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3.7 첫째주말 법문
又 ... 五(p.48)
증시랑에게 답하는 편, 다섯 번째
本 答狀도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師의 나이 四十六歲(南宋 紹興四年 甲寅 西紀 1134)에 閩中의 洋嶼山에 계실 때에 答한 것으로, 이 단락을 ‘三咄狀’이라고 한다.
【狀旨】다만 방편을 빌려 도에 들고〔正印方便入道〕, 아울러 꿈과 깸이 한결같음을 나타내었다〔兼顯夢覺一如〕.
깨우치는 말〔諭:편지〕을 받아보니, “‘밖으로의 모든 반연을 쉬고 안으로 마음의 헐떡거림이 없어야 도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방편의 가르침〔方便門〕입 니 다 . 방편의 가르침을 빌려서 도에 들어가는 것은 옳거니와, 방편을 고수(固守)하여 버리지 않는다면 곧 병됩니다.”고 하시니, 진실로 보내온 글과 (제 생각이)같아서 뛸 듯이 기쁜 마음을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요즘 여러 곳〔諸方〕의 칠통배(漆桶輩)들은 다만 방편만을 고수하여 버리지 않고 실다운 법〔實法〕으로써 사람에게 지시한다고 하나니,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하는 것이 적지 않습니다. 이런 까닭에, 제가 가 바름과 삿됨을 구별하는 논설〔辨邪正說〕을 지어서 그들을 구제했습니다.
근세에 마(魔)는 강하고 불법(佛法)은 약해져서 담담하게 맑음으로써 맑음에 들어가〔湛入〕그윽히 맑음에 합함〔合湛〕으로써 구경(동정을 이분으로 삼는 것)을 삼는 사람들이 그 수를 셀 수가 없으며, 방편을 고수하여 버리지 않음으로써 종사(宗師)된 자가 마와 같고 조와 같습니다〔如麻如粟〕.
제〔山野〕가 요사이 일찍이 납자들과 더불어 이 두 화두를 거론하니, 바로 보내온 편지에 말한 것과 같아서 한 글자도 어긋나지 않았습니다. 그대〔左右:증개거사〕가 마음을 지혜〔般若〕가운데 머물게 하는 것이 늘〔念念〕 중단되었다면, 곧 능히 위로부터 모든 성인들의 갖가지 다른〔諸異〕 방편을 분명하게 깨닫지 못했을 겁니다.
그대가 이미 칼자루를 잡았습니다. 벌써 칼자루를 얻어 손에 있거늘, 어찌 ‘방편의 가르침을 버리지 않고 도에 든다’고 (감히) 생각하겠습니까? 다만 이와 같이 공부를 하되, 부처님의 가르침〔經敎〕과 아울러 고인의 어록과 갖가지 차별된 말씀과 글귀를 볼 때도 역시 다만 이와 같이 공부를 하며, 저 ‘수미산’과 ‘방하착’과 ‘구자무불성화’와 ‘죽비자화’와 ‘일구흡진서강수화’와 ‘정전백수자화’에도 마찬가지로 다만 이와 같이 공부를 하고, 절대 따로 다른 알음알이를 내지 말아야 하며, 따로 도리를 구하지 말아야 하며, 따로 기량을 내지 말아야 합니다.
그대가 능히 (世間塵勞의) 급히 흐르는 물결〔急流〕가운데를 향하여 늘 스스로 이와 같이 움켜잡아 쥐고서도 도업을 만약 이루지 못한다면, 곧 부처님의 법이 영험이 없으리니,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받아보니, 꿈에 ‘향을 사르고 저(山僧)의 방에 들어서 매우 고요했습니다’라고 하니, 절대로 꿈이란 생각을 짓지 말고 반드시 ‘참으로 방에 들었다’고 아십시요.
보지 못했습니까?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묻되 “꿈속에서 육바라밀(六波羅密)을 설명하니, 깨어있을 때와 더불어 같은가? 다른가?” 하니, 수보리가 이르되 “이 뜻은 매우 깊어서 내가 설명할 수 없으니, 이 모임에 미륵대사가 계시니 네가 그에게 가서 여쭈어봐라!”고 하시니, 돌(咄)! 허물〔漏逗〕이 적지 않구나! 설두스님께서 이르시길 “당시에 만약 내버려두어 뒤에서 한 방망이 때려주지 않았다면 누가 미륵이라고 이름하며, 누가 미륵이 되는 자인가? 문득 얼음이 녹고 기와가 깨지는 것을 보겠구나” 하니, 돌! 설두 또한 허물이 적지 않습니다! 혹, 어떤 사람이 “단지 증대제(曾待制:시랑)와 같이 꿈에 운문(대혜스님)의 방에 들었다고 하니, 또 말씀해 보십시요! 깨어있을 때와 더불어 같습니까? 다릅니까?”라고 묻는다면, 운문은 곧 그를 향하여 말하되 “누가 방에 들어간 사람이며, 누가 방에 들어가게 된 사람이며, 누가 꿈을 꾸는 사람이며, 누가 꿈을 설명하는 사람이며, 누가 꿈이라고 하는 견해를 일으키지 않는 사람이며, 누가 참으로 방에 들어간 사람이요?”라고 하리니, 돌! 또한 허물이 적지 않습니다.
