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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설
우리말과 우리얼의 연금술로서의 시
-김종선의 제3시집『촛불보람』에 붙임
이동희(시인․문학박사)
* 들어가는 말씀
시인은 말의 연금술사다. 시인은 새로운 말을 만들어내고, 그 말이 생명력을 지니고 살아 숨 쉬게 하는 말의 신이다. 시인은 이미 있는 말을 빌려서 새로운 세계를 펼쳐 보이지만, 이미 죽은 말에도 미감의 입김 불어넣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어찌 죽은 말 뿐이랴. 아직 솜털도 나지 않은 생각의 씨앗에까지도 시인은 이름을 붙이고 새로운 말의 자리를 매김 한다. 그래서 시인은 말에 날개를 달아서 하늘로 치솟게도 하고, 죽은 말에 입김을 불어넣어 새 생명을 잇게도 하는 신통력을 지녔다.
시인은 어법 안에서 시를 꿈꾸지만, 시인의 꿈은 언제나 문법의 울타리 밖을 향한다. 일면 어법의 울타리를 세우면서 다른 일면으로는 스스로 만든 문법의 울타리를 허무는 시인! 그래서 시인은 말의 길을 내면서 스스로 낸 길을 부정하는 모순을 아무렇지도 않게 되풀이하는 말의 이단아다. 시인은 말에 관한한 반역을 허용 받은 모국어의 병사다. 시인은 자신의 모국어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영혼까지도 내어놓은 시의 파수병을 자처한다.
시인이 부리는 병사는 말의 집합체요 정신의 결정체인 시(詩) 작품뿐이다. 자신의 모국어를 자신의 분신처럼 여기며 존중하고 사랑하는 시인만이 자신의 시를 부정하고 자신보다 더 큰 나라와 겨레의 얼을 존중할 줄 안다. 그런 시인에게서만 자신의 시를 부정하고 더 큰 겨레의 참됨을 드러낼 수 있다. 스스로를 부정하며 새로운 미와 의미를 찾는 시인, 자신의 작품을 끊임없이 새롭게 하는 시인에게서만 더 큰 나라정신의 참됨과 겨레마음의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다.
어느 시인은 이와 같은 시정신의 모순을 이렇게 지적했다.
“시는 앎이고 구원이며 힘이고 포기이다. 시는 이 세계를 드러내면서 다른 세계를 창조한다. 시는 선택받은 자들의 빵이자 저주받은 양식이다. 시는 격리시키면서 결합시킨다. 시는 여행에의 초대이자 귀향이다. 시는 들숨과 날숨이며 근육운동이다.”(옥타비오 파스)
모순의 상승적 통합이랄까, 역설의 포괄적 수용이랄까? 시 정신은 모순이나 불합리마저도 시정신의 용광로에 넣어 고양시키며, 예술 미학의 범주에서 승화시키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 중심에 언어-모국어가 있다. 모국어의 은혜를 외면하고서는 누구도 시인일 수 없으며, 예술의 언저리에서 생존할 수 없다.
용감한 병사는 자신의 몸을 바쳐 나라를 지키고 겨레를 살리지만, 훌륭한 시인은 자신의 얼을 바쳐 나라의 혼을 살리고 겨레의 넋을 지켜낸다. 용감한 병사의 무공은 죽어서 차가운 빗돌로 서겠지만, 훌륭한 시인은 죽어서 모국의 말밭을 기름지게 하는 밑거름이 된다. 그래서 한 사람의 훌륭한 시인을 한 나라와도 바꾸지 않겠다고 말하는 나라와 겨레는 풍요롭다.
나라의 위상, 겨레의 됨됨이는 힘의 세기로 결정된다. 경제적 부의 힘, 군사의 힘, 영토의 힘, 자원의 힘, 인구의 힘은 부강한 나라가 될 수 있는 여건이다. 그러나 이런 힘만이 전부는 아니다. 참으로 힘이 세면서도 품격 있는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또 다른 힘이 필요하다. 문화의 힘, 예술의 힘, 인문학의 힘, 역사의 힘, 그리고 사람의 힘이 풍성한 나라와 겨레가 진정 높은 위상과 품격 있는 겨레의 자격을 지닐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강대국만이 최선은 아니다. 모든 것이 크고 풍부한 외적 힘만으로 작은 나라와 겨레를 얕잡아보는 나라는 선진-강국이 되기에는 좀 부족하다. 강소국이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 모든 면에서 작고 부족하면서도 함부로 넘볼 수 없는 품격을 지닌 나라와 겨레는 강대국이 함부로 얕잡아 볼 수 없다. 그런 힘의 바탕을 제대로 갖춘 나라와 겨레는 강소국의 자격이 있다. 겉으로 보기에 작고 약하지만, 속으로 무한한 문화 창조의 힘을 지닌 강소국은 스스로를 존중하고, 마침내 다른 나라와 겨레의 존중을 받을 수 있다.
그런 강소국이 되기 위한 가장 우선하는 바탕이 바로 문화-예술 등 인문학의 힘이다. 인문학의 힘은 가시적인 경계를 넘어선 어떤 정신적인 바탕까지도 포함하는 개념이다. 그럼에도 어떤 가시적인 인문학의 힘, 한 나라와 겨레가 지니고 있을 법한 나라 힘과 겨레의 역량을 보이라면 우리는 서슴지 않고 제 나라 말과 글자의 유무와 함께 말밭[국어사전]의 두께와 질량을 측정 자료로 삼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제 나라 말과 글자는 바로 문화와 예술, 역사와 철학을 올곧게 하는 도구이자 바탕이며, 정신이자 실체이기 때문이다. 이 엄연한 사실을 아예 모르는 겨레도 많으며, 설사 안다 할지라도 강대국의 위세에 길들여져 제 나라 말과 글자의 존재성을 애써 외면하는 겨레 또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이 현실이다. 설사 외면하지 않더라도 힘써 살려 쓰고 존중하려는 노력을 포기한 겨레 또한 대부분이다. 말과 글을 존재의 근원으로 여기는 시인 작가에게서 이런 현상을 목격하는 일은 실망을 넘어 울분을 느끼게 한다.
제 나라 겨레의 생각과 느낌을 막힘없고 거침없이 부려 쓸 수 있는 훌륭한 글자를 지닌 나라, 그 문자로 이루어진 풍부한 말밭을 지닌 나라는 강소국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다행스럽게도 우리 겨레는 그런 행운을 지닌 민족이다.
