목표치를 향해 10걸음을 나아가느냐, 5걸음을 나아가느냐 하는 차이만 가져올 뿐, 사회든 조직이든 퇴보시키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제시한 비전 자체가 잘못되었을 때에는 그가 개인적으로 수완과 능력이 뛰어날수록 사회든 조직이든 더 빨리, 더 멀리 목표로부터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컨대, 김일성이 개인적으로는 아무리 유능하고 수완이 좋은 자라고 하더라도 그가 제시한 비전 자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지금의 북한처럼 퇴보하고, 이상적인 상태로부터 더 멀리 떨어지게 되었음을 보더라도 이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박기봉 대표가 비봉출판사에서 펴낸 <이승만의 대미투쟁>이란 책의 광고가 실린 신문을 바라보고 있다. 박 대표는 이 광고에 ‘음수사원(飮水思源)’ 즉, ‘물을 마실 때는 그 물의 근원을 생각하라’는 문구를 넣었다. 그는 "한국인이라면 세종대왕-이순신-이승만-박정희 네 명의 공로를 잊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이승만의 애국심과 위대함 알려야"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서는 학교 수업에서부터 너무나 많은 오해와 왜곡이 진행되는 듯합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오랜 망명생활 후 돌아와서 나라를 세울 때는 일흔이 넘은 나이였습니다. 이분의 한평생 삶은 그야말로 ‘나라사랑’ 하나로 똘똘 뭉쳐 있었습니다. 종북좌파들은 이런 분에게 친일파(親日派)의 누명을 씌우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데, 그들의 입장에서는 아쉬운 부분이겠지만, 이분의 삶에서 친일을 할 기회는 한 번도 없었습니다. 이승만은 조선에서 가장 먼저 깨우치고, 미국에서 고도의 지적인 훈련을 받았으며, 귀국하기 전에 이미 한 나라를 다스리는 데 필요한 모든 철학과 세계정세를 살펴보는 혜안과 경륜을 갖추었던 분입니다.
그런 분이기에 그 혼란한 시기에 지도자가 되어 대한민국을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시장경제 체제라는 인류 역사상 가장 훌륭한 체제 위에 세워놓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해방 직후 우리나라 지도자들 중에 <자유민주주의>라는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거나 신념화한 사람이 몇이나 있었으며, <시장경제 체제>의 우월성을 확신한 지도자가 이승만 말고 그 누가 있었습니까.”
-좌파들은 왜 이승만 대통령을 친일로 모는 걸까요.
“이승만 때문에 남한이 공산화되지 않았고, 이승만 때문에 대한민국이 탄생했기 때문입니다. 저들이 이승만 대통령을 철천지원수처럼 여기는 데에는 바로 이런 북한 김일성의 관점, 즉 우리나라를 인민공화국으로 통일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이승만 대통령 때문에 놓쳐버렸다는 원망이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해방 직후에 ‘친일파’ 인사들을 크게 중용했던 사람은 이승만이 아니라 김일성이었습니다.
북의 김일성은 대놓고 초대 내각을 친일파들로 구성했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협조하는 사람이면 악질 친일파도 마다하지 않고 끌어들였습니다. 북한의 김일성은 1960년대에 남한 적화공작 전술의 하나로 ‘민족’과 ‘자주’를 내세우면서 자기들 편에 서지 않은 사람들은 무조건 친일파로 몰아붙이고 반미를 부르짖도록 했던 것인데, 남한의 종북좌파들이 김일성의 이 전술을 그대로 추종하면서 이승만과 건국세력을 전부 친일파로 몰아붙였던 것입니다.”
박 대표는 “이승만이 귀국했을 당시 우리나라의 문맹률은 90퍼센트가 넘었고, 중학교 졸업 이상의 학력자는 전부 2만5천명도 되지 않았으며, 공산주의 운동을 하던 자들이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며 “아마 공자가 나타났다고 해도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그런 상황에서 나라 잃은 백성들이 일본인들 밑에서 일한 경력이 있다고 하여 전부 친일파로 몰아붙여 추방한다면 누구와 더불어, 어떻게 나라를 건국하고 운영할 수 있었겠습니까. 추적해 보지는 않았지만, 이승만과 박정희 대통령을 친일파로 매도하는 인사들의 부모들 역시 거의 전부 친일행적이 있을 것입니다.”
박 대표는 “이승만 대통령은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 오직 나라와 국민을 살리기 위한 선택을 했다”며 “그는 나라 없는 백성으로 살아온 사람의 고통을 이해하고, 친일 행위 중에 용서할 수 있는 범위와 용서할 수 없는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를 국가 차원의 큰 틀에서 보고 국가를 경영했다”고 덧붙였다.
마지막 꿈, "대학생들에게 고전을 전자북으로 보급하는 장학 사업 펼치고 싶다"
박기봉 대표는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첫째는 <삼국연의> 번역작업은 이미 마쳤으므로, 올해 내로 진수(陳壽)가 쓰고 배송지(裴松之)가 주를 단 <정사 삼국지(正史 三國志)>의 번역작업을 완료하려고 합니다. 같은 역자에 의해 이처럼 <삼국연의>와 <삼국지>가 각각 번역되어 나란히 서점에 꽂히게 될 때 비로소 우리나라 독자들은 <삼국연의>와 <삼국지>가 전혀 다른 책임을 알게 될 것이고, 따라서 <삼국연의>를 <삼국지>라고 부르는 일이 없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금년 내로 어린이들과 초·중·고·대학생들이 함께 쉽게 배울 수 있는 한자교재를 쓰려고 합니다. 1998년 초에 <비봉한자 학습법>이란 책을 쓸 때에는 총 8권으로 2천자(字)를 배우도록 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우선 1, 2권을 먼저 출간했었는데, 책을 내놓고 난 후 한자 학습 순서 또는 한자 분류상의 문제점이 발견되어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그 문제를 가지고 오랜 고민 끝에 마침내 그 문제점을 해결할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그래서 금년 봄부터 새로운 한자 학습서를 쓸 계획입니다.
셋째는, 이는 장기 계획입니다만, 동양고전 중에서 <사서삼경> 7권을 더 이상 번역이나 주해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제가 직접 완벽한 번역과 주석 작업을 해내고 싶습니다. 이 작업은 제가 평생 공부해 온 것의 마지막 결산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책을 통한 장학 사업을 하고 싶습니다. 세계의 고전 수백 종을 번역해서 대학생들에게 2천~3천원 대의 전자책으로 보급하는 것입니다. 현재 책 한 권의 값을 평균 1만5천원으로 계산한다면, 책 한 권당 1만원의 비용절감 효과를 가져 오므로, 10만 명의 학생이 1년에 10권을 읽는 경우, 매년 학생들에게 100억 원 정도의 장학금을 지급하는 것과 동일한 효과가 발생합니다. 물론 선정된 세계의 고전들은 전부 새로 번역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완성되면 아마 우리나라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있는 재단 중에서는 가장 큰 규모의 장학금을 주는 재단이 되는 셈입니다. 이 사업 추진에 소요되는 수십억 원의 비용은 현재 큰 기업을 경영하고 있는 친구가 도와주기로 이미 약속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선 <삼국연의> 판매로 경제적 여유가 생기면 그것으로 전자책을 취급하는 ‘e북 플랫폼’부터 구축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출판인으로서 저의 마지막 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