又 ... 六(p.54)
증시랑에게 답하는 편지, 여섯 번째
本 答狀도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師의 나이 四十六歲(南宋 紹興四年 甲寅 西紀 1134)에 閩中의 洋嶼山에 계실 때에 答한 것이다.
【狀旨】깨달음을 빨리 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말고, 다만 반야 가운데 생각을 돌이켜 수행하기를 권함〔勸勿求速效 但修般若〕.
온 편지를 몇 번이나 자세히 읽어보고서 족히 무쇠와 바위처럼 변함없는 마음〔鐵石心〕을 갖추었으며, 결정한 뜻을 세워서 소란스럽게 급히 서두르지 않는 것을 알았습니다.
다만 이와 같이, 목숨이 다할 때까지〔臘月三十日〕 나아간다면, 또한 능히 염라대왕〔閻家老子〕과 더불어 서로 겨루리니, 결코 이마에 있는 눈〔頂門眼〕을 활짝 뜨고 금강왕보검을 쥐고서 비로정상에 앉는다고 말하지 마십시요.
내가 일찍이 세간의 도반〔方外道友〕에게 말하기를 “요즘 도를 배우는 선비들이 다만 빠른 효과(速効)만을 구하고 그것이 그릇된 앎인 줄 알지 못한다”고 하니, 도리어 그들이 말하기를 “일 없이 반연들을 덜어버리고 고요히 앉아서 그 본질을 궁구〔體究〕하며 헛되이 시간〔時光〕을 보내는 것보다는 차라리 몇 권의 경전을 보고 몇 번의 소리로 부처님을 염(念)하며, 부처님 앞에 허다히 몇 번의 절〔拜〕로써 예배하여 평생에 지은 바의 죄와 허물을 참회해서 염라대왕의 손에 있는 철봉(鐵棒)을 면하기를 바라는 것만 같지 못하다.”라고 하나니, 이것은 어리석은 사람들이나 하는 짓입니다.
하지만, 요즘 도가(道家)의 무리들이 오로지 참됨이 없는 생각이나 마음(妄想心)으로써 해의 정기와 달빛을 상상하며 노을을 머금고 기운을 삼키더라도 오히려 능히 그 몸을 변화지 않게 하여(세상에 두어) 세간에 머물러서 추위와 더위의 핍박을 당하지 않으니, 하물며 이 마음과 이 생각을 되돌려 온전히 반야 가운데에 둚이겠습니까?
앞의 성인들께서 아주 분명히 말씀하시되 “비유하자면 파리〔太末蟲〕가 어느 곳이나 앉을 수 있지만 오직 불꽃 위에는 앉지 못하는 것과 같이, 중생도 역시 그러하여 곳곳을 반연할 수 있지만 오직 반야의 위에는 능히 반연하지 못한다”라고 하시니, 진실로 늘 처음의 그 마음〔初心〕에서 물러나지 말고 본인〔自家〕의 마음과 의식〔心識〕이 세간의 여러 가지 일들을 반연하는 것을 반야의 위에 이르게 하여 두면, 비록 금생(今生)에 (한 번 겨루어) 사무치지 못하더라도 목숨을 마칠 때에 결정코 나쁜 업의 이끌리는 바가 되어 나쁜 길에 흘러 떨어지지 아니하고, 다음 생〔來生〕에 태어날 때 나의 금생(今生)의 원하는 힘〔願力〕을 따라서 결정코 반야 가운데 있어서 뚜렷이 이루어져 받아 쓰〔受用〕게 되 니 , 이것이야말로 결정적인 일이라, (두 번 다시) 의심할 게 없을 것입니다.
중생계(衆生界) 가운데의 일이란, 배우지 아니하여도 비롯함이 없는 때로부터 익혀왔기에 익숙해져있고, 길〔路頭〕도 또한 익숙하여 자연히 취하기만 하면 마음대로 그 근원을 만나나, 반드시 버려 두십시요. 출세간의 반야를 배우는 마음은 비롯함이 없는 때로부터 등지고 어겨서, 잠깐 선지식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는 저절로 이해하지 못하니, 반드시 착실하게 결정한 뜻을 세워, 저(반야)와 더불어 머리를 맞대고 서로 다투어서 결코 (반야․세간의) 두 가지를 세우지 마십시요. 만약 이곳(반야)에 드는 것을 깊게 할 수 있다면, 저곳(세간)은 애써서 물리쳐 보내지 않아도 모든 마와 외도가 자연히 숨어 항복할 것입니다.
생소한 곳은 익숙하게 하고, 익숙한 곳은 생소하게 하는 것이 바로 이를 위하는 것이니, 평상시 공부를 하는 곳에 칼자루를 잡아 (놓아버리지 말며) 점점 힘 덜림을 알 때가 곧 힘을 얻는 곳입니다.