세종께서 창제하신 한글[훈민정음]은 온 누리에서 가장 합리적이며, 과학적이요, 실용성이 탁월한 문자라는 사실은 이미 자타가 인정하고 있다. 한글은 창제자와 창제의 의도와 그 창제의 원리 및 방법과 그 실용성이 낱낱이 밝혀져 있는 전 세계에서 거의 유일한 문자다. 그 한글을 실제 생활에서 실용적으로 유효하게 사용하는 문자로서는 온 누리에 유일하다. 대부분의 문자들이 근원이 확실치 않은 문자를 나라마다 약간씩 변용-변형시켜가면서 쓰고 있는 다른 나라의 실정을 감안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아무리 우둔한 사람일지라도 한 나절이면 그 운용의 뼈대를 터득할 수 있을 정도로 쉽게 익혀 쓸 수 있는 한글-우리말을 우리는 그 동안 얼마나 천대하고 박대했던가? 큰 나라의 위세에 짓눌려 정신까지도 사대주의(事大主義)적 잔재에 묻어두고 살아오지 않았던가.
이처럼 한글의 훌륭한 점은 우리보다는 오히려 언어의 전문가들이라 할 수 있는 외국의 언어학자들로부터 꾸중처럼 지적받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의 저명한 언어학자가 외국의 언어학회에 참석해서 한자로 쓰인 명함을 건넸다고 한다. 그 외국의 언어학자가 한국의 언어학자로부터 한자 명함을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이렇게 질책성 질문을 했다고 한다.
“당신 나라에는 가장 완벽한 언어 체계를 갖춘 ‘한글’이라는 훌륭한 문자가 있는데 왜 한자를 쓰느냐?”
이 국내의 언어학자는 어찌나 부끄럽고 황당하던지 몸 둘 바를 몰랐다고 한다. 그리고 그 뒤로부터는 한글로 쓴 명함을 만들어 쓰고 있으며, 우리말을 지키고 다듬어 사랑하는 학자로 활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언어학의 전문가라는 사람이 이런 정도이니 다른 보통 사람은 어떠하겠는가?
언어는 생명체다. 언어는 다른 유기체처럼 ‘생성-성장-쇠퇴-사멸’하는 과정을 밟는다. 사람들의 생활 속에서 태어난 말은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받아서 세력을 불려가면서 자라난다. 사람살이의 도구로 쓰이는 동안에는 막강한 세력으로 위세를 떨치지만 소통의 뒤안길로 밀려나게 될 때, 말은 힘을 잃고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게 된다. 언중(言衆)이 외면하는 이유가 자연스러운 언어현상으로 비롯하는 것이라면 어쩔 수 없는 것이겠으나, 역사의 부침 속에서 강제적으로 외면당하고 소통의 도구가 되지 못할 때 생성된 말은 급격하게 망각의 장막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강대한 나라의 문화와 함께 유입된 외래 언어-문자가 토박이말을 쇠퇴시키는 가장 큰 이유가 된다.
이렇게 쇠퇴한 말은 시간의 부침과 함께 언중에게서 잊혀 마침내 ‘죽은 말[死語]’이 된다. 죽은 말이 다행스럽게도 고어(古語)라는 흔적이 남아 있어 나라말을 사랑하는 언중의 입김을 쐬게 되면 말의 생명을 되살릴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잊힌 말들은 사어가 되어 소멸의 비운을 맞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말과 글자의 비운을 차단하고 문화의 역량을 풍요롭게 하여 품격 있는 나라와 고상한 겨레가 되기 위한 제 일의 임무를 가진 사람을 꼽으라면 우리는 서슴지 않고 시인-작가를 든다. 시인-작가는 나라말을 살리고 겨레의 얼을 갈무리하여 문화 예술의 역량을 스스로 충전시키는 것을 본질로 하기 때문이다.
시인이야말로 한 나라 문화의 총량을 보여주는 실재적 바로미터이며, 한 겨레 얼의 다채로움을 증명하는 살아 있는 화석이기 때문이다. 시인이 기울이는 제 나라 말과 문자에 대한 사랑은 그것이 어떤 형식, 어떤 작품으로 형상화 되었건 그것은 바로 겨레다움의 발로이며, 겨레말의 증명일 뿐이다.
겨레말의 수호와 그 사랑에 관한 한 우리에게는 다행스럽게도 김종선 시인이 있다. 김종선이 시문학을 통해서 우리말을 얼마나 사랑하고 가꾸려 애쓰는가는 시집『촛불보람』에 실린 작품들을 일별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김종선은 새로운 우리말의 생성에 심혈을 기울이면서 어미말-모국어의 지킴이로서 소명의식에 투철한 시인이다. 겨레말의 새로운 창조자로서의 소임을 시인 말고 누구에게 맡길 수 있단 말인가? 누더기처럼 오염되고 만신창이로 더렵혀지는 겨레말의 참상을 누가 보듬어 안아서 다듬고 지켜내야 하는가? 시인 말고 누구에게 이런 거룩한 소임을 맡기고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김종선의 시는 그런 물음에 대하여 스스로 시문학 작품으로 응답하고 있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묻힌 겨레말을 발굴해 내고, 말의 최고 위상인 노랫말로 다듬어내려는 노력이 눈물겹다. 고어는 고어대로 살려서 시어로 삼아서 입김을 불어넣고, 죽은 말은 죽은 말대로 찾아서 새로운 의미의 의상을 입혀준다. 그래서 되살린 시어들이 가질 수 있는 최상의 격조를 지닌 노랫말로 다듬고 가꾸어낸다.
겨레말을 사랑하는 절절한 마음얼과 그 뜨거운 열정을 대하노라면 김종선이 참으로 우리말을 대하는 정성과 사랑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참으로 우리 시대에 보기 드문 우리말 지킴이요 언어의 연금술사라 아니 할 수 없다.
김종선의 시를 읽다보면, 본디 우리말이었으나 그 우리말을 대신하여 행세하던 들온말 때문에 우리말로 쓰인 시어가 낯설게[생경하게] 느껴지는 이 황당함! 우리말의 새로운 합침과 나눔과 더함과 줄임으로 말의 경계를 확장하고, 그 의미의 영역을 증폭시키며, 아름다움의 경지를 심도 있게 하는 ‘우리말 시’가 오히려 어렵고 까다로운 것처럼 느껴지는 이 모순된 현상 앞에서 필자는 한없이 부끄러울 따름이다.
김종선의 시를 대하다 보면, 제 어미 아비, 제 형제자매, 제 일가붙이를 알아보지 못하는 망나니 패륜아처럼, 우리말에 관한 한 우리는 망나니요 패륜아가 아니었는가, 새삼스럽게 자문한다. 한없이 부끄러운 마음으로 나의 언어생활을 되돌아보게 하는 김종선의 시는 우리 시대의 인문학자들이 지녔던 어미말-모국어에 대한 방관적 태도와 의식에 대하여 통절하게 참회해야 할 자료가 되기에 충분하다.
그런 김종선의 노력을 크게 네 가지로 나누어서 살펴봤다. 하나는 언어의 연금술사로서 새로운 말을 생산하여 겨레말을 과감하게 부려 쓴 시, 둘째는 어미말-모국어를 시어로 살려 씀으로써 겨레말을 지켜내려는 시, 셋째는 말은 곧 얼이라는 자각 하에 겨레말을 통해 겨레의 얼을 가꾸어가는 시,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러한 우리말을 되살리고, 겨레의 얼을 지켜냄으로써 비로소 노랫말로 승화될 수 있는 시에 대하여 고찰해 보고자 한다.
우리말-겨레말을 시어로 살려 쓰려는 일관되고 치열한 노력들이 지향하는 바는 필경 우리 겨레살이의 즐거움과 보람에 있음은 두 말할 것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시야말로 그런 김종선의 시문학적 의도와 우리말 사랑의 의지가 슬기롭게 통합되는 결정체임을 확인하는 것은 이 시집을 읽는 참 보람이 되리라 확신한다.
1. 새 말 생산자로서의 시인
우리말을 살려 쓰려는 김종선의 노력은 뜨겁고 끈질기다. 어느 작품을 보아도 각주가 없으면 이해할 수 없으며, 해설이 없으면 의미 전달이 쉽지 않다. 이는 시로서는 결격 사유가 될 만하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것은 김 시인의 잘못이 아니라, 순전히 독자인 우리의 잘못이다. 고유한 제 나라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청맹과니, 순수한 제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우리의 게으름이요, 무지요, 안일함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김종선이 시를 우리말 살림의 도구로 삼고, 시를 겨레말 생성의 마당으로 삼은 일은 매우 슬기로운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시인이 아니고서 누가 우리말의 저수지를 풍성하게 할 것인가? 이 시집의 어느 작품을 보아도 순수한 우리말임에도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만큼 우리는 그 동안 우리말을 천대하고 외면해 왔음을 반증하는 꼴이 아닌가?
시의 세계는 완전히 창조된 세계다. 시가 개성을 생명으로 하고, 독창성을 양식으로 삼는 것은 시가 완전히 시인에 의해서 창조된 서정의 세계이기 때문에 당연히 지녀야 할 조건이다. 그래서 시를 우선 의미 맥락에서 이해하기에 곤란을 겪는 것도 시인의 개성과 독자의 의미역을 조율하는 과정을 겪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다가 감성의 수위까지 참작할 수 있어야 비로소 한 시인이 온전히 개성적으로 드러낸 서정미의 세계를 엿볼 수 있다.
김종선의 시에서는 의미 맥락을 따라잡기 위한 시어의 의미를 해석하는 일과 감성 채널을 맞추는 일 말고, 생경한 시어의 의미부터 파악해야 하는 과정을 한 번 더 치러야 비로소 그의 시의 세계에, 작품이 지닌 심미안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이지만, 이는 순전히 독자인 나의 탓이다.
장마철 허리에 누리공 짊어진 달팽이 하나가
때알이 여덟때 가옷 가리키는 곳품을 떠나
일갈 길 바쁜 찻길 느릿느릿 지나가고 있었다
나른한 듯한 맘 죽음의 구렁에 빠지려는 찰라
배움터 가는 어린양의 착한 눈에 띄어 목숨보람
들림 받아 모래주머닐 담아 둔 고무동이에 올려져
맘얼 고무공처럼 웅크리고 죽은 듯이 숨죽이다가
사위 고요해지자 눈을 떠 더듬이 둘 가로 뻗치고
발자국 찍으며 숨어간 즈믄길 벼랑의 때곳품
제 죽음의 길 아닌 꿈길 더듬어간 빈 우렁잇속
흙속에서 뽑아 올린 푸른 물기 채우려 배추밭에 촛불
켜고 속강꺼정 빼앗아 여름 그르치는 못된 벌레도둑
배움이 착한 눈땜에 이참 어쩔 수 없이 목줄 놓았으나
때품의 배곯은 헛검꺼정 몰아와 배추밭 어지럽히면
어둔 배추밭 촛불 켜고 못난 네 짓 밝혀 죄짐 물으리.
-「촛불 켠 달팽이」전문
이 작품에 쓰인 시어들을 살펴본다.
‘곳품=공간, 목숨보람=SOS, 맘얼=본능, 때곳품=시공’ 등 시인 스스로 각주를 달고 있는 시어 말고도 우리는 이 시를 서정의 등가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좀 더 시어를 정밀하게 탐색해야 한다.
‘때알이, 여덟때, 가옷, 일갈, 즈믄길, 속강꺼정, 벌레도둑, 때품, 헛검꺼정, 죄짐’ 등의 시어를 이해하는 데도 상당한 언어감각이 필요하다.
김종선이 우리말을 살려서 시어로 부려 쓰려는 노력의 일단이 여기에 보인다. 새로운 말을 만드는 일이 수선이고, 한자말, 들어온 말(외래어), 국적없는 말은 일체 쓰지 않으려는 시도로부터 출발한다.
그러자니 자연스럽게 순수 우리말들을 새롭게 합성하거나, 자유스럽게 파생어를 확장하여 쓰려는 시도를 줄기차게 해 오고 있다. 이런 노력들이 시문학적으로 어떤 의미와 가치가 있느냐를 가리기 이전에 이런 노력들이 결국 그의 시들에서 순전한 우리말만으로 짜여진 한 편의 시를 만날 수 있는 것도 큰 보람이 아닐 수 없다.
낯선 우리말의 난관을 뚫고 이 시가 담고 있는 의미맥락을 얼추 뜻매김해 보면 이렇다.
“장마철에 제 갈길 모르고 길에 나선 달팽이를 등교하던 마음씨 착한 어린이가 이를 보고 구해주었으나, 끝내 배추밭을 망가뜨릴 것 같으면 용서하지 않고 촛불을 밝혀서라도 네 죄를 물을 것이다.”
이런 의미의 추적이 갖는 의미역은 꽤 넓다. 우선은 자연 생태계의 현상을 인간적 차원의 눈길로 끌어당겨서 생명을 보는 화자의 마음씨를 엿보게 한다. 그런 다음 배추밭이라는 생존의 일터를 등장시켜서 자연의 생명일망정 인간의 삶을 훼손하는 것에 대한 응징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는 정치적이고 사회 환경적인 차원까지 끌어올려서 엄정한 비판의 은유를 담아낸다는 점에서 이 시는 또 다른 의미의 폭을 확장한다.
순수한 우리말의 울림이 자연 생태계의 생명 존중 사상으로까지 확대되고, 이것이 사람의 삶에 미치는 의미를 새겨보다가, 마침내 사람다운 삶의 의미에 대한 경지까지 확장한다. 그러니까 달팽이가 전반부에서는 자연의 순수성을 상징하다가, 후반부에 와서는 인간 삶의 순수성을 훼손하는 존재로 변이된다.
이는 배추밭을 삶의 순수성이 유지되어야 활 삶의 공간으로 보다면, 달팽이는 그 순순한 삶의 공간을 훼손하는 적대적인 존재로 변형되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그렇다면 후반부에서 달팽이의 존재는 무엇을 은유하고 있을까?
그것에 대한 원관념을 밝히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바로 ‘촛불’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촛불을 왜 밝혀야 했던가? 배추밭인 사람다운 삶을 훼손당하지 않기 위한 민초들의 자발적 함성이 빛으로 모였던 것이 아닌가? 존엄해야 할 사람다움 삶을 손상케 하는 권력도 어찌 보면 하찮은 미물 달팽이가 애써 가꾼 배추밭을 갉아먹는 일과 하등 다르지 않은 것이다.
어려운 전문용어를 하나도 등장시키지 않고서도 「촛불 켠 달팽이」에서는 자연과 인간과 사회라는 삼각관계가 어떻게 해아 바로 설 수 있는가를-정립(鼎立)의 방정식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을 논의의 예로 삼았을 따름이지, 여타 다른 작품에서도 이런 시적 의도와 창작정신, 그리고 우리말을 갈고 다듬어 내려는 노력은 조금도 다르지 않다. 모든 작품을 다 열거하면서, 우리말을 어떻게 시어로 빛을 낼 수 있는지, 시어가 어떻게 생활어가 될 수 있는지, 일일이 예거하여 보여줄 수 없는 지면의 한계가 안타까울 따름이다.
2. 어미말[母國語] 지킴이로서의 시
근래 우리나라에는 영어 광풍이 몰아치고 있다. 그렇다. 광풍! 이라고 하지 않고서는 설명할 길이 없는 이상 현상이요, 병적 증상이다. 아무리 영어가 국제적인 공용어로서 위력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상급학교 진학과 취직 시험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할지라도, 그리고 세계표준[global standard]에 따라가기 위해 적합한 맞춤 교육이라고 할지라도, 근래 우리나라에 불고 있는 영어 광풍은 도가 좀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아직 우리말-모국어도 제대로 익히지 못한 유아들에게까지 영어를 가르치느라 사교육비가 천정부지로 치솟아도 학부모들은 내 아이를 위한다며 영여 교육에 올인 하려 한다. 내 아이를 위하는 일이 진정으로 무엇인지? 한번쯤 생각해 볼 것을 권하기라도 할라치면 시대에 뒤떨어지고, 자녀 교육에 등한한 부모로 낙인찍히기 십상이다.
모국어는 그냥 언어가 아니다. 모국어는 산소 같은 존재요, 그 공기로 호흡함으로써 비로소 생명이 유지되는 혈액 같은 성질이다. 우리는 생각을 먼저 하고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말-언어를 미리 떠올리고 자신의 생각을 그 말에 맞추어 낸다. 말-언어가 없으면 생각도 없다. ‘아는 것이 많다’는 표현이나, 소위 말하는 ‘지능[IQ]’는 바로 언어 능력을 가리키는 수치일 뿐이다.
그러니까 한국어를 모국어로 익힌 사람은 생각도 한국어로 한다. 영어를 모국어로 익힌 사람은 당연히 생각도 영어식으로 하게 된다. 한국적 사고방식과 미국식 사고방식의 차이를 굳이 밝히지 않아도 그 생각의 씨앗부터가 어떻게 다른 것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유아기부터, 우리말을 유아들이 모국어로 습득하기 전부터 영어를 능숙하게 익히는 아이들은 무늬만 한국인이지 그 사고방식이나, 그런 사고를 통해서 형성되는 정신-얼은 이미 한국인이 아닌 것은 언어가 지닌 이런 이유 때문이다.
말이 전달하는 것은 의미만이 아니다. 의미와 함께 감성도 함께 전달한다. 말이 지니고 있는 감성은 어릴 적부터 부딪치는 사람과 환경으로부터 생득(生得)한다. 그 생득 하는 수단과 방법이 바로 말-모국어이다. 말은 의미를 지닌 전선 같은 것이라면, 이 전선을 타고 감성이 흐른다. 한국어라는 전선을 타고ㅡ 한국적이라는 감성의 전류가 한 인간을 ‘한국인’으로 성장케 한다. 모국어는 한국인이 한국인으로 완성되는 제1의 조건이다.
이렇게 본다면 영어를 유아기에 익힌 아이들은 당연하게도 정체성에 혼란을 겪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무늬만 한국인이지 도무지 그 얼이나 정신에 한국적이라는 요소가 희박하게 된다. 그러므로 당연하게도 그런 사람으로부터 한국인으로서의 애국심이나 겨레의식을 기대한다는 것은 연목구어나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김종선은 시를 통해서 모국어 사랑의 전도사를 자처한 사람이다. 우리말의 감칠맛을 살리고, 우리말이 아니고서는 표현할 길 없는 미감의 포착을 위하여 모함에 가까운 실험도 불사한다. 이것은 순전히 모국어를 통해서 점점 퇴색화 되어가는 민족 정서의 유지를 위한 시적 헌신이라 할 만하다.
언어가 어찌 의미만을 전달하기 위한 도구에 머물러야 하겠는가? 모국어는 마땅히 고향산천을 그려내는 물감도 되고, 겨레말은 당연히 어머니의 감성을 되살리는 그림붓도 되며, 우리말은 당당하게 우리의 자연이나 우리의 삶의 환경을 불러내는 노래가 되어야 한다. 모국어는 그냥 언어가 아니라,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가장 근원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김종선은 시를 통해서 이런 당연한 작업을 보여준다. 어머니의 사랑, 어머니의 사랑 같은 우리네 자연감성, 그리고 면면히 이어지는 겨레다운 공감의 맥락을 묻히고, 잊힌 우리말을 되살려 씀으로써 우리 얼을 되살리는 목표를 이루려 한다.
여리디 여린 손길로 아픈 자국 어루만지는
따뜻하신 어머니 같아, 봄비는
골온찰(일만번) 쓰다듬고 씻어주신 엄마손
손길 스치는 찰라 살아나는 숨결들
봄밤, 따뜻한 그 손길에 몸맘 다 맡기세요
당신의 꽃가지에 움 나고 텃밭에 싹 틔울
핏줄 타고 몸맘 흔흔히 젖는 삼시랑듬의 밀물
물너울 치는 손찜낫이에 박힌 얼음 다 풀리리
젖어미 젖줄 문 목마른 젖 아기의 기쁨
사랑하는 여자 살포시 보듬은 사랑탈 앓이
허물로 죽는 삼시랑듬 안타까운 한님의 숨사름
봄바람 헤집어 옹알대는 노랑 병아리 같이
아빠와 아이들 뒷바라지 하다 겉늙은
고분고분 하는 아내 같아, 봄비는
이웃 앞에서는 호호호 웃고 다녀도
먹구름 속에서 우릉우릉 우는 슬픈 여자.
-「따뜻하신 어머니 같아, 봄비는」전문
이 작품에서도 우리말은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따뜻하신(자비로우신), 손짐낫이(안마), 골온찰(일만번), 숨결, 몸맘, 삼시랑, 물너울, 사랑탈앓이(상사병), 숨사름,’ 등 단 하나의 시어도 우리말이 아닌 것은 이 작품에서 자리 잡을 틈이 없다. 엄정한 모국어 존중의 정성만으로 작품의 골격을 형성한다.
어머니의 사랑을 느끼는데, 어머니 사랑 같은 자연이 주는 서정을 새기는데, 사람과 자연으로 인하여 형성된 사람다운 정감을 그려내는데, 어찌 들온말(외래어)이 필요할 것이며, 난해한 전문 용어가 쓰일 수 있으랴?
김종선은 모국어를 지키는 일이야말로, 바로 본원으로서의 사람됨의 근간이라고 보는 듯하다. 이 작품「따뜻하신 어머니 같아, 봄비는」에서도 그런 시정은 멈추지 않는다. 아이가 자라면서 이루게 되는 성정은 온전히 어머니로부터 온다. 태아로부터 시작되는 어머니의 정서는, 자연을 교감함면서 어린 아이의 내면적 성정을 이루게 된다. 그런 정서가 중첩하고 반복되면서 한 아이는 모정과 모향을 모국어의 바탕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모성을 그리워하는 것이나, 어린 시절 마음에 새겨진 자연의 서정을 추억하는 것이나, 봄이라는 계절이 담고 있는 비유적 의미를 되새김하는 것들이 결국은 사람다운 정서의 중핵적 요소가 된다. 그래서 모국어를 지키는 일은 어머니의 사랑을 간직하는 일만큼이나 소중한 것이며, 고향의 추억을 간직하는 것만큼 막중한 것이며, 자연이 주는 정서를 받아들이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이다.
김종선이 모국어를 지키는 방법의 하나로 고유한 정서적 맥락을 지키려는 의도는 그래서 의미가 있는 일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봄비는 그야말로 따뜻하신 어머니의 사랑 같은 자연의 은총이다. 엄마 손길이 어루만짐으로써 하나의 생명이 살아나듯이, 봄비가 자연을 어루만짐으로써 숨결이 살고, 손찜낫이(안마)로 치유되며, 사랑탕앓이도 나을 수 있고, 온 누리가 즐거운 웃음으로 되살아날 수 있는 것이다.
모국어를 지키고 살리는 일은 언어-어휘만을 살리는 일이 아니라 어휘가 담고 있어야 마땅한 정서 정감까지 회복시킬 수 있어야, 그런 어휘만이 생명력을 지니고 영원히 살 수 있는 것이라는 점을 김종선은 시 작품으로 말하고 있다.
3. 겨레 얼 가꿈 이로서의 시
모든 언어는 외국어로 번역될 수 있다. 모든 문학작품이 다른 나라 말로 번역될 수 있다. 그러나 시의 번역에는 한계가 있다. 시는 생득적인 모국어를 배경으로 하고, 겨레 얼의 형상화를 본질로 하기 때문에 다른 나라 말을 모국어로 하는 사람들에게 원시 그대로 번역한다는 것은 애초 불가능한 일이다.
시에는 의미와 함께 정서가 담겨 있다. 어찌 보면 시는 의미맥락보다는 정서맥락을 더 중시하여 전달하고자 하는 언어행위인지도 모른다. 아니 언어행위 이전에 감성의 재현, 서정의 미묘함을 형상하고자 하는 의도가 더 크게 작용하는 것이 시문학이다. 그래서 나라말의 서정체계나 모국어로서의 섬세한 감성을 담고 있는 시를 다른 언어로 재현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이 옳다.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 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같이 <승무>에 담겨 있는 조지훈이 그려낸 서정의 미묘한 아름다움을 어떻게 다른 나라 말로 번역하고, 다른 민족에게 전달할 수 있단 말인가?
‘하얀’과 ‘하이얀’의 차이하며, ‘나비로구’와 ‘나빌레라’의 미묘한 감성을 어떻게 분별하여 번역할 것인가? ‘파랗게’와 ‘파르라니’의 파란 차이의 농담의 차이는 또 어떻게 할 것이며, ‘감추고’와 ‘감추오고’에서처럼 쓸데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무용하지 않는 ‘~오~’의 삽입을 무슨 수로 제대로 전달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시만은 다른 나라 말로, 모국어가 다른 사람에게는 그 의미는 고사하고, 감성맥락을 오롯이 전달하기는 불가능한 것이 당연하다 할 것이다. 겨레의 얼을 본질로 하는 시의 세계에서 겨레말의 정확한 구사는 그래서 필수불가결한 요소라 할 것이다.
김종선은 기왕에 서정 소산인 시를 우리의 감성에 가장 적합하게 표현하기 위하여 과감하게 새로운 말, 새로 만든 말, 기존의 어휘를 합성해서 감성의 전달에 적합한 말, 묻혀 쓰임이 드문 말을 살려 쓰는 말 등 시어의 경계를 확장하기 위한 작업을 줄기차게 전개한다.
이런 작업의 궁극적인 지향점은 말할 것도 없이 ‘겨레 얼’을 가꾸려는 시인다운 의지에서 비롯하고 있다. 정신도 단련해야 바른 기품을 유지할 수 있으며, 의식도 수련되어야 지혜로울 수 있다. 김종선은 한국인의 한국인다움을 확립하기 위하여, 그런 노력을 통해서 겨레 얼의 바른 정립에 기여하기 위하여 모국어의 지평을 확대하는 일에 팔을 걷고 나섰다.
정치가들은 현실에 창조적 아이디어를 가미하여 환상을 만들어 민중을 선도한다면, 역사가들은 어제의 사실을 재단하고 평가하여 내일의 지혜로 연결한다. 언어학자들은 말을 분별하여 말이 길을 바로갈 수 있는 문법의 길을 만든다면, 언중(言衆)들은 언어학자들이 만든 말의 길이 무엇이 되었건 삶에 충실한 언어를 구사할 따름이다.
그러나 시인의 길은 다르다. 정치가들이 무엇이라고 선동하건, 역사가들이 어떻게 평가하고 재단하건, 시인의 안목은 겨레 됨의 가치와 사람됨의 의미로 정치와 역사를 뛰어넘으려 한다. 시인에게 있어 문법도 겨레의 얼을 다치게 하지 않는 정도에서 지켜갈 뿐이다.
김종선 시인이 현대의 문법 체계나 말살이의 길에서 조금은 비켜난 곳에서 시의 세계를 구축한다든지, 시세계의 아름다움을 형성하려는 일관된 노력의 근거도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의 우리다움, 한국인의 한국인다움은 다른 데 있지 않다. 우리말을 제대로 구사할 수 있고, 우리말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데서 멀지 않다.
하늘로 뻗치는 가을무늬 금빛 빛때깔의 흰 새털
청자 하늘에 가락을 빚는 소리꾼의 창 아니리아니리
금만경 나락 잎에 푸른 기상을 담은 판소리 여섯마당
전라도 사투리로 익살스레 물결쳐간 신재효의 넉살
온 누리 신명나게 장단 맞추어 깽깽 쳐 올리는 꽝새
서른여섯 돌 나라 잃고 부황나 헛검 들려 징징징 운 징
여름지이 나락 누에 쳐 앗은 설움 겨워 더쿵 쿵더쿵 설장구
법고 잡아 돌아돌아 손에 손을 잡아 비손한 강강수월래
세 박자와 여섯 박자의 무질서로 질서를 엮은 소리 마당
달구름속 한 길게 풀어 동그란 마음 그려내는 열두 필 상모
성을 지키는 성벽도 울타리도 치지 않고 문 열어 살다가
무너진 마한 백제 후백제 그리고 온의 물렁한 씨넋덜
대창 깎아 들고 왜구의 총칼에 맞서 싸운 녹두밭 파랑새야
임진 정유년 괭이 들고 나라 지키다 붉게 물든 사미르강
온고을동산농장이천정보, 태인구마모또일천오백, 익산호소까와이천,
옥구후지모도일천, 김제이사까와농장칠백정보, 산과바다와흘떼꺼정
빼앗아 소작을 주어 훑어 멍에 씌우고 부려 먹은 우리더러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괴성 지르는 저들 어떤 벌로 다스리랴
다시 찾은 씨알 열두마당 판소리의 넉살 물결치는 만경평야
벽골제에 허수아비 세우고 소달구지 끌던 여름지이 둠벙에
메뚜기물방개게아제비송장헤엄치게송사리개구리미꾸라지무자치
벌레약 뿌려 멸종 시키고 무심히 농자천하지대본의 깃발 달고
빈 황금마차 끌어 하늘하늘 하늘 먼 길 날아가는 고추잠자리떼
새털 몇 낱 빠진 열달 하늘 할아버지께 죄스러워 눈물 나네요.
-「고추잠자리가 끌고가는 황금마차」전문
언어는 단순히 의사소통의 도구만은 아니다. 사람이 섭취하는 음식이 단지 목숨을 연장시키는 에너지원으로서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영혼을 살아 있게 하는 원동력인 것이나 마찬가지다. 언어는 의미를 전달하면서 동시에 의미가 담고 있는 정신과 영혼을 담는 그릇이 된다. 말은 곧 얼이요, 나라말은 곧 나라의 정신이자 겨레의 얼이 된다.
그래서 나라말이 깨끗하면 그 나라의 정신이 올곧으며, 겨레말이 온전하면 겨레얼 또한 온전하게 되는 이치가 여기에 있다. 사회가 혼탁해지면 우선 언중이 쓰는 말씨부터 혼탁해지는 것을 우리는 체험적으로 경험한 바 있다. 한자문화를 숭상하던 조선조는 우리말을 한자로 굴종시키는 역사의 오류였으며, 일제강점기는 그나마 살아남은 토속어를 일본어로 도색하는 망언(亡言-나라의 말이 죽은)의 역사였다. 그 지독한 악영향은 해방 반세기를 지난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으며, 영원히 우리말의 순수성을 훼절하는 요소로 작용할 것이다. 여기에다가 6․25전쟁으로 인한 외세의 개입과 외국어의 남용, 근대화 현대화 과정에서 겪은 외국어의 무분별한 남용으로 인하여 우리말은 어린아이의 말이나, 개념과 개념을 연결하는 조사(토씨)로만 남아 있을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렇게 우리말이 혼탁한데 겨레의 얼을 어디에 가서 찾을 것인가? 요즘에는 ‘영혼이 없는 공무원’이라거나, ‘영혼이 없는 공직’라는 말을 당사자도 쓰고, 언론에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한다. 영혼은 얼이요, 얼은 사람의 근원이 아닌가? 영혼이 없다는 것은 얼이 없다는 것이니, 허우대만 사람이지 속은 사람이 아닌 사람이 나라의 중책을 맡고 있는 형국이다.
김종선은 그 주요한 원인 중의 하나가 바로 우리말의 혼탁에서 찾고자 한다. 김 시인은 그런 시인 중의 특별한 사람이다. 생각은 그렇게 할 수 있지만, 자신이 생산하는 모든 시를 자신이 정한 원칙대로 생산해 내는 시인은 흔치 않다. 독자의 외면, 시단의 이단아 취급, 그렇게 해서 마침내 올지도 모를 문학의 이단아로서의 고독을 감수하지 않으면 이룰 수 없는 결단이다. 김종선은 그런 모든 위험을 스스로 안고, 잃어버린 영혼-얼을 찾을 수 있다면 그 길을 과감하게 걸어가는 시인이다.
이 작품「고추잠자리가 끌고가는 황금마차」는 우리가 지키고 가꾸어야 할 얼의 바탕이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순수한 우리말 시어와 우리의 정서를 통해서 형상화 한다.
금만경 넓은 벌은 우리네 삶의 신명난 터전이었다. 역사적 무지와 어리석음, 외세의 침탈과 자민족의 무지몽매함, 자연성을 외면한 맹독성 농약을 함부로 사용함으로써 자연도 죽이고 인간성도 말살하는 맹신적 과학성, 자국의 영토인 독도마저 제대로 지켜내지 못하고 일본의 망언을 감수해야 하는 수모, 이런 어리석음과 눈물 나는 수모를 가장 토속성이 강한 전라도 정서로 풀어낸 시가 이 작품이다.
그러니까 ‘고추잠자리’는 자연성의 질서가 온존한 것의 비유이자, 사람다운 사람, 겨레다운 겨레로서 지녀야 할 온존한 얼의 원관념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황금마차’는 사람이 추구해 마지않는 가치와 의미의 비유로 보면 타당할 것이다. ‘끌고 간다’는 것은 중심으로서의 역할, 역동적인 자각의 구체적인 표현으로 보인다.
이를 의역해 본다면 ‘본디 우리다운 정서와 얼을 원동력(고추잠자리)’으로 삼아서 ‘잘사는 나라, 행복한 겨레, 세계만방에 떳떳한 나라(황금마차)’를 이루어내자는 것이다. 그것은 물론 우리의 정신, 겨레의 얼을 온전히 지켜내고 가꾸는 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4. 노랫말 다듬이로서의 시
시의 본래 모습은 노래다. 시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모습도 바로 노래다. 시가 반드시 지녀야 할 태생적 요소로 음악성-운율-리듬을 말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시는 노래의 다른 이름이며, 노래는 바로 시의 구상적 모습이다.
시가 그렇게 음악성을 지니는 요소는 시어 때문이다. 시어의 구사가 시에 운율을 부여한다. 규칙적인 정형률은 말할 것도 없고, 비정형률인 내재율 역시 시어의 구사, 시행의 배치, 시연의 작용으로 이루어진다.
그렇게 노래를 지향하는 시는 마침내 노랫말이 되고, 가사가 되어 인구에 회자된다. 그런 노랫말로 사랑받아야 할 시가 대중들의 애창곡에서 멀어진지 오래다. 어느 시는 너무 난해하고 고답해서 노랫말이 되지 못하고, 어느 시는 너무 난삽하고 우리말의 질서를 외면해서 노랫말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소위 대중가요라는 노랫말이 시다운 품격보다는 대중성을 하향평준화 하는 방향으로 고착되었다.
우리말의 질서를 잘 살려낸 시, 우리 겨레의 얼을 잘 담아낸 시가 있다면 대중들이 좋아할 수 있는 대중가요의 노랫말이 되기를 꿈 꾼다. 시인이라면 이런 꿈을 꾸어야 하며, 시를 사랑하는 독자 역시 이런 꿈이 싫을 이유가 없다.
김종선이 우리말을 살려 씀으로써 궁극적으로 이루고자 하는 하나의 목표도 바로 우리말 노래가사의 고양에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의 몇 작품은 노랫말이 되기에 적합하며, 노랫말로 쓰였을 때 대중가요의 품격을 높이고, 시의 대중화에도 기여할 수 있는 요소가 충분하다. 시인이 노랫말 작사에 소홀할 때, 음악인이 우리말 사랑에 등한 할 때 이 나라에는 시와 노래가 공존할 수 있는 문화적 기틀을 잃게 될 지도 모른다.
들봄 풀잎놀은
햇살의 따뜻함
바람의 싱그러움
푸르고 여린 느낌속
소리시늉 짓시늉
살이빗살 아시가락
꿈듯 흘리는 겨레놀
저품의 숨사름 불붙어
푸르게 맘우렌 씨의 깃발
뽑아도 뽑아도 기운이 차
바람을 배안은 멋의 숨결로
가락을 빚는 높은음자리표의
풀잎놀 잉걸불보다 더 뜨겁다.
-「풀잎놀」전문
이 작품 역시 우리말을 되살리면서 동시에 우리얼을 활력 있게 하려는 의도를 잘 살리고 있다. 시어의 적절한 구사로 정형적인 음수율의 안정감을 주면서, 동시에 자유시가 품은 직한 내재율의 감칠맛도 살아나게 한다.
‘살이빗살=활유, 아시=시원, 꿈듯=낭만, 저품=자연’ 등 우리말의 다양한 변화와 생성을 통해 평범한 정서를 한국적 정서로 승화시키는 여유도 있다. 노랫말로서 알맞은 시행의 배치, 미학적 서정미를 끌어안고 있는 의미맥락의 적합성 등 노랫말이 되기에 과․부족하지 않다.
모든 시가 노래가 되기를 꿈꾼다. 모든 노래는 모국어의 향연장이 되어야 마땅하다. 우리말이 생생하게 노닐면서도 의미 전달에 막힘이 없는 향연장, 우리얼이 당당하게 노래되면서도 어긋나지 않는 노래의 향연장, 시와 노래는 그렇게 일치되고 상승효과를 내어야 한다.
김종선이 꿈꾸는 긍극적인 시의 경지도 그런 이상향에 두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 꿈을 실현하기 위한 1차적인 절차와 방법으로 우리말을 제대로 살려내는 일이고, 그 살려낸 우리말이 우리 시에 당당하게 자리매김 되는 것이며, 그런 우리말과 우리의 시가 우리의 얼을 목청껏 노래하는 경지일 것이다.
* 나가는 말씀
젊은이들이 사랑하는 사람과 나누는 작별 인사가 “내꿈 꿔!”라고 한다. 아마 김종선 시인이 작별인사를 한다면 틀림없이 “우리말로 꿈 꿔!”라고 인사할 것이며, 그는 꿈도 우리말로 꿀 것이다. 어찌 꿈뿐이랴? 그는 우리말로 노래하고, 우리말로 사랑도 하고, 우리말로 전화도 하고, 우리말로 편지도 쓰고, 우리말로 사귀거나 싸움질도 할 것이 틀림없다.
생경한 외래어, 잘난 척하는 외국어, 고답한 듯 멋을 부리는 한자말-한자어, 유식연하는 문자투, 전문가인척 하는 전문용어, 메너를 가장한 민중의 정서와 떨어진 말, 상스럽고 품격 없는 말은 전혀 입 밖에도 내지 않을 것이다. 그가 우리말을 부려 쓴 그의 시를 읽다보면, 그가 우리말 사랑에 기울이는 정성과 노력이 그의 시를 읽는 독자들을 우리말 사랑의 신앙인으로 만들기에 그의 정성과 노력이 가상하다.
우리나라 시인 중에 김종선 시인처럼 우리말을 살리는 일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는 시인이 몇 사람 만 더 있었다면 우리말이 지금보다는 훨씬 더 깨끗해지고, 품격이 높아질 것이다. 나아가서 올바른 우리말을 씀으로써 우리의 얼을 바르게 갖추고, 나라의 품격을 고양시키는 데 이바지하게 될 것이다. 나라말은 나라 정신의 골격을 이루며, 시어는 나라말의 정체성을 올곧게 보여주는 언어예술이기 때문이다.
김종선의 시집『촛불보람』에 담긴 모든 작품은 우리말-우리얼을 살리기 위한 의도가 한결같다. 그는 전 편이 그런 의도와 시도를 담아서 창작된 작품이라는 점이다. 독자들께 잠시 독해의 곤란을 줄망정 멀리 보고 길게 보아 우리말의 부활에 초점을 두고 있다.
따라서 필자를 포함은 독자들은 김종선의 시를 받아들이는데 우선은 ‘우리말 사랑’이라는 일대 독서원칙으로 무장하실 것을 권고 드린다. 이는 그의 작업이 잠시 곤란을 줄망정 우리말의 위상을 드높이고, 우리얼을 고양시키기 위한 고역을 스스로 떠안고 있는데 대한 마땅한 대우라고 생각한다.
시문학의 길을 감에 있어 김종선은 넓고 큰 길을 버리고, 좁고 험한 길을 선택하였다. 그의 우리말 사랑의 시들이 우리나라의 문화-예술사에 길이 남아서 우리의 얼을 올곧게 하는 시금석이 될 날이 있으리라고 확신한다.
다양한 방법으로 새로운 시어를 생산하여 시적 형상화의 도구로 삼음으로서 우리 겨레말을 풍성하게 한 시, 겨레를 지키는 일이 곧 모국어를 살려 쓰는 일이라는 확신을 담아 낸 시, 말이 사람의 얼을 전달하고, 나라말이 겨레얼을 담은 그릇이라는 깨달음으로 일관한 시, 그리하여 마침내 우리말이 빛나고, 우리얼이 노래되는 노랫말을 꿈꾸는 시가 우리들로 사랑 받지 못한다면 어디에서 우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우리말-겨레말을 시어로 살려 쓰려는 일관되고 치열한 노력들이 지향하는 바는 필경 우리 겨레살이의 즐거움과 보람에 있음은 두 말할 것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시야말로 그런 김종선의 시문학적 의도와 우리말 사랑의 의지가 슬기롭게 통합되는 결정체임을 확인하는 것은 이 시집을 읽는 참 보람이 되리라 확신한다.
언어의 연금술사로서, 나라말 지킴이로서, 김종선 시인의 작업에 아름다운 성취와 의미 있는 보람이 함께 하기를 바란다.
글놀의 말꽃 드높 모심
글놀랑으로 등단 한지 열네 해, 해가 갈수록 글놀이 차츰 어려워진다.
“글놀이란 무엇인가” “토박이말이 왜 낯설게 느껴지는가” 라는 솟을물음은 우리가 풀어야할 일벼름이다. 세종 임금은 나랏말이 없어 중국말을 빌어다 쓰는 것이 마음 아파 훈민정음을 새로 만들어 우리에게 맞는 본디 말을 펼치셨다.
몇 해 앞에 나는 합친 말과 붙임 말을 부려 써 글놀을 쓰면 어떨까 생각하다가 국문학자 염시열님의 도움으로 토박이말에 바탕을 둔 새말을 부려 썼다. 염 선생님은 토박이말을 쓰는 글놀랑은 있어도 새말을 만들어 글놀을 쓰는 글놀랑이 아직 없으니 부려 써 보라고 했다.
일본은 오래전부터 새말을 부려 쓰고 있다. 우리 한말글의 말꽃을 활짝 피우려면 한말글 말본에 따른 새말을 만들어 자꾸 써야 할 것이다. 내들면 생김살이+울타리=생김살이울=생태계, 맘+우레=맘우레=감동, 빛+때깔=빛때깔=이미지로 부려 쓴다.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살려 말글살이를 활짝 꽃 피워야 들온말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
글놀랑이 자꾸 새말을 만들어 써야 겨레의 새얼(문화)이 빛난다. 한말글을 잘 지으신 세종임금의 뜻을 받들어 새말을 다듬어 쓰는 일은 일본처럼 겨레의 새얼맞이로 펼쳐져야 한다. 우리나라에도 새말을 지어 쓰는 글놀랑이 많이 나타나 글놀곬의 말꽃이 활짝 피어나기를 드높모심으로 비손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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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반갑구요.. '내 정보'에 등록하실때는 꼭 <감뫼/ 아무개> 이렇게 등록하시고 글을 쓰시길 앙망하나이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